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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14권
44. 등승품(等乘品)
[대승의 자취를 멸하는 법]
그때에 좌중(座中)에 보살이 있었으니, 그 이름을 정안(淨眼)이라고 하였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꿇어앉아 합장한 채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떠합니까,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대승(大乘)을 발취(發趣)하여 걸림 없는 지혜에 이르려면, 어떤 법을 닦아서 대승의 자취를 멸해야 하나이까?”
그때에 세존께서 정안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지금 네가 발하여 묻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으로 이룬 바니라. 살펴듣고 살펴 들어서 잘 생각하여라.
내 마땅히 게송으로써 그대의 의심을 없애 주리라.”
이때에 세존께서 문득 게송을 말씀하셨다.
경계[色]를 망가뜨리거나 무너뜨리지 않고
평등한 도(道)에 나아가서
색과 도가 다르지 않음을 관하면
바로 능히 대승(大乘)을 타는 것이네.
색과 도를 사유하니
있는 그대로의 성품 또한 그러하여
도를 망가뜨림을 보지 않음은
지혜 있는 이가 수행하는 바이네.
도의 성품 본래 무너짐이 없어서
찾고 궁구해도 다할 수 없으니
제일의(第一義)에 최고로 응하여
이것을 타고 걸림 없음에 이르네.
어리석은 자는 마음이 뒤바뀌어
도를 5음(陰)ㆍ18지(持)ㆍ12입(入)에서 구해
삼계에 물들고 집착하여
생(生)의 몫을 받음을 여의지 못하네.
온갖 법을 받거나 취하지 않고
위와 아래 및 중간에서도
흩어지고 떨어짐을 보지 않으니
이것을 대승에 나아감이라 이름하네.
만일 법과 법 아님을 보고도
그 두 가지의 뜻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또한 두 소견을 내지 않으며
발하여 나감[發趣]도 또한 그러하네.
둘을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또한 무위법(無爲法)이라 이름하니
둘을 없애서 둘을 보지 않으면
곧 위없는 도에 응하네.
범부의 경지를 초월하여도
아직 성현의 도에는 이르지 못하고
나아감을 얻어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이 또한 세상의 복전(福田)이네.
세상의 여덟 가지 법[世八法] 능히 여의어
마치 연꽃이 물에 집착하지 않듯이
백겁의 행을 초월하여
그대로 대승으로 나아가네.
있는 데마다 바른 업을 닦고
곳곳마다 신족을 나타내서
남을 제도해도 제도함 보지 않고
마음ㆍ입ㆍ뜻으로 비밀히 행하네.
나고 죽는 길에서 물러나지 않고
마음 또한 겁약(怯弱)함이 없으며
뜻을 금강처럼 잡아
걸림 없는 지혜에 최고로 응하네.
허공엔 선악(善惡)이 없고
법계는 언제나 청정하며
법 또한 본래 법이 없거니
어찌 더럽고 물듦이 있으랴?
삿된 법을 버리고서
위없는 도를 닦음을 보지 않고
다시 낮고 모자라는 사람이 없으면
이것이 대승의 모습이라네.
온갖 법은 본래 모습이 없음이
마치 허공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고
모습을 구해도 본래 스스로 공하니
지혜 있는 이여, 마땅히 깨달아 알라.
대저 걸림 없음을 행하고자 하면
훌륭한 방편이 제일이 되니
저 중생의 염원을 채워서
도량으로 인도해 이르게 하네.
착한 벗으로 바른 도를 삼고
굳건히 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며
5음(陰)ㆍ18지(持)ㆍ12입(入)을 영원히 여의어서
익히지 않고도 의심의 덮개를 다스리네.
만일 부처님을 세상에 나시게 하고
멸도를 취하시게 하면
바른 법은 늘 있으면서
끝내 변하거나 바뀌지 않네.
모든 법에 정증(正證)이 있어
선과 악은 섞여서 옮겨지지 않는 것처럼
진제의 성품[眞際性]도 또한 그러해
항상 머물면서 옮기지 않네.
닦는 바가 극히 깊고 깊어서
마군의 경계에 집착한 바 없고
온갖 법에도 또한 그러해서
삿된 소견의 무리를 영원히 여의네.
위없는 도를 구하고자 하면
수행하는 법에 집착하지 말라
상념 있음도 상념 없음도 아니니
이것은 걸림 없는 지혜에 응하네.
부처님 지혜는 집착한 바 없고
법마다 낳는 바가 없으며
일어나고 멸하는 도(道)도 봄이 없으니
이에 대승행에 응하네.
혹은 머리와 눈으로써 보시함으로써
신심을 버리는 바가 없고
받는 이 있음도 보지 않으면
망상(妄想)이 집착하는 바 없네.
온갖 법은 본래 생겨남이 없고
찾아 궁구해도 그 소굴이 없으니
법상(法相)도 또한 그러하여
실마리 끝을 볼 수 없네.
마치 사람이 허공을 궁구하고자 하고
그 가장자리 언덕을 알고자 해서
밤낮으로 생각하고 궁리하여
헛되이 공부해서 수고롭게 하는 것과 같네.
어리석고 미혹함이 나를 집착해서
항상함을 계교하여 능히 여의지 못하고
3악도의 난관에 떨어져서
구경처(究竟處)를 얻지 못하네.
진인(眞人)과 성현의 도는
세 가지를 통달하여 걸림 없지만
오히려 공의 근원 다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다시 이들 무리이랴?
사람은 모두 항상하다고 헤아리고
무명(無明)으로 인해 스스로 비추지 못해
나고 죽음의 고통만 더욱 키우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해탈에 이르랴?
재물을 보시해도 집착한 바 없음은
위없는 도를 구하고자 함이니
보시와 도(道) 둘도 함께 못하거늘
하물며 영원한 구경(究竟)이랴?
금계(禁戒)와 무아(無我)의 행으로
제1의 법에 편안히 처하고
또한 이 상(相)마저 없음은
지계와 지혜의 바라밀을 생각하는 행이네.
닦지 않고 자연히 얻은
지혜로 무명의 뿌리를 없애고
계(戒)로 청정의 도를 갖추었으니
깨끗하기가 달의 무구(無垢)함과 같네.
몸은 거품이 모인 포말(泡沫)과 같고
또한 눈앞에 번개가 지나감과 같으며
의근(意根)은 아지랑이와 같으니
계로 청정의 도를 삼네.
가장 훌륭하여 동등한 이 없고
온갖 성현에서 하늘 중의 하늘이며
일체의 악을 쉬게 하고 그침은
적정(寂定)의 바라밀이네.
계를 범함과 계를 지님
고요함과 어지러움에 약간도 없이
모든 법계를 분별하며
계로 샘이 없는 도[無漏道]를 삼네.
인욕의 바라밀을 얻어서
온갖 고뇌를 감당하여 받고
여러 중생 널리 사랑하여
높고 낮은 상념이 없네.
과거의 법을 추억하니
나고 멸함 오래 머물지 않고
칭찬ㆍ꾸짖음의 헐고 찬탄하는 법이
어찌 그 틈을 얻을 수 있으랴?
마디마디 그 형상을 풀되
끝내 악한 생각 내지 않고
안팎의 일을 분별하여
몸과 마음이 견고히 머무네.
원수가 해치러 와서
이 무르고 가냘픈 몸 멸하고자 하거든
대지가 싣는 것처럼 인내하여
좋고 나쁨을 헤아리지 말라.
인욕(忍辱)의 큰 서원은
대(對)함을 보아도 상념이 없으니
이 때문에 여러 중생으로 하여금
보면 기뻐하지 않음이 없게 하네.
대승의 바다를 싣고자 하거든
삼가서 겁약한 마음을 품지 말라
몸을 단정히 하고 그 마음 바르게 하면
문득 무생인(無生忍)을 얻으리라.
본래 무수한 겁으로부터
나고 죽음에 유전하는 가운데
한 중생 위하는 까닭에
몸소 큰 서원의 갑옷 입었네.
온갖 법은 본래 일어나고 멸함 없고
다시 무너지고 망가지는 상념 없으나
어리석은 이는 마음이 뒤바뀌어서
과거의 지혜를 알지 못하네.
법계의 성품은 늘 머물러 있는데
배우는 이가 궁구하여 다하지 못할 뿐이니
마땅히 본말을 요달하여
생겨남은 본래 성겨남이 없음을 알아야 하네.
미묘하고 걸림 없는 지혜를
중생은 깊이 통달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교묘한 방편 구하여
뒤바뀐 마음을 없애 버려라.
여러 부처님 세상에 출현하시어
제도할 바를 다 제도하지 못했지만
또한 다시 놓아 버리지 않고
힘써 정진(精進)하신 용력(勇力)을 쓰시네.
온갖 법 분별하니
마치 허깨비나 아지랑이나 번갯불 같고
실다움 구해도 과보가 없어서
허공처럼 형상 없다고 관하네.
중생은 도(道)를 깨닫지 못해서
스스로 물들고 집착하는 상념 일으키니
그들로 하여금 지극한 도의 가르침을 보여주어서
무위의 곳[無爲處]을 알게 하네.
방편으로 이 뜻을 생각하여
원하는 바는 반드시 얻고
낱낱이 사유하여 관하면
걸림 없는 지혜를 이루네.
안팎의 행을 생각해 지녀서
곳곳에서 공의 성품 구하고
의지함 없고 집착한 바 없으면
나고 죽음의 본말이 청정하네.
배움에 나아가 공한(空閑)을 즐기고
홀로 처해도 무서운 바 없네.
선정과 지혜를 사유하며
6신통에 잘 나아가네.
대중에 있어도 마치 들과 같아
한마음으로 섞이거나 어지러움 없어
위의(威儀)의 법을 잃지 않으니
이것을 미묘한 정(定)이라 이르네.
정법(定法)에 약간이 있으니
뜻을 쉰 무루(無漏)의 행으로
두 가지 해탈을 증장시키니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온갖 법을 두루 관하고
편안히 처하여 마음을 옮기지 않아
하나에서 다시 하나를 세니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도의 마음 완전히 견고해져서
뜻을 멸하여 마음이 영원히 쉬고
순숙(純淑)한 사람 접하여 제도하니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항상 등정각을 생각하고
여래 법신의 도를 생각하여
온갖 색상(色想)을 싫어하고 근심하면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다시 여섯 가지 생각[六思念]을 닦고
차제(次第)에 따른 행(行)을 어기지 않아
생각[念]을 없애 사상(思想)이 없다면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4쌍(雙) 8배(輩)의 사람들이
따라서 무위의 도(無爲道)를 내고
무수(無數)로서 한정을 두지 않으면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지혜 있는 이는 4선(禪)을 닦고
식공정(識空定)을 쓰지 않으면서
안팎의 몸을 요달해 분별하면
이것을 미묘한 정이라 이르네.
시방의 여러 부처님들
멀리서 이 중생을 보심은
눈으로 말미암아 색을 봄이 아니어서
자연히 도의 가르침을 이루네.
또한 다시 이 사람 보시고
있는 데마다 바야흐로 법을 설해
귀와 소리의 상념을 내지 않으니
식이 멸하여 다시는 집착하지 않네.
중생의 상념은 한량이 없지만
한뜻[一意]으로 모조리 알아
두 마음의 소견 일으키지 않고
조금도 상념을 내지 않네.
지나간 겁을 생각하니
항하의 모래처럼 셀 수가 없고
앞 마음과 뒤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용맹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네.
다시 한량없는 찰토에 노닐며
신족의 도를 나타내 보이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 몸도 자연히 따라서
변화의 법[變化法]을 알게 하네.
감로의 도를 연설하여
나아가는 행 잃지 않아
한 겁부터 백겁에 이르기까지
걸림 없는 지혜가 끝이 없네.
지혜의 바라밀에 미쳐서
음(陰)ㆍ지(持)ㆍ입(入)을 분별하고
남을 위해 묘한 법 설하되
나[吾我] 있다고 헤아리지 않네.
권도의 방편 바라밀을 행해서
음행ㆍ화냄ㆍ어리석음을 균등히 나누고
인연에 물들고 집착함이 없게 하여
청정의 도를 알게 하네.
본래 내가 스스로 행을 지어
해탈하여 무서울 바 없고
인연들이 모여 이루어진지라
온갖 법이 처소가 없네.
스스로 관하고 또한 부처님 관하며
공을 관하고 법도 또한 그러해서
생사와 열반의 길을
지혜 있는 이는 곧 깨닫네.
지혜의 성품을 잘 알아서
지혜의 광명을 구하고
끝없는[億載] 티끌의 어둠에서
환하게 크나큰 광명을 보네.
이 지혜를 큰 지혜라 이르니
부처님의 지혜는 부사의해서
이 위없는 지혜를 이루도록
중생의 무리를 끌고 인도하시네.
대저 일체지(一切智)를 헤아리는 데
능히 이를 능가하는 것이 없으니
이 여러 지혜를 닦아 갖추면
대승의 도과(道果)가 이루어지네.
지혜를 없애면 비록 이름 있어도
진실한 도는 있지 않네.
이 지혜는 온갖 지혜의 위에 있어
온갖 어려움을 구제해 주네.
만일 지혜를 구하고자 하거든
허공의 성품을 구하는 것처럼 해야 하니
무심(無心)은 저보다 더 빠른데
하물며 다시 어지러운 상념을 내랴?
허공은 정해진 경계 없고
형상이 없어서 볼 수도 없으니
이 지혜도 또한 다시 그러해서
한량이 없고 그 끝이 없네.
가령 온갖 사람들이
이 지혜의 배 타면
생사(生死)의 언덕에서 노닐다가도
열반의 바다에 곧바로 이르네.
설사 사람이 백천 겁에 이르도록
이 공덕을 칭찬하고자 하더라도
지혜의 큰 횃불의 밝음은
능히 그 밑을 다할 수 없네.
무진(無盡)은 다할 수 없고
또한 여덟 가지 무한(無閑)도 없네.
능히 걸림 없는 지혜를 외우면
하늘ㆍ사람 가운데 가장 존귀하네.
애초부터 악취(惡趣)에 안 떨어지고
6정(情:根)을 늘 완전히 갖추어
하늘과 인간 가운데 태어나서
호귀(豪貴)함이 무리 중에 최상일세.
온갖 중생의 무리가
모두 마땅히 도의 지혜 이루고
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면
일찍이 무서움 품은 적이 없네.
바른 법의 근본을 옹호하여
무위(無爲)의 도(道)에 편안히 처하고
마땅히 올바른 법륜을 굴려서
세간에 펼쳐 나타내시네.
억백천 겁에서
끝내 나고 죽음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등정각 이룸은
걸림 없는 지혜 때문일세.
용맹함은 사람 중에서 제일이라
마군과 그 권속을 항복시키고
정진의 지혜가 뛰어나서
모두 지니어 잊지를 않네.
마치 어떤 한 사람이
모든 강물을 다 마시겠다 생각하고
두루 사방을 돌아다니지만
능히 그 근원 다하지 못함과 같이,
지혜 있는 이는 권도의 방편으로
사유하고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니
오직 4해(海)의 물을 마시면서
그저 널리 돌아다닐 뿐이네.
위없는 도의 걸림 없는
지혜 광명을 이루고자 해서
받아 지니고 생각하고 외우면
오래지 않아 수기를 받으리니,
비록 부처님은 세상에 출현하시어
32상을 나타내지 않지만
문득 불사를 행하여서
한량없는 사람을 널리 건졌네.
이제 내가 정각(正覺) 이루어서
삼계에서 제일 존귀하니
이 걸림 없는 큰 지혜 곳간을
받아 지니었기 때문일세.
세존께서 이 법을 설하신 때에 그 설법은 너무나 깊고 헤아리기 어렵고 불가사의해서 나한이나 벽지불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때 좌상에 있던 10천(千)의 하늘 사람이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모두 발하였고,
다시 3만 7천의 보살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고,
다시 한량이 없는 비구가 유루심(有漏心)으로 해탈함을 얻었고,
46해(姟)의 중생이 온갖 번뇌를 다 끊고 법안의 청정함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