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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51권
5. 변수면품 ⑦
3) 삼세 실유의 논증
이와 같이 삼세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취(理趣)에 정사(正邪)의 차별이 있음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였다. 이러한 뜻(삼세실유의 바른 이취)을 결정코 더욱 분명히 밝히기 위해 다시 송문(頌文)에 근거하여 [실유의] 종취를 널리 드러내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삼세의 실유는 교설과 두 가지와,
경계대상과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으로
삼세의 실유를 설하였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로 인정되는 것이다.
三世有由說 二有境果故
說三世有故 許說一切有
논하여 말하겠다.
과거ㆍ미래ㆍ현재는 실유이니, 요의(了義)의 성교와 정리(正理)상으로 다 같이 지극히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삼세는 무엇에 의해 차별되어지는 것인가?
이와 같이 따지는 것은 어찌 다음의 일이라고 하지 않겠는가?1) 여기서는 먼저 ‘어떠한 성교와 정리에 [의해 지극히 잘 이루어진다는] 것인가?’에 대해 따져 물었어야 하였다. 나는 성교와 정리를 인용하여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실유라는 우리의 종의를 성립시킬 것이다.
‘유(有)’의 뜻에 대해서는 이미 밝혔거니와 별도로 생각하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가 실유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지만, 어떠한 성교와 정리로써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논증하는 것인가?
3-1) 경증①: 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계경 중에서 세존께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ㆍ미래의 색도 무상한 것이거늘 하물며 현재의 색을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색이 무상한 것임을 관찰한다면, 모든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들은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厭捨)를 닦을 것이며,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흔구(欣求)를 끊을 것이며, 현재의 색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염리(厭離)하여 멸하고자 할 것이다.
만약 과거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지 않을 것이지만, 과거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는 것이다. 만약 미래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흔구를 끊지 않을 것이지만, 미래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미래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흔구를 끊는 것이다.”2)
또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리자(舍利子)에게 고하였다. 장계외도(杖髻外道)는 황홀경에 도취되어 능히 잘 심구(尋求)하지 않으며, 자세히 살펴 생각하지도 않으니, 저들은 어리석음과 불명(不明) 불선(不善)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말하였다. ‘만약 업이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멸진(滅盡) 변괴(變壞)하고 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업이 비록 과거로 [낙사하여] 멸진 변괴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인연으로 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즉 여기서 인용된 계경은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으로, 이는 결정코 요의경(了義經)이니, 일찍이 다른 곳에서 이 같은 사실을 결정적으로 부정[遮止]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1) 경증①에 대한 경주의 논란 비판
“이는 예컨대 보특가라 등과 같은 경우이기 때문에 [요의경이 아니다]. 이를테면 비록 곳곳에서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실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계경 등에서 [보특가라를] 분명하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설한 계경은 모두 요의가 아닌 것이다.
또한 예컨대 경에서 ‘마땅히 부모를 해쳐야 한다’고 설하였다면, 이치상 역시 마땅히 불요의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 밖의 다른 경에서 ‘이는 바로 무간업으로, 반드시 무간에 나락가(捺落迦,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예컨대 경에서 ‘욕탐을 익힌 모든 이[習欲者]는 어떠한 경우에도 악업을 갖지 않을 뿐더러 능히 짓지도 않는다’고 설하였다면, 이 역시 마땅히 불요의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 밖의 다른 경 중에서 ‘모든 성자는 고의적인 의사[故思]에 의해 온갖 악업을 짓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3)
이와 같은 등의 유형에 따라 이것(앞서 인용한 계경)도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고 분명하고도 결정적으로 설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이미 다른 곳에서 다시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고도 결정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에 준하여 [인용한] 이 같은 경도 요의경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4)
그렇지만 이는 결정코 바로 요의설이니, 그 밖의 다른 경이 갖는 불요의의 특성[相]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황홀론자(恍惚論者)는 어찌 그토록 가벼이 말하는 것인가? [그는] 다만 자신의 종의에 어긋나는 경이면, 바로 불요의라고 판별하는 것이다.
“어찌 과거ㆍ미래를 부정하는 경도 역시 존재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 중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온 곳이 없으며, 안근이 멸할 때 조작 집기된 곳[所造集](다시 말해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곳)으로 [가는] 일도 없다. 그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5) 그러나 만약 미래세에 일찍이 안근이 존재하였다면 [경에서] 마땅히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등의 말을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6)
무릇 비천(鄙淺)한 이는 붕당의 주장[朋執]이 마음을 덮어 거칠고 얕은 뜻조차 능히 분명하게 관찰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이하도다. 바야흐로 [삼세실유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만두고서라도 그대는 어떻게 뒤의 계경에 의해 앞서 언급한 계경이 요의경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인가? [그렇다고] 앞서 언급한 경에 의해 뒤의 경이 불요의를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7)
즉 [그는] 이 같은 사실(앞서 인용한 『잡아함경』 제79경이 불요의경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승의공경』을 설하고 있지만, 이에 근거하여서는 능히 과거ㆍ미래를 부정할 수 없으니, [그것은] 행(行)을 떠나 작자(作者)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지 능히 ‘과거ㆍ미래가 바로 실유이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8) 그렇지만 이 같은 ‘안근이 생겨날 때 온 곳이 없다’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마땅히 자세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만약 안근이 생겨날 때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미래[의 안근]이 존재한다는 뜻도 이미 성취된 셈이다. 그러나 만약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무슨 의심[疑慮]이 있었기에 ‘생겨날 때 온 곳이 없다’고 말하였을 것인가? 제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온 곳도 없을 것인데, 어찌 수고스럽게 여기(『승의공경』)서 온 곳을 부정하였을 것인가?9) 다만 마땅히 분명하게 ‘생겨날 때,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생겨날 때 온 곳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대사(大師)께서는 ‘현재 [안근을] 적집(積集)한 처소가 별도로 존재하며,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하니, 바로 다음에 ‘멸할 때 조작 집기된 곳(다시 말해 그것이 생겨나게 된 곳)으로 [가는] 일도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간에 사론(邪論)을 주장하는 이들은 “안근이 생겨날 때 화륜(火輪)으로부터 오며, 안근이 멸할 때에는 다시 조작 집기된 그 곳으로 돌아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이러한 두 구(句)의 경문을 설하게 된 것이다.10) 혹은 “안근은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와 [멸할 때] 다시 그것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혹은 [안근은] 자재천(自在天)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 이와 같은 두 구의 경문을 설하게 된 것이다.11) 그것은 말하자면 ‘안근에 수승한 작자(作者)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부정한 것으로, 오로지 원인과 결과가 서로에 계속[相屬]된다는 사실만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승의공계경』에서는] 이미 다른 종의를 비판하였으니,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그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며,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는 두 구의 경문을 설하게 되었다.12) 즉 여기서 말한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고 함은 ‘본래 그것이 생겨난 곳[集處]이 없으며, 스스로의 인연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혹은 “원인은 바로 결과의 곳간[果藏]이다(다시 말해 결과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는 “결과는 원인 중에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러한 원인에 의해 별도의 결과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혹은 이 말은 안근이 생겨날 때, 본래 ‘아직 이르지 않은 상태[未至位]’에서 이르렀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다시 말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났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니, 이러한 경문의 뜻은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다시 ‘존재하다가는 다시 사라진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이는 작용을 일으켜 자신의 결과를 견인하고 나서 다시 사라져, 본래 [생겨나기 전과] 같은 작용을 갖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과거ㆍ미래는 바로 실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방편으로서 이러한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는 등의 말을 설하였다면, 앞의 구절에서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고 말한 것처럼, 뒤의 구절에서도 마땅히 ‘존재하다가는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有已還無]’고 설하였어야 하였다. 그러나 [경에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無]’고 말하지 않았으며,13) 다만 ‘다시 사라진다[還去]’고만 말하였으므로 [부처님께서는] ‘과거는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그대의 종의에서는 “과거[의 안근]은 존재하며, 오로지 ‘미래의 안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같은 계경을 인용하여 [과거ㆍ미래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인(證因)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14)
나아가 세존께서는 이러한 말을 설한 다음, 장차 이러한 계경의 뜻에 미혹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과거ㆍ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원인을 비방하고 결과를 비방하는 사견(邪見)이 증장할 것을 관찰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다시 이같이 말하였다.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작자는 획득될 수 없다.”15)
이는 요컨대 과거의 업인(業因)이 존재하기에 비로소 미래의 이숙과가 일어나는 것이지만, 작자의 작용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여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의 자아[實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인과만이 존재하여 서로에 계속[相屬]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승의공경』을 설하였던 것이지,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부정하기 위해 설하였던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승의공계경』은] 앞에서 인용한 경(‘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주2의 계경)의 뜻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앞의 계경은 바로 요의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결정코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부정하는 경도 존재하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내적인 안처(眼處)에 결(結, 번뇌)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내적인 안처에 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참답게 안다’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계경에서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계경에서는 ‘저들 두 [필추]에게는 난(煖)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은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부정하는] 증인(證因)이 되지 않으니, 그러한 경 중에는 [도리어]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성취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 경에서는 “내적인 안처에 결(結)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나는 내적인 안처에 결이 존재한다고 참답게 안다”고도 설하였던 것으로, 선심이 아닌 상태(즉 무기와 불선심의 상태)에서는 ‘결’이 존재하여 현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경에서는 과거ㆍ미래[의 결]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설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 경에서는 ‘행(行)이 존재하면 식(識)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숙과와 이숙인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경에서는 과거ㆍ미래[의 이숙인과 이숙과]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설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16)
또한 그 경에서는 설하기를 “두 필추에게 ‘4구(句)의 법문이 있으니, 나는 마땅히 그대들을 위해 설하리라’고 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소의신 내에 결정코 당래 설하게 될 미래 어문(語文) 등의 [법]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17) 따라서 그 경에서는 과거ㆍ미래[의 어문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설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그러한 경에서 ‘결’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은 그것이 성취되지 않았고, 조작되지 않았으며, 획득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18) 결정코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경(‘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주2의 계경)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정코 이를 부정하는 경을 일찍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앞서] 인용한 ‘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경은 이치상 마땅히 참된 요의설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참된 요의경을 요의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바로 비판하고 배척하였는데, [이렇듯] 우리와 저들의 생각은 결정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여기서 [그것(‘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주2의 계경)은] 요의가 아니라고 [더욱] 강력하게 핍박하고자 하여 이같이 해석하여 말하였다.
“우리들(경부사)도 역시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고 설한다. 이를테면 과거세는 증유(曾有) 즉 일찍이 있었든 것으로서의 존재를 말하고, 미래세는 당유(當有) 즉 앞으로 있을 것으로서의 존재를 말하니, 결과와 원인을 갖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는]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지만, 과거ㆍ미래가 현재와 같은 실유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19)
따라서 [계경에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다만 일찍이 있었든 원인적 존재[曾因性], 앞으로 있을 결과적 존재[當果性]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일 뿐, 그 자체가 실유라는 것은 아니다. 즉 세존께서는 인과를 비방하는 [사]견을 부정하기 위하여 증유와 당유의 의미로써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20) ‘존재한다[有]’는 말은 존재하는 법이나 존재하지 않는 법 모두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간에서 ‘등불은 [그것을 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先無]’거나 ‘등불은 [그것을 끈] 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後無]’고 설하듯이, 또한 어떤 이가 ‘등불이 이미 꺼져 있다[有燈已滅]. 그러나 지금 내가 끈 것은 아니다’고 말하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할 경우, 그 뜻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미래의 자성[性]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21)
이러한 ‘존재한다[有]’는 말에 대한 해석은 결정코 선설(善說)이 아니니, 과거ㆍ미래세가 실유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과거ㆍ미래가] 가유(假有)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22) 더 이상 그 밖의 다른 ‘유’의 뜻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설한 ‘존재한다’는 말을 어떻게 결택 판별하였기에 “나도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고 설한다”고 말한 것인가? 비록 “과거세는 증유(曾有) 즉 일찍이 있었든 것으로서의 존재를 말하고, 미래세는 당유(當有) 즉 앞으로 있을 것으로서의 존재를 말하니, 결과와 원인을 갖기 때문이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이는] 실로 방편의 속임수로서 현재의 유(有)를 다른 방식[異門]으로 설한 것일 뿐인데, 어찌 과거ㆍ미래의 그것과 관계한다는 것인가? 따라서 그가 말한 “우리들도 역시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고 설한다”고 한 것은 다만 허언(虛言)일 뿐으로, 끝내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뜻을 능히 펼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과거ㆍ미래세가 다만 증유와 당유일 뿐, 법 자체로서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존재한다’[有]고 말해서는 안 된다. 혹은 만약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과거ㆍ미래의 2세가 다만 증유와 당유일 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만약 [과거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實無]’지만, 일찍이 존재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또한 과거를 ‘실로 존재하는 것[實有]’이라고 설하였다면, 마땅히 현재가 비록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찍이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과거는 마땅히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曾有]’과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며, 이러한 이치에 따라 미래에 대해서도 역시 유추하여 마땅히 ‘앞으로 존재할 것[當有]’과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유인 과거의 [법]체 상에도 역시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일부 존재하기에 이에 따라 과거의 존재성[有性]를 성취할 수 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실유인 미래의 [법]체상에도 역시 ‘앞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일부 존재하기에 이에 따라 미래의 존재성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세간에서 실유의 법에 대해 증유와 당유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실로 존재하지 않는 법에 대해 증유와 당유라고 말하는 것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예컨대 사리자(舍利子)가 세존께 아뢰어 말하기를 “천타필추(闡陀苾芻)는 옛날 일찍이[曾] 한 바라문의 마을로 가 어떤 집에서 걸식하였습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설할 때에도 그 집은 지금 바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세존 역시 설하기를, “경희(慶喜, 아난다) 필추는 앞으로[當] 상좌(上座)가 되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설할 때에도 경희는 지금 바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유의 과거ㆍ미래에 대해 증유와 당유를 설할 때, 그 이치는 [비로소]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실로 과거ㆍ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정해야 할 ‘인과를 비방하는 [사]견’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실유의 과거를 원인이라 하고, 능히 초래할 미래의 실유를 결과라고 하며, 이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인과를 비방하는 [사]견’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세의 원인과 결과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견해를 어찌 ‘비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찌 [저들이] 그것(과거ㆍ미래세의 원인과 결과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할 것인가?
어찌 앞에서 “[과거와 미래는]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이고, ‘앞으로 존재할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앞에서 “[그럴 경우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설하였다.
또한 여기(‘과거ㆍ미래색이 존재한다’고 설한 주2의 계경)에 어떤 또 다른 이치가 있기에 오로지 “증유와 당유의 의미로써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는 것인가? 증유와 당유가 아닌 [현유(現有)에] 근거하여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였더라도 이 역시 상견(常見)을 부정하는 공능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23) 따라서 그가 말한 바에는 깊은 이취(理趣)가 없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앞서 “증유와 당유라는 말은 다만 현재의 유(有)를 다른 방식[異門]으로 설한 것일 뿐으로, 과거ㆍ미래의 그것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고 설하였는데, 어떻게 능히 [이 같은 사실을] 부정할 것인가?
[또한] “‘존재한다[有]’는 말은 존재하는 법이나 존재하지 않는 법 모두를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지극히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능히 모두를 나타낼 수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에 부합하는] 진실한 말[誠言]을 시설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간의 상식은 ‘존재한다’는 말은 오로지 존재하는 법만을 나타낸다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법을 나타내는 경우를 일찍이 보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존재한다’는 말이 [존재하는 법이나 존재하지 않는 법] 모두를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세간에서 ‘등불은 [그것을 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先無]’거나 ‘등불은 [그것을 끈] 후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有燈後無]’고 말하지만, 말의 이치[聲理]대로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을 뿐더러 뒤에서 다시 분별하게 될 것이다.24)
나아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과거ㆍ미래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미래의 자성[性]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상 옳지 않으니, 그 같은 사실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증유로서의] 과거는 과거의 자성[性]을 갖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당유로서의] 미래는 미래의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니, [법]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자성이라는 말을 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증유와 당유로서의] 과거와 미래의 자성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혹은 그는 마땅히 온갖 수고와 노력을 더하여 과거ㆍ미래가 바로 실유성임을 성립시켜야 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과거ㆍ미래의] 2세의 자성은 필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바야흐로 그의 종(宗, 즉 경부종)에서 설한 바로써는 결정코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고 설한 경을 능히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종의로써 능히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선서(善逝)께서 설한 계경을 버려서도 안 된다. 따라서 마땅히 과거ㆍ미래가 실유라는 사실을 믿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경주(經主)는 또한 『장계경(杖髻經)』을 해석하여 [이같이] 말하였다.
“[세존께서 장계외도를 위해] ‘업이 과거로 [낙사]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설한 것은, 그러한 업에 의해 인기된 현재 상속(相續) 중의 여과(與果)의 공능(功能)에 근거하여 은밀히 ‘존재한다’고 설한 것으로,25) 만약 그렇지 않고 그 같은 과거의 업이 현재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과거가 어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박가범께서 『승의공계경(勝義空契經)』 중에서 ‘안근이 생겨날 때 온 곳이 없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26)
이는 마치 어리석은 이가 물살이 빠른 여울에서 배를 거기에 탄 사람의 발에 메어놓고서 배가 멈추기를 고대하지만, 끝내 그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바야흐로 그가 주장하는 ‘현재 상속신 중의 여과(與果)의 공능’이란, 지자(智者)가 그 상을 아무리 자세하게 살피고 헤아려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과거의 업은 그 자체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여과의 공능’에 근거하여 ‘존재한다’고 설할 수 있을 뿐이다”는 것인가?
거짓을 교묘하게 설하는 모든 이[巧僞者]들이 주장하는 수계(隨界)ㆍ공능(功能)ㆍ훈습(熏習)ㆍ종자(種子)ㆍ증장(增長)ㆍ부실법(不失法) 등에 대해서는 이미 곳곳에서 논파하였으니,27) 그것이 어찌 이러한 요의경에서 설한 ‘존재한다’는 말을 능히 장애하여 불요의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설혹 그러한 업에 의해 인기된 공능이 존재한다고 인정할지라도, 역시 마땅히 “[경에서는] 이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을 ‘존재한다’고 설하였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것의 원인(과거로 낙사한 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역시 또한 공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해야 하니, [양자를] 차별할만한 인연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존의 설과 그의 [해석]은 동일하지 않으니,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업이 비록 과거로 [낙사하여] 멸진 변괴할지라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업에 의해 인기된 여과의 공능이 상속 중에 지금 바로 존재한다고 인정할지라도 [업] 자체는 과거로 [낙사하여] 멸진 변괴된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공능)에 근거하여 이 같은 말을 설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만약 필시 결정코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다시 말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업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의해 낳아진 공능이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업은 비록 과거로 [낙사하여] 멸진 변괴하였을지라도 상속 중에 그것의 공능이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다만 “그러한 업이 여전히 존재한다”고만 말하였기 때문에 실로 그러한 과거의 업이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만 ‘과거[의 업]이 존재한다’는 말만을 설하였는데, 어떻게 공능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인가?
어찌 앞에서 이미 설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지 않고 그 같은 과거의 업이 만약 그렇지 않고 그 같은 과거의 업이 현재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과거가 어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28)
나(중현)도 앞의 글에서 어찌 이미 설하지 않았던가?
앞의 글에서 무엇을 설하였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체상(體相, 즉 법체)에는 비록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거기에는 성[류](性類)의 차별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고 설하였다.29) 이와 같이 성[류]에 동일하지 않음이 있다고 이미 설하였으니, 그대들 중 누가 능히 이에 대한 허물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뜻에 따라 어떤 이는 게송으로 말하였다.
온갖 법의 체상은 단일하지만
공능(즉 작용)이나 존재의 성류는 다양하니
만약 이를 참답게 알지 못한다면
불타의 교법 밖에 있는 이라 말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경주)가 인용한 『승의공경』은 앞에서 통석(通釋)하였듯이 그 같은 사실(과거ㆍ미래의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證因)이 되지 않는다. 또한 저들의 종의에서는 ‘실로 과거의 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경에서는 ‘존재하다가는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된다[有已還無]’고 설하지 않았거늘,30) 어떻게 그들의 종의를 입증하고 성취하기 위해 그것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이는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라 교묘히 그릇되게 해석한 것일 뿐으로, [이러한 해석으로써는] ‘과거ㆍ미래가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능히 어기거나 훼손시킬 수 없는 것이다.
(2) 경증①에 대한 상좌의 해석 비판
상좌(上座)는 여기서 앞서 [첫 번째로 인용한] 경에 대해 [이같이] 해석하여 말하였다.
“[계경에서는] ‘만약 과거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문(多聞)의 성(聖)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厭捨)를 닦지 않을 것이지만……(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는데, 이러한 경설의 뜻을 말하면 [이러하다]. 만약 과거의 색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면,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지 않을 것이며, 마땅히 현재의 그것처럼 부지런히 염리(厭離)하여 멸(滅)해야 할 것이다.
혹은 만약 과거의 색으로서 자타의 상속 중에 일찍이 영납(領納, 受의 작용)한 것이 아니라면, 다문의 성 제자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지 않을 것이니, 요컨대 일찍이 영납한 것이라야 비로소 염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영납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을 염사할 것인가? 즉 그러한 색은 바로 과거의 것이거나 과거에 일찍이 영납한 것이기 때문에, 다문의 성 제자들은 과거의 색에 대해 부지런히 그것의 염사를 닦는 것이다.”
또한 [그는] 두 번째 『장계경(杖髻經)』에 대해서도 [이같이] 해석하였다.
“그 같은 과거의 업도 역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인연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며, 수계(隨界)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것의 상속(相續)을 능히 부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의 이숙과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최후에 비로소 능히 이숙과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ㆍ미래세는 그 자체 실유가 아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경의 뜻을 이와 같이 해석하여 어찌 능히 과거ㆍ미래가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일체지(一切智, 즉 불타)의 경을 해석하여 어찌 인도(印度)의 방역(方域)을 능히 장엄할 수 있을 것인가?31)
여기서 먼저 앞서 인용한 경에 대한 그의 첫 번째 해석에 [대해 비판하면, 이러하다]. 그는 앞의 경에 “과거의 색이 바로 과거의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이에 대해 부지런히 염사를 닦지 않을 것이며, 마땅히 현재의 그것처럼 부지런히 염리(厭離)하여 멸(滅)해야 한다”는 뜻이 있다고 하였지만, 이는 경의 뜻이 될 수 없으니, 쓸데없이 수고만 한 셈이다.
즉 만약 그러한 색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현재의 것이라고 하든지 혹은 미래의 것이라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다만 ‘현재의 그것처럼’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말은 도리어 계경[의 뜻]을 어지럽히는 것이거늘, 어찌 경의 의취(意趣)를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경에서는 “만약 과거의 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이라고 하지 않고 다만 마땅히 “만약 과거의 색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면……”이라고 말했어야 하였으며, 또한 경에서는 그 다음에도 마땅히 “과거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과거의 색이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라고 말했어야 하였다. 그러나 경문은 이미 그렇지 않으니, 그의 해석은 결정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앞의 경에는 이와 같은 뜻이 있다. 즉 만약 과거의 색에 과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에 대해 부지런히 염사를 닦지 않을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법에 대해 염사를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과거의 색에 과거성(性)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이에 대해 부지런히 염사를 닦을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현재의 색에 현재성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이에 대해 부지런히 이염(離染)하고 멸(滅)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유부)의 해석과 의미상 차이가 없을뿐더러 ‘과거가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더 드러내어 성취하는 것이 된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의 해석은 쓸데없이 수고만 하였을 뿐으로, [그것으로는] 결정코 능히 ‘과거가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경에 대한 그의 두 번째 해석에는 그 경에서 설한 의취(義趣)가 조금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찍이 영납(領納)한 것이라야 부지런히 염사할 수 있는 것으로, 일찍이 영납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을 염사할 것인가?”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같이 경을 해석하여 어떻게 ‘과거가 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고 있다. 만약 [과거의 색이]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염사(厭捨)하려는 것, 즉 싫어하여 버리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아가 『장계경』에 대해 해석한 것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 법은 인연성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 같은 수계라는 말은 소전(所詮) 즉 그러한 말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일 찰나의 종의[一刹那宗, 즉 유부종]에는 상속(相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은 능히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기 때문으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 법도 이숙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생사는 마땅히 끝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는 과거ㆍ미래가 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3-2) 경증②: 두 가지 연(緣)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식(識)은 두 가지 연(緣)을 갖추어야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식은 두 가지 연에서 생겨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이 연이 되어 안식(眼識)을 낳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의(意)와 법(法)이 연이 되어 의식(意識)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2)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세가 실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능히 그것을 반연하는 식은 마땅히 두 가지 연 [중의 하나]를 결여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1) 경증②에 대한 경주의 논란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기서 이러한 뜻에 대해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의근과 법경을 연으로 하여 의식이 일어난다고 할 때, 법경은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能生緣]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所緣境]이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법경이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래 백천 겁 후에나 응당 존재하게 될 그러한 법이나, 혹은 응당 존재하지 않을 법이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되어 지금 의식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열반의 존재[性]는 생겨난 일체의 모든 존재와 상위하는 것으로, 그것이 능히 [의식을]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경은 다만 능히 소연의 경계가 될 뿐이라고 한다면, 우리(경부사)도 과거ㆍ미래 역시 소연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33)
경주의 이러한 말은 논도(論道)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를테면 대법자(對法者)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연(緣)이 능히 식(識)을 낳는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오로지 ‘실유와 가유의 근거[依]를 근(根)으로 삼고 경계대상으로 삼아야 비로소 능히 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34) [이렇듯] 두 가지 연은 오로지 그것(실유와 가유)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無]’은 두 가지 연에 포섭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에 따라 부처님께서는 이미 방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소연으로 하는 식도 역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미 과거ㆍ미래를 반연하는 식 역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과거ㆍ미래는 그 자체 실유임을 알아야 한다.”
종의의 계승[宗承]이 이미 그러함에도 경주가 이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역시 능히 소연의 경계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대법(對法)의 종의를 어긴 것이 아니라 다만 부처님[의 종의]를 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법의 여러 논사들은 부처님의 뜻을 계승하여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서 모두 이와 같이 “과거ㆍ미래는 결정코 실유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경주는] “이러한 뜻에 대해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 중의 어떠한 법에 대해 마땅히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의근은 의식의 소의로서 [의식을] 낳는 조건 즉 생연(生緣)이 되고, 법경은 소연이 되어 능히 의식을 낳는 것으로, [양자는] 소의와 소연으로서는 차별되지만 ‘[능히 의식을] 낳는 연[生緣]’으로서는 동일하니,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연이 능히 식을 낳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소의가 결여될 경우 식은 결정코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소연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역시 식은 일어나지 않으니, 두 종류가 모두 식의 생연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이] 분명하고 확실한 뜻에 대해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만약 “의근은 생겨난 [의]식과 동일한 종류의 상속으로서 무간에 [의식을] 인기하여 낳기 때문에 ‘능히 낳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35) 법경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안근이나 색경도 안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마땅히 ‘능히 낳는 것[能生]’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것도 안식과 동일한 종류의 상속으로서 무간에 [안식을] 인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세나 가까운 장래에 생겨날 법도 의식에 대해 역시 ‘능히 낳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것도 역시 생겨날 식과 동일한 종류의 상속으로서 무간에 [그것을] 인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자신 역시 ‘능히 낳는 것’이 된다고 인정하였으니, 그는 스스로 “[만약 법경이 의근과 마찬가지로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래] 백천 겁 후에나 응당 존재하게 될 법이나, 응당 존재하지 않을 법, 그리고 열반이 어떻게 능히 지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세나 가까운 장래에 생겨날 법이 지금의 의식에 대해 역시 ‘능히 낳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백천 겁 후에나 마땅히 존재하게 될 법이나,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법, 그리고 열반이 어떻게 능히 지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가 설한 말 [자체]에도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서(善逝)께서는 결정적으로 판결하여 “소의와 소연은 다 같이 능히 식을 낳는다”고 말하였다. 각기 다른 상속이라 하더라도 역시 능히 [식을] 낳을 수 있으니, 어머니가 능히 낳는 자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36)
또한 그는 “어떻게 미래 백천 겁 후에나 응당 존재하게 될 제법이 능히 [의식을] 낳는 조건이 되어 지금 의식을 낳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하였지만, 이에 대해서도 역시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미래세나 가까운 장래에 생겨날 법이 지금의 의식을 능히 낳을 수 있는 것인가? 원인과 결과, 염오와 이염(離染)은 멀리 떨어져있거나 혹은 가까이 있거나 간에 그 성(性)이 모두 동등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37)
또한 일체법의 자성은 다 작자로서의 작용을 갖지 않기에, 마땅히 이에 대해 결정코 능히 낳는 것[能生]과 낳아지는 것[所生]의 차별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다시 말해 이 법은 능히 낳는 것이고, 이 법은 낳아지는 것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일체법은 다 다만 식의 소의와 소연이 되는 것으로, “[여기서] ‘다만’이라는 말은 ‘식이 존재하지 않는 법[無體法]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도 능히 나타낸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38)
경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힐난하고 해석하여 말하였다.
“만약 [과거ㆍ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無]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소연의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것(과거ㆍ미래)이 소연이 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설한다.
어떠한 방식으로 소연이 되는 것인가?
말하자면 증유(曾有) 즉 일찍이 존재하였던 것과, 당유(當有) 즉 앞으로 존재할 것으로서의 소연이 된다. 즉 과거의 색이나 수(受) 등을 기억할 때, 현재처럼 분명하게 그것을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이 일찍이 존재하였을 때의 상(相)을 추억할 뿐이다. 또한 반대로 미래의 당유를 관찰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즉 일찍이(즉 과거) 현재시점에서 지각[領]하였든 색상(色相)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추억하여 ‘존재한다’고 하고, 역시 또한 당래(미래)의 현재시점에서 지각될 색상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거슬러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ㆍ미래가] 현재처럼 존재한다면 응당 마땅히 현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과거ㆍ미래] 자체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식[緣無境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그 이치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39)
비유사(譬喩師)의 무리들은 [이처럼] 정의(情意)에서 세속법을 뒤섞고 있으니,40) 그들이 소유한 혜(慧)와 해(解)가 다 같이 거칠고 얕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이염(爾焰)의 조림(稠林)은 세간의 얕은 앎으로써 헤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41) 오로지 청정한 앎[覺]을 성취한 자만이 그러한 경계를 칭량(稱量)할 수 있으니, 미묘한 앎[妙覺]에 의해 관찰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의 온갖 앎으로서 부정(不淨)한 것을 [성취한] 자라면, 요컨대 일찍이 지각[領受]하였던 것이어야 비로소 능히 추억할 수 있으며, 이에 근거하여 과거ㆍ미래세의 차이를 살펴 생각[尋思]하니, 이치상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즉 그는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 영납(領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관찰이 지극히 어두운 것이다. 그러나 청정한 앎을 [성취한] 자라면, 아직 영납하지 않은 것에서 벗어나 과거ㆍ미래를 관찰하기에 [그것에 대한] 관찰이 지극히 명료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과거ㆍ미래가 소연이 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무그루터기에서 사람을 반연하며, 흙덩이에서 비둘기를 반연하기도 하는데, 어찌 그것을 소연이 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42) 따라서 과거ㆍ미래를 ‘반연하는 방식[緣]’과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有]’은 각기 다르다. 즉 그것(과거ㆍ미래)은 소연이 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존재하는 것’은 과거[曾]와 미래[當]에 근거하지만, ‘소연이 되는 것’은 현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앞뒤가 서로 모순되게 말하였다.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과거의 색이나 수(受) 등을 기억할 때, 현재처럼 분명하게 그것을 관찰하여 ‘존재한다’고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이 일찍이 존재하였을 때의 상(相)을 추억할 뿐이다”고 말하였으므로 뒤에서는 마땅히 “일찍이(즉 과거) 현재시점에서 지각[領]하였든 색상(色相)의 경우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추억하여 ‘존재한다’고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현재 색상을 영납할 때, 증유(曾有)의 상을 영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바로 존재하는 현유(現有)의 상을 영납하며, 또한 역시 과거의 색을 추억할 때, 현유의 상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증유의 상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영납하는 것과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현유(現有)와 증유(曾有)의 상으로 분명하게 차별된다. 만약 현유처럼 과거를 추억하여 ‘그것은 소연이 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설한다면, 그럴 경우 과거의 실유는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다. 즉 현재 실유의 상을 영납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추억하여 ‘존재한다’고 하였기 때문으로, 이미 그것(과거)은 추억한대로 존재한다고 인정하였으면서 어떻게 과거 자체는 실유가 아니라는 것인가? 따라서 그의 뒤의 말은 그 자체 앞의 종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만약 [과거ㆍ미래가] 현재처럼 존재한다면 응당 마땅히 현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과거ㆍ미래] 자체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식[緣無境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설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과거ㆍ미래의 ‘유(有)’는 현재[의 ‘유’]와 같은 것이 아니니, “일체의 다 같은 실유 중에도 여러 종류의 ‘유’의 성류(性類)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43)
3-3) 이증①: 인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체의 식(識)에는 반드시 경계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존재하는 경계대상[有境]을 관찰할 때 비로소 식은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세존께서 “이러저러한 경계대상의 상(相)을 각기 요별하는 것을 식취온(識取蘊)이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요별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색[경] 내지 법[경]이 바로 그것으로, 그 경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계대상을 갖지 않은 식도 존재한다[有識無境]’는 사실을 설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과거ㆍ미래를 반연하는 식에는 결정코 경계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ㆍ미래가 실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44)
(1) 이증①에 대한 상좌의 논란 비판
이에 대해서도 경주(經主)와 쟁론해 보아야 하겠지만,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기 때문에 거듭하여 논술하지 않는다.45)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앎[智]이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을 반연하더라도 역시 두 가지(과거ㆍ미래)에 [대한 앎은] 결정적인 것이니, 인과적 관계로서 전전(展轉)한다는 이치[에 따라] 추리하여 살필[推尋]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이 어떠한가?
요컨대 현재를 취하고 나서 전ㆍ후제에 대해 능히 신속하게 추리하여 살필 수 있으니, 이를테면 현재의 이와 같은 결과는 이와 같은 종류의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이러한 [과거의] 원인은 다시 이와 같은 원인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능히 추리하여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아득히 먼 과거[久遠]에 이르기까지 상응하는 바를 모두 다 추리하여 살핌으로써 현재처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현재의 이와 같은 종류의 원인은 능히 이와 같은 종류의 미래의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이러한 [미래의] 결과는 다시 이와 같은 결과를 인기하여 낳는 것임을 능히 추리하여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아득히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상응하는 바를 모두 다 추리하여 살필 수 있기 때문에 현재처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전하며 과거의 원인을 관찰하고,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아득히 먼 과거에 이르기까지 현재처럼 증득한다고 하여도 그것들은 다 어떠한 전도됨도 없다. 그리고 비록 이러한 상태(과거ㆍ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경계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두 종류의 앎이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거의 원인에 대해 추리하여 살필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이와 같은 원인에 대한 앎[因智]이 생겨날 때, 자상속 중에 [이러한 앎의] 인연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옛날 일찍이 이와 같은 앎이 생겨난 일이 있었으며, [그것이] 전인(傳因)이 되어 지금의 이와 같은 상(相)의 앎을 낳은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앎은 이미 옛날의 앎을 원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의 앎이 옛날의 그것처럼 생겨나고 이해하는 것으로, 바로 옛날의 경계대상을 지금의 소연으로 삼은 것이다.46)
그렇지만 그 소연은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비록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이라 할지라도 소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과거ㆍ미래세)는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미래[의 결과]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하니, 결과가 전전(傳傳)하여 생겨나는 것에 대해서도 앞서 [언급한 과거의 원인에] 준하여 논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힐난하고서 해석하였다.
“만약 앎이 앞서 일찍이 취한(증득한)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옛날의 경계대상을 지금의 소연으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과거 일찍이 취한(증득한) 일이 없는 경계대상을 반연하거나, 혹은 반대로 미래세의 일을 사유하는 경우, 어찌 옛날의 경계대상을 그것의 소연으로 삼는다고 하겠는가?
상속(相續) 중에 필시 원인에 대한 앎[因智]과 결과에 대한 앎[果智]이 이전에 이미 생겨났기에 지금의 앎이 생겨날 때에도 역시 그 같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앎이 일찍이 반연하였던 경계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것으로, 그 같은 앎이 원인이 되어 지금의 앎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앎도 그 같은 앎과 마찬가지로 역시 능히 ‘이와 같은 [현재의] 원인으로부터 이와 같은 [미래의] 결과가 생겨난다’거나 혹은 ‘이와 같은 [현재의] 결과는 이와 같은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났다’는 사실을 추리하여 살필 수 있다. 나아가 [아득히 먼 과거나 미래에 이르기까지]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능히 증득할 수 있을 뿐더러, 증득된 [앎]에 어떠한 전도됨도 없다. 비록 이러한 상태(과거ㆍ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경계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두 종류의 앎이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상좌의 모든 말은 다 벙어리가 꿈속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4연(緣)을 분별하는 곳에서 이미 널리 검토하였으니,47) [여기서는] 마땅히 그의 논문의 예(例)에 의거하여 이러한 설을 논파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설은 다만 어리석은 이들만을 유혹하고 속일 수 있을 뿐으로, 지자(智者)가 검토하여 살펴보면 여기에는 어떠한 진실 된 뜻도 없지만, 여기서 이에 대해 간략하게 거듭 생각해보기로 한다.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니, 그는 스스로 힐난한 것에 대해 해석하여 말하기를 “상속(相續) 중에 필시 원인에 대한 앎[因智]과 결과에 대한 앎[果智]이 일찍이 이미 생겨났기에 지금의 앎이 생겨날 때에도 역시 그 같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앎이 일찍이 반연하였던 경계대상을 소연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이미 생겨난 원인에 대한 앎과 결과에 대한 앎’이라고 하였기에 지금의 앎도 그 같은 [앎의] 소연을 반연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인가? 이는 즉 일찍이 지금의 앎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였다는 것인가, [지금과는] 다른 경계대상을 반연하였던 앎이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것인가?
만약 “일찍이 지금의 앎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였다”고 한다면, 이러한 경계대상은 이미 옛날의 앎의 소연이 되었던 것인데, 어떻게 ‘일찍이 취한(증득한)일이 없는 경계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지금과는] 다른 경계대상을 반연하였던 앎이 별도로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이미 그 같은 [앎의] 경계대상을 지금의 소연으로 삼는다고 주장하였거늘, 어떻게 지금의 앎에 대해 과거ㆍ미래의 일찍이 취한(증득한) 일이 없는 경계대상을 그것의 소연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앞서 이미 생겨난 ‘원인에 대한 앎’과 ‘결과에 대한 앎’의 소연이 되었던 인과가 지금의 소연이 되었다면, 이러한 경계대상은 이미 이전의 앎에 의해 취해진(증득된) 것이거늘 어떻게 다시 ‘일찍이 취한(증득한) 일이 없는 경계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일찍이 [취한] 것을 일찍이 [취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설혹 “인과적 관계로서 전전 상속하는 구(舊) 수계(隨界)라고 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록 다겁(多劫)의 오랜 시간이 지나 이미 소멸한 경계대상이라 할지라도 지금 취할 수(증득할 수) 있다고 해도 이치상 어긋남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만약 미래 백천 겁 이후에 존재하게 될 경계대상을 어떻게 지금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인과로서 전전 상속하는 힘 때문에 그것 역시 취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니, [그에 의하는 한] 미래 자체는 마치 말의 뿔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미래의] 상속 중에는 수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과거의 원인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건대, 일찍이 취한(증득한) 경계대상에 대해 바야흐로 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찍이 취한 경계대상에도 가깝고 먼 [시간적인 차별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빨리 취하고 늦게 취하는 시간적인 차별이 있어야 하지만, 몸은 현재 파타리성(波吒釐城)에 있으면서 옛날 박갈국(縛喝國)에 겪었던 일을 기억할 때 원인을 살펴 나아가다가 비로소 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문득 그것을 반연하여 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48)
또한 이식(耳識)으로부터 무간에, 이전에 일찍이 취하였던(증득하였던) 것을 반연하는 식이 생겨났을 경우, 이와 같은 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 것인가?49) 바야흐로 당시의 수계를 원인이라 할 수 없으니, 이식은 그 같은 경계대상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일찍이 그것을 취하였던 식을 원인이라 할 수 없으니, 일찍이 그것을 취하였던 식은 그 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을 원인으로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無]를 낳았다고 할 수도 없을 뿐더러,50) 말의 뿔 등에 대해서도 역시 [식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도 안 되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4연을 분별하는 중에 널리 따져 비판하였다.51)
따라서 오로지 ‘[현재] 일 찰나[의 법]만이 존재[有]한다’고 설하는 종(宗, 즉 경부종)에서는 과거ㆍ미래를 반연하는 식이 생겨나더라도 필시 두 가지 앎에는 결정적인 [뜻]이 없다. ‘실로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경우에만 비로소 두 가지에 대한 결정적인 뜻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3-4) 이증②: 업에는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에는 당래의 과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 조작된 선ㆍ불선의 업은 연(緣)에 근거하여 당래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업을 사택(思擇)하는 곳에서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52)
그런데 이숙과는 업과 무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당래 결과가 생겨날 때, 이숙인이라는 현재 혹은 과거법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원인 없이 결과가 생겨난다고 하든지, 혹은 마땅히 그 결과는 필경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실로 과거ㆍ미래는 존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3)
(1) 경증②에 대한 경주의 논란(종자상속설) 비판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부사(經部師)는 이와 같이 ‘바로 과거의 업이 능히 미래의 결과를 낳는다’고는 설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된 상속(相續)이 전변(轉變) 차별(差別)되어 미래의 결과로 낳아지게 된다’고 [설하는 것이다].54) 비유하자면 세간에서 종자가 당래 과실을 낳는 것과 같다. 즉 [세간에서] ‘과실은 종자로부터 생겨난다’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당래 과실은 이미 괴멸한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종자와 무간(無間)에 당래 과실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즉 당래의 과실은 선행한 종자로부터 인기된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능히 낳아지는 것으로, 이는 말하자면 최초 종자로부터 다음에 싹이 생겨나고, 그 후 계속하여 잎 내지 꽃이 일어나며, 꽃으로부터 다음의 순서로서 바야흐로 과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과실은 종자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은, 종자에 의해 인기되어 계속 발전[展轉]되어 온 꽃 중의 공능이 과실을 낳았기 때문으로, 만약 꽃 중에 종자에 의해 인기된 이 같은 공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와 같은 종류의 과실을 능히 낳을 수 없을 못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으로부터 당래의 과보가 생겨났을지라도, 당래의 과보는 이미 괴멸한 업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업과 무간에 당래의 과보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즉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된 상속의 전변과 차별이 능히 당래의 과보를 낳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선행된] 업의 상속이란, 이를테면 업이 선행하고서 그 후후(後後) 찰나에 마음의 상속이 일어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상속의 후후 찰나가 [전전(前前) 찰나와] 각기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전변’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전변의 최후 찰나에 뛰어난 공능이 있어 무간에 과보를 낳음으로써 여타의 다른 전변과 다르기 때문에 ‘차별’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한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55)
이러한 설에 대해서는 앞서 업을 사택하는 곳(즉 「업품」)에서 이미 비판 부정하였으니,56) 지금 여기서는 [개별적인] 뜻에 근거하여 이치가 미진한 것에 대해 다시 널리 논파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경주는] “업이 선행하고서 마음이 그 후에 상속하여 일어나는 것을 업의 상속이라 이름한다”고 하였지만, 이치상 필시 그렇지 않으니, 업과 마음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별’이라 말한 것은, 이를테면 업과 마음은 [법] 자체[體]와 종류[類], 그리고 원인[因] 상에 차이가 있기 때문으로, ‘법 자체 상에 차이가 있다’고 함은 그 상(相)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종류 상에 차이가 있다’고 함은 심과 심소법으로서 그 종류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며, ‘원인 상에 차이가 있다’고 함은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57) 이렇듯 [업과 마음에] 이미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후 찰나의 마음이 상속하여 생겨나는 것을 ‘업의 상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마음과 업은 구시(俱時, 동시)에 생겨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구유인(俱有因)을 분별하는 곳과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58) 그러나 사(思, 즉 업)의 상속이나 식(識)의 상속 중에서 일찍이 [‘식’과 ‘사’가] 자류(自類)의 상속으로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업과 마음은 동일한 상속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대의 종의에서는 멸진정 중에서도 마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59) 부처님께서는 “멸진정에서는 모든 의행(意行)이 소멸한다”고 설하였거늘, 어떻게 마음과 업이 동일한 상속이라 하겠는가? 만약 업과 마음이 동일한 상속이라고 인정한다면, [멸진정 중에서] 마음이 멸하지 않듯이 의행도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며, 의행이 멸하듯이 마음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60)
그렇지만 멸진정 중에 머물 때에는 필시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은 존재하는 일이 없으니, [이에 대해서는] 불상응행법을 [설하는 곳에서]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61) 즉 [업과 마음이 동일한 상속이라면, 멸진정 중에서는] 업의 상속도 끊어지기 때문에 후과(後果)는 필시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지만, ‘종자와 싹 등이 순서대로 상속하여 후과(즉 과실)를 낳는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이치가 없기 때문에, 그 같은 [“업이 선행하고서 마음이 그 후에 상속하여 일어나는 것을 업의 상속이라 이름한다”고 하는] 말은 오로지 허망(거짓된) 분별일 뿐이다.
또한 그가 설한 “과실은 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는 것도 이치상 지극히 잘 성립하지 않으니, 우리의 종의에서는 이미 소멸한 종자 자체도 여전히 실체로서 존재[實有]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설혹 [그 같은 말이] 지극히 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종자)이 상속하는 것처럼 이러한 업도 상속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앞에서 분별한 [업과 마음이] 차별된다는 이치 때문이며, 또한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는 그 원인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악행은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며, 만약 좋은 결과라면 그것은 결정코 묘행(妙行)을 원인으로 삼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꽃의 경우처럼 바로 종자의 상속이 전변 차별되어 능히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결정적인 이치에서 묘행과 악행의 원인은 각기 별도로 좋고 좋지 못한 결과를 능히 초래할 뿐, 악행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좋은 결과를 초래할만한 공능이 없고, 묘행은 능히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없으며, 무기는 두 가지 모두를 초래할 공능을 갖지 않는 것인가?62)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여기에 어떤 결정적 이치가 있기에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업에 존재하는 공능이 모두 마음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따라서 [공능에도] 역시 마땅히 종류에 차이가 있다고 설해서는 안 된다. “종류는 다르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별도의 실체[別體]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 같은 경우를]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꽃과 싹 등의 상속에 종자의 공능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종자의] 공능과 꽃은 별도의 실체[別體]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만, 선과 불선에 체[성]의 차별이 없다고 할 경우, 여기에는 크나큰 과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자와 싹 등은 바로 동일한 상속으로, 이미 꽃에 종자의 공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싹 등의 공능도 역시 꽃에 존재한다고 해야 하니, 이것(종자)과 저것(싹)을 차별할만한 [인연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싹 등이나 종자의 공능은 모두 꽃과 별도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꽃 안에 존재하는 공능으로부터 꽃을 보조적인 연[助緣]으로 삼아 능히 과실을 낳는다고 하였으니, 이에 따라 싹 등도 마땅히 생겨날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때에는 오로지 과실만을 낳을 수 있을 뿐으로 싹 등은 낳을 수 없으니, 여기(꽃)에 무슨 [싹 등의] 원인이 존재하겠는가? 꽃 중에는 종자 등에 의해 인기된 미세한 부분[細分]의 공능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그 때에는 오로지 종자에 의해 인기된 꽃을 보조적인 연으로 삼아 능히 과실을 인기하여 낳을 수 있을 뿐으로, 꽃 중에서 싹 등이 인기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싹 등에 의해 인기된 공능이 비록 꽃 중에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요컨대 과실이나 혹은 싹 등이 일어나는 것에 근거하여(다시 말해 꽃이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다시 싹을 틔울 때), 비로소 싹 등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일찍이 종자에 의해 인기되어 자신의 결과(즉 열매)를 낳고서, 다시 원인이 되어 그 뒤에 싹 따위 중에 종자의 상속을 낳는 것처럼, 마땅히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된 공능은 자신에 의해 초래된 이숙과를 낳고서, 다시 원인이 되어 그 뒤에 업의 상속을 일으킨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대의 종의에서는 이숙의 후변(後邊)을 설하므로, 별도의 업이 원인이 되어 업의 상속을 인기하는 것이지 전[생]의 업의 종자가 후[생]의 업의 공능을 인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자의 상속’으로써 ‘업의 상속이 능히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비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종자와 싹 등은, 무시이래 각각의 종류는 각기 동일한 상속으로, 최초 벼의 종자와 싹 등이었던 것이 전전 [상속]하며 피의 결과를 인기하여 낳았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대의 종의에 의하는 한, 동일한 업이 상속하여 좋거나 좋지 못한 결과를 다 같이 능히 인생(引生)하기 때문에 그것(종자상속)은 마땅히 동일한 법의 비유(즉 同喩)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식(識) 자체가 사(思, 즉 업)의 공능을 지니고 있으며, ‘사’ 자체도 또한 ‘식’의 공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식’과 이러한 ‘사’는 무엇에 의해 그 상(相)이 차별될 것인가? [그대의 종의에 의하는 한] 공능과 법은 별도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순현수업 등은 마땅히 뒤섞이고 말게 될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등의 허물에 대해 곳곳에서 수차례 논설하였다.63)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종의]를 싫어하여 배척하려는 자들에게는 ‘업은 결과를 초래하고, 결과는 업에 의해 초래된다[業果感赴]’는 그 같은 이치가 결정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음에 덮여 경을 은멸(隱滅)하는 자[愚蒙隱滅經者]들은 “상속이 전변 차별되어 능히 당래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여기지만, 이는 이치상 필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경주는 여기서 또한 이같이 힐난하고 있다. “만약 과거ㆍ미래가 실유라고 주장한다면, 결과 자체[果體]도 모든 때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업은 그러한 결과에 대해 어떠한 공능을 가질 것인가?”64)
이러한 힐난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응당 참답게 해석할 것이다.65)
바야흐로 그대(경주)의 ‘업은 결과를 초래하고, 결과는 업에 의해 초래된다’는 이치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3-5) 경증③: 삼세법의 무상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과거ㆍ미래는 결정코 실유라고 해야 할 것이니, 현재[법]이 그러한 것처럼 상(相, 유위상)을 갖기 때문으로,66) 계경에서 “과거ㆍ미래의 색도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의 색을 말해 무엇할 것인가?”라고 설한 바와 같다.67) 즉 무상(無常)은 바로 유위의 상(즉 滅相)이기 때문으로, 현재[법]은 그러한 상을 갖지만, 그것이 실유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인 것이다.
만약 과거ㆍ미래가 실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계경에서는] 마땅히 현재[법]처럼 유위의 상을 갖는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절대적 비존재[畢竟無]인 공화(空花)나 말의 뿔 등에 대해서도 역시 “그것은 무상[의 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ㆍ미래는 결정코 실유임을 알아야 한다.
(1) 경증③에 대한 경주와 상좌의 해석 비판
[만약] “증유(曾有)와 당유(當有)에 근거하여 [유위의] 상을 갖는 것이라고 설하였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차별하여 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색은 일찍이 무상한 것이었고 당래 무상할 것이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의 해명은 다만 자신의 정의(情意)에 따른 것일 뿐이다.
또한 그가 말한 ‘일찍이 무상한 것이었다’는 등은 다만 ‘현재[시점]의 무상’을 방편으로 설한 것일 뿐이니, 이를테면 일찍이 [존재하였던 때와], 당래 [존재할 때의] 현재[시점]의 무상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미 현재의 무상을 설하였으니, 마땅히 다시금 “하물며 현재의 색을 말해 무엇할 것인가?”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68) 혹은 마땅히 오로지 현재의 무상만을 설했어야 하는 것으로, 과거ㆍ미래의 무상은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미 알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현재 이미 소멸한 상태이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때에 [법]체가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무상성은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세의 차별[世別]을 분별하면서 이치대로 해석하게 될 것이다.69) 바야흐로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이 무상하다’고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이같이 해석하였다.
“[과거ㆍ미래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한 것으로, 만약 [과거ㆍ미래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무상하다’는 이치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재법은 그 자체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에도 무상한 것이라고 설하였다면, 마땅히 “[과거ㆍ미래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설하였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삼세를 거치면서 자성이 항상 지속[恒住]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제법은 삼세에 걸쳐] 동등한 별법(別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삼세를 거친다고 하는 것인가? 자성이 항상 지속하는 것을 다같이 ‘상주하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상주하는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 [삼]세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70) 또한 마땅히 ‘자성이 항상 지속한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과거ㆍ미래와 지금의 성[류](性類)에 차이가 있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71)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가 설한 힐난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경에서 ‘과거ㆍ미래색은 무상하다’고 설한 것은 현재 [그러한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해석하였지만,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그 다음에 바로 “하물며 현재의 색을 말해 무엇할 것인가?”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럴 경우] 현재 색은 무상하지 않은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현재의 색은 그 자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증인(證因)으로 삼아 “현재의 색도 그 자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는 것은 피차(과거ㆍ미래법과 현재법)에 지극히 상식적[極成]이지 않으니, 현재법은 그 자체 존재하는 것이지만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 계경에서 “제행은 무상한 것으로, 생멸을 갖는 법[有生滅法]이다”고 말하였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에 대해 무상하다고 설한 것은 아니다. 즉 과거ㆍ미래의 모든 법체가 비록 실유라고 할지라도 이는 바로 생멸을 갖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이취(理趣)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분별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존재하지 않는 것[無體]도 역시 무상의 상(相, 즉 멸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 이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ㆍ미래가 실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포랄나계경(布剌拏契經)』에서 설하였기 때문에 과거ㆍ미래세는 결정코 실유임을 알아야 한다. 즉 그 경에서는 설하기를 “이 만필추(滿苾芻)는 안근으로 색을 관찰[見]하고 나서 능히 색을 알았으며, 색탐을 알았다. 즉 그는 내적인 안근에 의해 식별된 색탐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나에게 내적인 안근에 의해 식별된 색탐이 존재한다’고 능히 참답게 알았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72)
즉 [여기서] 참다운 관찰과 탐은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73) [이를 만약] “견(見, 참다운 관찰)의 상속 중에 탐수면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견’의 상속 중에 탐수면은]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탐수면을] 성취하는 일이 있다면, ‘견’ 역시 성취되지 않을 것이니, [그럴 경우] 실로 [견수면과] 그 자체 차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74) 따라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앎[智]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능히 수면을 관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탐의 대치를 아직 닦지 않았기 때문에 탐이 존재한다고 믿는다”고 하는 이치 역시 옳지 않으니, [그럴 경우] 이러한 탐이 어떠한 상태로서 존재하는지(다시 말해 과거의 탐인지, 미래의 탐인지, 혹은 현재의 탐인지) 마땅히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혹 “그는 탐이 존재하는 것을 믿어 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할지라도 탐이 어떠한 상태로서 존재한다고 믿는지에 대해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탐이 일찍이 [존재한 것], 앞으로 [존재할 것], 지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어떻게 탐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상주하는 법[常法]을 설하여 탐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시 마땅히 과거ㆍ미래[의 탐]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내적인 수(受)에 대해 따라 관찰[隨觀]하며 머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등의 여러 지교(至敎)가 있어 과거ㆍ미래가 결정코 존재하는 것임을 능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3-6) 이증③: 살생업도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또 다른 이증(理證)이 있다. 이를테면 만약 그러한 [과거ㆍ미래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생의 이치도 이루어질 수 없다. 즉 현재세의 명근(命根)은 [일] 찰나이기 때문에 굳이 힘들여 수고하지 않더라도 멸상(滅相)이 능히 [명근을] 멸하는 것으로, 만약 미래세의 그러한 [명근] 자체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살생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인지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75)
어떠한 법을 능히 장애하여 그것(명근)으로 하여금 존재하지 않게 한다는 것인가? 이미 생겨난 것(현재의 명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당래 생겨날 것(미래의 명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야흐로 이미 생겨난 법은 필시 장애할 수 없으니,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76) [또한] 그 같은 당래 생겨날 것 역시 장애할 수 없을 것이니,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명근]은 이미 소멸하였으니, [그것에 대한] 살생도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과거ㆍ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정코 살생의 이치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과거ㆍ미래세의 [법]체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현재세의 색(色)ㆍ성(聲) 등의 법과 마찬가지로 능히 그것에 반연하는 앎[覺]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모든 법[非有法]은 [비존재라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반연하여서는 능히 차별적인 앎을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3-7) 소결: 설일체유종의 명의(名義)와 이종(異宗) 비판
온갖 유정으로서 세속에 처한 이든 출가인이든 앞에서 분별한 바대로 삼세[법]이 존재하며, 아울러 진실(眞實)인 세 종류의 무위가 존재한다고 믿어야 비로소 스스로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칭할 수 있으니, 오로지 이와 같은 [일체의] 법(즉 삼세의 유위법과 세 종류의 무위법)이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설일체유종(說一切有宗)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으니(다시 말해 ‘설일체유종’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실유의 법을] 더 많이 주장[增益]하거나 더 적게 주장[減損]하기 때문이다. 즉 더 많이 주장하는 증익론자(增益論者)들은 진실(眞實)인 보특가라(補特伽羅)와 아울러 앞서 언급한 제법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며,77) 분별론자(分別論者)들은 오로지 현재법과 아울러 과거세의 법 중에서 아직 결과를 낳지 않은 업만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다.78) 또한 찰나론자(刹那論者)들은 오로지 현재 일 찰나 중의 12처의 법체만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며,79) 가유론자(假有論者)들은 현재세에 존재하는 제법도 역시 다만 가유일 뿐이라고 설하고 있다.80) 그리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도무론자(都無論者)들은 “일체법은 모두 무자성(無自性)으로 공화(空花)와 같다”고 설하고 있으니,81) 이들은 모두 ‘설일체유종’이 아닌 것이다.
경주(經主)는 이(삼세실유)에 대해 이와 같이 비방하고 있다.
“만약 ‘과거와 미래가 실로 존재한다’고 설할 것 같으면, 이는 성교(聖敎)에 대해 잘 설한 것[善說]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일체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설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계경에서 설한 바대로 설해야 할 것이다.
경에서는 어떻게 설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말하기를 ‘범지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일체의 존재[一切有]는 오로지 12처(處)이며, 혹은 삼세는 오로지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말을 설할 뿐이다’82)고 하였던 것이다.”83)
그 경 중에서는 오로지 현재 12처의 법체만이 존재하고, 과거와 미래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곳에서 과거ㆍ미래[의 12처]를 부정하는 분명한 성교(聖敎)를 보았던 것인가? 곳곳의 여러 경에서 “과거ㆍ미래의 2세도 역시 존재한다”는 설한 것을 보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던 것인가? 나(중현)는 들었으니, 어떠한 연유에서 성교를 어기고서 ‘[일체법이] 존재한다’고 설한 이들을 비방하여 “잘 설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그대들은 “현재의 12처의 일부는 실로 존재하고, 일부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니, 상좌종(上座宗)의 색(色)ㆍ성(聲)ㆍ촉(觸)ㆍ법(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84) 어떻게 이를 설일체유종(說一切有宗)이라 하겠는가?
또 다른 이들은 다만 번뇌의 증상(增上)으로 말미암아 “일체법은 오로지 가유(假有)이다”고 설하였는데, 어찌 이를 역시 설일체유종이라 하겠는가?
또 다른 이들은 다만 사견(邪見)의 증상으로 말미암아 “일체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성을 갖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니, 그들 역시 현재가 거짓된 환영의 존재[虛幻有]라고 말한 것이거늘 어찌 이와 같은 ‘유’를 ‘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역시 또한 설일체유종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부처님께서 범지(梵志)를 위해 이러한 계경을 설하였던 것은 실유의 보특가라를 부정하기 위해서였으며, 아울러 “알려진 법[所知法]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였지, “오로지 현재 일 찰나의 12처의 법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실로 과거ㆍ미래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모든 이들은 마땅히 ‘설일체유종’이라고 자칭(自稱)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들(경부종)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저들 도무론종(都無論宗)은 오로지 일 찰나의 간격만 있을 뿐으로, [설일체유종의] 견해와는 전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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