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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35)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1980년대 미국불교 (2)
버만트 주 카멜쵸링 트룽파 화장터에 세운 탑
미국에 온 지도자들의 열반
미국 본토박이 1세대 지도자로 활동 시작
삼보사 건립한 이 한상 거사도 1984년 별세
미국불교사에서 1980년대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불교계 지도부의 성적 부도덕 술과 약물의 과다복용 등 ‘계율’문제로 시끄러웠던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는 미국 본토박이 출신 1세대들이 지도자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지도자로 활동한 사람들은 글래스맨, 존 다이도 누리 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1980년대에는 티베트 불교가 일본 불교를 제치고 크게 부상한 시기이다.
또 이 시기에 쵸감 트룽파 린포체를 비롯한 여러 명의 티베트 계 불교계 지도자들이 입적이 있었다. 북가주 카멜에 삼보사를 건립한 이 한상 거사도 1984년 8월에 입적했다. 여러 사람들의 입적이 있었지만 초감 트룽파 린포체의 입적은 미국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는 미국백인불교계의 가장 큰 단체인 삼발라센터를 건립하였고, 콜로라도에 ‘나루빠 대학’를 설립했다. ‘성스런 전사의 길(The Sacred path of the warrior' 등 많은 저서를 가지고 있는 그는 스님이었다가 미국에 올 때는 환속한 상태였다. 그는 어학에 매우 뛰어난 소질에 있었으며, 강력한 카리스마와 영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의 강연에는 많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영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였다. 그는 조동종의 스즈키 순류 스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그는 계율을 잘 지키지 못했다. 인도에서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공부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왔기 때문에 1970년 미국에 올 때는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었다. 1987년 그의 죽음은 미국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버먼트 주의 ’카메 촐링‘에서 화장한 후에 그의 부도는 ’카메촐링‘과 스즈키 순륜의 부도가 있는 북가주 ’타사하라‘에도 있다.
초감 트룽파 장례식에 관한 아래의 글은 ‘이야기 미국불교사(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에서 옮긴다.
카멜쵸링에 있눈 쵸감 트룽파 부도
카메춀링
1984년 이한상 거사 사망 보도기사
트룽파의 화장
초감 트룽파 린포체의 장례행렬은 혼자서 ‘노바 스코시아여 안녕’을 피리로 부는 사람을 선두로 하고, 그 뒤로 심장이 뛰듯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나직한 북소리와 걸걸하고 목에 걸리는 듯한 티베트 나팔소리가 뒤따랐다. 3,000명이 넘는 문하생들과 내빈이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 장례행렬은 안개가 자욱이 낀 숲을 나와 붉은색 토리 문Tori Gate: 신토사원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문 아래로 지나갔다. 그곳은 버몬트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카르메-쵸링 수도원의 윗 동산 화장터에 이르는 입구였다.
비단으로 휘장을 치고 하얀 우산으로 지붕을 가린 가마에 실린 시신을 트룽파 린포체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여덟 명이 어깨에 메어 운반하였다. 이어 그 가마는 고위직 라마의 화장火葬을 위해 만든 정교하게 채색이 된 탑(푸르캉purkang; 문자 그대로 ‘시체의 집’) 안으로 운구되었다. 땅에서 7.5미터 높이로 지은 탑 위에는 황금으로 된 첨탑이 꽂혀 있었다.
다비 예식은 카규파의 섭정 네 명 중에서 세 명인 샤마 린포체, 잠곤 콩투룰 린포체, 기얄찹 린포체 외에도 트룽파 린포체의 스승 중 한 분이자 닝마파의 종정인 딜고 키엔체 린포체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여기까지는 전통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에는 몇 가지 혁신적인 점이 있었다. 그런 혁신은 불교, 특히 티베트 금강승을 새 나라와 새 시대에 도입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한 스승의 화장火葬에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먼저, 트룽파 린포체 밑에서 공부를 하여 수준에 도달한 미국 불교 대표들에 의해서 예식이 거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스님이나 라마들과 똑같은 의식을 거행하여 약간 어색하기는 하지만 유연한 동작으로 종을 치기도 했고, 똑같은 ‘시각화’visualization: 보통 만트라를 외면서 심상心相을 떠올리는 수행와 무정형無定形 명상을 시도했다. 또한 그들은 영어를 사용하였으니, 트룽파 린포체가 자기 제자이며 헌신적인 학자들과 함께 작업한 영어 번역본으로 의식을 집전하였다. 또한 미국 ‘밀교도(tantrikas)’는 거의 전부가 재가신도였다. 그들은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틈틈이 짬을 내서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티베트 불교의 예비수행을 한 사람들이었으며, 여자와 남자의 수효가 같았다. 따라서 모든 의식이 오래된 전통에 준하여 올바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티베트인 스승과 미국인 제자들 양쪽 모두에게 자연스럽고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초감 트룽파
트룽파 린포체는 1987년 4월 4일, 마흔 일곱의 나이에 바즈라다투 불교사원의 국제본부가 옮겨와 있던 노바스코시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와 호흡장애였다. 의학상으로 보면 그것은 합당한 사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헌신적인 제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설이 되다시피 한 과음이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티베트인의 관점으로 보면 트룽파 린포체는 보통 인간이 아니고 보살이었다.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한 서원으로 환생한 각성한 도사道士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은 일반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오로지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룽파 자신은 자기가 죽을 시기와 그 의미에 대하여 별 의혹이 없는 듯이 보였다. “태어남과 죽음은 생명의 드러남이다”라고 그는 죽은 뒤에 읽혀진 메시지에 썼다. “나는 내 일을 완수했고, 나의 임무를 주위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행하였다. 지금 나는 퍽 행복하게 죽음을 맞는다. 전체로 보아서 훈련과 수행은 필수적이다. 내가 그렇게 했든지 안 했든지와 상관없이. 그대가 젊은이건 노인이건 나의 죽음에서 무상無常의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칼루 린포체 소개책
초감 트룽파 린포체의 죽음은 진정 무상의 진리를 뒷받침했다. 동양에서 수행을 한 1세대 스승들의 열반으로 인해 미국 불교 역사의 한 장이 끝났음이 가슴 시리도록 분명해졌다. 트룽파 린포체에 앞서서 샌프란시스코 선 센터의 창시자 슌류 스즈키 로시가 1971년 12월에 서거하였다. 카규파의 최고지도자인 걀와 카르마파 성하는 1981년 일리노이 주 자이온에서 서거하였다. 1984년에는 뇨겐 센자키의 도반이고 에이도 로시와 모린 스튜어트 로시의 스승인 나카가와 소엔 로시가 류타쿠지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에 뚭텐 예세Thubten Yeshe 라마는 자신의 서양제자들이 있는 캘리포니아 보울더크릭의 바즈라파니 센터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네팔의 코판 수도원을 떠났으니, 캘리포니아에서 전통에 따라 화장되었다. 2년 후에 스페인의 어린 아이 오셀 히타 토레스Osel Hita Torres는 조파Zopa 라마와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그의 환생으로 인정 받았다.
트룽파 린포체가 사망한 1987년, 닝마파의 최고 지도자이며 숨겨진 법전(terton)을 찾아내는 사람인 두좀 린포체 성하는 프랑스 돌돈뉴의 오르겐 삼예 쵤링 명상연구 센터에서 82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몸은 나중에 네팔 보다나트에 그를 기리기 위해 새로이 건립된 사찰에 안치되었다. 같은 해에, 사카 라마이며 20년 전 시애틀에 왔던 데슝 린포체가 보다나트에서 사망하였다. 2년 뒤, 현대의 밀라레파로 불리는 칼루 린포체가 인도 소나다 수도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네 번에 걸친 북미 순회 중 불법을 가르쳤는데, “전통적인 방법을 썼지 다른 견해는 전혀 가감하지 않았노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서양 라마들에게 3년에 걸친 수행을 완수하도록 지도했다. 1990년 3월 1일, 다이닌 카타기리 로시가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미네소타 선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63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조동종 선본부를 도와주기 위해 왔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스즈키 로시와 긴밀히 협력하였다. 열반에 들기 3개월 전, 그는 일본인 한 사람과 미국인 열한 사람, 모두 열두 명의 선승을 배출하는 수련의 완료를 축하하는 의식을 치뤘다. 끝으로, 트룽파 린포체에게 가장 소중한 스승이며 조언자였던 딜고 키엔체 린포체가 1991년 9월에 81세를 일기로 부탄에서 사망하였다.
이렇게 사망한 분들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가르친 선각자들이었으므로, 미국 불교가 드디어 성년成年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국 불교는 어색하고, 도전적이며, 성장하는 데 불가피한 날카로운 고통(성장통)으로 점철된 사춘기에 들어선 듯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승 몇 사람이, 미국인 후계자와 동양인 스승 양쪽이 다, 미국 특유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그것은 권력의 남용, 특히 성性적인 측면과 재정적인 측면에서 권력의 남용이란 함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사생활도 똑같이 미국 특유의 면밀한 조사를 받고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대다수 미국 불교인들에게, 문하생이건 스승이건, 혈기왕성하던 60년대와 70년대 초의 동東과 서西의 만남이 결국은 머리를 맞부딪치는 충돌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까지 미국불교계 중요 연표 1976년 LA 조종동의 마에즈미 스님은 쿠로다 연구소 설립. (Kuroda Institute for the Study of Buddhism and Human Values). 이곳은 학술회의와 연수회를 후원하며 하와이 대학교 출판부와 함께 동아시아 불교에 헌신하는 두 개의 출판 물을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다. 하나는 학술연구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전문헌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CH'an Meditation Center)출범시킴. 걀와 카르마파에 의해 설립 왓타이 LA로 바뀌었다. 브롱스의 리버대일Riverdale에 있는 그레이스트톤에 ‘뉴욕 선 공동체-Zen Community In New York- 설립 The Buddhist Peace Fellowship 랑중 릭페 달라이 라마 1980년 존 다이도 루리 스님이 뉴욕주에 Zen Mountain Monastery. 개원 1986년 나로빠 대학교 정식으로 인가를 받음. 받음. 1987년 뉴욕시에 달라이 라마 요청으로 티벳하우스 설립. 초대 회장에 로버트 써머 교수. 게셀완걀 스님 숭산 스님 뉴욕 티벳 하우스 달라이 라마 |
1980년대 미국 상황
한인들의 이민은 1980년대 중반 절정에 달하며 8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 내 생활수준의 급격한 향상으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의 역사에는 지미 카터 행정부의 마지막 1년과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8년간, 조지 H. W. 부시 행정부의 전기 2년이 포함된다. 카터는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 오점을 남겼고, 국내에서도 반대 세력을 만났다. 재선거를 요구한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 레이건은 1기의 1981년과 1982년의 불황을 거쳐 미국 경제를 자극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적극적 재정 정책을 선택했다. 그 중에는 석유 공급 과잉으로 이어지는 석유 규제 완화가 있었다.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4도 정상 회담을 갖고, 중거리 핵전력 폐기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의해 냉전의 종식을 가속시켰고, 부시 행정부 초기에 냉전이 끝나고 베를린 장벽은 제거되었다. 1987년에 미국 역사에서 두 번째로 큰 주식 붕괴가 일어났다. 이것이 1990년대 초 불황의 전조가 되었다. 이 기간 최대의 스캔들은 ‘이란-콘트라 사건’이었다. CIA가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그 이익을 니카라과의 반공 민병대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데 유용하고 있었다.
레이건 혁명
데탕트 거부
1970년대는 미국의 자신감이 흔들렸던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통령의 신뢰감에 손상을 입혔다. 1975년 남베트남이 함락되었고, 1979년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은 장기화되었으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국제 테러의 증가와 군비 경쟁의 확대라는 국제적인 암울한 상황에 이어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국가의 능력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에너지 위기, 높은 실업률, 급속한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으로 경제 계획이 어려움을 겪었고, 미국의 미래 번영에 대한 기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1979년에 ‘자신감의 위기 연설’(crisis of confidence speech)에서 카터가 했던 용어인 미국의 ‘맬레이즈’(malaise , 무력감을 일으키는 것)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는 자신감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발견되지 않았던 말이었다.
레이건과 1980년 선거
로널드 레이건
로널드 레이건
보수적인 정서에 점점 더 호소하는 것 외에도,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주의의 아이콘이었던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를 경선에서 물리치자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재선 전망은 더욱 밝아졌다. 경제적 스태그플레이션의 배경에 대항해서, 그리고 해외에서 소련과의 경쟁 약화를 인식하고서, 로널드 레이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1980년 대부분의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종의 공동 대통령이 되기로 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전례없었던 합의에 실패한 후, 그는 그의 주요한 라이벌인 조지 H. W. 부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선거 운동 기간 중, 레이건은 진 커크패트릭을 그의 외교정책 고문으로 발탁해 카터의 허약한 외교 정책을 밝히는데 의존했다.[7]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미국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선거는 교외와 썬 벨트에 새로운 유권자 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한 정부의 빈곤 퇴치 계획에 관한 것과 위대한 사회의 적극적인 행동 양상을 퇴출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매파 외교 정책으로 돌아가는 징조가 되기도 했다.
제3 정당 후보자로 일리노이 선출 연방 하원 의원 존 B. 앤더슨은 중도 공화당원이었으며, 선거는 잘되지 않았다. 그 선거 운동의 주요 문제는 경제에서 스태그플레이션,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과 미국의 위대한 날은 끝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던 대중의 무력감이었다. 카터는 인플레 극복에 무능함을 드러냈고, 테헤란 인질 구출에도 실패했다. 카터는 데탕트를 지향하는 보좌관을 해임하고 빠르게 소련과 대결하는 자세로 전환했지만, 레이건은 그것이 너무 하찮은 조치이며, 너무 늦었다고 비난했다.
선거인단 선거에서는 레이건이 489표를 얻은 반면 카터는 49표 밖에 얻지 못했고, 결국 레이건이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공화당은 민주당 상원 의원 12명을 물리치고 25년 만에 상원의 다수파를 되찾았다. 총선에서 레이건의 득표는 43,904,153표 (투표 총수의 50.7%)이며, 카터는 35,483,883표 (동 41.0%)이었다. 존 앤더슨은 5,720,060표에 불과했다.
레이건 행정부
1981년 3월 30일, 레이건은 워싱턴 DC에서 존 힝클리라는 정신장애자에게 총격을 당했다. (레이건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 레이건은 병원에 실려갔고, 1주일 후에 회복했다. 부통령이었던 부시가 레이건의 부재 시에 대리했다. 힝클리는 결국 정신병으로 판단되어 감옥이 아닌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다.
레이건은 1981년 최초의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를 임명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86년에 보수 지도자 윌리엄 렌키스트를 대법원장으로 승진시키고, 최고의 보수주의자 앤토닌 스칼리아에게 그 자리를 메꾸게 했다. 1987년의 그의 네 번째 임명은 논란이 많았으며(대학 시절 마리화나를 핀 것 때문에), 처음의 선택은 철회를 해야 했으며, 상원은 로버트 보락을 거부했다. 결국 레이건은 앤서니 케네디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10]
1982년 불황
러스트 벨트가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1982년 초, 레이건의 경제 계획은 1979년에 시작되어 계속되고 있던 불황이라는 어려움에 부닥쳤다. 단기적으로 레이거노믹스의 효과는 적자를 급증시키고 있었다. 정부 부채는 통화 공급의 압박과 함께 천정부지로 금리가 높아졌고(단기간이지만 20% 정도나 인상), 1982년에는 실업률 10%의 심각한 불황이 되었다. "러스트 벨트"(공업화가 진행된 중서부와 북동부)가 있는 지역에서는 제철소 등 공장이 폐쇄되고 사실상 불황 상태에 빠졌다. 중서부 등의 가족 농장의 대부분은 고금리에 의해 파산하고, 재벌 농업 기업에 팔렸다. 레이건의 재정 정책에 의해 인플레이션만 즉시 억제되었다.
레이건은 재선을 요구한 198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역사적인 대승을 하게 되지만, 그의 지지율은 1982년 최악의 불황기에 급락했다. 민주당은 중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전 선거에서 잃어버린 의석을 되찾았다. 당시 비평가들은 레이건이 실태를 파악하고 있지 못했고, 그의 영화배우 시절의 이야기, 외모, 공격적인 언사와 구호만 말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고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82년까지 예산심의관이었던 열성적인 재정 보수파 데이비드 스톡먼은 "나는 레이건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의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은유에 불과 했다"라고 적고 있었다.
경제는 1983년과 1984년에 회복되었다. 1982년부터 1983년까지 최악의 시기에서 회복 요인은 1980년대 석유 공급 과잉으로 인한 원유 가격의 급진적인 하락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유가의 늘어난 압력이 끝나게 되었다. OPEC 카르텔의 실질적인 붕괴는 이자율과 통화 공급 확대를 줄이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던 보수적 통화주의 경제론자들이 대경실색할 정도로 행정부에게 꽉조인 통화 정책을 변경하게 하였다. 이들은 사실상 실업과 투자감소를 우려하는 인플레이션(지금은 통제되는 것처럼 보였던)에 대해 하찮은 우려를 하였다.
1983년 중반, 실업률은 1982년 11%에서 8.2%로 떨어졌다. GDP 성장률은 3.3%로 1970년 중반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은 5% 이하였다. 경제가 회복되었을 때,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의 아침’이 왔다고 선언했다. 주택 건설은 붐을 이루었고, 자동차 산업은 활력을 되찾았으며, 소비자들의 소비는 새로운 정점을 이루었다.[11]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 몇 년동안 활황에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그다지 혜택을 보지못했으며, 한때 비숙련 노동자에게까지 높은 급여를 주었던 공장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12]
레이건은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월터 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증가하는 적자
1983년에 시작된 경제 회복에 뒤이어, 레이거노믹스의 중간결산은 세금 인하와 증가하는 국방비 비중으로 인해 수입을 초과하는 지속적인 지출로 인해 치솟는 예산 적자였다. 1970년 후반과 1980년대 초기 불경기와 비교해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비는 세금에 비해 증가했으며 걷잡을 수 없는 비용과 균형을 맞추지 못했다.
1981년의 미국 역사상 가장 대폭의 절세는 또한 연방정부의 단기 수입 기반을 침식했다. 대규모로 증가된 군비(약 5년간 1.6조 달러)는 사회적 지출 삭감을 훨씬 초과하였으며, 그러한 감동적인 세금 인하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는 재앙이 되었다.그래도 1985년 말까지 국내 계획 예산은 의회가 용인할 수있는 한계를 넘는 데까지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적자는 1980년 600억 달러에서, 1980년에는 최고 2,200억 달러 (GDP의 5% 이상)까지 부풀어 올랐다. 이 기간 국채는 7,490억 달러에서 1조 7,460억 달러로 배 이상 증가했다.
적자 예산은 경기부양책으로 가치가 1982년 이후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경기 회복에 기여했지만, 1980년대 예산 부족 규모는 금리를 높게 유지시켜 달러의 가치를 과대 평가 상태로 두기 때문에, 투자와 수출 측면에서 고통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증가시켰다.
달러 강세로 인해 외국인은 미국 제품을 사는 것이 어려웠고, 미국은 수입품을 사는 것이 장려되었다. 공업 제품 수출 부문에 있어서는 미국 달러가 너무 높았다. 철강과 기타 중공업은 노동조합에서 과도한 요구를 받은 데다 일본의 수출품과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퇴조를 했다. 1970년대부터 쇠퇴가 시작되고 있었던 가전 산업은 덤핑 등 일본의 불공평한 무역 관행의 먹이가 되었다. 미국의 가전제품도 품질이 나빴고, 일본 제품에 비해 기술적인 혁신이 빠져 있었다. 이것은 냉전에 의해 소비재 보다는 방위산업에 미국의 과학 기술이 집중되었던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 10년이 끝날 때까지 미국의 가전 산업은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었다. 1980년대 미국의 기술의 긍정저긴 면으로는 신흥 컴퓨터 산업이 급성장한 것이었다.
조지 H.W. 부시
조지 H. W. 부시의 취임사
공화당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과 함께 8년간 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가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듀카키스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 운동에서 M1 에이브람스 탱크를 타고 연출한 유명한 선거 광고를 포함해서 듀카키스의 잦은 실수는 결정적인 패배 요인이 되었다.
1989년에는 미국의 파나마 침공이 일어나서 마누엘 노리에가가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초기에 부시는 1982년 마지막 달부터 시작된 강력한 랠리 경제를 계승했다. 그러나 연방준비제도가 1980년대 경제 성장을 제한하는 통제적인 통화 정책을 계속했다. 1990년 중반에 오일 쇼크가 다시 오자, 1990년부터 시작된 소비 지출은 수축되었으며, 경제가 불황에 진입하였다. 1980년대 초기 불황과는 달리 1990년 시작된 불황은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가장 타격을 입은 지역은 북동부와 캘리포니아였고, 반면 남부는 덜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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