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ire de la philosophie(철학사),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7장 이탈리아의 관념론 - L’idéalisme italien 783-788
1절 로스미니 – Rosmini 783
이탈리아의 철학은 1800년에서 1850까지 프랑스 철학과 비슷한 곡선을 따라간다. 그 철학은 칸트의 관념들에 다소 물든 정신주의로 향하여 가기 위하여 세기 초부터 이데올로지를 포기한다. 갈루피(Pasquale Galluppi, 1770-1846)는 정확하게 마치 꾸쟁(Cousin, 1792-1867)과 르와예 콜라르(Royer-Collard 1763-1845)처럼, 내적 관찰 속에서 자아의 확실성뿐만 아니라 인식의 원리들이라는 구성적 연관들의 확실성을 찾고자 원했다. 자아와 더불어, 외적 세계의 현존이,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에 연결되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783)
로스미니(Antonio Rosmini, 1797-1855)는 1831년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인 스트레사(Stresa)에 있으면서, 1840년까지 거기에서 머물렀던 마죄르 호수가의 고독을 포기했다. 그 이유는 1848년에 그가 교황 가까이에 있기 위해서 사르딘 왕국의 왕의 사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스미니를 이 임무를 하도록 선택했던 이는 당시 왕의 장관인 지오베르티(Vincenzo Gioberti, 1801-1852)였다. (783)
사람들은 마치 지오베르티에게서처럼, 로스미니에게서 이탈리아에게 철학적 사변을 부여한 관심사를 찾으려 한다. 그 철학적 관심사는 감각주의적 이데올로지보다 그의 천재성에 더 많이 가깝다. 이 두 철학자에게서, 지적인 개혁은 정치적 르네상스와 뒤섞여있다. 로스미니가 쓰기를(심리학, II, 286쪽, 번역 스공), 논리적 곧음(la rectitude)과 크리스트교의 감정은 이탈리아 인민들의 두 성격들이다. 또한 논리적 이고 종교적이었던 작가들은 항상 국민에게 환심을 샀다.거기에 이탈리아에서 갈릴레이의 성공의 진실한 이유가 있다. 반면에, 그 이유는 16세기의 매우 강력한 천재들의 호소에 노년기의 한가함과 느림으로 응답했다. 이 천재들이란 브루노(1548-1600)와 캄파넬라(1568-1639)인데 이들은 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갈릴레이(1564-1642)는 철학자가 아니다.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북쪽의 이단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멀리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버려졌다. 그가 결론짓기를 “이 나라는 철학 없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민족을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784)
따라서 로스미니는 민족적 철학을 창조할 임무를 갖는다. 그는, 진리의 인식을 인간적 역량들의 자연 위에 세워지게 하는 모든 학설들에 반대하는, 즉 데카르트의 사유의, 칸트의 형식들의, 스코틀랜드의 감정 또는 본능의 학설들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정신의 적대성에 대해 매우 생생한 감정을 갖는다. 그는 그래도 전통적인 학설들 또는 상식의 학설들을 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 “제1 진리”의 직관을 갖는 거기에서만 진리가 있다. 제1진리는 정신을 앞서고 그리고 다른 진리들의 규범이다. 따라서 로스미니의 학설은, 인식보다 위에 존재의 우월성을 선언하는 말브랑쉬의 학설 또는 플라톤의 학설과 친근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존재는 영혼이 우발적으로 만났을 수 있는 자료(le donné)가 아니다. 그것은 지성에 매우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지성일 수 있는 것(un intelligible)이다. 이런 연결이 없이는 전체의 지성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사유한다는 것, 그것이 있다는 것과 달리 있을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우선 존재를 마치 있는 그대로, 즉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고, 변질하지 않고, 단순하고 또 완전히 비결정적인 것처럼, 사유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존재는 신이 아니어도 신적이다. 존재가 신의 실재성과 연관은 마치 추상이 구체와 연관있는 것과 같다(로스미니는 스스로 존재론자이라고, 그리고 신의 통찰과 같은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옹호했다). 따라서 지성의 첫 대상은 이상적(idéal, 관념적) 존재이다. 로스미니는 진리를, 마치 관념과 대상의 상응처럼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플라톤의 관념과 같은 마치 영원한 전형처럼 간주한다. (784)
의심할 바 없이 사람들은 또한 유한한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러나 동물적 감정을 느꼈던 제한된 존재가 지적인 지각작용의 대상이 되는가? 이것이 우리가 그 존재에서 비규정적인 존재의 관념을 적용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런 필연성과 불가능성에 의해, 즉 우리가 있으면서 사물들을 인식한다는 것에 대해 일련의 필연성에 의해, 그리고 우선 사물들이 존재들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하면 사물들이 존재를 사유에 의해 통합하지 못한다면, 사물들을 인식한다는 것에 대해 일련의 불가능성에 의해, 존재는 유한한 사물들에 적합하다. 또한 존재의 본질은 감각적 실재성들과 혼동되지 않는다. 그 본질은 단지 그 실재성들에 통합되고, 그 실재성들을 지식가능하게 한다.” 이런 종류의 통합은, 마치 플라톤의 참여(la participation)처럼, 체계의 진실한 모호함을 만들고, 그 통합은 범신론을 회피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데아에서 표출되는 본질은 유한한 사물들이 중요한 한에서 실재성으로부터 구별되어 항상 남아있기 때문이다.” (785)
존재의 관념이 인식에서 규범으로 이용되는 것처럼, 관념은 또한 품행의 규칙이다. “존재들은, 그것들이 …이다[있다]는 정도에서 좋다[착하다]. 윤리학은 존재의 이론의 파생명제(un corollaire, 따름정리)일 뿐이다… 각 대상은 그 자체적으로 그것의 본질 속에서 내속하는 질서를, 즉 그것의 부분들과 그것의 성질들의 필연성을 규정하는 질서를 소유하고 있다 … 존재의 인식은 우리를 존재의 선성(善性 sa bonté)과 그것의 가치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한다.”도덕성은 존재의 사랑 안에 있으며, 정언명법은 또한 스스로 진술될 수 있다. 존재를 사랑하라, 그것이 너의 오성에게 제시하는 질서 속에서, 마치 너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처럼 사랑하라. 따라서 로스미니는 의지의 자치로부터 나온 칸트의 주제에 반대이다. 거기에서[칸트의 주제에서] 그는, 그가 그 인식이론 속에서 고발했던 것과 동일한 주관주의를 발견한다. 강제(l’obligation, 의무)는 행위자의 외부 원리에서만 올 수 있다. 도덕적 잘못(le mal moral)은 마치 우리 존재의 변질(la dénaturation)의 일종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로스미니 철학에서 말브랑쉬의 영감을 쉽게 재인식한다. 이 영감은 이탈리아에서 추기경 제르딜(Gerdil, 1718–1802)의 철학에 이어진다. (785) (57SME)
2절 지오베르티 Gioberti 785
지오베르티(Vincenzo Gioberti, 1801-1852)는 로스미니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 나라에서 정치적 삶에 참여했다. 1825년에 신부 서품을 받았으며, 1833년에 공화주의적 사상들 때문에 추방되었다.그리고 그는 파리로 가서, 거기서 그는 여러 출판업자들(les publicistes, 언론가들)과 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우선 람네의 한 신념가의 말투들(Paroles d'un croyant, 1834)에 열광하였으며, 마찌니(Mazzini, 1805-1872)의 친구인 그는 조금씩 입헌적 군주제의 생각으로 이어갔다. 그는 람네의 철학의 소묘(Esquisse d'une philosophie, 1846)를 버렸다. 그는 삐에몽(Piemont, it. Piemonte)에서, [삐에몽 왕국이] 이탈리아의 미래 연방의 선두가 되어야 하는 국가임을 보았다. 1847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1848년 말에 두 달 동안에, 삐에몽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의 찰나에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1798-1849, 재위 1831-1849)의 수상(제1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785)
지오베르티가 생각하기를 “‘존재론적 민족들(les nations ontologiques)’만이 영웅주의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민족들만이 위대한 진리들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살아있으면서 알고 그리고 이들 자체를 위해 숭고한 희생들로 부과되는 필요에서 안다.” [이 민족들은] 존재론적인 민족들이며, 말하자면 존재의 우선성을 인정하면서, 정신의 모든 지위로부터 독립적으로 있다. 마치 강제로 부과된 하나의 자료(une donnée)처럼 말이다. [이들은] 이런 경향성의 적들인데, 이 경향성은 거의 모든 근대 철학의 것이며, 즉 루터파의 자유로운 시험 속에 그것의 뿌리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데카르트인데, 그는 위대한 회의주의자,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몽상가이며,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위에 토대를 세우면서 여러 세기의 철학을 퇴보시켰다. 이 코기토는 정신이 자기 스스로를 제안할 수 있다고, 또한 신을 제안할 수 있다고 믿도록 이끌었다. 데카르트는 우주의 제작자 그 자체를 마치 그의 활동성의 산물인 것처럼 간주하는 심리학주의[영혼학주의]로, 즉 믿을 수 없는 광기로 이끌었다. (786)
이러한 길에서, 지오베르티는 로스미니보다 더 멀리 나갔다. 그것은 이상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은 우선 이상적 존재의 직관이다. 그러나 또한 실재적 온존재이다. 이 온존재(l’Etre) 만이 거대하고, 절대적이고 변질하지 않는 존재일 수 있고, 말하자면 신일 수 있다. 그 존재(l’être)는 마치 로스미니에게서처럼, 그에게서도 단순한 규범 또는 표본(modèle)이 아니다. 그것의 활동성은 창조적 원인성이다. 인식은 스스로 만들어지는(se faisant) 창조를 파악하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인식에게 오직 인상을 주장할 수 있는 창조적 원인의 관념을 결합하지 않고서, 하나의 감각적 사물이 현존한다고 결코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념을 삭제하는 순수 영혼주의는 회의적 주관주의에 이를 것이다. 인식은 감관에 의해서도 지성에 의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부딪힐 것이다. 초지성적인 것, 즉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럼에도 그것의 현존은 확실하다. 지오베르티에 따르면 (그는 플로티노스와 다마스키우스를 알지 못한 것 같다.), 어떠한 철학자도 자기에 관해 비춰보지(sepeculer) 못했다. 초지성적인 것은 한계가 있는 인간적인 지성적인 것과 [한계가 없는] 신적인 것 사이에 차이다. 이것은 사물들의 불가사의한 토대, 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토대이다. 이것은 칸트의 누메논이며, 이법[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초합리적 역량의 대상이라는 차이를 갖는다. (786)
초지성적인 것의 용어는 지오베르티에게서 신학적 합리주의의 비판에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 이 시대의 많은 예들을 이미 만났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이고, 불가사의적이고, 계시의 용어를 위협하는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방어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샤또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과 몽딸랑베르(Montalembert, 1810-1870)는 종교적 진리가 이법을 받아들일 수 있게 시도하는 것이 잘못이다. 게다가 지오르베티는 초자연을 표현하는 교리들[독단들]이 마치 완성되어 결정적인 진리들처럼 주어진다고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교리와 문명의 상태 사이에 항구적으로 균형을 정립하는 신학의 연속적인 발전을 원했다.“전통은 삶이다. 그런데 삶이 산다는 것을 그친다면, 삶은 무용하다.” (787) (57SME)
3절 마찌니 – Mazzini 787
이 세기의 전반기에 이탈리아에서 퍼졌던 지적인 전율은 마찌니(Giuseppe Mazzini, 1805-1872)에게서도 느껴지게 되었다. 그는 1849년에 선언했는데 프랑스 원정대에 의해 몇 개월 만에 끝났지만, 로마 공화정을 지배했던 마치 삼두체제의 한 사람처럼 알려졌다. 프랑스 원정대는 교황권을 복원하고자 했다. 마찌니의 사상 속에는, 훨씬 더 적은 신비주의와 훨씬 더 많은 활동성과 더불어, 폴란드 메시아주의의 영감에 유사한 영감이 있었다. 그에게서 이탈리아 정치적 통일은 민족적 이기주의의 만족에 있지 않았다. 민족은 개인과 인류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매개일 뿐이다. 민족적 독립이란 세계[우주]에 쓸모 있어야만 한다. 그는 개체주의와 마찬가지로 전통주의에도 적대적이다. “개체성, 즉 개인적 의식에 호소는 무정부체제로 이끈다. 사회적 관념, 즉 오직 전통에만 호소는, 개인적 의식의 직관에 의하여 전통을 해석하기 위한, 또한 미래로 향하여 이렇게 인간을 밀고 나가기 위한, 항상적인 노력이 없다면, 그 호소는 전제군주제로 그리고 침체기로 인도한다.” 따라서 마찌니는, 진보 속에 과거의 모든 단계들을 간직할 것이라는 진보의 관념을 옹호한다. 그리스-로마의 고대 시대가 역사 속에서 도입했던 자유, 마치 크리스트교처럼 보편주의 종교와 더불어 태어났던 인간의 평등, 프랑스가 1789년에 실천적으로 시도했던 형제애[동포애, 박애],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 혁명에 의해 요약되었던 역사의 세 가지 단계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들의 개인주의는 이제 불충분하다. 마찌니가 생각하기를 권리는 의무에 의존한다. 그리고 의무는 방어의 부정적인 의식의 국면 하에서만 개별적 의식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의식은 자기의 본능들을 증빙하기 위하여 규칙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인류의 이법[이성]이다.” (인간의 의무들(Devoirs de l’Homme, 1860); 전집, XVIII, 41). 어려운 점은 두 힘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개체의 의식은 성스럽다. 인류의 공통적 동의도 성스럽다. 서로 서로 상의하기를 무시하는 자는 진리의 인식에 본질적인 수단으로부터 박탈되어 있으며… 하나는 다른 하나의 검증작업이다.” (같은 책, 38-39). 개인적 활동성 없이, 인간의 요구들과 성향들 없이는, 추상적이고 무기력한 원리들만 있다. 개체들과 민족성들(이것들 또한 인격들이다)은 인류성에 삶을 부여한다. (788)
마찌니의 학설은 로스미니와 지오르베르티의 학설들과 동일한 소리를 낸다. 이탈리아 정신은, 세 사상가들이 증거 하는 대로, 순수하고 단순한 내재성의 학설들에게 적대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정신은 개체보다 우월한 실재성의 관념에 결합되어 있다. (788)
(5:07, 57SME)
*
# 참고문헌 Bibliographie 788.
I.
Rosmini(1797-1855), Opere, éd. E. Castelli, Rome-Milan, 1934…; Scritti autobiografici inediti, éd. E. Castelli, Rome, 1934.
M. F. Sciacca(1908-1975), Opere complete, vol. 3 et 4. Milan, 1958.
R. Jolivet(1908-1975), De Rosmini à Lachelier, 1953.
Atti del Congresso internaxionale di filosofia Antonio Rosmini, 2 vol., 1957.
II.
Gioberti(1801-1852), Opere, éd. nazoonale, E. Castelli, Millan, 1938…
G. Bonafède(1910-1995), V. Gioberti e la sua evoluzione politica, 1952.
G. de Crescenzo(1930-?), La Fortuna di Vicenzo Gioberti nel mezzogiorno d’Italia, Brescia, 1964.
III.
Mazzini(1805-1872), Scritti editi et inediti, Imola, 8 vol., 1940…
T. Grandi(1884-1981), Apunte di bibliografia mazziniana, Milan, Turin, Genève, 1961.
E. Morelli(1913–1995), G. Mazzini, Rome, 1950.
G. Calogero(s.d.), Il pensiero filosofico di G. Mazzini, Brescia, 1937.
Settimana mazziniana, Congresso nazionale, Genève, 1947. [1946, 7-9 mars. Gênes]
*
1797 로스미니(Antonio Rosmini, 1797-1855), 이탈리아 신부, 종교 수도원 같은 자비(慈悲) 학당 설립, 사회 정의 개념 선구자. 이탈리아 자유카톨릭 인물,
1801 지오베르티(Vincenzo Gioberti, 1801-1852) 이탈리아 철학자, 정치가.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의 이론가, 활동가.
1805 마찌니(Giuseppe Mazzini, 1805-1872), 이탈리아 혁명가, 애국자. 이탈리아 통일의 실현을 위한 투쟁한 열렬한 공화주의자.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 엠마뉘엘 2세(Victor-Emmanuel II, 1820-1878), 카브르(Camillo Cavour, 1810-1861)과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1884 그란디(Terenzio Grandi, 1884-1981), 이탈리아 왕국의 편집자, 작가.
1891 졸리베(Régis Jolivet, 1891-1966), 프랑스 신부, 철학자. 크리스트교 현존주의에 대해 여러 작품이 있다.
1908 스키아카(Michele Federico Sciacca, 1908-1975), 이탈리아 철학자. Interpretazioni rosminiane, 1958.
1910 보나페데(Giulio Bonafede, 1910-1995) 이탈리아 왕국의 대학교수.
1913 모렐리(Emilia Morelli, 1913–1995), 이탈리아 왕국의 여성역사학자. 대학교수.
1930 크레센쪼(Giovanni De Crescenzo, 1930-) 이탈리아 철학자.
?-? 칼로제로(Giuseppe Calogero, s.d.), 이탈리아 연구소 연구자. (57SMD)
(6:06, 57S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