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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면 이렇게 목마름을 지속시키면서 ‘모를 뿐’ 모른다, 라고 하니까 제가 하는 설법을 들을 때도 설법을 이리저리 짜 맞추고 짜 맞춰서 ‘아 이 얘기구나.’ ‘저 얘기구나.’ 이제 이렇게 듣기보다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냥 모르겠다. 모르는 마음으로 듣다보면 그냥 모를 뿐이라는 어떤 감옥에 그냥 콱 갇힌 사람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생각이 그냥 멍청한 바보처럼 생각이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듣게 되는 순간. 그냥 듣는다는 거지요,
해석하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게 되지요. (죽비를 치며) 이것이 부처다. 라는 얘기를 (죽비를 치며) ‘이게 왜 부처지?’ (죽비를 치며) ‘저 소리를 듣는 내가 부처라는 얘기인가?’ ‘아님 저 소리자체가 (죽비를 치며) 부처라는 얘긴가?’ ‘아니면 저 소리를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얘기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해석하고 애쓰는 유위적인 조작이 시작되다가 어느 순간 이게 부처다.
라고 할 때 맥이 확 풀려서 모르겠다. ‘내가 저 뭔 소린지 내가 어찌 아노, 도대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그냥 절망해야 된다는 거지요.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구나. 라고 해서 탁 절망을 해버려야 되는 거지요. 마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방법이 나를 깨닫게 해줄 거라고 생각하고서 6년 동안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를 선정주의 수행법, 고행주의 수행법을 엄청나게 닦아가다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구나.
이 수행법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수행법이 나를 깨닫게 해주지 못하는구나. 이 수행법만 닦고 나면 깨달음을 얻을 거다. 라는 어떤 알음알이가 있을 때는 그 수행법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이걸 다 포기해버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행을 하다 보니까 ‘나중에 깨달은 거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도 고행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때 막 장좌불와를 하고 막 몇 천 배를 하듯이 고행을 해야지만 깨닫는다, 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건 부처님 세계를 전혀 잘못 아는 거지요. 그러면 그 앞에 선정주의를 하다가 선정주의는 아니다, 라고 생각해서 딱 포기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포기하라는 얘긴데 사람들은 부처님도 선정주의 한 것처럼 우리도 선정을 일단 닦아야 돼.
그래서 부처님이 올라간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가야 그다음 단계로 깨달음이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하는 게 이 돈오라는 말입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끝까지 막혀 있다는 거지요. 알 것 같은 마음이 완전히 조복됐을 때. 야, 난 계속 처음에는 법문 들으면 알겠지, 알겠지 하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 이거 아는 게 아니구나. 알 수가 없구나. 나는 정말 일도 모르겠다.
그래서 탁 포기가 되고 절망이 될 때 그럴 때가 공부가 되고 있는 공부가 되고 있는 건데.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으로 봤을 때는 공부가 전혀 안 되고 있는 것 같은 갑갑한 그 순간이 사실은 되고 있는 건데. 그 순간은 공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지요. 그냥 절망감밖에 안 들지요. 그게 공부라는 거지요. 그렇게 모르고, 모르고 모르던 순간을 겪으면 분별심이 딱 가로막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전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깨달으려고 애쓰는 순간에는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애쓰는 순간에는. 그런데 그냥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몰록 찾아온다. 그래서 정문에 띵동 계십니까? 이러고서 깨달음이 찾아오는 건 없다. 도둑처럼 찾아온다, 그럽니다. 정문으로 들어오는 건 진짜로 도가 아니다. 도둑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을 딱 떠보니 갑자기 도둑이 와서 칼을 딱 대는 것처럼.
순간 그냥 갑자기 눈을 딱 뜨게 된다는 거지요. 몰록 돈오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자기 성품을 확인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해서 돈오에는 뭐 이견이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당연 이제 깨달음은 돈오로서 찾아온다, 라고 하는데. 돈오이후에 점수냐 아니면 돈수냐. 이제 이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돈오점수 돈오돈수 논쟁인데.
이것도 이제 깨달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테면 깨달음의 입장에서 본다면 돈오돈수라고 할 수 있고. 중생의 입장에서 본다면 돈오점수라는 표현도 방편으로 쓸 수는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에 다르지 않는 것이지요. 돈오돈수라는 말은 자기 성품을 확인하고 나면 돈수, 몰록 닦은 것도 끝난다는 겁니다. 닦을 게 없다는 겁니다. 본래 닦을 게 없었던 것처럼 수행이 따로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몰록 자기 성품을 확인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와 똑같은 자리다. 더 이상 닦아갈 필요가 없고 그게 바로 부처다. 그 이상은 없다는 거지요, 끝. 그 이상은 없다. 그게 돈오돈수입니다. 그게 맞는 얘기고요. 그런데 중생들은 오랜 습이 있다 보니까 오랜 습이 있다 보니까 몰록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을 정말 깨달음의 여운이 남는 정말 막 환희심 나는 순간들.
뭐 그런 순간들이 때로는 가볍고 막 정말 환희심 나는 그런 순간들이 사람에 따라서 뭐 몇 주가 계속되기도 하고 몇 달이 계속 되기도 하고. 뭐 어떤 사람은 일 년 가까이 계속되기도 하지만 감정적으로 막 환희심 나는 이런 느낌은 왔다가 가는 겁니다. 그게 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막 환희심이 날 때 이게 법인 줄 알고 아 환희심 속에 계속해서 있는 게 법인 줄 아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왔다가 환희심은 가버립니다. 그러니까 다시 분명히 내가 깨닫긴 한 거 같은데 놓쳤다. 이제 이런 표현들을 수많은 영적인 특히나 인도 승자들 이런 사람들도 많이 쓰고 그런 경험들을 누구나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치 이것과 같은 거지요. 군 생활하는 장병들 혹은 교도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이 한 10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0년이 다가와요.
그래서 10년이 딱 되던 날 출감을 합니다. 뭐 군인들이 2년 군 생활하고 제대하던 날 그날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 날은 정말 세상 다가진 것처럼 기쁘지 않겠어요. 그 환희심이 난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환희심이 계속 평생 갑니까? 제대한 환희심이 평생 가나요? 여러분들은 보살님들은 잘 모르실 수 있겠지만 병사들한테 물어보면 뭐 한 하루 이틀이라 그래요. 잠깐 술 먹고 신난 데요.
몇 칠 지나고 나면 이제 현실적인 어려움이 나를 콱 쪼여오는 거지요. 예비역인데 지금까지 또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할 수도 없고 돈 달라하니 미안하고. 그러려니 뭔가 내가 공무원시험 준비할 테니 6개월만 봐주십시오. 그러고 이제 막 그럴 수 있겠지만. 그러면서 이제 공부와의 싸움 막 그다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삶에 대한 어떤 고민이 시작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즐거움은 잠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처럼.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다시 분별심이 생겨난다는 거지요. 그리고 매순간 분별심이 언제나 일어나니까. 그런데 그 분별심에 끌려가다가 아차 하고 다시 또 이 자리로 돌아오고.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을 경험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많은 영적인 스승들의 가르침이나 책들을 보면 이렇게 왔다 갔다 한다는 얘기들이 많아요.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이 자리 들어왔다 또 나갔다 왔다 갔다 한다.
그런 어떤 경험이 있다 보니까 깨닫고 나면 출세간을 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즉 이 법의 자리에 있을 때는 참 편하고 좋은데. 세간 속으로 들어가면 또 싫은 거지요. 옛날에 그 분별 망상하던 그 시기로 돌아가기가 싫고 막 치가 떨리게 그건 싫고 이 자리만 좋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탁 깨달음을 얻고 나면 일순간 어느 순간 동안은 세상을 막 개입하기 싫은 거 같고 세상에서 좀 떨어지고 싶고
혼자서 좀 조용히 있는 시간이 좋고 이런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뭐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 그런 시간을 보내지만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은 또 합니다. 할 건 하고 그러나 내가 쉬는 시간에 최대한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막 애를 쓰는 시간을 보내는 거지요. 그래서 자식하고 노는 것도 귀찮고 뭐 남편은 아내와 지내는 것도 귀찮고 회사 가는 것도 사실은 좀 귀찮고
그런 어쩔 수 없이 그냥 하긴 하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다가 그러다가 이제 이 불이법이라고 해서 법과 법 아닌 것이 있다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던 순간이 있다가 다시 참된 불이법에 딱 계합한다. 그러면 이제 ‘아 이제는 내가 법에 있던 세간에 있던 둘이 아니구나.’ 세간 일을 그대로 하면서도 아무런 부담이 없고 아주 가벼워지는 그런 또, 또 다른 어떤 체험의 길로 들어선다는 거지요.
이런 것이 어떤 사람은 견성 이후에 뭐 한 번 더 오기도 하고 약간 전환의 시기 같은 것이 또 어떤 경우는 한두 번 또는 한 세 번 정도까지 이렇게 겪어가면서 그런 어떤 정착하는 완전히 깨달음의 세계에 딱 뿌리내리는 그런 어떤 보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견도 수도 법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뭐 금강경이나 초기불교에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뭐 이런 식의 표현도 한 거 같은데.
그것은 어쨌든 일단 견성하는 것이 먼저고 그 이후에 보임하는데 있어서 이 분별, 습을 조복 받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 시간은 뭐 보통 10년에서부터 뭐 한 30년 걸린다는 표현도 쓰고 그래서 육조 스님에게도 오조스님이 육조를 준 다음에 바로 와서 설법을 하거나 이러지 말고 좀 충분히 익혀, 라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사냥꾼 속에서 한 십몇 년을 보내다가 이제 돌아온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처럼 이렇게 오래 보임의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그 보임의 시간을 굳이 중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걸 닦아가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걸 점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점수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점수라는 것은 습을 조복 받는 거지 깨달음을 더 완성시키는 건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돈오돈수가 맞다. 그러니까 돈오돈수가 맞느냐? 돈오점수가 맞느냐? 을 가지고 싸울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지요. 다음에 보면,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그대의 스승은 대중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지성(志誠)이 답했다.
“늘 대중들에게 ‘마음을 쉬고, 고요함을 관찰하며, 오래 앉고 눕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육조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을 쉬고, 고요함을 관찰하려는 것은 병(病)이지 선(禪)은 아니다. 오래 앉아서 몸을 구속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게송을 들어 보라.
살아서는 앉느라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더럽고 냄새나는 송장 같은 몸을 어찌해 본들
어떻게 공부가 될 수 있겠는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p146)
이 지성이 이제 신수 스님의 제자였어요. 그런데 북종선의 그 신수 스님께서는 신수 스님의 제자들과 육조스님의 제자들끼리는 서로 헐뜯고 싸우기도 하고 이랬다고 그랬는데. 법을 막 빼앗으려고 애쓰기도 하고 이랬다고 그러는데. 정작 신수 스님은 그 육조 스님을 좀 뭐랄까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저 분이 진짜 법이 있다, 라는 것을 마음속에 인정을 하고 또 이런 모습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수 스님께서 신수 스님 제자에게 내가 직접 저 남쪽에 가서 혜능에게 법을 배우기는 좀 뭐하니 존심도 있고 그러겠지요. 제자였던 지성 스님을 몰래 혜능 스님한테로 가서 혜능이 도대체 뭘 가르치는지 어떤 가르침을 가르치는지 좀 배워가지고 나한테 와서 좀 알려줘라. 이렇게 해서 지성스님을 보냅니다. 보냈더니 이제 보냈다, 라는 걸 알고 나서 이제 육조 스님이 지성에게 물은 것이지요.
“야 그러면 너희 스승 신수스님은 너한테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고 묻는 거지요. “제자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느냐?” 했더니 지성이 얘기했습니다. 이게 신수 스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했고 육조 스님의 등장은 어찌 보면 불교의 어떤 전면적인 아주 완전 바른 불교로 돌아감, 이런 거거든요. 기존의 보편적으로 행했던 불교가 이런 불교를 행했다, 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지성이 뭐라고 했냐면. 늘 대중에게 마음을 쉬고 고요함을 관찰하고 오래 앉아 눕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게 장좌불와, 오래 앉아서 눕지 마라. 장좌불와 해서 딱 앉아가시고 마음을 쉬고 번뇌 망상을 쉬고 번뇌 망상을 쉰 채 그 고요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라. 이걸 가르친다는 거지요. 좌선관심이라고 해서 이처럼 이 당시도 오래오래 앉아있는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하는 좌선하는 이 불교가 뭐 거의 보편적이었습니다.
그게 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지요. 육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쉬고 고요함을 관찰하려는 것은 병이지 선은 아니다. 제가 한 얘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병이라고 했더니 몇 분이 인상을 쓰면서 혹은 웅성 웅성거리는 것도 초기에는 좀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병이라고 제가 그랬더니 저도 그때 ‘내가 좀 심했나?’(웃음)
그것만이 최고라고 이렇게 알고 왔던 분들에게 그건 병이라고 하면 이게 왜 병이야. 이게 수행이지. 이게 최고의 수행이었는데 이걸 병이라고 하니 ‘저 나쁜 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육조 스님이 얘기하시잖아요. 마음을 쉬고 고요함을 관찰하려는 것은 병이지 선이 아니다. 오래 앉아서 몸을 구속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게송을 들어 보라.
살아서는 앉느라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더럽고 냄새나는 송장 같은 몸을 어찌해 본들
어떻게 공부가 될 수 있겠는가?
송장 같은 몸뚱어리를 어떻게 해 논다고 해서 그게 무슨 법이 있느냐. 이 공부는 마음공부지 몸 공부가 아니거든요. 요 바로 뒤에 육조 혜능 스님의 게 나오면 바로 진도가 끝나면 이제 마조의 일화가 나오는데 마조 일화에도 같은 얘기가 아주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앉아 좌선하는 마조한테 그 남악회양(南岳懷讓)스님이 가서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옆에서 기왓장을 막 간 거지요.
그러니까 시끄러우니까 아 이 사람 왜 내 앞에서 이러나 싶어서 뭐 하십니까? 이랬더니 아니 그 벽돌을 갈아서 거울로 만들려고 그런다. 아이 그 천 년 만 년 간다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덥석 물고서는 너는 그럼 그렇게 천 년 만 년 앉아있는다고 부처가 되겠느냐.(웃음) 앉아서 부처가 될 수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라고 했더니 이런 얘기를 하지요.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지 가겠느냐? 수레를 때려야지 가겠느냐? 소를 때려야지 가잖아요. 그런데 소는 마음이고 이것을 끄는 원동력이 마음이고 이 몸뚱어리 끄는 거 마음이잖아요. 이 몸뚱어리인 수레를 때려봐야 수레가 가겠느냐? 소는 가만히 편하게 누워 자고 있는데. 수레를 아무리 때려도 소가 이 소 수레가 가지 않는 것처럼.
몸을 아무리 애써서 몸을 가지고 뭘 해본들 좌선을 한들 그게 되겠느냐? 그래서 넌 좌선을 하려고 하느냐? 좌불을 배우려고 하느냐? 앉아있는 부처가 된들 그게 진정한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이런 이제 힐책을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선어록에 보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앉아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나쁘다, 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풍토가 앉는 것만이 최고다,
라고 해서 집착해 있기 때문에. 앉는 거 아니면 공부가 아니다, 라고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앉는다, 라는 데 치우쳐있는 분들을 깨주기 위한 약을 쓴 겁니다. 약을 쓸 때는 약에는 독성분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멀쩡한 사람이 약을 먹으면 큰일 나요. 오히려 병이 됩니다. 그러니까 앉는 거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이 독을 쓰는 거지요. 그 병이야, 차라리.
이렇게 얘기한 건데 평범한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얘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앉는 거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잖아요.(웃음) 장좌불와 뭐 일주일씩 장좌불와 해보셨습니까? 장좌불와 엄청나게 하거나 앉는 걸 너무너무 열심히 해보지 않은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병이라고까지 할 필요가 없어요. 이런 약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뭐 우리는 적당히 앉아있는 거 아주 좋은 공부입니다.
염불도 하고 진언도 하고 하는 거 다 괜찮은 공부인 것이 방편으로써는 어느 정도의 공부가 되도록 해주는 방편으로써는 아주 훌륭합니다. 왜냐 하면 번뇌 망상, 분별심이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법문을 아무리 들어도 이 분별심이 조복이 안 돼요. 계속 생각이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염불이든 뭐 다라니든 아니면 좌선이든 생각을 그거 하나에 딱 집중해서 생각을 딱 하나로 매진하는 이게 하나의 삼매거든요.
하나에 집중해서 호흡에 집중하든지 해서 생각을 잠시 쉬어보는 공부.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어느 순간 생각이 좀 많이 쉬게 되는 공부가 조금씩, 조금씩 되거든요. 그러니까 습이 생각만 따라가든 습이 조금씩 생각을 내려놓는 습으로 바뀌어가기 때문에 일정부분의 도움은 분명히 됩니다. 그러나 과도하게 이거 아니면 절대 안 된다, 라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다시 말하면 충분조건까지는 아니고 그냥 뭐 필요조건 정도는 될 수가 있겠지요. 이것을 안 하면 절대 안 되는 건 아니지요. 선택사항 정도. 좌선을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은. 좌선이 적어도 안 맞는 사람들도 가끔 있긴 있어요. 혹은 몸이 안 좋은 사람은 디스크가 있다든지 이런 사람은 오래 앉아있고 이러기 힘들 수도 있거든요. 그럼 또 의자에 앉아서 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과도하게 이렇게 막 할 필요는 없지만 잠시, 잠시 내가 하고 싶을 때 이렇게 한 30분이든 20분이든 한 시간이든 이렇게 앉고 싶을 때 잠시 앉아있는 것들은 당연히 많은 일반 중생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그 당시 너무 좌선에만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약을 주느라고 이렇게 극단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만약 자기의 성품을 깨닫는다면 깨달음과 열반도 내세우지 않고, 해탈지견(解脫知見)도 세우지 않는다. 가히 얻을 만한 한 법도 없어야 온갖 법을 세울 수 있다. 이 뜻을 이해한다면 그를 불신(佛身)이라고 해도 좋고, 깨달음, 열반, 해열지견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다. 견성한 사람은 법을 세워도 되고 세우지 않아도 된다. 가고 옴에 자유롭고, 머묾이 없고 막힘이 없다. 상황 따라 즉각 행동하고 반응하며, 온갖 질문에 마음껏 답변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47, p148)
즉 이 성품만 깨닫는다면 성품을 깨닫고 나면 그 성품을 깨달은 자리에는 깨달음도 없고 중생도 없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고 그 어떤 것도 붙을 자리가 없다. 사실은 깨달음이라는 것, 열반이라는 것은 중생에게 상대해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중생에게 ‘야 너 이렇게 힘들고 괴롭지.’ ‘괴로움이 지금 너를 묶고 있다.’ ‘너 스스로 만들어낸 분별심이 너를 묶고 있잖아.’
‘그 묶인 것에서 이렇게 벗어날 수 있어.’ ‘너 스스로 이렇게 자승자박으로 묶어놓은 그 묶인 포승줄을 끊고 나올 수 있어.’ 이 묶인 줄에서 벗어난다, 라는 게 해탈이거든요. 그러니까 벗어날 수 있어.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이름 해. 하고서 이 이상 벗어나는 상황. 벗어날 수 있다, 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해탈이라는 임시방편의 약을 쓴 것이지.
중생이 따로 있고 해탈이 따로 있어서 내가 해탈이라는 뭔가를 쟁취해야 되는 뭔가가 아니라는 거지요. 중생에게 방편으로 부처라는 방편을 쓴 것이지. 중생이 사라지면 부처도 사라집니다. 중생이 있을 때만 방편으로 부처도 내세우는 것일 뿐이지. 부처, 열반, 해탈이라는 것도 임시방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세우는 것이지 부처라는 뭔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이라는 뭔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냥 텅 빈 공이라고 하듯이. 그냥 아무 일이 없어지는 것이지. 내가 부처가 되는 게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부처도 되지 않고 중생도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공부이지. 중생을 버리고 부처로 가려고 하면 그건 이법이거든요. 둘로 나누는 분별법입니다. 내가 부처에게로 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노력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미 있는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 중생인 줄 착각하고 살던 사람에게 ‘아 착각만 버리면 이미 부처구나.’ 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이 공부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본래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구나.’ 라는 사실에 눈뜨는 것이지요. 그래서 깨달음, 열반, 해탈지견 이런 거 내세우지 않는다. 해탈의 안목, 해탈지견 이런 것도 내세우지 않는다.
가히 얻을 만한 한 법도 없어야 온갖 법을 세울 수 있다. 부처님은 뭐 내세울 만한 한 법, 한 진리 이것만이 절대 진리야, 라는 뭔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는데 중생들의 병에 따라서 그 중생들의 병을 없애주기 위해서 적재적소에 온갖 말도 하고 온갖 설법도 하고 온갖 법인 것처럼 보이는 방편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지요. 온갖 법을 세울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은 특정한 진리만 법이다, 라는 게 있으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을 거예요. 그 법을 집착하고 그 법에 고집해서 이 법을 그 사람에게 알려줘야 되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중생들의 번뇌 망상 중생들이 처해있는 괴로움 그것만 깨주면 끝나는 겁니다. 파사현정, 삿된 것을 파하면 저절로 헌정은 이미 있는 우리의 당연한 본래면목이니까.
본래 갖추고 있던 거니까. 삿된 것만 깨주면 되는 것이지. 본래 있는 것들을 다시 들어내주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부처를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는 이미 드러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번뇌 망상을 깨주기만 하면 될 뿐. 그래서 가히 얻을 만한 한 법도 없어야 온갖 법을 세울 수가 있고요.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를 바로 불신, 부처님의 몸이라고 하고, 해도 좋고 깨달았다고 해도 좋고
해탈 열반 해탈지견이라고 해도 좋고. 그래서 견성한 사람은 법을 세워도 되고 세우지 않아도 된다. 자유자재로 세워도 괜찮고 세우지 않아도 괜찮고. 임시방편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와. 하기 위해서 잠시 세워서 방편의 진리를 세워서 이렇게 가게 해준 다음에 오면 다시 이건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해서 세웠다 무너뜨릴 수 있지요. 그러니까 세워도 되고 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껏 입하자재, 그래서 뭐 세우는 것과 깨뜨리는 것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것이지요. 가고 옴에 자유롭고 머묾이 없고 막힘이 없다. 상황 따라 즉각 행동하고 반응하며 온갖 질문에 마음껏 답변한다. 뭐 간다 온다. 뭐 이런 막힘이 없지요. 그 어떤 삶에도 완전히 막힘이 없이 상황 따라 그저 즉각 반응할 뿐. 상황 따라, 그 상황 나에게 주어진 상황. 삶 , 나에게 주어진 삶.
이것이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에 미래에 특정한 상황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상황을 그리워하지 않고 추구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지금 이대로 벌어지는 이 삶에 뿌리내리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즉각, 즉각 반응할 뿐. 배가 고프면 먹고 사람이 물어보면 답을 해주고 반응 안 하는 것은 아니지요. 인연 따라 인연은 받아들이고 집착은 놓아버려라
하면서 인연 따라 그대로 즉각, 즉각 삶을 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도 어긋남이 없다. 온갖 질문 있으면 거기에 맘껏 답해줌으로써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번뇌 망상을 다 깨뜨려주는 것이지요. 다음은 영가현각(永嘉玄覺) 스님의 그 혜능 스님의 제자이고요. 영가현각(永嘉玄覺) 스님이 증도가(證道歌)라는 책을 썼고요. 몇 구절을 제가 좀 따와 봤습니다. 유명한 첫 번째 구절입니다.
절학무위한도인 부제망상불구진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움이 끊어진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52)
배움이 끊어졌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한가한 도인,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고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자기 성품을 확인하고 자기 공부를 마친 이런 한가한 도인은 한도인이라 그럽니다, 한도인. 한가하게. 그래서 절에 가면 ‘한주’라는 직책의 스님들이 있어요. 한주는 사실은 직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한주가 상당히 어른 스님이에요, 사실은. 한가한 주인공이에요.
한가하게 노는. 한주는 그냥 한가하게 노는 사람이에요. 한가한 사람. 할 일이 없는 사람. 제일 쉽게 말해서 공부가 되어 있는 스님들을 한주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배움이 끊어진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이렇게 딱 공부에 뿌리내린 사람은 망상도 끊어 없애지 않고 그렇다고 참됨도 구하지 않지요. 끊어 없앨 망상도 없고 망상이 일어나는데도 망상이 없고 또 참됨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됨은 불생불멸하게 이미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불성이나 신성은 언제나 우리에게 구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따로 추구할 필요가 없다.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면 바로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추구하는 마음이 바로 분별심이기 때문에. 중생심이기 때문에. 추구하면 없고 추구하지 않으면 언제나 있다.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그래서 망상을 없앨 필요도 없고 참됨을 구할 필요도 없다.
무명실성 즉불성 환화공신 즉법신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
무명의 참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52)
무명이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무명의 본래 참된 성품이 곧 불성이다. 어리석음 우리는 어리석음이라고 하지만 어리석음이라는 온갖 어리석은 생각들 번뇌 망상들 그게 바다에서 일어난 파도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생각 자체가 바로 불성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각의 뿌리가 그대로 불성이고 생각의 뿌리가 그대로 자성이다. 생각을 없애야만 불성을 취득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자체가 불성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파도가 그대로 바다라는 사실을 아는 거지 파도가 칠 때마다 파도를 싹 잘라가지고 없애서 버리고 또 다음 파도가 치면 또 싹 잘라서 파도를 없애 버리면 말도 안 되는 거지요. 그것이 그대로 부처구나. 그대로 바다구나, 라는 사실을 그냥 확인하는 것일 뿐이지요. 허깨비 같은 이 빈 몸 이 육신이라는 이 몸이 곧 법신이다. 법의 몸, 이 진리의 몸이다. 삼라만상 두두 만물에 모든 존재, 존재들이 그대로 다 부처다.
법신 각료무일물 본원자성 천진불
(法身 覺了無一物 本源自性 天眞佛)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 152,153)
법신을 깨닫는데 법신을 깨닫고 나니 한 물건도 없어요. 근원 자성이 본래 천진한 부처였기 때문에 본래 우리의 자성이 본래부터 천진한 자연 그대로의 천진하다. 그냥 자연 그대로의 있는 그대로 부처일 뿐이었다. 법신을 깨닫고 났더니 깨닫는 것도 없고 법신이라는 것도 없고 근원이라는 것도 없고 자성이라는 것도 없고 천진불이라는 것도 본래 없던 겁니다. 한 물건도 없다.
무죄복무손익 적멸성중 막문멱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 莫問覓)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153)
우리는 죄가 있다고 여기니까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내가 했던 행동에 따라서 이것을 죄다 아니면 복이다. 이렇게 거추장스럽게 의식으로 지어냅니다. 그걸 이제 우리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지어낸 것을 공업이라고 하고 개별적으로 지어낸 걸 이제 자기가 지어낸 어떤 개인의 업이겠지요. 때로는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이 어느 나라에서는 복인데 어느 나라에서는 죄가 되지요.
일부다처제 국가에서는 보살님들이 많으니까 일처다부제 국가에서는(웃음)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데리고 사는 게 공부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죄지요. 나쁜 놈이지요. 아 나쁜 놈이 아니네요.(웃음) 이것처럼 인연 따라 어느 나라에서는 죄가 되는 것이 어느 나라에서는 복이 되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죄가 되는 게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도 하고.
한 여인에게 이 남자와 손을 붙잡고 뽀뽀를 하는 것은 복인데 모든 딴 남자와 손을 잡고 뽀뽀를 하는 것은 죄인 것이지요. 이처럼 죄와 복이라는 것 자체가 허망한 관념들이거든요, 관념들. 그런데 우리는 그 관념을 진실이라고 여기고 진짜라고 여겨서 거기 사로잡히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이 옳다, 라고 여기고 선은 복은 좇고 죄는 버리려고 애쓰고
그래서 복은 집착하고 죄는 막 버리려고 애쓰고 이러다 보니까 죄와 복이라는 두 개의 어떤 관념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둘 중에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려야 하는 취사간택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본래는 손해, 이익이라는 것도 본래는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났다가 빈 몸으로 와서 인생을 살면서 온갖 것들을 벌고 가지고 취하다가 또 죽을 때는 또 빈 몸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런데 이제 살아있는 동안 내가 취한 것들을 가지고 이익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래서 어느 때 많은 것을 취하면 이익이 많다고 여겼다가 또 그것이 사라지면 손해가 많다, 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마치 아파트를 샀는데 아파트가 10억까지 뛰었다가 나중에 갑자기 이게 한 7억으로 떨어지니까. 제가 실제 얘기를 들은 거중에는 옛날에 저∼ 몇 억 주고 샀데요. 그게 뭐 오르고 오르다가 한 30억 가까이 올랐다.
그러다가 나중에 떨어질 때 보니 20억까지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 분은 10억을 날렸다.(웃음) 10억을 손해 봤다. 이렇게 여긴단 말이지요. 10억을 손해 본 거는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지. 그게 오히려 10억을 손해 본 게 아니라 내가 한 5억 주고 샀다가 15억 이익 본 건데. 한 생각 돌이키면 이익이고 한 생각 돌이키면 이게 손해가 돼버려요.
이것과 비슷한 일들이 우리 인생에서는 정말 무수히 벌어지지요. 한 생각 차이로 이게 손해인지 이익인지 내가 내 견해로써 내 마음으로써 손해다 이익이다 하는 어떤 관념의 관념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제가 인도 같은 데 가보니까 정말, 정말 아무것도 없는,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냥 길거리를 떠도는 아기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리고 뭐 특히 네팔 쪽에 가니까 젊은 애 엄마가 애기를 안고 애기 손도 막 온 몸이 다 터있고 본인도 막 그렇게 있는 이런 분들이 이렇게 1달라 달라고 이러는 분들이 되게 많이 계시더라고요. 저는 그분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야 참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정말 복 받은 사람들이구나. 그냥 최저임금만 받아도 사실 그 나라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잘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최저임금 받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당연히 이제 못하겠지요. 왜? 더 많이 받는 사람과 비교하니까.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는 절대 비교를 안 하지요, 내 옆에 있지 않으니까. 이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뭐 복을 받았다. 또는 손해다 이익이다 이런 분별을 하고 있지만 본래 그런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잠깐 왔다가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여러분이 이익 봤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인생에 어느 순간에 잠깐 나에게 온 것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또 인생의 어느 순간은 반드시 떠나갑니다, 반드시. 결정코. 절대. 몸뚱어리도 떠나가고 물질도 떠나가고 돈도 떠나가고 자식도 떠나가고 남편도 떠나가고 모든 게 다 떠나갑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 모든 것과 이별을 해야 됩니다.
본래 이 세상에 올 때 네 거 내 것이 없이 그냥 이 세상에 온 거예요, 우리는. 그냥 공짜로 서울 땅을 사야지만 내 땅이 아니잖아요. 여기 여기서부터 여러분 원광사 4호선 1번 출구에서부터 원광사까지 걸어오는 길을 여러분이 돈 주고 사지 않았는데도 오고 싶을 때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데. 거기를 한 100평을 왔다 갔다 하는 길목을 사도 사니 거기 내가 맨 날 거기를 누워 잘 겁니까?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물론 뭐 월세도 받고 이럴 수 있겠지만.(웃음) 그 땅은 잠깐 그걸로 인해서 그걸로 인연으로 뭐 돈을 좀 받고말고 이럴 순 있겠지만 그건 영원히 내 땅이 아니지요. 내 땅이라고 그냥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그냥 생각해놓은 거지요. 같이 이렇게 어떤 설계한 것이지. 진짜 내 땅이고 네 땅인 것은 아니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잠깐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사라질 뿐이지 그게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딱 따져 묻고 찾지 말라. 죄나 복을 찾거나 손해나 이익을 찾거나 모든 것은 적멸해서 완전히 딱 끊어져서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적인 뭔가가 내세울 만한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린 손해와 이익 이런 두 가지로 분별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불구진부단망 요지이법 공무상
(不求眞不斷妄 了知二法 空無相)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으니, 두 법이 공하여 모양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무상무공무불공 즉시여래진실상
(無相無空無不空 卽是如來眞實相)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으니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53)
아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은 그 사람을 도인이라고 합니다.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아님도 없으니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 모양은 당연히 없지요. 그런데 모양 없는 세계를 깨달은 것을 공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런데 깨닫고 나면 공도 없습니다.
공이라는 것도 하나의 개념일 뿐이잖아요. 우리가 만들어놓은 공이라는 개념일 뿐입니다. 공도 없고 그러면 공이 없네. 하고 또 공이 없다, 라는 데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거지요. 공 아닌 것도 없다. 텅 비어서 일체가 본래무일물.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여래의 진실한 상없는 상이라는 것이지요.
학인 불요용수행 진성인적장위자
(學人 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53)
수행하는 것은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다.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냥 수행만 하려고 애쓰니까. 여러분이 분별심이 꽉 막히지 않은 채 천 년을 앉아서 좌선을 한다고 분별심이 없어지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공부해야 되는지를 제대로 모르고 분별을 가지고 막 애쓰면서 좌선을 아무리 오래 한들 그 좌선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른 법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바른 법문을 들으면서 있으면 좌선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은 염불대로 도움 되고 좌선은 좌선대로 도움 되고 다라니는 다라니대로 도움 될 뿐만 아니라. 길을 걷는 것도 도움이 되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도움이 되고 아들하고 캠핑을 가서 노는 것도 도움이 되고 모든 것이 공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순간에 항상 나도 알 수 없는 이 석연치 않은 마음을 품고 있거든요. 이를 테면 이게 어찌 보면 이제 하나의 그 화두 같은 방편을 쓴다면 여러분들이 하도 방법이 없다고 하니까 너무 막막해 하니까 굳이 화두 같은 방법을 쓴다면 그런데 이것은 약효도 있는 대신 모든 약은 독성분이 들어 있잖아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걸 제가 좀 싫어하는 이유는 방법은 좋은 효과적인 도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독성분도 함께 안고 있기 때문에 좀 위험한 겁니다. 원래 화두선 자체가 사실은 위험한 것인데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거예요. 위험한 줄 알면서. 굳이 화두선의 방식을, 이제 초기 화두선은 그래도 좀 순수했던 선인데. 그런 방식대로 여러분에게 좀 방법 아닌 방법을 말씀드린다면 어떻게 하면 도대체 염불할 때 다라니 할 때 절할 때 좌선할 때 길을 걸을 때 삶을 살 때 회사생활 할 때
모든 것이 공부가 될 수 있으니까? 일체법이 불법이라는 입처개진이라는 일체 모든 것이 일체 시 일체 처에 모든 것이 법이라는 모든 것이 이 하나의 법이라는 이 사실을 늘 뭐랄까 늘 마음속에 이렇게 품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늘 마음속에 챙겨라. 뭐 이런 식의 표현을 쓰면은 이걸 또 화두처럼 막 챙기고 이걸 막 되뇌고 막 이러는데. 물론 그것도 처음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됩니다.
일체법이 불법이라는데 왜 나한테는 이게 불법처럼 안 보이고 컵으로 보이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모양으로 보이지? 이 모든 것이 불법이라고 하는데 하고 일체법이 불법이다. 하는 화두를 늘 이렇게 마음속에 그냥 이렇게 궁금해 하는 거지요. 궁금해 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서도 남들은 다 스마트폰을 보고 앉아 있는데
나는 약간 멍한 시선으로 야 이 모든 사람들이 내 눈앞에 목전을 목전에 의식을 잠시 둔 채 야 이 모든 것이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 이 모든 것. 사람들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이 모든 것. 이것들이 전부다 불법이고 모든 것이 참된 법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참 참된 법으로 보이지 않는구나. 참 도대체 알 수가 없구나. 도대체 갑갑해 알 수가 없다.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그냥 모름 속에 있는 거예요.
모름 속에 있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애써서 일체법은 불법. 일체법은 불법. 계속 그걸 되뇌기 시작하면 그 또다시 어떤 그냥 죽은 화두가 되기가 쉽지요. 그래서 화두 수행하는 제대로 가르치는 스님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화두를 들긴 들되 처음에 한번 화두 들었으면 됐지. 그 계속 챙기지 마라. 그렇게 얘기를 해요. 마음속에 이미 챙겨져 있는 거다. 그냥 정 모를 때는 그냥 한번 그냥 이렇게 챙기더라도,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일체법이 불법이라는데 나에겐 왜 불법이 안 보이고 다 모양처럼 보일까. 하는 마음으로 하면 되겠고요.
손법재 멸공덕 막불유사심의식
(損法財 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心意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53)
심의식이 심은 유식, 의는 칠 식, 식은 팔식을 주로 얘기합니다. 유식, 칠 식, 팔식이라는 게 전부다 식이에요. 즉 내가 분별하는 마음.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라고 이렇게 분별해서 대상을 아는 마음. 아 이건 긴 거야. 이건 물이야. 하고 아는 마음. 그것을 이제 의식, 분별심, 분별 의식이라고 하고 거기에 이제 우리가 요즘 심리학적 용어로 뭐 무의식, 심층의식 얘기하듯이
칠 식 팔식이라는 것은 내 내면에 있는 내면에 있는 분별심, 칠 식. 예를 들면 겉으로는 이 육식으로는 분별할 줄 아니까 나는 내 아내를 내 몸보다 더 사랑해. 내 자식을 내 몸보다 더 사랑해. 이게 육식이 분별하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칠 식은 자아의식. 나라는 자아의식이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인데. 평소에는 아내를 나보다 더 챙기다가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확 사고 나기 직전에 나도 모르게
칠 식이 무의식으로 발동을 해서 핸들을 확 틀어서 나는 살고 아내는 죽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거는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이 식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칠 식이 작동을 한 거지. 내 겉에 표면, 육식이 작동한 것조차 아니거든요. 육식, 칠 식은 실제 내가 아닙니다. 내가 그러고 싶어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어떤 그 마음의 무의식에서 그런 건데
그걸 가지고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사실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밑에 뭔가 업이 있으려면 내가 업장이 저장된 어떤 창고가 있지 않느냐. 그래가지고 내 업이 있으니까 내가 세상을 보면서 내 식대로 이렇게 판단을 하고 이런저런 업이 나오지 않느냐. 그래서 더 근원에 있는 어떤 업이 나오는 그런 것들을 어떤 팔식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거든요.
그래서 육식, 칠 식, 팔식 쉽게 말해 전부다 분별심입니다, 한 마디로. 그건 다 진짜 내가 아니에요. 이처럼 법의 재물을 진리를 덜어내고 공덕을 없애는 것은 분별심이다. 겉에 드러난 분별심이든 심층의식에 있는 분별심이든 그 분별심은 전부다 공하고 텅 비어서 나의 공부를 가로막는 장애일 뿐이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박수 (이어서 1시간 54분 녹취)
첫댓글 감사합니다.
살아서는 앉느라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더럽고 냄새나는 송장 같은 몸을 어찌해 본들
어떻게 공부가 될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生來 坐不臥
생래 좌불와
死去 臥不坐.
사거 와부좌.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
一具臭骨頭
일구취골두
何爲立功課.
하위입공과
파사헌정을 파사현정(破邪顯正)으로 수정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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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