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은 조그만 시골 도로를 따라 한참 달려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만큼 경제개발과 관련이 없는 진짜 시골이란 말인데 사실 예산땅 전체가 그랬다. 산이 있으되 조금 높은 언덕일 뿐이고, 들이 있으되 주름 잡혀 평야라 불릴 수 없는 곳, 그러면서 가진 모든 것과 땅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이 예산이었다.
몇 년 전, 은영이와 함께 추사고택을 찾았다. 소박하게 서 있는 한옥 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도로 맞은편에 걸려 있는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근처에 있는 비닐하우스(Vinyl House) 광고였다.
[ 멜론(Melon), 방울토마토(Tomato) 싸게 팝니다. ]
아무리 장삿속이지만 이렇게 사람의 급소를 후벼 파다니… 멜론 하면 내가 끔뻑 죽는 과일이고, 방울토마토 하면 은영이가 끔뻑 죽는 과일이다. 그런 과일을 산지에서 직접 싸게 살 수 있다고 광고하는데 어떻게 해? 우리는 총 맞은 것처럼 그리로 끌려 갔다. 이 때 우리는 추사고택에 들어가기 1 분 전이었고, 반경 10 m 안에 있었다.
싸게 샀든, 비싸게 샀든 우리는 멜론 세 통과 방울토마토 한 박스(Box)를 들고 비닐하우스를 나왔다. 시식으로 먹은 것만도 멜론 한 통과 방울토마토 한 주먹이었다. 계산을 하면서.
“카드(Credit Card)가 되나요?”
하고 물었지만 묻는 우리나 대답하는 농장주나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돈을 지불했다. 얼마였더라…? 어쨌든 우리는 갖고 있던 현금 전부를 주면서 얼마 깎았었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을 한 꾸러미씩 들고 의기양양하게 차로 가고 있는 우리 둘, 차에다 곱게 싣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우리도 이제 어른이 다 된 거야, 그지? 이런 게 여행의 묘미야, 그지?”
그리고 다시 올라간 추사고택… 그런데 한쪽 옆으로 매표소가 보였다. 문을 닫았나 싶도록 한산하고 허름한 매표소였지만 우리를 발견한 매표원이 정좌하고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입장료는 한 사람당 500 원이었다. 우리는 “설마~” 하며 온몸과 가방을 뒤졌다. 차도 구석구석 뒤졌다. 그런데 그 1,000 원이 없었다. 이럴 수가! 벌건 대낮에, 서른을 넘긴 어른 둘이, 차까지 끌고 거기에 가 있으면서 돈 1,000 원이 없다니… 돈 뽑을 데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카드는? 그것도 안 된단다. 정말 황당했다. 비닐하우스로 돌아가서 1,000 원어치 물러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우리는 죽기살기로 다시 매표소로 갔다. 순진함이 유일한 무기였다.
“아저씨, 요 앞에서 멜론하고 방울토마토 산다고 돈을 다 썼는데 그냥 좀 들어가면 안 될까요?”
같은 충남 예산이고, 이 곳 지역 발전에는 추사고택 한 번 보고 휭~ 하니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됐건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진짜로… 우리의 진정성도 몰라주고…….
“내가 이러이러해서 예산의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줬으니 이 정도 1,000 원은 나중에 계좌이체를 해주겠다는데 그래도 안 되겠냐? 그러면 정말 내가 멜론하고 방울토마토를 다 무르고, 딱 1,000 원만 쓰고 예산을 떠나야 좋겠냐? 많이도 안 바란다. 저녁에 계좌이체를 하게 해주든지, 1,000 원을 빌려 주든지, 딱 10 분만 돌아보게 해 다오.”
물론 머리로만 맴돈 말이다. 결국 우리는 입맛만 다시다 추사고택을 담장 너머로만 구경하고 떠났다. 이런 뼈아픈 추억이 서려 있는 추사고택을 2009 년 7 월, 두 번째 방문했다.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할아버지인 김한신이 1700 년대 중반에 53 칸 규모로 지은 집이다. 그런데 왜 정미와고택(정미와는 김한신의 호다)이 아니고 추사고택이냐 하면 추사 김정희선생이 나서 자란 곳이고, 역사적으로 추사 김정희선생의 명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김한신선생이 자신이 지은 집에다 손자의 이름을 붙였다고 뭐라 그러진 않겠지? 고택이라고 해서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세월에 너무 닳고 닳아서 그런지 사람 살던 곳이라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옛 모습은 어땠을까? 나는 추사고택을 돌아보며 사람 냄새를 찾아봤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너무 깔끔하고 현대적이고 기계적이었다. 한옥 한 채가 수용할 수 있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찾으니 어쩔 수 없는 수순이고,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부분을 수리한 것이 아니라 사무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수리 처리기에 또 하나의 전싯거리 고택류일 뿐이었다. 사실 지금의 추사고택이 원래 김한신이 지은 집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도 여기에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근래 와서 당시에 지은 집이라면 이랬을 것이라며 완전히 새로 지은 가옥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많은 모사품들이 진열돼 있는 툇마루 한 귀퉁이에 앉아 텅 빈 마당을 바라보았다. 옛 분들의 시선을 빌어 그 때는 저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보았지만 마음이 이내 지쳐버렸다. 내가 고택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건지… 내가 사극에 의존해 너무 편협한 취향을 갖고 있는 건지… 옛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절실했던 추사고택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손수 짓고, 고치고, 드나들던 집이었으니 아무리 그 집이 그 집이 아니라 해도 온 동네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퍼졌을 텐데 그렇게 수백 년 동안 손에서 손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책에서 책으로 전해져 내려온 곳이 별 것 아닌 곳일 수 있을까? 그 안에는 내가 모르는, 그리고 이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묻혀 있지 않을 수 없다. 모조리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일거수일투족을 몽땅 기록하려 든 왕궁도 아니니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 비록 형체가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서서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흩어질세라 주춧돌 아래 두고 꾹 밟고 있는 현대식 고택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위업이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덕분에 우리도 이렇게 추사 김정희선생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첫댓글 전 옛날 방문하였을때, 관사 올라가는 계단에 햇빛이 반 반사된 그자리가 넘 맘에 들어었답니다.
영양가 많은 추사고택 답사기 입니다.
굿~
그런 사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