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 본 게 언제였을까. 아주 오래 전으로 기억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고 이래저래 정신없이 살던 시절에 불현듯 부모님이 그리워진 날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고향으로 향하였다. 어린 자식 둘은 일방적으로 남편에게 맡기고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수원에 가니 새벽 여섯 시 조금 전이었다. 안개가 자욱했고 인적이 거의 없는 세류동 버스 정류장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첫 차를 무작정 기다리는 동안 설레임과 그리움이 안개처럼 날 휘감아왔다. 내가 대문간을 들어서면서 엄마! 아버지! 라고 큰 소리로 불렀을 때 그 분들은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오셨다.
종호, 내가 살았던 석우리 보다 첩첩 산골인 신리에 살았던, 잘 먹지 못해 대부분 마르고 작았던 그 당시 또래 친구들에 비해 발육이 훌륭했지만 아주 순박했던 친구와 함께 양재에서 용인가는 직행버스를 탔다. 사십 년 만에 만났는데도 초등학생처럼 바짝 붙어 앉아서 키득키득 한 시간여를 떠들다가 웃다가 떠들었다. 외대 앞에서 내렸을 때, 오늘 동창생들을 초대한 일태, 사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을 와서 한동안은 친구들과 섞이지 못해 어둑한 얼굴로 뒤쪽을 배회하던, 체구가 작았던 친구는 정말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약간은 무덤덤해 보이기는 하나 보일 듯 말듯하게 슬쩍 비치는 미소에서 번져 나오는 반가움을 친구인 우리가 어찌 모를까. 친구는 절대로 나처럼 헤프게 웃음을 다 내보이지 않는다. 슬쩍 보여주다가 멈춘다. 첩보원 같은 미소다.
구불구불 시골길을 따라 올라가보니 빨간 바지에 노랑 셔츠를 입은, 색깔로 보면 꼭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친구 영수가 있었다. 키가 커서 축구 선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말끔하게 흰 셔츠를 입은 재원이, 말썽꾸러기도 아니요 그렇다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 중간에서 눈에 잘 뜨이지 않았던 친구가 함께 준비 중이었다. 야외 식탁에는 와인과 와인 잔과 과일을 빈자리가 보이지 않게 차려 놓았다. 준비가 완료된 줄 알았는데 종호와 내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아직 다듬지 않은 야채 자루부터 내밀었다.
'뭐야 준비가 아직 멀었네 일복이 터진 여자는 어디를 가도 일이 기다린다더니' 종호는 막내 며느리인데도 불구하고 맏며느리 노릇을 하며 살았고, 나는 맏며느리였으니 일복을 타고 난 여자들이라는 말인데 그러면서도 빙긋이 웃는 종호는 정말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인 것처럼 척척 준비를 잘했다. 큰언니 같다. 기대고 싶은 친구. 나는 막내 동생처럼 꼽사리 껴서 쑥갓을 다듬고 마늘을 까는데 영수가 카메라를 들이댔다. '야! 영수야 오십대 아즘마는 2m 거리에서 찍는 거다 그래야 그래도 봐 줄만하지' 한바탕 웃음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청계리 느티나무 옆에 살아, 더 먼 산골 석우리 쪽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승순이는,오산에서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오산리에 살던 마르고 키가 미루나무 같았던, 동그스름하면서 순한 웃음을 헤프게 날려 착한 얼굴이었던 영자는 평택에서 왔다. 영천리 가는 쪽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 늘 외로웠으나 부침성이 좋고 여성스러웠던 화자는, 수술로 병약해진 몸을 이끌고도 안성에서 왔다.
우리 동네 바로 옆 안말에 살았던 효숙이는 아픈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봐주느라 늘상 아이를 업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상숙이는 똘똘하고 씩씩했던 것 같다. 지금 이 나이에도 어엿한 직장인으로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또한 우리 동네 음말에 살았던 찬금이,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쁜 여자애의 눈웃음을 간직한 친구와 그리고 동인이,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우리를 따라다니느라 무척 애쓰던 착한 친구가 부천에서 함께 왔다.
다들 먼 걸음이었다. 일태의 기다림과 친구들의 설레임이 합쳐진 웃음소리가 집 앞쪽 황금빛 들판으로 한없이 퍼져 나갔다. 황금빛 일렁이는 웃음바다를 보았다. 내가 그동안 마구 찍어대던 사진에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 꾹꾹 눌러 담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거기다가 영수는 제가 다년간 찍어두었던 세계 곳곳의 사진, 큰 사이즈로 프린트한 멋진 것들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사진작가이든 시인이든 소설가이든 자기 작품을 함께 동감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같은걸 보고 같은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행복감을 영수는 찾는 중일 것이다. 야외에서 사진을 감상하는 시간이라. 새롭다.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는데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구름이 산 능선처럼 겹겹이 드리운 드넓고 아득한 사진 한 장, 저 장면과 직접 맞닥뜨렸을 영수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녀석! 제법인데. 제 오십 줄에서 멋을 찾은 영수가 부럽다.
새우가 구워지고 삼겹살이 구워지고 와인을 한 잔씩 돌렸다. 친구들을 위해서 준비하느라 애쓴 일태 마음이 분명 이 와인 빛 같으리라. 우리의 가슴이 붉어지고 있다. '너희들 맛있게 먹고 있는 거 보니까 좋다 ' 친구가 형님처럼 흐뭇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친구들이 오기 전에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일태가 일찍 도착한 우리에게 툭 던진 말이 생각났다. '생각보다 일이 많네 정신이 없어' 그럼 그럼 손님 초대하는 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 두 가지인가. 오십대 아줌마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인데 남자인 네가 그걸 몰랐던거지. 그래서 우리가 깜짝 놀란 거지.
시골의 가을 저녁은 서늘했다. 집안으로 들어가서 빙 둘러 앉아 차를 마셨다. 배부르고 등 따습고 가슴 넉넉해진 저녁, 모두들 얼굴이 환했다. '다음번에는 버섯구이 마련해 볼 테니까 다들 또 오는 거다' 그 말에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보냈다. 고마운 친구! 나는 언제 너처럼 착한 마음 한번 가져보려나?
-2010 10 11 용인 초부리 일태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