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陵洞)의 동명(洞名)은 1904년 11월에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의 첫 황후
"순명황후"(純明皇后)민씨의 묘역인 "유강원"(裕康園 : 裕陵)이 마련되어 "능말","능리"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라고 백과 사전에 표현하고 있다.
2001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된 "유강원"(裕康園) 석물(石物)은
현재 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번지 어린이대공원 내 10.5㎡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서쪽 정문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산책로를 따라가다보면 우측을 보면 금새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표지판 하나 서 있을 뿐 쉽게 눈길이 가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지나치며 석물(石物)의 내력을 챙겨보는 이는 드물다.
서울의 수많은 유물, 유적들의 많은 곳이 방치되거나, 외면당한 것처럼
"순명비"(純明妃) "유강원"(裕康園)석물도 예외는 아니다.
어린이 대공원의 석물은 조선 제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순종황제)의
"황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의 능이었던 옛 "유강원(裕康園)터에 남아 있는 석물들이다.
"유강원"(裕康園)의 원 위치는 현재 팔각정 부근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이대공원의 여러 곳에 장식용으로 흩어져 있던 석물들은 2006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 복원됐다.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는 고종 9년(1872)에 민태호의 딸로 태어나 고종 19년(1882)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됐으나 "순종"이 임금이 되기 전 1904년 33세에 사망했다.
"세자빈"(世子嬪)은 시어머니되는 "명성왕후"(明成皇后)의 친척이다.
"명성왕후"(明成皇后)의 권력 강화를 위해 선택된 세자빈은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하여 1905년 "유강원"(裕康園)에 묘소를 마련했다.
사망 당시 "릉"(陵)아니라 "원"(園)이였지만
1907년 "순종"(純宗)의 즉위 이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로 추증되어 "유릉"(裕陵)이 됐고,
"순종"이 세상을 떠난 1926년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의 "유릉"(裕陵)으로 옮겨졌다.
무려 20여년을 이곳에 있었단 이야기이다.
현재의 "능동"(陵洞)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어린이 대공원 내 "유강원"(裕康園)석물은 이전 당시 그대로 버려진 것들이다.
대체로 무덤을 "이장"(移葬)할 때는 기존 석물은 버리는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지금도 북한산 곳곳에서 무덤없이 버려진 석물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이장"과 관련이 있단다.
버리는 이유는 옮겨가기가 용이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옛 무덤의 석물을 그대로 쓰면 자손에게 안 좋다'는 속설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강원"(裕康園)"석물도 그렇게 버려져 70여년간 짓밟히고, 온갖 치욕을 다 당했다.
20여 기의 석조물은 석등(石燈)을 비롯해 문인석, 무인석과 말, 양, 호랑이 등
동물의 조각물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유강원"(裕康園)"석물은 조선 말 왕실의 석조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석물이 현재의 자리로 모여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채 전 관장이 2000년 10월께 유강원(裕康園)석물을 조사해 광진구청, 서울시 문화재과,
어린이대공원 관리소 등에 보내 문화재 지정을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동안에는 공원 내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고, 내력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에 당시의 " 채원석 건국대학교 전 박물관장"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 조사, 지정 등을 건의하게 됐다.
이후 광진구에서도 서울시 문화재과에 건의하고,
문화재청에서 2001년 7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러나 지정 당시 석물은 한군데 모아지지 못하고 여전히 여러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에 광진구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하는 한 지역민이 2003년부터
꾸준히 유강원 석물을 한 곳에 모아 보존하자고 여러 곳에 여러차례 건의해
2006년 서울시에 의해 현재와 같이 한 곳에 모아 복원 보존하게 됐다.
현재 남아 있는 석물들은
석상(石床 : 혼유석)과 고석(鼓石) 4기,
문인석(文人石) 2기
무인석(武人石) 2기
석호(石虎) 4기와 석양(石羊) 2기
석마(石馬)4기
장명등 대석(長明燈 臺石) 1기
망주석(望柱石) 대석(臺石) 2기.
죽석(竹石) 5기와 석주(石柱) 7기
동자석주(童子石柱) 9기
지석(誌石) 1기 등이 남아 있다.
지석(誌石)에는 "大韓 裕康園誌 光武八年十二月 日"라고 새겨져 있다.
"光武八年"은 1904년이다.
즉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사망한 해이다.
지석(誌石)이란 것은 "이곳에 이런 곳이 있었다"라는 표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리고 "유강원"(裕康園)"의 지석(誌石)은 있는데 어찌 하여 "유릉"(裕陵)의 지석(誌石)은 없을까?
그리고 "유릉"으로 격상되었다면 "유강원"(裕康園)" 지석(誌石)은 설치하지 않아도 될 물건이다.
석물중에는 석양 두마리가 빠져 있다.
지역 주민들은 세종대학교에 흩어져 있는 석물 중에 끼어 있는게 아닌가 추정한다고 한다.
"무인석"과 "문인석"의 표정은 기존의 다른 곳의 "문무인석"과 달리 침울한 듯,
화난 듯 힘이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이곳에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만 있었어서 그것만으로 "능동"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을까?
아니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큰 실권을 휘두른 여장부다.
아들 "헌종"(憲宗)이 왕통을 이어받아 남편이 "익종"(翼宗)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사망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손잡고
"고종"(高宗)을 즉위시킨 뒤 "조 대비"(趙 大妃)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사망한 나이는 83세로 조선의 비(妃)중 왕실 생활을 가장 길게 했다.
처음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장지(葬地)로 결정된 곳은 능동(陵洞)의 "도장곡"(현재 어린이대공원)이다.
이곳을 장지(葬地)로 정하고 산릉 조성 작업을 진행하던 중 혈처(穴處) 주변에서 5기의 옛 무덤 흔적과 유골이 발견된다.
이에 작업을 중단하고 능을 "의릉"(懿陵)근처로 옮긴 후 다시 양주 용마봉(광진구 용마산) 자락으로 옮겼다가,
1855년 "철종"(哲宗)때 최종적으로 동구릉의 "건원릉" 좌측으로 옮겼다.
또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릉(陵)이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