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그가 얼마나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보고 생각하였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남편이 외출한 주부가 한가하게 청소하면서 TV를 보는데 그 드라마가 불륜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지속적으로 보게되면 어느새 자신도 거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남편이 좀 늦게 오는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 남편도 불륜을 저질러서 늦게 오는 것이 아닌가? 의부증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듣고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생각도 거기에 적응해 가고 어느새 자기의 마음도 빼앗기에 된다, 오늘날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음악 춤 드라마가 나오는데 이러한 예술을 만들어 낸 그들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멀리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의도이다. 실제로 미디어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루미나이트 같은 사탄의 하수인들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랩음악을 좋아하다보면 그 가사는 나는 마귀를 따라가야 해 난 마귀가 좋아 하는 그런 가사로 그 영혼이 어느새 마귀를 따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긴다는 말씀이 다시한번 떠 올리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장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의 이름들이 나온다. (히11:18-25)을 보면 믿음으로 이삭은 다가올 일들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고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죽으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자기 뼈들에 관해 명령을 주었느니라.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특히 히11:30은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 성벽 주위를 돌매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도대체 라합은 어떠한 은혜를 입은 여인이었기에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속에 나오는 축복을 받았던 것일까?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알아야 할 문제이다. 1. 라합의 신분 이미 모세가 생존해 있을 때 요단 동쪽 아래쪽에 있는 아모리족속 (시혼 왕국)과 위쪽에 있는 바산(옥의 왕국)이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왔다가 그들이 멸망당하고 그 지역 아래쪽은 르우벤지파 중간은 갓지파 그리고 위쪽은 므낫세 반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는데(신29:7-8) 이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여호수아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 들어가는 것이 광야 40년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나안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여리고성은 그야말로 정복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철옹성이라 무기가 변변찮은 이스라엘로서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전쟁에 앞서 여리고 맞은편에 있는 시팀에서 여리고 성을 정탐하라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치르기 전 철저한 준비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두 정탐꾼이 여리고성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누구나 만나기 쉬운 라합이라는 창녀집에 들어가서 유숙했다(수 2:1). 여행객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창녀 라합의 집은 정탐꾼인 그들로서는 특별한 의심을 받지 않고도 머무를 수 있는 적절한 장소였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정탐군을 숨겨둔 사람이 바로 창녀 라합 이라고 히브리서에 짤막하게 소개하는데 라합은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하는 바로 그 여인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그녀의 신분은 사람들에게 천대받던 기생 다른 말로 하면 창녀로서 부정한 삶을 살아갔던 여인이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볼때 그녀는 결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라합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물질소유, 학력, 외모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 하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자를 찾기 위해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갔었을 때도 사무엘은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보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나는 마음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이새도 주목하지 않던 막내아들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했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그 사람을 선택하거나 판단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라합이 누구냐 하면 여리고성 창녀였는데 이 여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착에 큰 역할을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 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본인에게는 상상치도 못할 정도로 자신과 후손들에게 큰 축복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창녀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까지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과 살몬의 아내였던 라합과 모압여인 룻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나옵니다. 이렇게 창녀 라합의 신분이 이렇게 비천하였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2. 라합의 믿음 라합이 기생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는데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난 40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는 이 놀라운 기적과 같은 사건 그리고 최근에는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바산지역의 왕 옥에게 행한 일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단 저쪽은 요단 동쪽을 말하는데 거기는 어떤 곳이냐 하면 가데스바네아에서 요단 강 동편으로 올라가는 가장 손쉬운 길은 에돔과 모압을 가로지르는 왕의 큰길을 지나는 것이었다. 모세가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만 하겠다고 요청했지만, 에돔도, 모압도 이 요청을 거절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에돔과 모압과 싸우지 않게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에서의 후손이며 롯의 후손이기 때문이다(신 2:5, 19). 결국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서 더 멀리 남쪽과 동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에돔과 모압 족속의 땅을 우회한 후 거기서 만난 족속이 아모리 족속 헤스본지역 시혼왕이었고 또 아모리 족속의 땅 위에 바산 왕 옥이 있었다. 이번에도 모세는 사신을 아모리 족속 시혼왕에게 보내 그 땅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시혼은 한마디로 거절하고 군대를 이끌고 와서 야하스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민 21:21-22) 21 이스라엘이 아모리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22 내가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을 통과할 때까지 왕의 큰길로만 가리이다 하였으나 헤스본왕 시혼과 바산왕 옥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왕들인데 헤스본은 시혼왕이 차지한 성읍 이름이며 아모리는 그가 다스린 족속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력을 믿고 이스라엘을 대적했으나 하나님은 에돔과 모압 족속 때와는 달리 시혼 왕과 그의 땅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다. 한바탕 전쟁을 벌인 이스라엘은 시혼 왕과 아모리 족속을 진멸했다(민 21:21-32; 신 2:26-37).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위협을 느낀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하나님께서는 바산왕 옥도 이스라엘에 넘겨주어서 바산을 완전히 정복하고 바산 사람들을 진멸했다(민21:33-35; 신 3:1-11).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요단 강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가나안 땅을 정복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족속의 왕 시혼과 바산지역의 왕 옥을 멸망시킨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다는 본보기 였습니다. 또한 그 땅들은 이스라엘의 두지파인 루우벤지파와 갓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지파가 차지하는 기업이 되었다. 라합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 집에 오는 사람들로부터 여러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적 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합이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
(1) 상천 하지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곧 정신을 잃었나니 주 너희 하나님 즉 그는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 주 너희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각 나라마다 자신들의 신을 믿던 당시대에 라합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보면 변변한 무기도 없고 훈련되지 않은 유목민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 헤스본과 바산의 옥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였다는 것임을 알았고 이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 여리고성도 들어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라합의 믿음이었다. (2) 용기있게 행동하는 믿음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식을 들었(수 2:9-10)는데 그 소식을 흘려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확실히 믿었다. 라합이 수십년간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들로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였고 그리고 얼마전에는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족속과 바산족속도 멸망시키었다는 것을 들으면서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되었다. 비록 그녀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던 사건과 아모리 족속을 전멸시키신 일들을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그 이야기를 온전히 믿었고 또한 그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을 경외했다. 자주 듣다보면 자신도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여리고성안에 있지만 마음은 이스라엘쪽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이스라엘 백성이 이 견고한 여리고성도 쳐들어 올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살기위해서는 딱 한가지 방법밖에 없는데 그것은 지금 자기에게 온 정탐꾼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목숨을 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눈앞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명이 도움을 청했을 때 라합은 용기 있게 행함으로 그들을 안전히 숨겨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파멸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예측을 하면서 정탐꾼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순교적 신앙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정탐꾼들을 영접하는 것이야 말로 라합의 참 믿음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약2:25).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믿음으로 행함을 통해 순종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라합이 눈으로 하나님을 뵈옵지 못했지만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선대한 것은 하나님을 본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라합이 정탐꾼들이 자기 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이 유숙하도록 숨겨주었다고 수2:1-27까지 이야기 되는데 이 긴 말씀을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31절에는 한줄로 라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히11:31)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한히 받아들이고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적국의 간첩을 숨겨주는 일은 걸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라합은 참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용기있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정탐군들을 영접한 것이야 말로 라합의 믿음이 행함있는 믿음이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2:25) 또 이와 같이 창녀 라합이 사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른 길로 보냈을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면서 라합의 믿음을 행함있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올 것에 대하여 대비를 굳게 하였고 외부인 누구라도 들어온다면 당연히 신고하게 되어 있었지만 라합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을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믿었으므로 라합은 정탐꾼들을 순교적 자세로 영접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만약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준 것이 발각된다면 정탐꾼들 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하여 그녀의 온 가족이 몰살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음에도 라합은 그 모든 위기를 무릅쓰고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군인들이 돌아간 후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수 2:8~9) 8 그들이 눕기 전에 그녀가 지붕에 올라가 그들에게 이르러 9 그 사람들에게 말하되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두려움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또 이 땅의 모든 거주민이 너희로 인하여 기력을 잃었나니 하면서 내부의 상황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러면 정탐꾼들을 영접한 라합의 신앙고백을 들어볼까요.
3. 라합의 신앙고백 (1) 주 하나님은 온 천하에서 가장 위대한 신이시다 (수2:11) 라합은 출애굽의 역사 특히 홍해를 건넜던 기적의 역사와 요단 동편에서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의 왕 옥이 이스라엘백성들에 의해 죽임당한 것을 들었고 주 하나님이야 말로 온 하늘과 땅에서 유일한 하나님이시라고 정탐꾼들에게 고백을 합니다. 하늘과 땅사이에 하나님과 같은 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뿐만아니라 그녀는 여리고 성내의 분위기도 들려주었다. 또 여리고성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인하여 두려워하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고백하게 한다. 또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게 한다. 우리들도 참 믿음이 있다면 라합처럼 하나님만을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순교자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라합이야 말로 참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2) 위기를 극복한 라합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기고 있은 후 곧 군인들이 집에 들어닥쳤다. 이 군인들은 이미 정탐꾼들이 이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본 사람들의 신고로 온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 라합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연 그 사람들이 우리집에 들어왔으나 나는 그들이 어디에서 온지 알지 못하였고 어두워서 성문을 닫을 때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간다면 그들을 따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위기순간에 이렇게 지혜롭게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면 가슴이 떨리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앞뒤도 맞지 않는 것인데 라합은 그들의 묻는 말에 아주 정확하게 신뢰감을 주면서 말함으로 그들을 돌려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숨겨둔 정탐꾼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적어도 3일 간은 산에 숨어 지내다가 군인들이 성내로 들어오면 돌아가야 된다고 하면서 이제는 라합이 그들에게 요청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선대하였으니 너희들도 나와 우리 가족들을 선대하도록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훗날 이 여리고성이 멸망될 때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생명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여인이리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만 약속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어떤 증표로서 그리고 주 하나님앞에서 약속을 받은 것이다.
(3) 붉은 줄을 내리라는 증표(수2:17-18) 정탐꾼들은 라합의 요청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곳에 올 때 우리를 달아내린 붉은 줄을 창문에 매어 놓아라. 그리고 살고자 하는 사람 은 누구든지 다 너희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성밖으로 내보낼 때 붉은 줄로 내려줌으서 여리고 성 밖으로 내 보냈다. 그후 그녀는 붉은 줄을 창에 매 달아 두어서 정탐꾼들과 자기 사이의 증표를 삼았다. 여기서 붉은줄은 십자가 대속의 피의 예표이다. 출애굽하기 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른 양의 피가 십자가 대속 구원의 예표이듯이 라합이 집에 달아 내린 붉은 줄 역시 십자가 대속의 예표이다. 이처럼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오직 예수님보혈의 십자가이다. 붉은 줄을 달아 내리고 이를 증표로 삼았던 라합의 집이 여리고 성 전체가 멸망하는 중에 구원을 얻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보혈을 믿는 믿음이 심판날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듣고 믿을 때 구원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늘 생활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진리의 말씀을 의지해 살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이뤄주십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선대한 이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크게 고무되었고 특히 성안에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심히 두려워하고 그래서 그들의 간담이 녹을 정도로 약해졌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히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여리고 성도 무너뜨릴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4.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다 (히11:30) 믿음으로 그들이 이레 동안 여리고성벽 주위를 돌매 성벽이 무너졌으며 우리는 계속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말씀을 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 6장에 기록된 말씀을 단 한 절로 요약해서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어떻게 함락되었을까? 여리고성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성이었습니다. 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무너질 수 없는 철옹성인 여리고 성과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무후무한 전쟁이었습니다. 어떤 전쟁이었는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전쟁의 전략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성을 함락시킬 전략을 말씀하셨습니다. 1.무장한 군인들이 나팔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고 2.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숫양의 뿔)나팔을 불며 언약궤 앞에서 나가고, 3. 이어서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는 나팔을 따르며 행할 것이며, 4. 뒤에 가는 백성들은 소리 내지 말고 언야궤 뒤를 따르고 5. 이런 방법으로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도는데 6일 동안 동일한 방 법으로 돌 것이며, 6.제 7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 것이며, 마지막에는 나팔 소리를 길게 불면서 큰 함성을 지르면 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전쟁을 하기에는 정말 황당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가 명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2) 전쟁의 시작 1) 언약궤를 앞세우고 (수6:12) 대열의 제일 앞에는 군대가 나가고 이어서 제사장 일곱이 양각나팔을 불며 나가고 뒤이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앞세우며 따르고, 뒤에서 백성이 따르는 모습, 그러면서 사람들은 침묵하고, 하루에 한바퀴씩 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찌보면 경건한 예배라고 생각이 듭니다. 나팔은 찬양, 언약궤는 말씀, 침묵은 겸손과 경건의 모습. 이것을 성 위에서 보고 있던 여리고 군인들은 얼마나 비웃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지내면서 이제 몸에 밴 행위였고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왔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예배를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2) 순종하며 행하다 (수6:14)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행동이 6일 동안 계속 되었다. 같은 행동을 하루에 한 번씩 돈 후에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7일 째 되는 날 새벽 일찍이 일어나서 일곱 번을 똑같은 행동으로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을 그대로 전하고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성 주위를 돌았습니다(8). 성 주위를 돌면서 말은 일체 하지않았습니다(10). 침묵하면서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 할만도 한데 오직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을 낳습니다. 3) 함성소리에 성이 무너지다 (수6:15,16, 20) 제사장, 군사들, 백성들이 7일 동안 성을 도는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회중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날 성벽도는 것을 마치고, 한 목소리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라고 외치는데 이 큰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그 함성과 더불어 그 견고하던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20). 하나 된 함성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그 때 지진이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고고학의 자료를 믿기보다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으면 되겠습니다. 아무리 큰 문제가 가로막혀 있어도 하나의 목소리를 내게 되면 기적을 연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그만 문제라도 하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그 문제 때문에 망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말로 죽고 살게 됩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일치된 행동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5. 구원의 축복 라합이 하나님을 믿고 여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보호해준 결과가 그녀의 삶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결론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 할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녀의 가족만이 구원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족 가운데 믿음의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가족 전체가 구원을 받았던 것은 정탐꾼들과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네 집으로 데려오라(수 2:18)고 말했던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창문에 붉은 줄 때문에 구원받았는데 여기서 붉은 줄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합니다. 이 보혈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원수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 보혈이 마음에 뿌린 바 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1) 구원을 받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약속한 구원의 표시(수2:18)는 우리가 이 성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린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는 약속을 실천한 결과입니다. (수2:21) 라합이 가로되 너희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녀는 정탐꾼을 보내자 즉각적으로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구원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붉은 줄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라합은 십자가를 붙들었고 결국 그와 그의 가족을 구원받게 하였는데 라합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31절을 보겠습니다. (히11:31)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음으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사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창녀 라합은 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영접했던 결과 이스라엘의 군대가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영광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스러운 가문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다 비천한 신분이었던 창녀 라합에 대하여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그 중에서 라합은 당시 매우 천대받던 창녀였으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그것도 네군데(약2:25 히11:31 수2 수6)나 기록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라합은 보아스의 어머니요, 보아스느 룻의 남편으로 오벳을 낳았는데 바로 오벳의 할머니가 라합이요 ,이 라합이 이새의 증조할머니 그리고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믿음은 그녀를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라합의 남편 살몬은 여리고 정탐을 하였던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히11:6)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하느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전 16장31절 말씀이 다시한번 떠오르게 됩니다. 라합의 구원받은 결과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들은 그보다 더 놀라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라합보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았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라합은 이방인이였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라합보다 더욱 믿음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라합이 받았던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 자신이 믿음이 있어야만 가족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축복의 통로들이 되시고,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라합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하나님을 진심으로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고백한 라합의 신앙고백을 통해 히브리서 11: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나는 라합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며 하나님편에 굳게 서있는 라합의 믿음을 나도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편에 서서 라합과 같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길 소망합니다. 금보다 귀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도,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우리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것도 믿음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가 라합처럼 믿음의 위인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이 믿음장 안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이름들 사이에 라합이라는 이름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라합을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 창녀 라합입니다. 그 이름앞에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을 창녀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조나’라고 하는 말은 ’간음하다, 매춘하다‘를 뜻하는 ‘자나’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조나를 포르네 즉 창녀라고 번역한 것은 적절한 해석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의 많은 이름들 가운데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 경우는 유일하게 라합의 이름 앞에‘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믿음으로 아벨은, 에녹은, 노아는, 아브라함은’이라고 했지 ‘믿음으로 족장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애굽의 총리 요셉은’‘믿음으로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이렇게 표현한 데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라합에게만은 ‘창녀라는 말을 그 이름 앞에 붙였습니다. 정말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말 그대로 술 팔고, 웃음 팔고, 자기 몸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의 이름이 신앙의 위인들 사이에 당당히 들어 있습니다. 그것도 성경에 네 군데나 말입니다.(수2:1,마1:5,히11:31,약2:25)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론 하고 누구라도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한 가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한 대로 한 줌의 흙에 불과합니다. 새벽에 내리는 이슬과 같고 아침안개와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창녀 라합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잘 살고, 바르게 산다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우리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을 내가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믿음은 귀중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여생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에는 행함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행함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역사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순종과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초신자가 목사님 앞에서 침례 문답을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형제님은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그때에 초신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확신 있게 예 저는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고백입니까? 그래서 목사님은 좀 놀라면서 어떻게 예수 믿은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믿음을 가졌을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또 물었습니다.“만일 공산당이 형제님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그러자 또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예, 저는 총에 맞아 죽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목사님은 감격을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그러면 형제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십일조 생활은 잘하고 계시겠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 치던 그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니요. 아직은 십일조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는 사람이 물질이 아까워!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곧 그의 믿음이 어느정도인지 들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행복침례교회 성도들은 창녀 라합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으로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살아 역사하는 참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창녀 라합은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던 그 라합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행함있는 믿음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것 때문에 그 믿음이 어려운 것입니다. 말로 고백하고 입으로 믿는 것은 어떤 희생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하는 믿음에는 자기 희생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약 2:14-26) ​오늘은 연이어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야고보가 강조 하신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 자체가 100% 온전한 것으로서 어떠한 행위도 가감해서는 안 되고, 믿음 그 자체로 믿는 순간 의롭다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롬 3:28; 갈 2:16). 믿음이 무엇인가? 어떤 대상과 어떤 말에 대하여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상태라고 사전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우리를 주관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행위가 나오게 마련입니다(본문의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 이를 단정하여 마음으로 순종하고 몸으로 순종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순종함은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포괄적이고 독립적인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와 사도들이 당시 가장 경계하였던 잘못된 교훈이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주의 곧 율법주의였던 것인데, 율법으로 말하자면 우선 가장 대표적인 말씀으로 십계명을 들 것이고, 좀 더 확대하면 613가지나 되며, 더 나아가 우리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 되는 성경말씀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헤아리면서 의외로 신앙생활의 외적 행위(주일성수, 십일조 생활, 신앙양심을 따르는 것 등등)를 척도로 삼는 일이 많다. 물론 그와 같은 일들이 믿는 자의 삶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마 23:23). 그러나 그와 같은 행위들이 있어야만 믿는 자라고 가늠한다면 오히려 사도들이 그토록 경계하며 싸웠던 율법주의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말씀과도 충돌이 생겨 그야 말로 괴리가 생길 것이다(롬 4:2-3; 갈 3:5-9). 우리는 성경 말씀을 단편적으로 떼어 바라봐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문의 믿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요 자유의 율법을 믿는 믿음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에,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믿음과 행함 절반 절반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말만 해서 믿음이 아니고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따라 우러나오는 행함으로서 서로 차별하지 말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로마서는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메시지를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두권의 책이 신앙생활에 균형을 잡게 해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만,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음으로 좋은 나무인 것을 증명하는 게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구원받은 사람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합당한 열매가 바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가 ‘복음의 씨앗’을 말한다면, 야고보서는 ‘복음의 열매’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종교, 윤리, 이론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의 진리 가운데로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변화를 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놀라운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변화를 주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그 삶에서 변화가 없는 삶이라면 정말로 예수를 온전히 믿는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성경에서 보겠습니다. 노아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가 와서 물이 고인 것도 아닌대 배를 지을 까닭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것도 바닷가에 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맨 땅에 배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규모 또한 한 집안 식구들이 탈 정도가 아니라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그 배를 짓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120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미쳤다는 말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노아 자신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큰 배를 그런 곳에 지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을까?’라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자기도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120년 동안 배를 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갖 소리를 다 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이 창세기 6장 9절‘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당대 완전한 사람 노아,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노아, 이것이 노아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별명을 얻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것은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는데 순종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번제단을 설치한 후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한 행함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자기 희생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참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희생이 있을 때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곧 행함이라는 말에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십시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선생님, 그것은 제가 어릴 적부터 잘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본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다음을,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마19:22) 라고 기록합니다. 그 젊은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하면서 큰 허물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도 그렇게 사모하던 영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2장 14절은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이 젊은이와 달랐습니다. 허물도 많고 지은 죄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많은 사람을 괴롭히면서 돈을 모았으므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악한 사람이 삭개오였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많이 모았으므로 유대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구원은 삭개오에 있어서 전혀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눅19: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 같은 삭개오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은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 젊은이가 그렇게 받고 싶어도 받지 못했던 영생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은 삭개오가 예수님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먼저 예수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2장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라고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 하나님 믿습니까? 그 정도의 믿음은 마귀도 믿는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진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떱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행위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행함이 없다면 당신이 그런 마귀와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행함이 없는 당신의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 똑같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1-22) 믿음이 행함이고 행함이 믿음이 아닌가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