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바로 이웃에 음악 전용인 콘서트홀과 국립부산국악원이 있다는 것과 구경한 얘기는 ‘신항일지_79’에서 적었다. 특히 국립국악원이 2004년 겨울에 착공했을 당시 우리 아파트의 관리위원장을 맡았었기에 우여곡절이 있어 감회가 남다른 곳이다. 2008년 가을에 개관했는데 그 후 증축을 하여 야외 공연장에 올라서면, 이미 개장한지 10여년이 훌쩍 넘어 녹음이 우거진 부산시민공원의 눈시린 풍광과 더불어 매일 밤 공연이나 산책을 즐기러 나온 많은 시민들의 분주한 모습들이 콘서트홀의 휘황한 네온싸인과 어울려 하루의 고된 기분을 말끔히 씻어주기도 한다.
계단 옆의 공연 광고
콘서트홀은 음악전용인데다가 입장료가 만만찮아 한 번 가기가 쉽지 않지만, 대신 국악원(國樂院)은 말 그대로 우리 같은 늙은이에게는 어릴 적부터 만져본 꽹과리, 징, 북 등 농악(農樂)들이 섞여 있어 흥(興)을 돋구어 주는 데다, 입장료도 경로 혜택을 받으면 쇠주 두어 병값이라 가끔 할멈과 손잡고 간다.
어제 저녁에는 부산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으로 ‘접(蝶) - 삶이 춤이로다’는 공연이 있다기에 한(恨)과 신명을 한껏 풀었다. 이번에도 680여 전좌석이 만원인 듯 한데 우리가 최고령 관객이 아니었나 싶다.
인간은 쉬지 않고 변하는 세계와 관계하면서 살아가는 데 온갖 정신적 ‧ 신체적 접촉과 압박에 시달림을 받는다. 마침 지방선거운동 기간이라 문밖을 나서면 스트레스부터 받기 일수다.
함께 해준 가족들!
「아예 개념이 없는 시대의 상태로 세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음악이다. 소리로 하는 것이다. 소리가 신(神)에게 더 가깝다. 소리로 신을 부르기도 한다.
소리를 벗어나는 것이 춤이다. 소설은 쓰는 것이지만 시는 토해지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자기가 드러날 것인가? 인간의 높이는, 논변‧논증, 이야기, 시, 음악, 춤의 순서로 올라 간다.」는 철학자의 얘기에 공감을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시를 읊는 사람이, 시를 읊는 사람보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이, 소리를 다루는 사람보다 몸을 다루어 춤을 추는 사람이 더 함량이 크다고도 했다. 이 함량의 바로 덕(德)의 크기요, 시선의 높이라는 것이었다.
무용수들이 하는 나비의 날개짓 같은 연약하면서도 보드랍고 날렵하며 예민한 손가락 끝과 몸의 움직임이 공연의 이름처럼 ‘삶이 춤이로다’는 의미가 무지렁이인 내게도 감각적으로 닥아왔다. 똑같은 춤사위라도 조금씩은 느낌이 다름을 알아차린다.
거기다 신명이 나면 무대와 객석이 ‘대꾸’와 ‘박자(拍子)’로 어울릴 수가 있어 마당놀이처럼 내 자신도 공연자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탈춤, 아리랑, 강강술래 등이 몸의 언어로 승화되어 이어진다. 숨만 조금 크게 쉬어도 터질듯한 콘서트의 조용함과 실낱같은 소리들과는 달리 툭박스럽기는 해도 꾸밈없이, 사정없이 생으로 울리는 웅장하고 큰 풍물소리들이 우리의 오래 익은 감각과 자연스레 어울린다.
‘우리 시대 장춘불로지무(長春不老之舞)로 펼친다.
우리 시대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을 울려라!’
안내 책자에 있는 말이다.
설명이 불요
무싯날 점심시간이면 무용수들이 연습 옷차림 그대로 집 현관 앞을 지나 다니는 모습들을 자주 만난다. 이번엔 손이라도 한번 보여달라고 해야겠다. 어찌 그렇게 간지럽고 연하게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미친 영감이라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받은 감동(感動)을 얘기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는 나 혼자만의 황홀한 상상을 넘어 운 좋으면 “할아버지 손 한 번 잡아보세요.” 할지도 모른다는 몽상마져 한다. 얼쑤 좋을시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