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묘용도 물 떠오고 땔감 나르는 일
<62>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②-1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으니
달리 마음 내 점검해서 되겠나
[본문] 편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산승이 보낸 편지를 받은 후로부터 매양 일상에 분주하여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항상 스스로 점검해보니 아직 공부에 힘이 붙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이 일상에서 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공부입니다. 만약 다시 힘을 써서 점검한다면 또한 다시 공부와는 멀 것입니다.
옛날에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 선사가 말씀하였습니다. “불법은 일상생활을 하는 곳과 걸어 다니고, 머물러 있고, 앉아 있고, 누워있는 곳과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곳과 말로써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곳과 동작을 하고 행위를 하는 곳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에서 달리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 또한 옳지 않습니다. 바로 피할 수 없는 곳을 당하여 절대로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여서 점검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강설] 사람의 삶에는 누구나 일상에 분주하여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식사를 하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잠을 자고, 사람을 만나고, 용변을 보고 하는 등등의 일이다. 이것이 사람의 삶이다. 만약 이것을 버리고 달리 다른 공부를 찾아서 점검을 하거나 그것 밖에 특별한 참선을 하는 것을 진정한 공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것이며, 반지나 비녀를 버리고 달리 금을 찾는 일이다. “도(道)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고 하였다.
일찍이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였던 회통(懷洞) 노화엄 선사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그 말씀이 그대로 정답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현재 보고, 듣고, 느끼고, 움직이고, 말하고 하는 그 사실이며 그 작용이다. 그것 밖에 달리 또 무엇이 있는가? 선게(禪偈)에 “백년삼만육천조반복원래시자한(百年三萬六千朝 反復元來是遮漢)”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의 100년 3만6000일 중에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 그것이 곧 그 사람이다.”
[본문] 삼조승찬(三祖僧璨) 대사가 말씀하였습니다. “분별심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텅 비고 밝아서 저절로 비춘다”고 하였습니다. 또 방거사(龐居士, ?~808)가 말씀하였습니다. “일상의 일이 별다른 것이 없다. 오직 내 스스로 상대하며 어울리도다. 낱낱이 취하거나 버릴 것이 아니요, 곳곳이 틀어지거나 어긋남이 없도다. 높디높은 저 벼슬(朱紫)을 누가 이름 하였는가. ‘산더미 같은 재산(丘山)’도 한 점 티끌인 것을.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떠오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네”라고 하였습니다.
[강설] 또 삼조승찬(三祖僧瓚) 대사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일상에 견문각지하면서 공연히 번뇌를 일으켜 분별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다음에 인용한 방 거사는 마조(馬祖)선사와 석두(石頭)선사의 법석에서 심요(心要)를 밝힌 분으로 당시 조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원래 부귀공명을 한 몸이 누리며 부호로 잘 살다가 깨달음을 이룬 후로 전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재도구는 동정호(洞庭湖)에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초가삼간에 몸을 담아 돗자리를 짜고 짚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아내와 딸이 모두 도를 이루었으며 스스로 열반에 든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하다. 게송의 말씀과 같이 높고 높은 벼슬자리나 산더미 같은 재산도 도를 통하여 인생을 초탈한 방 거사에게는 한갓 먼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참으로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였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의 “신통과 묘용이여, 물을 떠오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네”라는 말은 천하의 절창이며 뛰어난 안목이라고 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구절이다. 실로 신통과 묘용이 피곤하면 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고, 누가 부르면 돌아볼 줄 알고, 말을 하고, 소리를 듣고 하는 이 사실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출처 : 불교신문 2886호/2013년 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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