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쌀이나 반찬을 상급부대에서 받아오는 것을 "일종 수령"(一種受領)이라고 한다.
소위 "카피"라는 것을 3일 전에 가져다 주고 그 후에 물건을 받아 오는 것이다.
"카피"의 어원은 모르겠는데 그날 그날의 병력 인원을 보고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이것을 작성해 본 적은 없다.
모두 조수인 한상병이 작성하고 물건을 수령해 오는 것이였다.
보통 때는 병력의 이동이 거의 없어 3 ~40명의 주식인 쌀과 부식을 타오면 문제가 없는데
예비군이 입소를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예비군이 몇명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담당 구청직원도, 우리 군대 행정반이나 장교도, 그야말로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하물며 3일전에 알아맞춰 쌀과 부식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만일 500명이라 적어 올렸는데 300명이 입소하면 200명치의 식재료를 과다하게 타온 것이고,
500명이라 적어 올렸는데 600명이 입소하면 모자라는 100명치를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
사실 이 이야기를 쓰려다 문제가 발생할 듯해서 여지껏 쓰지 못하고 있었었다.
그런데 이 심각한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 한사람 뿐이였다.
흔한 말로 결산을 볼 때 + - 10원 이면 부대장이 크게 다친다고 "관구"에서 공갈을 치기도 한다.
그런데도 중대장이나 주임상사, 식사관, 나아가서 내 조수인 한상병도 걱정이 전혀 없다.
그러니 일단은 대충 인원보다 적은 숫자를 눈치껏 올려야 하고,
받아 온 식자재로 어찌됐던 해결을 해야 했다.
방법은 이러했다.
입소한 첫날 점심은 식사준비를 늦게하는데 아주 조금만 한다.
그 이유는 첫날은 해당 구청에서 빵을 나누어 주는데 처음 들어 온 예비군은 빵만 먹고 식사는 거의 안한다.
당일 저녁도 마찬가지로 인원수보다 상당히 적게 조리를 한다.
다음날 부터는 조금씩 양(量)을 늘린다.
3일째는 오히려 정량보다 더 많이 밥을 해야 했다.
그 며칠새에 군대밥에 적응을 하고 식사량이 늘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쌀의 소비는 적다.
쌀대신 보리를 더 넣는 것이였다.
보리쌀을 몇번에 걸쳐 씻어내 밥을 하면 밥이 검지 않고 희게 나온다.
당연히 불만은 없다.
퇴소하는 날 점심을 먹고 퇴소해야 하는데 그때도 조금 늦게 그리고 적은 량의 음식을 만든다.
한시간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예비군은 거의 밥을 먹지 않고 뛰쳐나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적은 숫자의 일종을 수령해도 무사히 견뎌 나가는 것이다.
아니 견뎌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일정의 비축을 해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시의 직업군인들의 재정상태는 무척 빈약했다.
우리 부대의 중사, 상사의 가족은 그리 윤택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되도록 하루 삼시 세끼니를 부대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물론 근무시간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치 않은 때도 부대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부대 내에서의 식사가 가능한 일반 사병 3~40여명의 식량에 그들의 숫가락을 얹어야 했다.그 여유분도 비축해야 했다.
부식 중에 여유가 있는 것은 소금과 고추장, 그리고 흔히 "쇼팅"이라 부르는 "쇼트닝"(Shortening)이다.
옛날 일반사병들의 얼굴을 기름이 번지르르하게 흐르게 하는 주범이다.
이런 것들을 알게 모르게 중,상사들은 조금씩 가져간다.
그리고 또 한가지.
두부와 콩나물.양이 많이 나오지만 일반 사병들도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다.
훈련병 때 먹던 콩나물은 길이가 무려 30여cm정도였다.
어떻게 그렇게 굵고 길게 길었는지 모르겠다.
남아 돌아가는 두부와 콩나물의 일부도 중,상사의 가족들에게는 중요한 식자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