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묘역 최초의 피장자 John W.Heron 헤론(1856~1890)과 가족묘.
아내: Gale.Harriet G. Heron(1856~1908)
외손자: Gale.James M(1914~1914)
"헤론"(John W.Heron)은 영국 "더비셔"(Derbyshire)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가서
미국 테네시州 메리빌大와 뉴욕 醫大를 졸업하여
의대 교수 초빙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에 조선으로 왔다.
그가 조선에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수정"(李樹廷)이 쓴 편지가 실린 선교 잡지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였다.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헤론"은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를 찾아 선교사 파송을 부탁했다.
선교 본부는 “아직 조선에서 드러내 놓고 복음을 전하기는 시기상조”이므로
우선 일본에 가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1885년 6월 21일에 입국하라고 했다.
이 시기 조선은…
1876년 개항이후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내란에 휩싸여 있었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권은 강대국에게 침탈되고 있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면서 먼저 일본으로 가서
"이수정"(李樹廷)에게 조선 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힌 다음
1885년에 6월 21일 다른 몇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의사인 "알렌"(H.N.Allen)이 거의 1년이나 먼저 입국했지만 그는
미국 장로교선교회 본부의 정식 임명을 받고 온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는 본래 중국으로 파송되었으나 1년간이나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조선에 와 있는 미국 공사와 외국인들이 양의(洋醫)가 없어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자진해서 조선 주재 외국인 공의(公醫)가 되어 온 것이다.
"알렌"(H.N.Allen)은 1884년 9월 20일에 입국했는데,
조선 사람 중 아무도 그가 기독교 선교사인 줄 몰랐다.
그러다가 그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알렌"(H.N.Allen)은 일약 국립병원인 "광혜원"의 원장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영익"이 칼에 맞아 크게 상처를 입었으나
한의사들은 외과치료를 할 수 없어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그 때 미국 공사가 "알렌"(H.N.Allen)을 추천하여
빈사 상태에 있던 "민영익"을 회복시키는 공을 세우게 됨으로써
"민영익"을 살린 고마움의 보답으로 만 냥의 거금을 받게 되었고,
高宗에게 천거되여 국립병원인 "광혜원"을 세우게 함으로써 초대 병원장이 되었다.
이 "광혜원"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며,
우리나라 복음 선교의 문이 열리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후 1887년 "알렌"이 주미 조선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가는 바람에 "헤론"이 2대 병원장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헤론"은 "알렌"의 뒤를 이어 高宗의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알렌"은 궁중 사람들만 치료하는 서양 병원 "광혜원" 설립을 허락받았으나
"알렌"은 일반 백성들도 치료할 수 있도록 탄원하여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비로소 일반 백성도 서양 의학의 혜택을 보게 되고 이로써 의료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헤론"은 "제중원" 제 2대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헤론"은 밤 낮으로 환자 치료에 전력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고
밤에는 성경 번역으로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의 건강상태를 보고 한 보고서는 1885년 4월 10일부터
그해 말까지의 통계를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절반은 천연두로 죽습니다.
매독은 아주 흔한 병입니다.
회충 환자가 1년간 760건이나 됩니다.
돌싸움과 활쏘기를 하다가 다친 환자도 꽤 많습니다.
피부병과 무좀은 백성들의 거의 전부가 걸려 있습니다.
학질은 만병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각기병(脚氣病)이나 디스토마 환자도 많습니다.
환자들에게 약을 주면 잘 먹긴 하는데 술을 많이 마시고 음식을 조심하지 않아서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장티푸스 환자 1,147
소화불량과 기타 환자 3,032
유행성 감기 114
호흡기 환자 476
정신병 환자 833
성병 환자 1,902
눈병 환자 105
피부병 환자 845
부인병 환자 67
천연두는 어찌나 심했던지 조선 왕실까지 침입하여 궁궐 안에도 무당과 판수가 자주 출입했으며,
"명성황후"의 소생 하나는 죽고, "엄비"의 소생 하나는 곰보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전염병 중에서도 "콜레라"가 가장 무서웠다.
"콜레라"가 엄습해 오자 평양감사는
"이 괴질은 만주 쪽에서 오는 것이니 그 길목마다 장승을 세워라.
띄엄띄엄한 길을 가로 질러 개골창을 파서 오다가 빠져 죽게 하라"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보고 그 당시 평양에 있던 "마페트"(Samuel A. Moffett)선교사는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날것을 먹지 말고 설익은 참외도 먹지 말고 물은 반드시 끓여서 먹어야 합니다.
옷은 깨끗이 빨아 입고, 집 안팎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라고 했지만 민중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병원을 시작한 "헤론"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Daniel L Gifford)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결국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헤론"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긴 사연이 담겨 있다.
"헤론"이 별세하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조선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신들의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시민들이 사대문 안에 묘를 썼다고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공사(公使)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었다.
"헤론"은 그의 병상을 지키는 아내와 "언드우드"에게
"나의 사역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지만 모두가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John W Heron M.D
Who Came To
Korea In 1885
Missionary Physician
to
Court And Legations
born
Derbyshire eng 1858
Died
Seoul July 1890
그의 묘비 아래에는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쓰여 있다.
특이한 것은 부인과 같이 합장되었는데 부인의 내용은 없다.
아래 이야기가 그 사연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이렇다.
"헤론"의 아내: Gale.Harriet G. Heron(1856~1908) "해리티"(Harriet Eliasabeth GIBSON : Hattie).
"해리엇 깁슨"(Harriet Eliasabeth Gibson)선교사(1860~1908)는 부유하고 신앙이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의과 대학 교수이고 어머니가 기독교 교육자인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대학 시절 의대생인 "헤론"을 만나 연애하다가 졸업 후 결혼하였다.
그리고 1885년 6월 "헤론"이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함께 내한했다.
그녀는 먼저 제중원에서 남편의 의료 사역을 도왔다.
1903년 3월 "모펫"(Samuel Austin Moffet)선교사의 편지에서
"깁슨은 매주 20~30명의 여자 아이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세례 문답 교육을 실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그녀의 학생들을
"스크랜턴" 부인에게 인계하여 훗날 "이화학당" 학생이 되게 하였다.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여성 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비선교적 결정을 하는 "알렌"(Horace Newton Allen)선교사와도 당당히 맞선 여인으로 전해진다.
1890년 7월 여름휴가 기간 중에 환자를 돌보던 남편의 임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그녀는 남한산성에서 수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에 억수같이 비를 맞으며 서울로 돌아와서 사랑하는 남편의 임종을 지켜봤다.
"한국과 한국인을 더 뜨겁게 더 사랑하고 싶소"
그리고 그동안 가까이 지낸 조선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말 했다고 한다.
남편 "헤론"선교사는 최후의 말을 하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한국에서 사역하기로 마음먹고
"천로역정"(天路歷程)을 한국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당시 치안이 불안한 시대여서 남편 없는 과부 혼자서 두 딸을 키우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권총을 두고 잠을 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게일"(James S. Gale)선교사와 "모펫"(Samuel Austin Moffet)
두 선교사가 그녀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게일"선교사의 적극적인 구애로
그녀는 1892년 4월 7일 "게일"선교사와 재혼하였다.
이때 "게일"선교사는 노총각으로 30세였고,
그녀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이 있었다.
(1885년에 출생한 큰 딸, Sarah Anne과 1887년에 출생한 딸,Jessie Elizabeth)
"게일"은 전 남편의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넣되, "헤론"이라는 성은 그대로 있도록 했다.
아이들의 미국인 성을 그대로 둠으로써 아이들의 장래가 더 좋아지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재혼 후 원산으로 사역지를 이동하는 "게일"선교사를 따라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한 여자들"이란 글을 남겼다.
또한 1895년 "게일"선교사와 함께 "천로역정" 번역을 완성하였다.
"천로역정" 번역본은 한국 교회에서 교리 교육을 위해 많이 사용된 책자이다.
그 후 원산 지역이 캐나다 선교사 구역으로 결정되면서 1900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게일"선교사의 목회를 도우며 사모로 살았다.
그녀는 폐렴이 심하여 1907년 8월 두 딸을 데리고 조선을 떠나 일본과 스위스 등
공기 좋은 곳으로 가서 요양하며 병의 회복을 위해 애를 썼다.
1907년 스위스에서 서울로 돌아왔으나, 다음 해인 1908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녀는 "게일"선교사와 16년 결혼 생활을 하였으나 첫 남편인 "헤론" 옆에 있기를 희망하여
그는 첫 남편인 "헤론"선교사의 묘소에 안장되었다.
"해리엇 깁슨"(Harriet Eliasabeth Gibson)의 묘비명은 뒤쪽에 있다.
HATTIE G. GALE "해티 게일"(게일 선교사와 재혼했기에 이름이 바뀌었다)
WHO CAME TO
KOREA IN 1885
A
MRS J.W. HERON "헤론의 부인"(그러나 여기에는 헤론의 부인이라고 명기했다.)
BORN IN
JOHESBORO TENN 1880
DIED
SEOUL MARCH 1908
UNTIL HE COME
JAMRS
Mc DOWELL
RELOVED SON
OF
ESSON & ANNIE GALE
NOVEMBER
1914
"헤론" 선교사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다.
"Sarah Annie Heron Gale" (사라 큰딸)
"Jessis Elizabeth Heron Carroll" (제시 작은 딸)
이중 큰 딸 "사라"(Sarah)는 성장하여 "게일"(J.S Gale)선교사의 조카인
"에손 게일"(Esson Gale)과 결혼했으며
"제임스 M 게일(James M Gale)을 1914년에 낳았으나 그 해에 죽었다.
한국식으로 하면 가족관계가 얽혔지만 서양에서는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이들이 그후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