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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조선 시대 최대의 처형지 |
성지 주소는 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 16-4. 사실 이 성지는 지난 11차 순례 때 왔다가 시간이 늦어 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린 곳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오늘 이곳을 순례하고는 다른 성지에 가기는 어렵다. 다만 시간제한이 없는 용산 성직자 묘지는 시간을 봐가면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 시대 서소문 밖 네거리의 위치
조선시대에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로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西小門)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다.
아현(阿峴)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城底十里) 중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성저십리란 도성에서 10리 이내의 지역을 뜻한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17세기부터 대표적인 난전시장인 칠패시장(七牌市場)으로 발전하여 한양의 대표적 상권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와 접해 있어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 공식 처형지이자 천주교도 박해지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서소문 밖은 서소문 밖 네거리는 당고개, 새남터, 그리고 절두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다. 조선시대 이곳에서의 행형(行刑) 기록은 연산군 10년(1504)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는데, “죄인을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하고 시신을 전시하여 뭇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내용이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을 처형하였다. 서소문 밖 형장의 위치는 현재 서소문로와 의주로가 교차하는 서소문 역사공원 인근인데 이는 《서경》의 "형장은 사직단(社稷壇)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따른 것이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공원)의 우측이었다.
또한 시장과 인접하여 많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으므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으며,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또한 조선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먼저 천주교도들의 순교터가 되었다. 그들은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다. 그런 다음 형조의 감옥인 전옥서(典獄署,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죄인을 이송할 때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을 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 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 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져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현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앉힌 뒤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 달레의 ‘천주교회사’)
서소문 성지의 순교자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신유박해 때부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황사영의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알렉시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다.
두 번째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남명혁(다미아노) 김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다)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천주교가 진리임을 밝히는 상제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이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 정정혜(바르바라)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다.
세 번째는 1866년 병인박해 때였다. 이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요한) 성인 등 3명으로 나타난다.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가해진 최대의 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을 통해 밝혀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름 없는 순교화(殉敎花) 꽃송이가 도처에서 수없이 떨어져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 순교자의 시성(諡聖), 시복(諡福)의 현황을 보면, 1925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박해, 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인 44명에 이른다.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이후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중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그렇다고 이곳의 순교자가 모두가 시복, 시성된 것은 아니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도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이다.
■108위 성인 중 서소문 밖 순교자 44명
■124위 복자 중 서소문 밖 순교자 27명
26,27번째는 1819년 8월10일에 순교한 동정부부 조숙(베드로) 권천례(데레사)이다.
성지 개발의 과정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이렇듯 숭고한 삶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의미 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에 합당한 모습을 갖출 수 없었다. 근대화의 상징인 철로의 개통과 더불어 이 지역은 철도시설 용지로 수용되어 고립되기 시작했다. 1927년 철로 안에는 수산시장이 개설되어 참형 터의 흔적이 사라졌다. 1966년에 고가차도가 건설되면서 서소문 밖은 통과지대가 되어 한층 더 이곳의 존재가 잊혀져갔다. 1973년에는 지하에 공영주차장과 쓰레기 재활용 집하장 등의 시설과 함께 서소문 근린공원이 조성되었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차도로 인해 접근이 어려웠고 염천교가 가로질러 이 땅은 마치 도심 속의 갇혀진 섬과 같았다.
이러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대한 무관심은 한국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사업 중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되살아났다. 1984년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103위 시성을 기념하여 서소문 성지의 순교의 땅을 매입하여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임송자 리타 作)을 건립하여 서울시에 기부 채납 하면서 서소문성지 조성사업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공원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순교자 현양탑이 약현성당 내 기도동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1999년 5월 성령강림대축일에 새로운 현양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2011년 7월 24일 서울대교구는 교회사뿐 아니라 한국사의 중요한 장소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쓰레기 재활용 처리장과 청소차 주차장, 노숙인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던 현실을 타개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중구청에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을 제안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교회가 협력하여 서소문역사공원(지상)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지하)을 조성했다. 그리하여 2019년 5월 29일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 및 봉헌미사를 거행하고, 6월 1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을 공식 개관했다. 이로써 사학죄인들과 반역 죄수들의 처형장이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가 온갖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과 함께 서로 위로하고 화합하는 역사 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거듭났다.
서소문역사공원은 원래 서소문 근린공원을 대폭 리모델링하여 지상 1층-지하 4층 연면적 4만 6천여㎡ 규모로 2019년 조성된 공원이다. 지상엔 역사공원과 시민 편의시설, 지하엔 기념전당, 하늘광장, 역사기념관, 교육 및 편의시설, 주차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서소문 역사공원
일단 성지에 도착하여 지상 역사공원을 먼저 관람하고 지하 역사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지상에는 1999년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탑은 그대로 보존한 채 광장을 공원 중심부에 놓고 녹지와 휴식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안내에 의하면 소나무, 대왕참나무, 장미 등 수목 45종 7,100주와 창포, 핑크 뮬리, 억새 등 초화류 33종 10만 본을 심어 '힐링'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순교자 현양탑 가까이 야외제대 옛 우물인 뚜께우물과 조각상 노숙자 예수가 있다.
▲순교자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은 1999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세워진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84년 그해 성인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공원 안에 일부 토지를 매입하여 건립한 순교현양탑이 있었다. 공원 조성으로 이 탑이 헐리게 되자 인근 약현 성당으로 옮겼다. 이 자리에 이 탑을 세웠다.
형구 셋을 기둥처럼 세우고 가운데는 십자가 고상을, 좌우에는 서소문 성지에서 순교한 44위의 성인과 복자 27명을 비롯해 진리를 입증하다가 희생된 30위의 순교자들의 명단을 새겨 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가운데 고상 아래에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노숙자 예수( Homeless Jesus, 티모시 슈말츠, 2013)
얇은 담요를 얼굴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하는 노숙인의 모습이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그의 발등에 못이 박혔던 흔적이 보인다. 작가는 마태복음 25장 40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에서 영감을 받아 노숙인의 모습으로 예수를 표현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이든, 생존경쟁에서 낙오되어 노숙인이 된 사람이든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사랑을 실천했던 예수님에 대한 상념을 일깨우고 있다. 원래 어느 성당 앞에 설치되었을 때, 신성 모독이라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항의를 받아 철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 로마 교황청에서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을 설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축복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마 교황청에 이어 스페인의 마드리드, 아일랜드의 더블린, 싱가포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등 세계 각지에 설치되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우리는 오늘 노숙자의 모습을 한 예수님을 얼마나 자주 지나치는가? 이 ‘노숙자 예수’를 보고도, 심판의 날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는 말씀입니까?”라는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바로 옆에는 야외 제대가 있다.
▲뚜께우물(망나니 우물)
조선시대 국가 공식 처형장소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뚜께우물이다. 우물이 크고 깊고 물의 양이 많아 늘 흘러내려 평상시에는 우물의 덮개를 덮어 두고 있다가 망나니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뚜껑을 열고 칼을 씻었다고 전해진다. 사형 집행 당시, 망나니가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칼날에 뿜어 대며 죄인 주위를 돌면 가족이나 친지들이 돈을 던져 주며 ‘행하(行下)’라는 팁을 주었다고 한다. 가급적 고통을 주지 말고 단칼로 죽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뚜께우물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개정(蓋井) 우물’이라는 명칭이 되었고, 주변 마을의 이름도 “개정동”이라 불리었다.
서소문 역사공원을 관람한 후 지하 서소문 성지 박물관을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편하다. 순교의 칼이 섬뜩하게 붙어 있는 벽면 옆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2019년 6월 천주교 순교의 역사는 물론 조선 후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회적 시대상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장소이다. 지하 건물이지만 완성도 높은 건축물과 종교적 상징성, 시민과 상생하는 공공성이 잘 표현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2019년 제37회 서울시 건축상에서 133개의 작품 중 당당히 최우수상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지하 1층은 도서실, 세미나실, 기념품 매장과 카페, 전시품 로비, 운영사무실 등 방문자를 위한 편의시설을 배치했다. 지하 2층은 정하상 기념경당, 기획전시실, 기획 소강당, 3층은 기념전당인 콘솔레이션홀, 하늘광장과 상설전시실로 구성된다. 넓은 뜻의 역사박물관 하면 지하 1,2,3층을 다 말하지만 좁은 뜻의 역사박물관 하면 지하 3층을 말한다.
오늘 우리는 일단 바로 지상 공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지하 3층에 갔으나 여기서는 순서상 바로 박물관 입구로 들어오는 순서로 소개한다.
서소문 성지 박물관 입구
문을 통과하면 넓은 공간이 있는데 순교자의 칼, 순교자의 머리 등 순교와 관련된 몇 점의 조각이 있다. 게시되어 있는 작품 설명을 곁들인다.
순교자의 칼 (2008 이경순)은 청동 브론즈와 스테린리스로 제작되었는데, 조선시대 죄인들의 목에 씌웠던 칼을 형상화하여 중첩 배열함으로써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의로운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또한, 고통 속에서 땅을 뚫고 나와 하늘로 치솟는 작품의 형태는 의로운 이들의 기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수난자의 머리 (2019 최의순)는 식민의 유산을 떠 않은 채 다가온 한국전쟁과 분단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나타낸 작품이다. 절제된 형태와 재료의 물성에서 나오는 거친 숨소리에는 길고긴 어둠의 세월을 견뎌낸 우리의 처연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하3층 전시관 - 콘솔레이션 홀, 하늘광장, 하늘길, 상설전시실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l)
땅속 14m 깊이 지하 3층에 위치한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l)은 고구려 무용총의 내부 구조에 모티브를 둔 벽면에 3차원적 웅장한 영상시스템 갖추어 관객들에게 극적인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또한 콘솔레이션 홀은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인 다섯 분의 유해를 모신 곳을 자연채광이 비추어지고 있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 땅에서 목숨을 다한 순교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안과 평화로움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무슨 행사가 열려 내부를 자세히 볼 수가 없어 사진 자료 몇 점을 제시한다.
열린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들어와 제단 위 순교자의 유해함의 표면 부조를 비춘다. 유해부조(2019 조숙의 작)는 순교자에게 바치는 종려나무 가지가 중심이며 십자가의 고통을 상징하듯 세 개의 못도 모서리에 새겨져 있다. 5위의 순교자는 이영희(막달레나), 이정희(바르바라), 허계임(막달레나), 남종삼(세례자 요한), 최형(베드로)이다.
콘솔레이션 홀 천정에서 들어온 빛은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하늘광장으로 이어진다.
▲하늘 광장
하늘 광장은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추념의 의미를 지닌 곳으로 지하에 있으면서도 천장는 틔어 놓았다. 이름 그대로 하늘을 볼 수 있는 광장이다. 하늘광장에 들어서면 3면의 거대한 붉은 수직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반면에 윗면은 뚫려 있어 자대한 하늘을 볼 수 있는데, 어쩌면 인간 존재의 한계와 그에 대비되는 신(神)의 무한한 능력과 영역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하늘 광장에는 두 개의 작품이 기다린다. 하나는 서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는 영웅이다.
서 있는 사람들(정현 작)은 서소문 형장에서 박해받다 순교하여 성인의 반열에 오른 44인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으로 철도 침목으로 만들어졌다. 지난날 무거운 기차가 수백 번, 수천 번 위로 지나가며 부지불식간 짓밟히며 누워있던 침목(枕木)이 이제 서 있는 사람들로 재탄생하여 하늘을 향해 있는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이 땅에서 순교한 거룩한 이들과 닮은 것이다.
영웅(이환권 작)은 인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을 반영하는 듯, 왜상기법을 이용하여 한 인간을 왜곡되게 수직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삶을 이어가면서 누구나 타인의 선입견 가득한 왜곡된 시선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의 주인이고 영웅이라는 깊은 메시지를 담았다.
해설자는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사람은 무의탁시설 안나의 집에서 헌신하는 김하종 신부라고 했다. (‘김’은 김대건, ‘하종’은 하느님의 종) 오늘날의 영웅은 대접 받는 사람이 아니라 대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작품은 언뜻 보아 국기게양대와 같은데 가만히 보니 장대 상반부가 빗자루를 든 사람의 모습이다
▲하늘 길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의 삶이 순례의 여정인 것처럼 하늘 길은 이 여정이 함축된 '순례자의 길'을 뜻한다. 마치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을 연상시키는 이 길에 들어서는 순례자들은 좁은 문으로 향해간다는 삶의 진실을 마주하고,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함을 자각할 때 고독해진다.
그러나 고독 한가운데서야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자기 발걸음의 의미를 찾게 되며, 삶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고 세상을 밝히게 된다. 더없이 소중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함께 살아가게 하는 선택은 대부분 좁고 험난한 길과 맞닿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좁은 문'을 향한 우리의 선택은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결과로 귀결되는 것이다.
해설자를 따라 물결이 출렁이는 하늘 길을 걷는다. 아늑한 몽환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이것이 죽은 다음 영혼이 가는 궤적일까? 하늘 길 끝에는 공예작품 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발아(Germnation 권석만 2019)는 쭈그러진 원통을 잘라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작품을 보고도 제목과 관련짓기는 쉽지 않았다. 설명에는 작가는 비움을 통한 생성을 표현하고자 원초적 물질인 자연석을 선택하였으며 돌의 자연스러운 물성과 물체 내부의 인공적인 재질감을 대비시켜서 표현하였다고 되어 있다. 해설자의 말을 듣고 보니 씨앗 하나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놓은 형상이라서 어느 정도 제목이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콘솔레이션 홀 앞에서 해설자를 만났는데, 우리가 전시 유물에 관심을 많이 보이자 그녀는 지하3층 하늘 광장과 상설 전시실을 함께 다니며 기념사진 촬영도 해주고성의 있는 해설로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주었다. 이제는 상설 전시실이다.
▲敬天
안중근(토마) 의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때에 쓴 것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고 하면 유학자를 떠올리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 공경과 이웃사랑이라고 하셨다. 하느님 공경이 경천(敬天)이고 이웃 사랑이 애인(愛人)인 것이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 인간이 있다. (배형경)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내려다본다. 벽에 머리를 대고 고뇌하는 사람도 있다. 실존적 인간에게 가장 많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고독이요, 단절이요, 절망이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은 벽이다.
▲103위 성인을 위무함 (김기희)
▲순교자의 무덤(최지만)
103위 성인을 위무함은 글자 그대로 103위 성인의 각각의 얼굴을 표현했고 순교자의 무덤은 성인의 유해를 담은 사발 지석을 나타낸 것이다.
▲일어나 비추어라(김경자, 김의용, 강정조, 손대현 작)
2014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한국 방문과 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기념하고 남북의 통일과 생명의 회복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천주교회의 쇄신의 표징으로 제작되었다. 생명문화 회복의 기원을 뜻하는 의미에서 한국 민화 십장생도를 밑그림으로 바탕으로 하고 한국천주교의 과거, 현재 미래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나전칠기의 기법으로 조형화했다.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만국기 등 각양의 소재를 동원했다.
‘일어나 비추어라’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구절로 어둠의 시대를 벗어던지고 새 희망 새 시대를 열어가는 시대적 사명을 말한 것이다. 극작가 오혜령의 신앙 간증 고백록 제목이기도 하고, 많은 예술적 테마를 열어가는 구절이다.
▲피에타 125위(이장우 작 2013)
하느님의 종 125위 순교자의 시복 추진 중에 만든 작품이다. 성모님이 125위의 순교자를 안고 있는 형상으로 품에 안긴 순교자가 예수님으로 치환되어 성모님의 전구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순교자의 조형물의 125위의 순교자의 얼굴 형상이 영상으로 계속 바뀌어 올라온다. 이 중 최양업 신부를 제외한 124위의 순교자는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지금 최양업 신부도 시복 추진 중이다.
▲명례방 그림과 김범우 초상화
명례방은 김범우의 사저가 있었던 곳인데, 이곳에서 천주교 전래 초기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일신 등 신자들이 모여 신자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훗날 이 부근에서 명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가장 낮고 거룩한 손길 (이수경 작)
한국인으로서 동서양을 이어 사랑을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이태석 신부는 2001년 내전 상황의 열악한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주민을 위해 헌신적인 선교봉사를 하다가 2010년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이밖에도 전시실에는 엄청난 문헌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 전시관 관람에 이어 이제 지하 2층으로 올라갔다. 지하2층에는 정하상 기념경당이 있다.
정하상 기념경당
정하상 기념 경당은 서소문밖 참형터에서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가족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당이다 서소문 성지의 유일한 성전으로 모든 미사는 여기서 열린다. 정하상의 아버지는 초기 교회의 창립자 정약종이며 그의 어머니는 유소사, 그의 누이는 정성혜 엘리사벳, 그의 형은 정철상이다. 이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문(조완희)
이 조각은 정하상 기념경당의 문의 형태로 제작하여 설치되어 있다. 서소문의 이름 글자 중 한글초성 ㅅ과 ㅁ자를 소재로 하였는데 ㅁ자는 연못을, ㅅ자는 서소문을 의미한다. 그 주위에 보름달·하현달·초승달을 배치하여 이승훈 베드로의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의 의미를 담았다. 등장하는 사람 형상은 베드로임과 동시에 3만여 명의 한국 순교자를 한자로 의인화 한 것이며, 노랑 사각점 44개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인 44명을 나타낸다. 상부 구름은 한국문양으로 표현하였고, 비둘기는 말씀의 이끔을, 7개 십자 점은 칠성사를 뜻한다고 한다.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水上池盡)'은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 한 말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위로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라고 하여 굽히지 않는 신앙심을 증거한 말이다.
▲피에타(장준호)
처형당한 자식의 머리를 품에 안고 서 있는 어머니의 형상이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상실감과 아픔이 그리스도를 잃은 성모님의 고통과도 맞닿아 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을 자비롭고 온화함으로 승화시킨 얼굴이다.
▲정하상 가족상
정하상 바오로는 순교한 부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등에 업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진리의 하느님을 의미한다. 오로지 이 막대기에 의지하고 움켜쥔 그의 굵은 손에는 강한 결단과 의지가 담겨 있다.
형 정철상 가롤로는 부친의 저서를 들고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상숭배관이 담긴 복식을 하고 있으며 이는 신앙심과 효심이 서로 조화로운 합일에 이른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따뜻한 품과 싸늘한 버려짐을 두루 겪으면서도 그분과 일치하고 사랑 깊은 신뢰로 천상을 향하고 있다.
어머니 유소사 체칠리아는 피비린내 나는 수난의 세월 가운데에도 가족을 사랑과 기도로 고요히 지켜온 존재이다. 언제나 순교하기를 바랐던 그녀는 종려나무 가지에 기대어 있다. 길게 누운 그녀의 인체는 끝까지 지켜낸 긴 수명과 함께 빈손으로 맞은 평온한 옥사를 의미한다.
다시 한 층을 올라 지하1층이다. 지하1층는 도서실,과 기념품매장 등 편이시설이 있고 공예 전시품이이 전시되어 있다. 성경직해, 천주실의 척사윤음 사학징의 등의 교회천주교 관련 자료 이외에도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등 예학서와 법전, 송자대전 성호집 등의 개인 문집, 천주교 신자이며 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매옥서궤 등 대표작들, 심지어 동학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까지도 전시되고 있었다.
첩보의 내용은 청송에서 사학죄인을 체포하여 안동과 경주에 수감하였다는 절도사의 보고문이다.
로비에도 많은 조각품의 전시도 볼 수 있는데 이경순(바올라) 작가의 순교자의 길을 예로 든다.
서소문 성지 박물관을 나오니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성지는 들어갈 수도 없는 시간. 서울역 KTX 예매 시간은 6시 48분. 바로 승차하러 가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다. 시간제한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용산 성직자 묘지라서 가기로 했다.
큰 도로에 나가 손쉽게 택시를 이용했다. 또 시간과의 전쟁이다. 용산 성직자 묘지는 용산 성당 경내에 있다. 용산 성당은 지명 그대로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옛날 같으면 산 꼭대기였을 것이다. 다행히 택시는 17시 30분 용산 성당에 우리를 내려놓아 주었다. 오르막이라서 걸어 오르기는 너무 힘든 코스라 택시비가 아깝지 않다.
용산 성직자 묘지 - 94년 만에 부임한 초대 교구장 |
서울시 용산구 효창원로 15길 37. 5시 30분쯤 성당 마당에 이르니 사람이라곤 볼 수 없다. ‘삼호정 고갯길’을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라 한강이 내려다보는 전망을 자랑할 만한 곳이지만 지금은 날씨도 어둑하고 건물이 시야를 가리기도 했지만 경관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없다. 큰 건물 하층에 불이 켜져 있다. 성전 건물이거니 했는데 건물 근처에 있는 표지석을 보니 2002년에 건립한 60주년기념 교육관이었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후 조선대목구는 1887년 용산 함벽정(현 성심여고 자리)과 삼호정 일대(현 성직자 묘지)의 임야를 매입하여 여주군 강천면의 오지 부엉골에 있던 예수성심신학교를 옮겼다. 3년 뒤인 1890년 삼호정 언덕에 공소를 설립하고 1897년 삼호정 뒷산을 성직자 묘지로 삼은 것이 현재의 용산 성직자 묘지의 유래가 된다.
그러나 이곳이 성직자 묘지로 제대로 꾸며지게 된 것은 1890년 2월 21일 블랑(Blanc, 白圭三, 1884~1890, 요한) 주교가 선종하자 왜고개에서 구운 벽돌을 가져다 여기에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묘지를 조성한 때부터였다. 당시의 삼호정 공소는 그후 1942년 1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날 용산 성당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시대 때 대공진지였던 이곳에 성당을 지어 사용하다가 한국전쟁 때 크게 훼손된 것을 1954년 12월 신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성당과 종탑을 완공하여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종탑은 기념관의 건립과 함께 없어졌으나 종은 아직 남아있다.
용산 성당 내 성직자 묘지에는 1890년 이래로 70여 성직자가 잠들어 있다. 특히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천신만고를 겪으며 조선에 입국하려다 1935년 끝내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1792~1835, 바르톨로메오) 주교의 유해가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이 되던 1931년 10월 15일에 이곳으로 이장됨으로써 성직자 묘지로서의 의미가 더 실려지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앞쪽 언덕 경사지에 위치한 묘지부터 찾았다. 내려가는 계단 오른편으로는 유해 봉헌관 베나디아의 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왼편으로는 성직자 묘지로 내려간다. 입구에는 성 요셉 부자상이 멀리 새남터 방향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리고 묘지 맨 위에는 대형 십자가가 든든하 게 자리하고 있고 왼편에는 제대와 성모동굴이 자리하고 맨 왼쪽 끝에는 사제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이 또한 지키고 계신다.
이 묘지에 모셔진 성직자는 4위의 주교, 65위의 신부,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2위이다.아래 안내판 사진의 흰색 부분에는 바로 용산 신학교 출신이신 김원영 아우수스티노 신부이다.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7대 교구장, 블랑 주교, 8대 교구장 뮈텔 주교, 드브례 주교도 눈에 띈다.
흰색 종이가 얹혀진 묘가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이다. 종이는 아마도 신자들이 바친 기도문을 적은 종이로 추정된다. 바로 옆 계단 건너가 뮈텔 주교의 묘이며 뮈텔 주교의 바로 뒤가 블랑 주교의 묘이다.
순례를 마친 후 브뤼기에르 주교 묘를 촬영하지 못했다고 서울 안내자 친구 신 모세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더니 며칠 뒤 마침 다시 갈 기회가 있었다며 브뤼기에르 주교묘를 찍어 휴대폰으로 전송해 주었다. 그 친절함에 다시한번 감사들 드린다. 그 사진을 보니 며칠 사이에 사진도 놓였고 누군가 꽃다발도 바쳤다.
살제 조선교구 설정을 건의한 사람도 브뤼기에르 신부였고, 설정이 어렵다는 교황청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사람도 브뤼기에르 신부였다. 결국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이 되고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이 되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 것은 썩 뒤인 1832년 7월 25일 이후의 일이었는데, 이때 이미 그는 조선 입국을 위한 장도에 올라 마카오에 와 있었다. 늦게 발령을 접하자 그는 더욱 마음이 급해져 조속한 조선 입국을 위해 필리핀, 중국 대륙을 걸으며 갖은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중국 서만자 (西湾子, 오늘날 열하성)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10월 19일에는 오늘의 열하성(热河省)의 뻬리쿠라는 교우촌에 도착하였으나 20일에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그리운 조선 땅을 눈앞에 바라보며 선종하였다. 그 때 주교의 나이 43세였다.
조선을 향하여 페낭을 떠난 지 4년간, 오로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희망만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한 불요불굴의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였다.
서만자에서 때를 기다리던 모방 신부는 그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그해 11월 21일 장례를 치러 그곳에 묻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이듬해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등이 조선 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조선 교회는 드디어 모든 조직을 갖춘 완전 독립된 교회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그의 유해는 어찌 되었는가? 1931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조선 전교 100주년을 맞아 북풍이 몰아치는 묘지로부터 따뜻한 서울에 모시고 와 10월 15일 용산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안장하니 선종한지 94년 만에 평생에 그리던 조선 땅에서 잠들게 되었다.
묘지 둘레 담장이나 가림막도 참 우아하다. 담장 주위를 따라 십자가의 길 14처는 십자가형 석재로 되어 있다.
묘지를 떠나 바로 옆 건물 베다니아의 집을 거쳐 성전에 갔다. ‘베다니아의 집’은 죽은 자가 가는 봉헌당(납골당)이다. 성서에서 베다니아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곳이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이다. 입구 벽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구절이 유난히 크게 쓰여있고 그 밑에는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여 기록되어 있다.
성전에 이르렀으나 늦은 시간이고 시간도 급하여 어둠 속에서 불이 밝혀진 제대만 카메라에 담아 돌아섰다. 나오는 길 현관에 그림 선교사들의 출발이 있었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은 새남터 성지 소성전 부근 참조)
서둘러 서울역에 와서 모세 친구와 헤어지고 KTX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하여 절두산성지, 용산 성심신학교, 노고산 성지는 다음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안내해준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이며 함께 한 형제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