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8. 약탈된 장경동과 돈황학
‘왕오천축국전’ 발견된 막고굴 제17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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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막고굴 대불전> |
사진설명: 전진 건원 2년(366) 낙준스님이 첫 석굴을 개착한 이래 원나라 때까지 막고굴은 확장을 거듭했다. 원나라가 망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
중국 대륙 북서쪽에 자리한 감숙성(甘肅省)은 북서에서 남동 방향에 걸쳐 1,655km 길이로 뻗어있다. 폭이 100km도 넘지 않은 곳이 종종 있을 정도로 긴 회랑(回廊)처럼 생겼다. 하서주랑(河西走廊. 일본은 하서회랑)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하서주랑은 고대 중국과 서쪽의 유목민 국가들을 잇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물론 전한 무제(기원전 141~87년)때 황하 서쪽에 설치된 ‘하서사군’(河西四郡)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원전 127년 한 무제는 북방의 골칫거리인 흉노족들을 퇴치하기 위해 10만의 군대를 출동시켰고, 그것이 성공을 거둬 이 지역에 하서사군을 설치했다. 장액·무위·주천·돈황 등 4군이 그것. 당시 흉노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 표기장군 곽거병. 한 무제는 하서사군을 완전 장악하기 위해 기원전 108년 동쪽 지역에 살던 농민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방어와 개간을 동시에 노린 이민정책이었다.
돈황은 이러한 토벌과 개간을 거쳐 역사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 돈황에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돈황 주변은 온통 사막이다. 모래사막이 아니라 황량한 대지만 펼쳐진 사막이다. 그런데 돈황 지역에 들어가면 꽃이 만발하고 곡식이 풍성한 들판이 있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 도시가 돈황이다. 사방으로 뻗은 관개 운하망도 눈에 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돈황의 주 수입원은 관광으로 바뀌었다. ‘소리가 들리는 산’ 명사산(鳴沙山)과 막고굴 때문이다. 사실 돈황은 2000년 훨씬 전부터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정거장 중의 하나였다. ‘돌아올 수 없는 사막’으로 불리는 타클라마칸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쉬어가는 오아시스였다. 고대 동서교역로가 북쪽과 남쪽 루트(서역북도와 서역남도)로 갈리는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여기서 갈라진 실크로드는 서쪽으로 1,000km 이상 떨어진 카슈가르에서 다시 합쳐졌다.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보물창고 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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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동> |
사진설명: 돈황 막고굴 제17굴 전경. 5~11세기에 사경된 두루마리 경전이 이 석굴에 가득했었다. |
돈황은 여행자들에게 마지막 휴식을 제공하는 오아시스일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유목민족을 제압하고, 중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곳이었다. 한 무제가 기원전 111년 이곳에 첫 번째 군(郡)을 설치해 성을 쌓게 한 것도 이 같은 군사적 이유에서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돈황은 사람들의 물결로 북적될 만큼 여행객들에게 사랑받는 중간 기착지가 됐다. 상인들은 몇 달간의 고되고 긴 여행 끝에 이곳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장사를 했으며, 장사가 끝나면 중국과 아라비아 식(式)이 포함된 다채로운 여흥을 즐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돈황에 정착했고, 교역으로 살아가던 많은 민족들이 이곳을 거점도시로 삼았다. 돈황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가 돼갔다. 특히 인도·중국·중앙아시아 그리고 서구의 문화가 만나는 지점이자, 실크로드 초기부터 많은 구도자와 순례자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동쪽에 전파할 목적으로 찾아든 곳이기도 했다.
구도자들이 모여들고, 상인들이 재물을 보시하면서 돈황은 자연스레 불교 성지로 변모돼 갔다. 전진(前秦) 건원(建元) 2년(366) 낙준스님이 어느 부유한 순례자에게 “여행을 마치고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석굴사원을 지어 부처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사원 개착 문화가 바미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돈황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 1,600m 길이의 석벽에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했다. 이를 선례 삼아 수 백 년 동안 수많은 석굴사원들이 연이어 생겼고, 오늘날 막고굴(莫高窟) 혹은 천불동(千佛洞)이라 불리는 ‘불교회화의 정수’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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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불상> |
사진설명: 돈황 막고굴 제259굴에 안치돼 있는 불상. |
초기에 개착된 석굴 사원들은 대개 벽면과 천장에 벽화가 그려졌고, 점토로 조성한 큰 부처님을 중앙에 놓고 수많은 작은 부처님들이 호위하는 형태의 작은 동굴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상인들과 순례자들은 힘든 여행길을 앞두고 대자대비한 부처님 앞에 여행에서의 안전한 귀향을 두 손 모아 빌었다. 이들은 석굴 사원에 재물을 보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벽화가 그려진 새로운 천불동들이 속속 생겼다. 서진(265~316), 위진남북조(304~589), 수, 당, 오대(907~979), 송, 원을 거치며 석굴 사원들이 계속 늘어났다.
원나라가 망하면서 이곳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명, 청을 지나며 돈황과 막고굴도 쇠퇴를 겪었고, 20세기 초 ‘돈황문서’가 대량 발굴될 때까지, 세인들의 관심대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곳엔 - 옛날에는 천여 개의 석굴이 있었다지만 - 492개의 석굴만 남아 있다. 석굴 속에 2,000점이 넘는 채색소조상과 총 45,000㎡ 면적에 그려진 벽화들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비단길 문화사와 불교미술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스타인·펠리오 등이 경전 대량 빼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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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왕원록> |
사진설명: 돈황 막고굴 제17굴을 850년 만에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제17굴에 있었던 많은 문서들은 해외로 유출되고 말았다. |
돈황에 도착한지 2일째인 2002년 9월27일. 일찍 막고굴로 출발했다. 설레는 가슴만큼이나 빨리 보고 싶었다. 차를 타고 달리기 40분, 저 멀리 사진에서 많이 보던 절벽과 숲이 보였다. “막고굴이구나” 싶었다. 차에서 내려 인도를 따라 서서히 걸어들어 갔다. 근세 중국의 석학 곽말약(1892~1978)이 쓴 ‘막고굴’ 현판이 입구의 문에 걸려있었다. 안내인을 따라 카메라를 포함한 모든 물건을 보관소에 맡긴 채, 개방되는 석굴로 들어갔다. 몇 몇 굴을 보고 신라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굴에 도착했다. 장경동(17굴)을 - 16굴의 새끼 동굴이다 -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됐다. 순간 ‘왕원록’이라는 도사가 떠올랐다.
돈황 석굴은 원나라 이후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당나라 이후 감숙성 일대는 항상 정정(政情)이 불안했다. 서하(西夏. 1032~1277)가 이 지역을 장악한 어느 날, 돈황 막고굴의 한 수행자가 경전과 불상들을 한 석굴에 넣고 밀봉했다. 경전을 온전히 보존해 난리가 끝나면 다시 꺼내 보기위해. 그러나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 수많은 시간이 무심하게 흘렀다. 그러다 1900년 돈황 문서가 밀봉된 장경동(藏經洞)이 우연히 발견됐다. 호북성에서 태어난 왕원록이라는 도사(道師)가 이곳에 와 흙 속에 묻힌 석굴을 보고, 한 굴에 살면서 장경동을 발견한 것이다. 서하가 돈황 지역에 침입한 지 850년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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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자인가, 탐험가인가> |
사진설명: 두루마리로 된 경전류들을 빼돌린 영국의 오렐 스타인, |
막고굴에 정착한 왕도사가 하루는 어떤 굴을 청소했다. 청소 도중 동굴 북쪽의 벽 한 면이 부풀어 올라 터질 듯하게 된 것을 발견했다. 벽을 걷어내니 수많은 문서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바로 17굴이었다. 곧 돈황 현청(縣廳)에 신고했으나, 알아서 보관해 두라는 통보만 되돌아왔다. 그 즈음 중앙아시아 일대를 발굴하는데 열 올리던 오렐 스타인(1862~1943)이 소식을 듣고 돈황에 나타났다. 1907년 3월 스타인이 도착했을 때, 현지 관리들에게 사본(寫本)과 탱화 일부가 이미 팔려나간 뒤였다. 당시 왕도사는 수백 개소의 석굴들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와 조상(彫像)들을 보수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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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펠리오> |
사진설명: 장경동에서 작업하고 있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 스타인에 이어 폴리오도 5,000여 권의 경전을 장경동에서 빼돌렸다. |
스타인은 지금까지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액수의 돈을 왕도사에 주고 장경동에 들어갔다. 850년 만에 발견된 장경동에 들어선 스타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천 권이나 되는 사본과 두루마리가 차곡차곡 동굴 안에 쌓여 있는 것이었다. 6,000여 권의 경전을 상자에 넣고 낙타 40필에 실어 국외로 반출했다. 스타인이 왔다 간 뒤인 1908년. 중국학 권위자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1878~1945)가 막고굴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밀 검토한 그는 왕도사를 설득해 5,000여 권의 경전을 열량의 차에 싣고 나갔다. 여기에 혜초스님의〈왕오천축국전〉사본(寫本)도 들어있었다.
돈황문서 연구로 ‘돈황학’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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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
사진설명: 돈황 막고굴 일대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경전과 소상들을 일본으로 유출시킨 사람이다. |
뒤 이어 독일의 폰 르콕(1860~1930), 미국의 랭던 워너(1881~1955),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1876~1948)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돈황에 들어와 엄청난 양의 고급 골동품들을 실어갔다. 그들은 골동품 수집상, 심하게 말하면 도굴꾼이나 다름 없었다. 이를 뒤늦게 안 청나라 정부는 1910년 더 이상의 유출을 막는 조치를 취했다. 동시에 동굴에 남아있는 문서들을 북경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 중 일부는 교육부 창고에 보관됐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들 문서 일부는 교육부에 근무했던 중국인의 장서 속에서 훗날 발견되기도 했다.
청나라 정부가 손을 댄 후에도 오타니 탐험대(1911년), 러시아 오르텐부르크 탐험대(1914년) 등이 이곳을 방문해 남아 있는 문헌들을 왕도사로부터 입수해 갔다. 막고굴에서 발견된 경전은 4만여 점, 일본과 러시아 발굴조사단이 돈황에 도착했을 때, 매물로 나온 사본은 적지 않았다. 1913년 다시 돈황에 돌아온 스타인은 인근 마을에서 두루마리 600점을 구입해 유유히 중국을 벗어났다. 1919년 중화민국 정부는 비로소 돈황석굴에 남아있던 모든 자료들을 거두어 갔다. 그러나 이미 ‘돈황 문서’는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뒤였다. 유물 약탈에 이어 흩어진 문서를 연구하는 학구열이 전 세계에서 타올랐다. ‘돈황학’(敦煌學)이 탄생된 것이다. 이들 실크로드의 이방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도굴꾼일까, 약탈자일까, 아니면 발굴자일까. 17굴 입구에서 과거의 씁쓰레한 기억, ‘왕도사’와 ‘일단의 무리’들을 생각하며 발길을 돌려 나왔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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