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일찍 돌아오는 길, 아주 오랫만에 길보드 디브디를 잔뜩 집어들었다. 13편. 처음 목표는 3편이었다. 연결을 끊었던 사라운드를 연결하고 몇편을 골랐다. 내처 그렇게 보낼 생각이었다. 흠, 처음 고른 2편이 화질은 좋은데 소리가 먹통이다.
세 번째로 든 작품, [필로마니의 기적]. 주디 덴치,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할 정도라면 과장이겠으나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영화건 티비건 픽션보다 다큐, 넌픽션이 좋은 건 그 사실성이 주는 무게 혹은 핍진성에 대한 몰입때문일까. 요란스럽지 않은 대사, 화면, 그 잔잔한 일상성의 화면에 기득한 주디 덴치의 주름진 얼굴은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감정의 흐름을 함께 하게 한다.
과거, 죄, 슬픔, 고통, 신과 종교, 속죄, 종교라는 이름 아래 가증스럽게 정당화 된 폭력, 신의 이름을 앞세운 다른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인간의 잔인한 처벌, 그에 대한 당당한 후광이 되는 신 혹은 종교...단 한 번의 시랑으로 미혼모가 되어 낳은 아들을 어디로 누군가에게도 모른 채 강제로 입양당한 여인이 50년이 지나서야 그 비밀을 탈고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영화는 주제만으로는 어떤 영화에 못지
않게 무겁고 어둡다.
그러나 영화은 그 주제의 무게에 압도당하지도 않고 가벼움에 휩쓸려 신파로 추락하지도 않는다. 시나리오의 힘이겠으나 화면속에 담아내는 감독의 시선도 큰 몫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몫은 주디 덴치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기회만 되면 끊임없이 자신이 읽은 로맨스 소설을 들려주는 그녀에게서는 할머니이기에 더 아름다운 감성의 기운이 풍겨나오고 그 감정이 담담하나 더할 수 없이 큰 슬픔과 결합될 때 전해지는 울림은 깊고 묵직하다. 스티브 쿠건이 연기한 전형적인 저널리스트적 건조함이 그녀 옆에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잔잔하면서도 리얼한 영화의 무게를 더해준다.
50년만에 찾으려는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다음이나 그 아들의 모습을 찾아가면서 알게 되는 몇몇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필로미나의 모습은 삶이 우리에게 시간과 다불어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느끼게 한다.
아들이 생모인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슬퍼하는 엄마, 그 아들이 자신이 태어난 조국의 상징을 옷깃에 꽂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 그 엄마를 찾아 자신이 태어났단 그 수녀원까지 찾아왔던 아들의 생잔 모습을 비디오를 통해 보게 되는 엄마, 마침내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기다리며 태어난 곳에 묻힌 아들의 무담 앞에 선 엄마. 주디 덴치는 그 모든 모습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그대로 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녀는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그런 엄마였다.
그녀의 용서와 스티브 쿠건의 분노는 우리의, 아니 적어도 나의 마음을 대신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용서하는 필로미나와 자신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쿠건의 대사는 하여 우리 마음이다.
눈 가득한 나무들 사이로 위선 가득한 수녀원을 떠나며 자신이 읽은 로맨스 소설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는 필로미나. 우리 삶은 그 사이에서 고통도 기쁨도 서로 제 몫만큼 흐른다는 것을, 문 닫아 걸고 베란다에서 울던 필로미나처럼 고통을 견디며 기쁨도 느끼며 버티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정지된 화면을 응시하며 생각한다.
첫댓글 사람은 노년이 되면 추억을 그리워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저는 지천명이 지나면서부터 추억을 먹고 살고 있네요. 그러더니 갑자기 노안이 오고, 귀밑머리는 서리가 내리고, 심지어는 콧속의 털마저도 희어지니 세월의 힘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며 신의 영역인가 봅니다.
새털처럼가벼워지고싶은데
삶이란 놈은 돌덩이를 계속 물어다준다 ...
돈덩이로 물어다주면 좋으련만~
저는 두어달 전 비행기에서 그 영화를 봤습니다. 말씀처럼 재미있게 여러가지를 생각했지요. 사실 그 때 저는 엄마이면서도 그 어린 미혼모의 슬픔이 얼만큼 이었을지 잘 가늠하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세월호 사건 전이었지요.
영화를 돌이켜 보면서 새삼 가슴이 미여지니 이제 우리 어머니들의 의식이 세월호 전이냐 후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호의 희생자 가족들께도 그렇게 세상을 용서할 날이 ㅇㅇㅗ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