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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31.
~최일도 목사의
마음 나누기~
"제2의 종교개혁을 기다리며!!"
대한민국의 10월은 잔인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가위 눌리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호소를 듣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말을 했다가 ‘배신자’로 낙인찍힌 어느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린다는 친구 목사는 "어떻게 이룬 대한민국인데 이 나라를 무당에게 바치려고 하다니!" 하며 한없이 울더군요.
원치 않았지만 그래도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기에 임기기간 내내 참고 기도하며 살아왔는데 국민의 목소리는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사이비 종교의 영토를 구축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라며 분노하는 한분의 무의탁 노인을 진정 시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과 여야 정치 지도자들이 수습책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지만 도무지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현실이 마음이 아픕니다.
대통령마저도 20대에 사이비 종교에 정신세계가 점령됐고 지금까지 그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지금 갑자기 그 인격과 정신이 바뀔 수가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인격과 정신은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질 않습니다.
아마도 대통령은 상처받은 착한 국민들 보다는 친한 최 씨 집안과 영토를 더 걱정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심장을 점령한 ‘신정 세력’의 반발이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을 것이고 그 비리와 스캔들의 끝이 어디까지일지 우리들은 모릅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봅니다. 대한민국호가 침몰하기 전, 선미에 뻥 뚫린 구멍을 찾았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화여대 학생들로부터 시작한 대학생들의 항의와 참여정신에서 대한민국의 빛을 봅니다. 대학생들은 일부 정치세력의 개입 노림수를 막고, 민주공화국의 회복을 위한 목소리를 여전히 내고 있습니다.
시위에 참여해서 촛불을 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진지한 얼굴에서도 소망의 빛을 봅니다. 폭력시위를 막고 경찰을 보호하려는 시위 참여자들의 의연함에서도, 이제 다시는 감정에 휘둘리는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지인들의 진지한 목소리에서도 저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읽습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의 80일 투쟁의 결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대학의 학문세계를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입각하여 돈으로 통제하려는 정부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변칙과 부정을 저지르는 학교 당국의 이해가 맞물려 일어난 비리를 학생들이 단결하여 막아낸 것입니다. 학생들의 순수성이 권력과 자본의 힘을 막아낸 것이지요.
둘째는, 이대 학생들의 학내 투쟁 과정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금수저 입학비리와 맞물리면서 정치적 사건이 되었고, 10월 25일 최순실 PC에 담긴 비밀자료가 JTBC에 보도 되면서 박근혜 정권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끝날 수도 있었고 일부에게는 “기득권 유지”로 보이기도 했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투쟁이 이대 안에 축적된 권력비리와 부정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무능과 부패와 비선실세를 밝히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
우연은 없습니다. 필연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9주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Luther, 1483-1546)는 법관이 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루터는 법관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 숙소에서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늘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존재로 설까?’ 이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주님께 묻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루터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하라고 하는데 루터는 마음속에 죄가 떠오르기만 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담당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니까 담당 신부는 ‘제발 죄를 모아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라. ‘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철저하게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치고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된 루터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루터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올라갔다는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기도합니다.
이 계단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황제에게 부탁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왔다는 계단입니다. 루터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회하면서 이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무릎으로 올라갔던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외친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 로마서 1: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쌓은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성경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면죄부였습니다. 면죄부는 구원을 받을 만큼의 선행을 쌓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천국에 들어가고 남을 만큼의 선행을 쌓은 성자들이나 타인의 선행을 돈으로 사고, 그것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당시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던 교황청은 이 면죄부를 통해 건축비를 충당했고 내가 선을 많이 쌓지 않아도 돈을 내고 하늘 창고에 쌓여 있는 선행을 사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교황청은 가르쳤고 그를 통해 많은 돈을 성도들에게 거둬들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고통 속에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성직자라는 사람들은 부와 사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루터는 이 사실에 분개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현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499년 전 오늘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 게시판에 95개 반박 성명을 써 붙입니다.
물론 이것은 종교개혁을 하기 위해서 시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루터의 이런 움직임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자 교황 레오10세는 그 다음해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합니다.
‘60일 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1521년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것을 바라본 많은 독일 사람들은 환호했고, 루터는 그런 독일 백성들의 후원을 힘입어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불씨가 유럽에 번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개혁가들과 성도들이 피 흘리는 순교와 희생이 있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는 1303년의 아나니 사건으로 권력을 황제에게 빼앗기고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거의 포로가 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아비뇽 사건 이후 로마 교황청은 교회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 방법이 폐쇄적인 계층구조식의 성직체계를 견고히 하는 것이었고, 7성례를 강조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폐쇄적인 계층구조가 엄청난 비리를 양산하게 됩니다.
성직이 돈으로 매매되고, 가장 경건에 힘써야 할 수도자들이 타락하고,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사치와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를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교황청 역시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데 정신이 팔려 이를 바로 잡지를 못했습니다. 또한 7성례를 강조하면서 신앙에 미신적인 요소가 점점 가미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은 교회개혁에 대한 열망이 점차 무르익어 가게 되었고 그들 영혼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였습니다.
1884년 우리나라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 교회가 세워진지 벌써 1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역사 속에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만한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경제규모에서는 세계 13위인 우리나라가 선교사 파송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2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4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도 4만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한때 인구의 1/4, 1천 2백만 명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기독교는 500년 전 로마교회보다도 더 타락했다는 교회 안과 밖의 지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선교사를 몇 명이나 보냈느냐? 우리나라 안에 교회가 몇 개가 있느냐? 교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정말 교회다운가?’ 하는 것입니다. 세계 10대 대형교회 가운데 7개가 한국에 있다고 하는데,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밝힌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데,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어두운 구석이 많습니까? 기독교 인구가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나라는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고 점점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지고 있습니까?
십자가 탑은 많은데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 교단들은 여전히 저마다 소리를 외치고 있는데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적은 것일까요?
영국의 유명한 강해 설교가인 데니스 레인(Denis J. V. Lane)목사님은 한국교회에 이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자랑만 하지 마십시오. 100년 전 영국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교회의 전성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하고 자랑스럽던 영국교회는 지금 텅텅 비어 있고 박물관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이 영국과 같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과연 있습니까?”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충고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유독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매우 강합니다. 왜 일까요? 전도 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준다!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와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한국사회의 자원봉사 중에는 70%가 기독교가 감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한국사회는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봉사는 많이 하는데 순수한 뜻이 아니라 봉사마저도 교회성장으로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교회 크게 만들려고 하는 게 무슨 봉사냐? 는 겁니다. 봉사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지요.
500여 년 전 로마 천주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며 타락의 길을 걷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는 생명력이 없고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생명의 역사를 결코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비본질적인 모습으로는 새 역사를 창조해 갈 수 없습니다.
신앙의 신비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교회를 교회답게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구호가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입니다.
‘개혁교회’라는 이 말은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개혁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끝없이 목숨을 걸고 비본질과 싸워 본질을 지켜내야 하는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비본질은 무엇입니까? 개혁되어야 할 비본질적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함께 고민하며 하나하나 풀어가길 소원합니다.
우선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세속주의입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숫자 놀음입니다. 교인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요, 큰 교회로 부흥시킨 목사가 성공한 목사라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 없고, 장로가 되는 것이 성도들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부흥이 교회와 목회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몇 천 명모인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몇 십 명 모이 교회는 형편없는 교회입니까? 누가 그렇게 평가합니까? 몇 명이 모이느냐? 헌금이 얼마나 되느냐? 로 교회를 평가하려는 생각이 바로 세속적인 가치기준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시대풍조와 가치기준은 한심하게도 숫자와 크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겉모습과 크기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크기로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신실한가를 보십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냐? 를 보십니다. 얼마나 포기했고 순종했으며 충성했느냐를 보십니다.
우리 성경에 성공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전도서 10장 10절 입니다.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 ‘성공’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유익’이라는 말이 더 바른 번역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성화와 성숙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없는 대신 ‘충성’이란 말씀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가치에 물들어버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교회도 성공해야 하고, 목회도 성공해야 하고, 사업도 성공해야 하고, 인생도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고 하나님께 복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나 대형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런 사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숫자가 아니고 크기도 아닙니다. 종교개혁 499주년이 되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철저히 돌아보고 또 앞을 내다보며 세속적인 틀과 본질이 아닌 비본질의 껍데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신앙과 교회의 본질인가를 바로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껍데기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씀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먼저 구약성경을 보면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우상을 다 제거한 믿음의 왕입니다만 남 유대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불신앙적인 왕인 므낫세가 왕이 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제거해 버린 우상들을 다시 도입했고 유대를 우상의 천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므낫세의 뒤를 이어 2년을 통치한 아몬왕에 이어 8살이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요시야입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지 18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던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던 유대였는데, 요시야 왕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낸 것입니다. 서기관 사반이 율법의 말씀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 왕은 그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회개합니다.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말씀을 떠나 있었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상의 제단들을 다 불태우고 헐었으며, 이방 예배를 버렸습니다. 우상단지와 제사장이란 무당들을 다 제거합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잘 표현해 준 말씀이 열왕기하 23장 24절 입니다. “요시야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다.”
그렇습니다! 요시야는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우상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남몰래 행하던 모든 우상숭배까지 다 근절시켰습니다.
이런 요시야를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가 왜, 종교개혁을 감행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사회, 말씀으로부터 떨어져있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사회와 신앙으로 바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주장대로 살던 삶을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돌이켜 야 합니다. 나 중심의 생각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개혁이 아닙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좋은 쪽으로 개혁된다 하더라도 말씀으로 본질로 돌아가지 않으면 참된 신앙개혁이 아닙니다.
열왕기하 23:2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요시야를 항하여 하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보다 더 큰 칭찬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거짓되고 부패한 것들을 바로 잡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놀라운 칭찬을 하신 것처럼 무당이 대통령마저 움직이는 어지러운 이 시국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일년 앞둔 이 때에 주님의 몸된 교회부터 교회답게 하는 개혁의 몸부림이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시작되고 실천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