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1세기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은 자기 시대를 따라 태어나 자기 시대를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누구든지 자기 시대에 맡겨진 일을 하다가 부름을 받는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는 일을 맡았고 여호수아 가나안으로 들어가 땅을 분배하여 가지는 일을 맡았다.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결코 22세기 시대에 일을 맡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에 일을 맡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맡은 것을 깨달아, 즉 시대적 사명을 깨달아 얼마큼 일을 잘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고전4:2의 말씀처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맡겨진 일은 한눈 팔지 말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감당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일이다. 기원전 8세기 정확하게 말하면 기원 785년에 사역을 맡게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 시대까지 일을 했는데 근 60년간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 이사야는 맡은 사역을 위해 몸부림치는데 그 사역은 사20:4의 기록된 내용대로 유다가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려 하던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패망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간다는 것을 전하는 말씀 사역이었고 사실 이사야 시대에 유다와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 위기 속에서 살 길을 찾아야 했는데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애굽의 힘과 구스의 힘을 더 의지하였다. 바로 그와 같은 불신앙이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임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사역이 이사야가 맡은 책임이었다. 과연 이사야는 맡겨진 사역 앞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일하였는가?
첫째, 말씀이 임할 때 오직 순종으로 일한다. (사20:2) 사20:2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말씀이 임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가 그대로 하여..."라고 하였으니 임한 말씀대로 순종한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의 명령은 무엇인가? 자기의 자리에서 베를 끄르고 자기의 발에서 신을 벗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였다고는 하나 허리띠를 풀러 벌거벗은 자가 되고 신을 벗어 맨발의 사역자가 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대개 사람들은 품위는 잃어버린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자신의 외적 단장이 무너진다는 것을 내세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외면할 때가 많다. 그것은 순종이 아니다. 자신은 옷을 벗고 신발을 벗은 알몸이 되어 거지가 된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하는 때를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 때문에 해야할 일을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하나님은 계획의 성취를 위해 다른 사람을 사용하셔야 한다. 맡겨진 일을 잘하려면 오직 순종해야 한다. 이사야는 순종의 정신으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무조건적으로 말씀이 오면 순종해야 한다. 우리 교인 중에서 기도원에 다녀오는데 기도원 집회가 끝나는 시간에 헌금을 드리라는 감동이 왔다. 그런데 가다가 밥을 사먹고 용돈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다 드리라는 감동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려오는 길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가지고 있던 용돈까지 모두 소매치기를 당해 다 잃어버렸다. 그때! 얼마나 크게 깨달았는지 오히려 은혜를 받았다 한다. 순종을 했으면 천국에 물질을 보내는 것인데 회개하였다고 한다. 조시 도우슨은 말하길 무조건적 순종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1.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사모하고 있다는 증거라 하였다. 2. 순종은 또한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는 사랑의 정도를 나타내는 증거라 하였다. 3.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가 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4. 무조건적 순종은 거룩한 삶의 증거이다. 그 외에서도 서너 가지 더 순종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데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순종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나의 삶의 주인으로 대접해 드리는 일군의 도리라고 부언하고 싶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된다. 하나님의 임한 말씀이 체험이 된다. 1933년 예수전도단 북아메리카 총재였던 피터 아일런의 아버지는 5살이었다. 공산권 소련을 떠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중국까지 탈출하였다. 안전을 위해 밤에 걷고 낮에는 수풀 속에서 잠을 잤다. 한순간 그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불순종했다. 그때부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지 못하고 다음날 해가 내리쬐는 날 죽게 되어 고통 속에서 물을 구하며 기도하였다. "물을 주세요."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조금만 걸어가라 왼쪽으로 돌아라." 그들이 순종했을 때 갈대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모래를 파기 시작했는데 백연못이 나오더니 물은 점점 더 맑아졌다. 그들은 마음껏 마시고 다시 걸을 수 있는 기력을 찾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작은 것에 불순종하는 것이 큰 고통이 된다. 그러나 무조건 순종하면 살 길이 열린다. 이사야는 말씀 앞에 즉각 순종하여 맡겨진 사역을 감당했다.
둘째, 백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일한다. (사20:6) 이사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순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표현되었다.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사20:3을 보라.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야곱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가 되게 하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사20:6 살려줄 것이라고 믿던 나라가 무너짐으로 하나님 대신 열방을 믿고 이방 나라를 믿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려는데 있다. 애굽과 구스 같은 강대국이 오히려 새 강대국 앗수르에게 사로잡혀 간다.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의 허망함을 보여주기 위해 이사야가 벌거벗은 몸이 되었으니 얼마나 뜨겁게 사명을 다하려는 열정인가? 하나님께 일을 맡은 자는 뜨거운 열정(Passion)이 있어야 한다. 거짓되고 허망한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려는 자에게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역을 맡았다면 벌거벗어도 된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완악하고 어리석은 내 가족을 볼 때 그들을 구원코자 하는 열정 때문에 울어야 한다. 금식해야 한다. 거지 취급을 받아도 좋다. 내 백성, 내 친구, 바른 길, 바른 신앙, 바른 선택, 바른 소망을 지니고 살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되도 좋은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음악하는 사람의 열정을 보면 더 좋은 연주를 위해 똑같은 연습을 피가 터지도록 되풀이 한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의 열정을 보면 금메달 하나를 위해 고통을 참고 또 참고 연습한다. 영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복음 만을 위해 살았다. 칼빈은 그의 지식을 오직 기독교 강의를 쓰는데만 전력하였다. 오늘 우리는 열정을 품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해야 한다.
셋째, 맡겨진 사역을 행함으로 일한다. (사20:4)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며 말씀을 전하는 메시지는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시청각적으로 몸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사20:4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뵈이리니..." 장차 수치를 당할 애굽의 모습을 이사야는 친히 자기 몸의 벗음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자, 사역자가 되려는 자는 자기가 살아 있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워야 행함으로 보여주는 일군이 될 수 있다. 고상한 것을 지키려다 신을 벗지 못하고 상식을 지키려다 베옷을 풀지 못한다. 일을 맡은 자는 자기를 비우라. 세상적으로 자랑하지 말라. 대우를 받고 신분을 보장받는 것을 따진다면 무능한 일군이 되고 몸으로 보여주는 일군이 될 수 없다. 입으로 외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으로 보여주고 몸으로 실천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메시지이다. 이사야는 위대한 사역자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긴 시간동안을 인내하고 일한다. (사20:3) 사20:3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는 이사야는 삼년이란 해를 지나며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의 헌신은 벌거벗는 것으로 한 주간의 일이 아니었다. 실로 긴 인내의 여정이었다. 우리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이웃 친지를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헌신하였는가? 10년, 20년 기도했다고 하지만 그 헌신의 내용과 질이 어느 정도인가? 내게 맡겨진 일을 위해 얼마나 벌거벗는 헌신을 하였는가? 예수 때문에 받은 우리의 수치가 무엇인가? 예수 위해서 신발을 벗듯 포기하는 것들이 얼마나 되는가? 맡겨진 자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인내하고 기다리며 헌신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의 헌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변함없는 자세가 중요하다. 중앙 아프리카 조지 애들리라는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맹수의 공격을 막기 위해 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원주님들이 선교사에게 적개심을 품고 공격을 해왔다. 그는 그날 몽둥이에 맞고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가 죽은 후 추장이 그의 시체 옆에 있는 자동 소총을 보았다. 조사해 보니 그 속에 열 발의 실탄이 들어있는데 그 일로 인해 추장이 감동을 받았다. 얼마든지 자기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면 살아날 수 있는데 만약 총을 당겨 자기를 지키면 다치거나 상한 사람이 생겨 선교의 길이 막힐까봐 죽기까지 순교를 하기 위해 인내를 하였다. 결국 추장과 그 마을의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모두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한다.
기술자도 인내심과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장인이 된다. 농부도 인내심이 있어야 추수를 하는 기쁨을 얻는다. 하물며 주님의 맡기신 사역을 하는 자로서 사는데 내게 맡겨주신 시대가 끝나는 동안 인내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멸시 천대를 각오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자. 이사야가 보여주는 순종, 열정, 행함, 인내 이 네 가지를 지닌 하나님의 종이 되자. 벌거벗은 이사야로 인해 나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워지는 축복의 일군이 되자. 게으른 종, 세상의 종, 사단의 종, 불평 원망의 종이 되지 말자. 멋있는 옷, 화려한 장식품을 입었다고 하나님은 나의 종이라 하지 않으신다. 올바른 자세로 충성하며 일하는 일군이 된다면 내가 초라한 옷을 입었든 보잘 것 없는 신분이든 나의 종이라 일컬어 주실 것이다. (김 철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