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의 과징금/민혜
내 작은 구중궁궐엔 일 년 열두 달 하염없이 짐朕을 기다리는 궁녀들이 있다. 문을 열 때마다 그녀들은 이번엔 승은을 입어보려나 하는 눈치지만 택함 받는 애첩은 거의 정해져 있는 듯하다. 일단 몸피 가볍고 착착 감겨들며 짐에게 편안함을 안겨 주어야 한다.
저기 한쪽 구석에 보이는, 입술과 양 볼에 빨간 연지를 바른 교태스런 저 계집은 궁에 들이던 초기 몇 번만 안겼을 뿐이라며 입을 삐죽 내민다. 마마, 원망스럽사옵니다. 이럴 거면 어찌하여 저를 들이셨나이까. 짐은 측은한 눈빛으로 응수한다. 그래, 나도 안다, 알아. 하여 늘상 짐의 마음 또한 무겁도다.
언젠가부터 옷을 사고 나면 마음이 편칠 않다. 구입하는 순간이야 홀려서 지갑을 열지만 옷장에 넣을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거의 죄책감 수준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직장이 있어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면서 옷이 필요 이상 많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잘 사들인다는 것. 그러고는 권태를 느끼며 다른 옷에 유혹을 느낀다는 것. 뿐더러 나는 이제 인생의 변곡점을 지난 후반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등이다.
평생 큰돈을 만져보지 못한 터수라 고가의 옷은 별로 사 입지 않았다. 대부분이 중저가품이다 보니 없앨 때에도 별 다른 갈등이 없었다. 혹자는 나이 들면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경우를 보면 옷에 들인 가격과 무관하게 싫증이 났으며, 그런 옷들은 섣불리 없애지도 못해 장롱에서 팍팍 썩고 있다가 결국엔 누구를 주거나 기부하는 곳에 갖다 놓기 마련이었다.
딴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답시고 옷가지가 많아져도 가구는 늘리지 않다 보니 옷들은 옷걸이에 겹겹이 옥작복작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내야 했다. 더러 옷장 정리를 할 때면 유사한 색상과 디자인이 많은 걸 보며 반성했지만 의상이란 디테일이 조금만 달라도 입을 때의 느낌엔 큰 차이가 난다고 둘러대었다.
가슴에서 옷에 대한 죄책감이 꿈틀댈 적마다 자기 합리화도 시시콜콜 늘어났다. 나는 태생 곱슬머리라 미용실을 평생에 열 번도 채 가지 않았다는 것, 머리를 커트 할 때도 스스로 한다는 것, 때문에 남들이 주기적으로 지출하는 미용비를 이 나이 되도록 거의 쓰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이유로 옷 구입을 정당화 했다. 코로나가 창궐하여 외출이 부자유할 때도 두어 벌을 사들이며 전혀 돈을 쓰지 않으면 상인들이 힘들 거란 이유를 들어 변명하기 바빴다.
문제는 옷가지는 늘어나는데 외출 할 일은 점점 줄어간다는 점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관계도 소수정예로 정리되었으며, 가깝던 친구들은 거의가 외국이나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려 만날 사람도 마땅찮았다. 새 옷을 입고 나가는 건 기껏 해야 주일 미사를 갈 때나 혼자 외출 할 때다. 하지만 성당 갈 땐 남의 눈에 튀는 옷은 지양하였다.
장 안의 의류들을 번갈아 착용하는 것도 아니어서 숱한 옷들이 상감마마 손길을 기다리는 후궁들처럼 지존(?)의 눈치나 살피기 일쑤다. 평소 내가 편애하던 옷들은 일단 가볍고 편한 옷들이다. 색상은 검정과 회색이 주류라 대체로 칙칙하고 어둡다. 하여 가끔은 청바지나 청재킷도 걸치고 빨강으로 파격을 해야 한다며 기분전환을 위한 컬러의 옷들을 몇 벌 추가로 구입했다. 이래저래 옷장 안은 밀도가 조밀해지고 옷들은 저마다 바깥바람 좀 쏘이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마침내 나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이 노녀老女로 하여금 옷의 허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십사고. 기도는 일시적 효력을 보이는 듯 했으나 약발은 길지 않았다. 나는 다시 주님께 중요한 결심을 아뢰었다. 앞으론 옷을 살 때마다 벌금의 의미로 금일봉을 불우 이웃에게 보내겠노라고. 가격과 상관없이 옷 하나당 최소단위는 십만 원 이상이라고. 벌금이 약하면 실행력이 떨어질까 봐 처음부터 형편에 버겁게 책정했다.
그 즈음, 뉴질랜드로 이민 갔던 친구가 한국엘 왔다. 우리는 인사동에서 만나 회포를 풀고 난 뒤 옷 쇼핑에 나섰다. 친구는 몇 가지 옷을 장만하는데 나는 작심한 바가 있어 번번이 지나쳤다. 친구는 옷 좋아하는 네가 웬일이냐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하느님께 맹세했거든. 앞으로 몇 년간은 옷을 사면 무조건 벌금 내겠다고.”
“옷 사는데 웬 벌금?”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친구는 깔깔대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까 그 옷, 너한테 딱이겠던데 내가 사주면 벌금 물지 않아도 되겠다.”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굿 아이디어라며 환호하였다. 이리하여 옷장엔 모자와 쪽물로 염색한 잠자리 날개 같은 상의가 추가되었다. 한데 그 옷은 아무 때나 편히 걸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기회를 얻지 못하고 궁궐 속에 유폐되어 있을 뿐이다. 친구에게도 미안하고 그 날의 내 꼴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의류는 대부분이 폴리에스테르라 분해하는데 500년씩이나 걸리고, 매립이나 소각할 때엔 유독가스 및 발암성의 유기화합물을 배출한다.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있는 케이포네 의류 매립장에는 전 세계에서 유입되어 거기에 버려진 의류폐기물이 하루에 70톤. 그 높이가 무려 20m 언덕을 이룬다니 짐의 뭇 여인들도 그곳을 배회하며 한 서린 유독가스나 뿜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상을 하면 마음이 잿빛으로 움츠러든다.
일전에 명동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의지를 시험해 볼 겸 의류 상가를 일부러 찾아갔다. 참새 방앗간이라고 호피 무늬 상의가 첫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집에 있는 그 팬츠와 코디를 하면 젊은이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황혼녀 만의 섹시미를 발산할 것 같은 확신에 내 눈빛이 이글거렸다. 게다가 가격까지 착했으나 과감히 물리쳤다. 속으로 잘했군, 잘했어를 연발했다.
이 강열한 유혹을 억제할 수 있었던 건 대오각성의 덕일 터지만 얼마 전에 구입한 옷 때문에 육십만 원이나 나간 까닭도 있었다. 기만 원 짜리 옷 달랑 두 벌에 무리한 돈이 빠져나간 건 재범에 대한 따끔한 경고로 따따따따블의 과징금을 치르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 돈은 소시민인 나의 한 달 생활비에 육박하는 액수였기에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마마, 고정하소서. 이러시다간 파산하옵니다, 파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