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산행은, 가고 오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예정 코스(남원 정령치-고기봉-세걸산-세동치-부운치-팔랑치-바래봉-운봉 용산마을)를 단축하여 운봉읍 수철리 전북학생교육원에서 발진하여 주능선의 세동치를 치고 올랐다. 거기서부터 바래봉을 향해 산행을 계속해 나갔다. 오월의 날씨는 화창했다. 따가운 햇살이 얼굴을 사정없이 찌르고, 초여름의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산길은 좁고도 팍팍했다. 바래봉 철쭉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등산객들로 고산의 좁은 길은 인산인해였다. ‘나’도 그 무리 중에 하나지만, 오늘 산길에서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산은 이제 막 봄기운을 차린 듯 앙상한 가지마다 여린 새순들이 삐죽이 내밀고 연두색 잎을 피우기 시작했다. 길가에 즐비한 철쭉은 아직 빨간 꽃망울을 맺고 있을 뿐 아직 그 고운 속살을 활짝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능선의 높은 산봉에서 고개를 들어 남쪽을 바라보니, 백두대간 지리산의 장엄한 주능선의 원경이 눈에 들어온다. 실루엣처럼 이어져 나가는 산너울을 바라보며 가슴이 울렁거린다. 서쪽의 노고단에서부터 반야봉-토끼봉-영선봉-덕평봉-촛대봉-제석봉-천왕봉에 이르는 그 능선의 종주등반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열(灼熱)하는 햇빛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그 한 여름이었다. 또 어느 해는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영하의 매서운 겨울날이었다. 그 뜨겁던 숨결이 뿜어져 나오던 수차례의 종주등산이 새삼 가슴에 차오른다.
▶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 ‘황산대첩비’ 유래
고려 우왕 6년(1380)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1577) 운봉 현감 박광옥이 세운 대첩비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비를 파괴하였고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15 광복 후 1957년 10월 27일 다시 재건한 것이다.
☆… 황산대첩(荒山大捷)은 고려말 1380년(우왕 6년)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황산(지금의 전북 남원시 근처)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승리한 전투이다. … 왜구의 침입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고려 말기에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때 왜구의 노략질이 격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정치·정세가 극도로 혼란하여 변경지방민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이 지역은 해안뿐 아니라 내륙지방까지 왜구의 발길에 짓밟혔다. 왜구는 수도 개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화 교동(喬桐)과 예성강까지 나타났다. 이에 고려정부에서는 최영(崔瑩)·이성계·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박위(朴葳)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무찌르게 했다.
1375년(우왕 1년) 대대적인 왜구의 침략에 맞서 최영은 홍산(鴻山)에서 적을 쳐부수고 대승을 거두었지만 침입은 계속되었다. 1380년 8월 왜구는 손시제(孫時制)를 우두머리로 하여 500여 척의 배를 타고 금강 어귀에 있는 진포(鎭浦 : 지금의 서천)에 상륙했다. 고려정부에서는 나세·심덕부(沈德符)·최무선을 지휘관으로 삼아 왜구를 치도록 했는데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하여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들은 배를 잃어버려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더욱 잔인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다. 이에 고려정부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쳐부수도록 했다. 왜구는 경상도 상주·선산·경산부(지금의 星州) 등을 차례로 노략질하고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沙斤乃驛 : 함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鼎山峰)으로 나아가 이지란(李之蘭)과 더불어 악전고투한 결과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고려는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얻고 기타 무기도 많이 노획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때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577년(선조 10) 전라남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비의 높이는 4.25m이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괴하여 원상이 훼손되었으나, 남아 있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이용하여 1957년에 다시 세웠다. 비문은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송인(宋寅)이 썼으며, 남응운(南應雲)이 전액(篆額)을 만들고,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이 비문에는 황산대첩에 관한 사실과 비문을 세우게 된 목적·사정을 싣고 있다.
첫댓글 고문님덕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히 잘 읽고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