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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ve of Christ and God that nothing can separate
할렐루야! 온 세상을 뒤덮고도 남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주여!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과 또 역시 우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이 세상이나 저세상이나 무엇도 끊을 수가 없는 위대한 사랑을 이 세상의 모든 분들과 함께 묵상하며 나눕니다. 세상의 어디에 있던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시련과 역경을 견디며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오셔서 주님의 사랑을 확실히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소서!
샬롬! 깊어가는 가을 문경에 왔습니다. 어제 아침에 주안에 있는 합력성선에 대해서 같이 배우고 오늘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과 예수님의 강력한 사랑에 대해서 8장을 보면서 공부하겠습니다. 주님과 저와 모두가 함께 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산에 가고픈 강력한 욕구를 누르고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산에서 캐는 산삼보다 더 나의 몸과 영혼에 약효가 좋은 은혜의 단비가 내리고 수억 원 대하는 귀한 춘란보다 더 값진 깨달음과 위로와 그리고 강에서 만나는 일생에 한 번 만나는 명석보다 더 떨리고 흥분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선 본문의 말씀을 세 가지 버전으로 봅니다. 늘 개역개정, 공동 번역, NIV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번역 성경 찬송 앱이나 지금 제가 보는 GOOD TV 다번역 성경 찬송을 보시면 바로 구절도 검색이 되고 이렇게 세 가지 버전으로 동시에 볼 수가 있으니 이 시대는 성경을 모든 사람이 가장 배우기 재미가 있고 쉽게 배울 수가 있으니 성경을 읽고 정리하면 누구 못지않게 성경을 올바로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세 가지 버전으로 보면 개역개정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작은 제목으로 정했고 공동 번역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다른 나라의 번역이나 헬라어 번역은 단락을 우리와 같이 나누지 않은 버전입니다. 이렇게 단락이 나눈 버전이 이해가 쉽습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31. What, then, shall we say in response to thi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32. He who did not spare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 -- how will he not also, along with him, graciously give us all things?
33. Who will bring any charge against those whom God has chosen? It is God who justifies.
34. Who is he that condemns? Christ Jesus, who died -- more than that, who was raised to life -- 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d is also interceding for us.
35. Who shall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Christ? Shall trouble or hardship or persecution or famine or nakedness or danger or sword?
36. As it is written: "For your sake we face death all day long; we are considered as sheep to be slaughtered."
37.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38.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39.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본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우선 파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동시에 설명합니다. 그리고 개역개정의 8장 34절의 표현은 고발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해가 애매한데 이를 공동 번역에서는 깔끔하게 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시냐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NIV 영어 성경도 공동 번역과 같이 예수님은 아니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만 이해하면 본문의 이해는 그대로 세 가지 번역으로 하시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5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주시는 사랑으로 표시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증명했다고 했는데 8장의 생명의 성령의 법의 승리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합력성선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설명하는 데 시작을 독생자를 주신 사랑으로 다시 시작합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이 동시에 성도들에게 부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 사도와 로마에 사는 성도들 그리고 이스라엘과 바울이 선교한 지역의 모든 교회들이 당시에 로마에 속했기에 로마 정부가 기독교에 대해서 탄압을 하면 동시에 그 탄압을 받게 되는데 초기의 복음이 세상을 이기는 가운데 바울 사도는 언제나 돌에 맞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굶고 강도를 만나고 배가 파선되고 그리고 가는 곳마다 핍박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고난의 삶의 연속인 과정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께서 동행하시고 그리고 그를 사랑하심을 경험적으로 체험하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바울 선교여행 중에 일어나는 다양한 위험과 그리고 이런 가운데 눈동자와 같이 어떤 기적으로 어떤 때는 견딜 힘을 주심으로 어떤 때는 바울의 로마인의 신분으로 지켜주시고 성령께서 어떤 미리 알려주시고 어떤 때는 늘 감화 감동으로 인도하시며 이를 통해서 복음의 동토에 씨앗이 떨어지고 싹이 나며 그리고 열매로 성도들이 생기고 늘고 교회가 서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되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철이 먼저 들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직접 부모가 되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우리의 부모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사랑하시듯 사랑하셨음이 이해가 되고 이제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을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도 성경을 통해서 바로 믿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나라의 일을 하면서 늘 그 사랑과 함께 하심을 느끼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습니다만 또 어떤 분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은 바로바로 응답이 있고 반응이 있는데 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신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역사서와 예언서 그리고 시편 등 시가서를 보면서 살펴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단 말입니까? 하고 묻는 장면을 보는데 때론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금방 나타나지 않을 때 의심도 들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의 죄로 인해서 징계를 받을 때 우리가 원하는 정말로 원하는 일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청춘을 바치고 돈을 드려서 간절히 이루어지길 바라며 노력했지만 결과가 실패로 끝이 났을 때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왜 나를 이렇게 실패로 이끌고 질병으로 이끌고 낭패로 이끄시는가 그리고 오랜 가난은 또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하나님께서 도대체 계시기는 한가하고 마음속에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실망이 커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조금도 느끼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순간을 이기며 지나면 그 시간의 의미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도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을 보면 1000년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법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했으나 이를 그대로 이스라엘을 잘 지키지 않았고 언제나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징계를 하고 그러면 또 살기가 힘들게 되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암탉이 자신의 새끼를 품는 것과 같이 품으려고 애를 써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죄악의 길로 갔는데 이 세상의 무려 1000년 동안의 반복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하다가 이제는 법대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도 로마서 9-11장으로 보면 여전히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되었는데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사랑이 영원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포기하지 않으시는 1000년 그리고 또다시 200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비록 율법의 구약만 지키는 이스라엘을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민족이 되고 가장 부자로 사는 민족이 되게 하시는 데서 충분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모든 분도 사랑하시고 믿지 않는 유대인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믿는 성도에 대한 사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 교회 즉 천주교,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비록 500년 전에 천주교가 조금 어두울 때 개신교가 나왔지만 서로 대립하고 상대방을 비방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천주교를 사랑하시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성경에 말씀하시는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에게 혹은 집단이나 민족에게 나타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국가의 민족과 온 세계인을 우리와 달리 국적과 인종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확실한 증거가 모든 인류가 죄에 빠져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자신의 독생자를 피를 흘리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없는데 악인을 위해서 그것도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사랑이 얼마나 큰지 너무나 큰 사랑이기에 사람들은 이해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인간의 상상이나 한계를 초월하는 일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역시 사랑하셔서 그렇게 모진 고통을 겪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으로 모든 예수를 믿는 성도를 구원하시고 이제는 천국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로써 끝이 나면 사랑은 순간의 사랑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서 복음도 전하고 세상에서 또 행복도 추구하면 일도 하면서 살게 되는데 이런 개개인에게 다양한 시련이 다가오고 그리고 자신이 속한 가정과 집단과 교회와 그리고 국가와 어떨 때는 세계적인 재앙도 닥쳐 옵니다. 코로나도 그렇고 국지적인 전쟁과 세계적인 전쟁이 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죽게 되고 많은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믿고 그 시련을 이겨내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가 겪는 어떤 이 세상에서의 일들도 절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세상의 시련이나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련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기며 설혹 세례자 요한과 같이 올바른 이야기를 하다가 죽음을 당해도 그 죽음이 요한과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이 땅에서의 사랑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떠나도 여전히 그 사랑은 지속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있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해결을 할 수가 있고 풀 수가 있는 전능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능력과 권세를 지니신 분의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와 다른 사랑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대부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는 사랑을 원합니다. 자식이 어릴 때 철이 없어서 부모도 제쳐두고 홀로 친구와 놀고 그리고 결혼을 하면 부부가 서로 정신을 쏟다 보면 부모님을 잊고 살기도 하고 그리고 오랜 삶을 산 부모와 다르게 짧은 식견과 경륜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 부모의 속을 썩이고 부모가 재력이라도 있으면 그걸 지금 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도록 해 주는 것을 부모의 나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을 하고 사는데 부모님이 아니 계시게 되면 가장 그리운 것이 함께 하지 못함입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시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냥 그립고 그래서 함께 하지 못함이 가장 마음이 아프고 부모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픈 일들을 이제 철이 드는 우리가 함께해 주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프게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도 이와 같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내가 어렵게 되고 일이 풀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할 때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하나 실상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쉬지 않고 변치 않고 사랑하시나 내가 그분께서 나에게 원하시고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다르기에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충동적이고 그리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는 것이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의 계획에서 사랑하시고 이생의 삶과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을 동시에 보시고 사랑하시고 우리는 부분적으로 우리 주변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아시기에 이런 모든 부분을 고려해서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우리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처녀와 총각이 사랑하게 되면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을 합니다. 주님과 우리의 사랑도 함께 함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분명히 지키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안에 있기 싫어하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주님이 계신 곳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에 죄와 불의에 대해서 단호하시고 싫어하시고 처벌하십니다. 이스라엘의 1000년의 사랑을 봐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불의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짓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으시고 경고를 하십니다. 그렇게 살지 말아라 그렇게 가지 말아라 그렇게 살면 처벌이 있다 그렇게 살면 멸망이 있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품에서 떠나서 그 사랑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전할 때와 똑같이 하나님을 잊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나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가 약해 지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그래서 세상의 핍박과 조롱을 견디어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면 그대로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구나 하고 바로 믿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믿지 아니하면 누리지 못합니다. 먼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순서대로 생각하며 반드시 기억하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창조된 것도 알고 하나님의 사랑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남자가 자신의 외국인 아내가 진실하다고 믿을 때 살면서 자신이 살던 나라 즉 한국 남편이 가보지도 않고 경험하지도 않은 자신이 살던 나라의 모습을 이야기하면 우리와 달리 이국적이라 믿기 쉽지 않지만 아내의 진실됨을 믿고 그 말을 믿게 되면 그 남편은 자기 아내의 나라에 가보지도 배우지도 않았지만 아내의 지식을 통해서 그 나라를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반대로 아내의 말을 믿지 못할 경우 예를 들면 가난한 나라에서 아내가 수저를 전부 은으로 준비를 해 왔다고 하고 그 수저를 가족이 모두 사용하는데 진짜 은임에도 설마 무슨 은으로 수저를 가져오겠나 하고 그 말을 믿지 않을 때 그 수저는 한 벌에 십만 원이 넘는데 그냥 스텐 정도로 취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라고 믿음이 올 때 그 수저를 찾아보니 스텐으로 마음대로 평소에 대해 이미 없어지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느끼려면 가장 중요한 일이 그 사랑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 너무나 큰 사랑을 하십니다. 그 사랑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사랑이 많아도 자신의 자식을 누구를 위해서 그것도 악인을 위해서 내어 줄 인간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것인데 너와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그리고 역시 우리 죄인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흠도 없으시고 죄도 없으신데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조롱과 멸치를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진실로 누구를 사랑해서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타인의 죄나 잘못을 뒤집어 쓰고 불평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도 너무나 드물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런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가끔 대통령의 사면으로 복권이 되고 죄가 면제되는 경우가 있는데 죄에 대한 용서는 큰 안도와 기쁨이 되는데 우리의 죄는 그 대가가 참으로 참혹해서 조금도 소망이 없는 상태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 21-26절은 분명히 과거의 죄라고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대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큰 사랑을 이미 모든 성도는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제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너무나 큰 사랑이 우리와 사이에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께서 정의로우신 분이라 죄에 대해서 반드시 벌을 주시는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그리고 나무에 달려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 모든 저주와 죄를 용서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죄가 없어진 첫 사람 아담과 같이 깨끗해진 사람에게 또 성령께서 선물로 오십니다. 마가 다락방 사건을 비롯해서 고넬료 사건을 비롯해서, 베드로 설교로 3천 명 5천 명의 회개와 예수님 이름 세례와 성령세례를 비롯해서, 사도들과 바울이 함께 전도하면서 아직 성령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성령을 받게 함을 통해서 초대 교회, 안디옥 교회 그리고 바울이 세운 교회, 그리고 로마교회 등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대부분 구성이 되었고 이들의 삶은 내 것과 네 것이 없이 서로 나누는 육신의 형제보다 더 가까운즉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능력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을 새롭게 그 속사람을 창조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창조를 하십니다. 늘 예수 안에 있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의롭다 인정도 하십니다. 믿음으로 칭의가 일어납니다. 칭의는 제가 앞에서 수도 없이 설명을 했는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약 25년의 한결같은 믿음을 통해서 하박국의 경우는 불의가 난무하는 가운데 정의로운 삶을 삶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었음을 설명을 드렸는데 이렇게 의롭다 인정도 받게 됩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이었던 우리에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늘 함께 하심이 시작되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죄의 길로 가지 않게 감화가 감동이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람의 법에서 해방을 시킵니다. 사랑하면 함께 함이 가장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은 우리를 속박해서 우리를 자신의 마음대로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부모가 자식과 함께 있고 싶은 것과 같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장 큰 증거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함께 하시며 그냥 보시고 계시고 침묵만 하시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우리를 온갖 환란에서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십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교회 속에서 신앙이 자라갈 수가 있게 그분의 종인 목사님을 통해서 지도를 받게 하고 장로님과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사랑받고 교육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 영원한 천국에서 왕과 같이 살도록 쉬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전도하게 하시고 교회에 충성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머리 되게 하시고 꼬리 되지 않게 하십니다. 온 기독교 국가치고 못 사는 나라가 없이 축복을 받았고 우리나라도 이제 온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를 하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랑이 없고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징계를 통해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함께 하심은 언제나 성경 말씀을 통해서 혹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혹은 동료의 순종을 통해서 이해가 되게 하십니다. 인식이 되게 하십니다. 매일매일의 전도와 교회의 충성에서 주님은 쉬지 않고 우리를 위로하시는데 모든 분께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힘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무 걱정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힘을 나게 하십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상태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고 감동합니다.
이제 환란을 당할 때 성령께서 우리가 할 말을 준비하지 않아도 할 말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도 전할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기회와 지혜를 주셔서 전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정의롭게 살려고 하거나 혹은 우리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서 여러 가지 핍박과 혹은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언제나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격려하시고 또 우리의 고난을 충분히 견딜 수 있게 감해주시고 곧 싸매시고 곧 회복시키시고 곧 죄를 용서하시고 곧 우리를 기쁨이 넘치게 하십니다. 우리의 곤고나 고난이 잘 지내가게 도와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시련을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혹은 기적으로 견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사역을 마치고 주님을 뵈오려 천국에 갈 때 우리를 환영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수고에 따라서 상상도 못할 상급을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끝도 없고 우리가 측량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줄 수 없는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도 주님을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그리고 뜻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원하시는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만 합니다. 절대로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 됩니다. 반드시 주와 함께 내 옛사람이 죽었음을 믿고 해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살았음을 믿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랑, 예수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모두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기초가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에 대한 믿음이며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에서 요구한 바와 같이 버릴 것은 전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의 삶에 대한 회개입니다. 회개와 따름이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의 기본 작은 행위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과 하늘의 복을 받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가 회개와 따름입니다.
예수 밖에서 살던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의 기초가 바로 믿음이고 그리고 회개이고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저만치 두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안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틀림없이 똑같고 강력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낼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사랑은 예수 안에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작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랑은 너무나 커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믿고 우리는 또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늘 주와 동행하고 늘 성령의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내가 예수님과 죽었음을 믿고 온전히 예수님께서 나를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전하는 저도 진실로 여러 면에서 부족합니다. 내가 죽었음을 믿는 것도 쉽지 않고 하나님을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문제도 쉽지 않고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늘 부족했습니다.
모든 분이 이번 기회에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주안으로 모두가 들어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반드시 믿고 다시는 이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모든 세상의 것들 중에서 최고로 하시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사랑은 이 땅에서의 눈에 보이는 형통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또 그렇게 살고 이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고 이런 복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데 이런 복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무슨 문제가 있나 나의 신앙이 온전치 아니한가? 그리고 믿고 잘나가는 사람들에게 문제아로 낙인도 찍힐 수가 있고 우리가 나가는 교회에서도 소외되고 직분도 받지 못하고 안수집사 장로 권사로 세움을 받지도 못하고 만년 서리집사로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살고 있다고 내가 문제가 있다고 꼭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의 나라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잘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땅에 나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는 나라가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세상의 명예를 얻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나를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나 홀로 성공을 즐기고 믿는 형제도 외면하고 믿지 않는 자신보다 못한 세상의 사람에게 받을 것 다 받고 인색하게 살 때 이런 성공은 하나님의 나라에 별로 유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교회에 충성하고 헌금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큰일을 감당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세상을 향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서의 성도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내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 사랑으로 가득 차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형제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가득 차는 내적인 성장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더 치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속 사람이 잘 되는 일에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고 이 부분을 위해서 모든 세상의 복을 보류하고 나를 연단하시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조롱과 비난과 같은 믿음의 형제의 외면과 그리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어렵게 살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잘 사는 혈육의 외면도 오랫동안 견디며 살아야 합니다. 왜 너는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보다도 못 살고 사람의 구실도 못하고 사는거냐 할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믿지 않는 가정에서 처음 믿는 분들이 그리고 부부 중에 홀로 믿는 분들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믿음 속에는 이런 고난이 있고 이런 고난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기게 하시고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드십니다. 이 사랑이 돈과 집과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를 받는 사랑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가능하면 받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마음먹은 일이 잘 풀리고 남보다 돈도 잘 벌고 결혼도 잘 하고 편하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도록 복을 주시고 그런 사랑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상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는 평범한 사랑에 불과합니다.
칼도 핍박도 박해도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니 영적인 전투가 중단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명한 배우 최수종씨가 자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아니 뭐가 문제가 있어 그런 분이 자녀를 생각하며 우시나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돈이 있다고 명예가 있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세상이 아니기에 그렇게 잘 믿는 분이 눈물을 흘린 것일 것입니다. 진실로 세상은 우리가 사는데 큰 전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이런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즉 세상의 거대하고 눈이 도는 빠른 흐름에서 신앙을 지키는 일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보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직장도 변변치 않은 가정의 자녀는 어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벌여야 하는 가장 큰 전투는 이렇게 세상의 각자 도생하게 하는 풍조와의 전쟁입니다. 세상의 풍조 즉 각자 스스로 일을 해서 남보다 잘 살면 승리하는 것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이 풍조와 싸워서 교회와 성도가 이겨야 합니다. 이 싸움을 우리는 하고 있고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이 전투는 나 홀로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가장 의롭고 공평한 법 율법이 지켜지는 나라를 세우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아무리 세상이 강해도 우리는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 전투를 해야 되는 시기이고 이 전투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에게 로마서는 희망과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전투의 규모와 현장감과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분들에게 이 말씀이 무슨 위로와 관련이 있겠습니까?
때론 우리는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을 놓치고 헛된 일에 분주할 때가 많습니다. 마귀는 싸워야 하는 대상을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어떨 때는 잘 믿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먼저 땅과 집을 선점하고 가지지 못한 형제에게 비싼 세를 받고 살면서 야!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한다. 왜 그렇게 복을 받지 못하고 사냐! 잘 믿어 이렇게 훈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과 집을 과도하게 선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적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방해되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다른 길로 가며 부자 청년이 되어서 실상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힘든 상태가 되었음에도 이를 잊고 세상의 성공을 신앙의 승리로 착각해서 자랑하니 이런 일이 한국에 너무나 빈번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정의를 놓고 전투를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의는 무엇인지 저 멀리 두고 세상에서의 성공에 모든 노력을 다하며 혹 세상에서 잘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이보다 사랑하셔서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 오신 지 2000년 온 세상에 예수를 믿는 이가 넘쳐나는 지금 그리고 물질이 가장 중요한 성공의 기준이 되는 지금의 세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받는 이는 누구입니까? 이런 세상과 싸우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는 나라를 이해하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개인의 성공에 미쳐서 모두가 날뛸 때 공동체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대로 나타나며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과 예수님의 강력한 사랑의 최대의 수혜자가 될 것이고 이들이 이 시대의 바울들이라 믿습니다. 로마서 8장이 적용되는 사랑을 받는 모든 분이 되시고 그 사랑을 받는 고난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조롱과 비난과 못남의 멸시를 받고 사는 모든 믿음의 형제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나를 굳세게 하시고 나의 속 사람을 진실로 성공하게 하시고 영혼이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