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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초기교단사 제2권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저자; 박용덕 교무)
(1997년 3월 6일 원광대학교 출판국 발행)
(2003년 2월 7일 원불교출판사 발행)
제2편 기성조합의 활동
Ⅴ. 창립 인연의 결속
1. 영광 제자들의 결속
2.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3. 모악산(母岳山)의 인연들
4. 만덕산(萬德山)의 숙연(宿緣)
가. 전주(全州) 교화(敎化)를 위하여
1) 전주는 돌아보지 마라
2) 전주를 돌아서 가는 길
나. 진묵震黙과 석두石頭
1) 전주를 중심으로 두유(逗留)한 진묵대사
진묵대사(1563 명종18 - 1633 인조11)는 김제 만경 불개(火浦)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가계와 씨족은 명확히 알 수가 없고
그의 어머니 조의調意씨1)의 이름만 남아 있다.
[1) 조의調意; 전북향토문화연구회에서 낸 ≪김제인의 유적≫에 보면
‘調意’라는 이름은 불교적인 이름으로 진묵의 어머니의 성은 고씨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근거는 화포리 주민들의 전래에 근거하며 또 ‘고시레 전설’에서 찾고 있다.
화포리 조앙산 진묵의 어머니 묘가 천하 명당으로 無子孫千年香火之地로 유명한데
이 전래 설화는 ‘고시레 전설’과 유사하다.]
일설에 의하면, 불개의 부부가 불심이 매우 깊은 서방산 봉서사의 신도들이었는데
40이 넘도록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열심히 생남 기도를 하였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조의(調意)가 태몽을 꾸었다.
영롱한 구슬이 잠자는 베개 옆으로 떨어져서는 차차 변하더니
마침내 금빛 찬란한 부처의 모습이 되었다.
조의(調意)씨는 뭇 스님들과 함께 이 부처님 앞에 무수히 절을 하다가 깨어났는데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열달만에 생남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 자시 무렵에 그 집에 밝은 빛이 오래도록 머물러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새 아기의 탄생을 축도하였다.
아버지는 천신께서 내려주신 하나의 구슬이라 하여 아기 이름을 ‘一玉’이라 지었다2).
[2) ①봉서사 진묵전 벽화 참조.
② 손석우 ≪터≫ 下 <진묵대사와 무자손향화자자> 305쪽 ]
≪진묵조사 유적고≫를 보면
진묵이 태어난 곳은 ‘만경현 불거촌佛居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곳은 현재 만경면 화포리火浦里이다.
화포는 한자화한 지명으로 본디 우리말은 ‘불개’이다.
불개는 뻘로 된 개[浦]라는 말이고 그것이 ‘화포’로 기록된 것이다.
화포리는 만경강 하구에 있는 마을로서 서해와 접한 뻘로 된 개이므로
뻘개→불개→火浦란 이름으로 변하였다.
지명 중 예전에 ‘火夫里’ ‘佛伐’ 등으로 기록된 곳은
거의 본시 우리말 ‘블’을 한자 새김으로 빌거나 음을 베껴 그렇게 기록한 것이데,
그 ‘블’은 벌, 벌판, 뻘, 펄(개펼) 등의 말이다. ‘
벌’이나 ‘벌판’은 들이나 수목이 없는 넓은 곳의 뜻이고,
‘뻘, 펄(개펄)’은 조수가 드나드는 곳의 넓은 진흙땅을 뜻하지만 본래 어원은 같은 말이다.
불[火]의 옛말은 ‘블’이고 불[弗]의 고음도 ‘블’이다.
그런데 우리 말의 입술 소리 ‘ㅁ,ㅂ,ㅍ’이 첫소리가 된 ‘ㅡ’모음의 말은
후대로 오면 거의 ‘ㅜ’모음이나 ‘ㅓ’ 모음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본시는 ‘블개’였으므로 한자 말 ‘火浦’로 썼지만
‘블’이라는 말이 후대에는 ‘벌, 뻘’이 되었으니
‘벌개, 뻘개’는 곧 벌판 또는 뻘로 된 개[浦]라는 말이고
그것을 ‘벌, 뻘’의 전기어 시대에 ‘화포’로 기록한 것이다.
화포리는 만경강 하구 옆으로 서해와 접한 뻘로 된 개이므로 그런 이름이 합당하다3).
[]3) 전북향토문화연구회, ≪김제인의 유적≫ 360쪽 1994.9
진묵이 태어날 무렵 근처의 초목이 3년 동안이나 시들어 죽어,
사람들은 영웅 호걸들이 태어날 기운(間氣)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진묵은 어려서부터 냄새나는 채소나 비린내 나는 음식을 싫어하여
마을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 부처님이 나셨다고 덕담을 하곤 하였다.
진묵이 7세 때 단 하나 뿐이 동기간이 누나가
완주군 춘포면 쌍정리로 시집을 가고4)
[4) 진묵의 누나가 익산군 춘포면 쌍정리로 시집 갔다는 이야기는 이 고장 주민들 사이의
전래 설화이다. ]
불심이 장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봉서사에 출가하였다.
봉서사 鳳棲寺는 시집간 누나네 집과 가까운(20리길) 완주군 소양면 서방산에 있는 절이다.
진묵이 발심한 것은 누나 집에 놀러가서였다.
만경면 불개에서 춘포면 쌍정리까지는 50리 길이다.
하루는 모내기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농부들이 별 까닭도 없이 개구리를 보면 잡아서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진묵은 바들바들 떨면서 죽는 개구리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진묵은 보통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 흥미를 잃고
문득 중들이 살생을 금하는 일을 생각하고 그속에 가서 살 것을 결심하였다.
진묵은 효심이 장하였다.
자신은 중이 되었어도 노모 봉양을 그치지 않았다.
진묵이 전주부성 밖 아중리 일출암에 있을 때 절 아래 마을에 어머니를 모셨고
유난히 모기를 타는 노모를 위하여 신통을 부려 쫓기도 하였다.
노모가 죽자 진묵은 고향 만경면 불개에 등 너머 아득히 만경강 하구 개펄이 보이는
명당에 묘를 써 자손이 없어도 천년을 제사 지낼 수 있도록 신통을 부렸다.
진묵이 모친의 묘를 잡은 주행산舟行山은
불개(火浦里)에서 2.5km 떨어진 야트막한 야산이다5).
[5) 진묵의 모친 무덤이 있는 현지 안내문이나 ≪김제 군지≫ ≪김제인의 유적≫에 보면
모두 ‘維仰山’ ‘祖仰山’ 등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나 국립지리원 ≪지형도≫를 보면 ‘舟行山’이라 표기하고 있다.
주행산에 소재한 진묵祖師를 기념하여 건립한 祖仰司가 와전되면서
발생한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
풍수가 손석우는 이 자리를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이라고 하는데 산 이름과 묘하게 일치한다.
자그마한 이 야산에는 최근에 조앙사와 성모암과 조사전이 건리되었다.
조앙사는 1915년 3월 15일 강생술 보살이 진묵조사를 추앙하여
15평 대웅전을 건립한 데서 시작된다.
뒤를 이어 7층 석탑(1928)과 종각(1958) 등을 건립하였다.
조앙사는 유문수 스님에 이어 현재 공원성불 보살이 관리하고 있다.
성모암聖母庵은 진묵의 모친 묘소 옆에 있는 절이다.
1917년 5월, 이순덕화가 계룡산 신도안에서 기도를 하고
고향 임실로 돌아가다가 화포 근방의 마을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영몽을 꾸게 되었다.
서쪽 하늘로부터 흰가마가 내려오더니 한 스님이 나와서 가마를 타라고 하였다.
그 가마 안에 들어앉으니 공중을 날아 어느 묘소 앞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스님을 그녀에게 쉬어 가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이순덕화가 깨어 일어나 집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곳에 진묵대사의 어머님의 산소가 영험하니 참배하고 소원을 빌어보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묘소를 찾아가니 허물어져 알아보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순덕화는 바로 묘소에 사초를 하고 10여 성상을 시묘살이를 하면서
지방 유지들과 힘을 함하여 봉향계奉香契를 조직하고 1928년에는 진묵전을 창건하였다.
1929년 4월에는 진묵대사의 약력을 새긴 기념비와
고인이 된 이순덕화의 공덕비를 세우고 묘 아래 제각을 건립하니
이것이 바로 성모암이 되었다.
조사전을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성모암과 조앙사의 등 너머에 있는 영정각이다.
진묵대사와 모친 조의씨 그리고 누님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다.
바로 지척의 거리에는 마경강 하구 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진묵은 일생을 거의 전주를 중심으로 크지 않은 조그마한 절에서 살았다.
동, 남방쪽으로는 완주군 용진명의 봉서사와 상운암上雲庵, 원등암, 만덕산의 미륵사,
정수사, 일출암, 서쪽으로는 모악산 대원사와 변산 월명암, 김제 망해암 등이다.
봉서사는 전라북도 용진면 간중리 서방산에 있는 절이다.
신라 성덕왕 35년 해철선사가 창건하였고,
진묵대사와 신이神異한 일화와 진묵의 부도로 인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진묵대사 부도가 전북 무형문화재 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에서 가장 가까운 절은 일출암이다.
현 전주상고 교정인 마당재를 넘어서면 아중저수지가 나오가
이 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면 왜막실이다.
왜막실에는 일출암이란 작은 고찰이 있는데 이 절은 진묵대사가 창건한 것이다.
진묵이 일출암에 있을 때 어머니가 왜막촌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모기 때문에 고생하였다.
그래서 효심 장한 진묵이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쫓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곳에는 모기가 없다고 한다.
일출암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근래에 중건되었다.
우아동 왜막실은 왜병들이 막을 짓고 살았대서 붙은 이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소의 왜군들이 군복을 벗고 이곳에 취락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통칭 왜막실이라 불렀다.
이곳에 정착한 왜군 잔류민들은 한인으로 귀화하고 김씨 성을 썼는데
이글은 ‘왜막실 김씨’ 또는 ‘전주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6)
[6) 전주시청, ≪우리 고장 전주≫ 419쪽 1982.12 ]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에 소재하는 정수사淨水寺는
신리에서 만덕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절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2년(889)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 뒤 고려시대에 중건되었다가
다시 조선조에 들어와 선조 때 진묵대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단암사丹岩寺는 소양면 죽절리에 있는 절이다.
조선 성종 원년(1470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929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진묵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현재 절 모습은 1955년에 중건한 것이다.
원등암遠燈庵은 소양면 해월리에 있는 절이다.
진묵대사가 5백 나한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것을 8.15 행방 뒤에 재건하였고,
6.25 동란 때 참선당만 남고 전소되었다. 현 법당은 1956년에 중건하였다.
대원사大院寺는 모악산 동쪽 산중턱에 전주 쪽으로 향하여 있는 절이다.
1917년 대원사에서 몇 달 독공한 적이 있는 정산은
진묵대사의 이야기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가 그 절에 묵고 있을 때 어린 상좌가 ‘이 절 가난이 앞으로 5년은 남았다‘면서
그 내역을 이야기 하더라”
진묵의 일화는 대강 다음과 같다.
진묵이 대원사에 와 얼마동안 있을 때,
절 인심이 각박하여 제 때 밥 얻어먹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배가 고픈 차에 마침 절을 중수하는 일꾼들에게 주기 위해
불목하니가 곡차(술)을 거르고 있으므로
한잔 얻어먹을 양으로 “거 무얼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술을 거릅니다.”
진묵이 다시 물었다.
“거 무얼하고 있느냐”
“술을 거릅니다.”
이렇게 세 차례를 물을 때마다 한 대답이므로 종내 곡차를 대접받지 못하고
남은 술지게미라도 얻어먹으려는데 그마저도 재 거름 속에 묻어버렸다.
다음날, 다시 술 거를 때도 역시 세 번째까지 불목하니는 “술을 거릅니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므로
“그 참 고얀 놈이로고”
진묵이 화가 나 말하자 불목하니의 턱이 떨어져 붙지 아니하였다
.(일설에는 금강역사가 불목하니를 철봉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한다)
“내 여기 머물를 데가 못 되는구나”하고
진묵이 대원사를 떠나오자 허공에서 큰소리가 울렸다.
“이후 300년 대원사는 빈천보를 면치 못하리니, 애도롭다!”
이후 대원사에는 불공도 아니 들어오고 농사도 잘못 되어,
정산이 대원사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 옹색함은 마찬가지였다.
대원사 어린 상좌의 이야기대로(정산이 대원사 머문 때)
그로부터 5년 뒤 새 주지가 들어오면서부터 절 형편이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7)
[7) 이상의 이야기는 정사종법사 재세시 시자로 있었던 박정훈교무로부터 취재한 것임 ]
진묵의 곡차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근래에 전국 도처에 민속주개발이 한창 붐을 이루고 있는 판에,
대원사 위에 있는 수왕사의 한 스님이 그곳에서 전래해 오는 토속주를 개발하여
‘진묵대사가 담궈 즐겨 마신 술’이라 하여 경향 각지의 매스콤의 각광을 받은 적이 있다.
전주 근방의 절 외에도 만경 불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해안 진봉산 심포리 망해암望海庵에서도 진묵대사는 얼마 동안 머물렀다.
금만평야를 등에 엎고 멀리 서해의 고군산열도를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는 망해사는
만경강 하류 진봉산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11년(671) 부설거사가 개창한1) 이래
이 고장 만경 출신 진묵대사 등등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백제 의자왕 2년(642) 부설거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음]
경내의 낙서전樂西殿은 선조22년(1589)에 진묵대사가 세운 건물로
그 후 1933년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팔작지붕 ⌐자 형으로 앞으로 한 칸 나온 부분에는 마루를 놓고
그 위에 종을 걸었고 망해사라는 편액을 걸었다.
갯가 가파른 산기슭의 절이라 물이 귀하여 개펄로 내려가는 아래 마당에
진묵이 작대기를 꽂아 그 우물로 수백 년 동안 물을 해결하였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수백 년 묵었음직한 아름드리 팽나무 두 그루가 뜨락에 청정한 기상으로 버텨 서 있다.
근래에는 이곳에 경비하는 전경들이 개발한 관정으로 식수를 해결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묵은 부설의 자취를 따라 부안 변산 월명암에서 안거를 났다.
월명암은 부설거사가 창건한 절이다.
월명암에서 진묵은 이런 일화를 남겼다.
여름 안거가 끝나고 다른 중들은 동냥을 나가고
후원 일을 보는 어린 사미와 진묵만이 남았다.
“스님, 상을 보아 놓았으니 때가 되면 잡수세요”
어느 날 어린 사미도 근방의 절의 재에 참예하기 위해 나가고 진묵 혼자 남았다.
진묵은 방문을 열고 문지방에 한 손을 얹고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다음 날 어린 사미가 돌아와 보니
진묵은 어제 그 모양대로 앉아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
사미가 정재간에 가서 보니 어제 차려 논 그대로 밥상이었다.
사미가 다시 방 앞으로 달려가서 보니 문지방에 걸쳐 놓은 대사의 손은
피멍이 들고 깨져 피가 엉겨 있었다.
바람이 불어 문이 열리고 닫히며 손을 찧어댔으나 미동도 않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어린 사미가 놀라서 호들갑을 떨자 진묵은 그제서야 눈을 뜨고 쳐다 본다.
“재에 간다더니 어째 바로 왔느냐”
진묵대사는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을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대중들은 대사의 이 입정 삼매를 두고 ‘능엄삼매’라고 말하였다.
진묵의 입정 삼매 일화는 봉서사 근방의 암자 상운암에도 남아 있다.
중들이 모두 탁발을 가고 진묵만이 남았다.
한 달만에 돌아와 보니 대사의 얼굴은 거미줄이 쳐지고 먼지가 끼어
사람을 알아 볼 수 없게 생겼다.
중들이 놀라 황겁히 얼굴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닦아 내고 인사를 드리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아는 체를 하였다.
“너희들이 어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대사가 길을 가다가 한 사미(어린 중)을 만나 동행했다.
그들이 물이 불어난 요추천에 이르자 사미가 먼저 공손하게 여쭈었다.
“소승이 먼저 건너 보아서 깊고 얕음을 헤아려 볼 터이오니
노스님께서 뒤따라 오시지요”
“그러게나”
어린 중이 바지를 걷고 쉽게 내를 건었다.
그래서 대사도 바지를 걷고 그냥 따라갔다.
그러나 웬걸 얼마 가지 못해 대사는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사미가 웃으며 붙들어 올렸다.
대사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나한에게 희롤 당한 것을 알고 게송을 읊었다.
奇汝靈山十六愚 불문에 의탁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철부지 이녀석아
樂村齊飯幾時休 낙촌의 잿밥 몇 때나 그칠건가
神通妙用雖難及 신통과 묘용은 너를 따르기 어려우나
大道應問老比丘 대도는 마땅히 내게 물어야 할 걸
진묵이 길을 가다가 개울가에서 천렵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탕을 끓여 배불리 먹다가 대사를 보고 장난으로 말을 걸었다.
“대사께서 이 물고기 탕을 드시지 않으려오?”
“거 좋지요. 먹다마다요”
“그렇다면 솥채로 드시지요”
“그러지라오”
진묵은 솥을 들고 그대로 생선 매운탕을 들이켰다.
뒤에서 젊은이들이 흉을 보았다.
“저, 저런. 중이 물고기를 먹다니. 쯪쯪”
“대사 불문(佛門)에 계신 분이 어찌 이럴 수 있다요?”
젊은이들이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힐책하였다.
자칫 봉변을 당할 지경이었다.
“허허. 물고기를 죽인 것은 자네들이지”
하고 진묵은 바지를 걷고 개울에 들어가더니 허리춤을 풀고 엉덩짝을 내놓았다.
청년들이 기가 차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 웬 변인가.
진묵이 끙끙 하고 용을 쓸 때마다 주루룩 수도 없는 물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물살을 가르고 헤엄쳐 가지 않는가.
“이녀석들아, 어서 저 멀리 강가로 가거라.
다시 잡혀 탐욕 많은 자들의 끓는 탕에 들지 말거라”
젊은이들이 기가 질려 그물이랑 솥을 챙겨 줄행랑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묵이 대원사에 머물 때 전주 장날이면 빠지지 않고 나갔다.
대중들이 중이 무슨 장을 보러 가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해거름에 다녀와서 진묵은 장을 잘 보았다며 희색이 만면하기도 하였고,
또 어는 때는 장에 가서 실패하였다고 투덜거렸다.
그것은 장 거리에 돌아다니다가
술과 안주를 보고 먹고 싶은 생각이 났다든지 또 다른 일을 당하여 사심이 났다든지 하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오늘은 장을 잘못 보았다고 화를 내고,
반대로 어떠한 사물에도 그 마음을 동하지 않고 온전하였으면
그런 날은 장을 아주 잘 보았다고 희색이 만면하여 활발한 기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2).
[2) 이공주, 사심은 우리의 원수이다 ≪회보≫ 32호 14쪽 ]
진묵은 온갖 색상色相에 마음이 끌리는가, 안 끌리는가 시험하러 간 것으로
동정간 불리선(動靜間 不離禪) 공부를 하였다.
전주부에 한 아전이 있어 진묵과 평소 사이가 가까웠다.
그가 관청의 곡식을 수백 석을 포흠질하여3)
[3) 포흠(逋欠)질하다 :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 ]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 칠 계획으로 진묵에게 와서 그 사정을 말하였다.
진묵이 꾸짖었다.
“도망질치다니, 그 일이 어찌 대장부가 할 짓이냐”
“…”
“집에 돌아가서 쌀 몇 말을 가지고 와서
나한전에 공양이나 하거라. 무슨 수가 있나니라”
그 아전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진묵이 아전에게 물었다.
“부중에 빈 자리가 하나 있느냐?”
“옥졸 자리가 하나 비어 있으나 보수가 아주 박합지요”
“보수는 헤아리지 말고 곧 그 자리로 옮겨라”
“예”
진묵은 주장자를 들고 나한전에 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명령하였다.
“아무개 일을 잘 도와주어라”
그날 밤 아전의 꿈에 나한이 나타나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네가 청탁할 일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직접 말하지.
어찌 스승님께 여쭈어 우리가 주장자를 맞아 고통을 받도록 하느냐.
네 행위를 보아서는 우리가 돕고 싶지 않으나 스승님의 명인지라 부득이 보아주겠다만,
금후로는 이 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
그 아전이 옥졸로 자리를 옮긴 뒤 송사가 자주 일어나 죄수가 옥에 가득 차고,
그들이 자주 뇌물을 써서 한달 안에 포흠을 다 갚게 되었다.
진묵대사가 입적한 지 2백년이 지나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鍾)은
진묵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모아 초의선사에게
≪진묵조사 유적고≫를 쓰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진묵의 실제 어록이나 전기는 아니다.
진묵에 관한 동시대인의 기록은 오직 하나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의 짤막한 애사이다.
≪진묵조사 유적고≫를 발간한 김기종의 아들 김영곤金永坤은
그 책의 발문에서 말하기를
“내가 봉곡 김동준선생의 일기를 보면 대사를 두고
‘이 분은 승려이기는 하나 유림의 행동을 하였으니 슬픔을 참을 길 없다’
(此僧墨名儒行不勝慟悼)라고 하였다”는4) 말 이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4) 완주시청, ≪완주군사≫ 972쪽 1987.2 ]
봉곡 김동준(1575~1661)은 봉서사 근방의 사람으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다5).
봉곡은 유학자이고 진묵은 승려지만 서로 사귀어 격의가 없었다.
[5) 봉곡 김동준(1575 선조8 ~ 1661 현종2) : 49세에 사마시에 합격, 인조반정 뒤에 의금부도사,
사헌부 감찰, 양성현감, 한성판관 등 역임. 병자호란 때 척화에 앞장 서는 한편, 인조를 수종하여
남한산성에 파난하였다. 그 뒤에 세자의 사부, 사헌부 지평, 의정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쳐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
어느 날 진묵이 봉곡의 집에 가서 무엇을 찾아볼 대목이 있어든지
유서(儒書) ≪주자 강목 朱子綱目≫ 70권을 빌려
동자에게 짊어지게 하여 절로 돌아오는 길이였다.
봉서사까지 30리 거리인데 길을 가면서 진묵은 강목 한 책씩 뽑아 보기 시작하여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70권을 다 보았다.
길을 떠난지 얼마 아니 되어 동자가 책을 도로 짊어지고 돌아오자 봉곡이 괴이쩍게 여겨 물었다.
“어찌하여 책을 도로 짊어지고 오느냐”
“가는 도중에 대사께서 다 보았답니다”
뒤에 봉곡이 진묵을 만나자 따졌다.
“귀한 서책을 빌려가서는 보고 땅바닥에 버리다니 어찌 그럴 수 있소?”
“허허.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은 필요 없지 않소?”
진묵의 대답에 봉곡은 대꾸하지 못하였다.
봉곡이 진묵에게 공양하기 위해 여종을 보내어 맞아오게 하였다.
여종이 중도에서 공중을 바라보고 선 대사를 만났다.
“스님, 저희 어른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대사는 그 말에 대꾸는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네가 아들을 갖고 싶으냐?”
“예에?”
해괴한 소리라 여인은 말뜻을 알지 못하였다.
“쯧쯧, 네가 어찌 그리 복이 없냐. 어서 돌아가서 내가 곧 간다고 전해라”
한참 뒤에야 진묵이 봉곡의 집에 돌아오자 어찌 그리 늦었냐고 그 연유를 물었다.
“내가 재를 넘어오다 보니 마침 한 줄기 영기가 서쪽 끝에서 떠올랐소.
그런 일은 만나기 어려운 일이기로 끌어당겨 사람에게 주입시기려 하였으나
마땅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소.
그 기운이 흩어져 상서롭지 못한 데로 흘러갈까 걱정되어
멀리 허공 밖으로 물리치느라 늦었던 게요”6)
[6) 박희선, ≪진묵대사≫ 상권 86쪽, 다나,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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