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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1장 16-24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태복음 11장으로 들어오면서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데, 지난 시간 살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관하여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열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계시의 판명성과 관련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했다면 세례 요한의 경우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차원에서 선지자보다 더 낫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맡겨진 사명과 관련하여 더 낫다는 표현이 돌려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비록 세례 요한에게 선지자보다는 낫다는 표현이 돌려지고는 있으나 그도 역시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본 자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 앞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12절과 13절로 표현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지난번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천국 복음의 역사는 분명 구약 시대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대하여도 천국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소위 율법 시대라고 말한다고 해서 천국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칼빈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의 다른 형식이요, 복음은 율법의 다른 형식이기 때문에 율법 시대라 할지라도 복음의 역사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은혜 위에 은혜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받은 자들은 천국을 침노하는 것처럼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자들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지난번에도 살펴봤지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마태복음에는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29절과 30절인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과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마태복음 11장 14절 말씀에 근거해 보자면 세례 요한을 즐겨 받는 자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즐겨 받는 자로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세례 요한을 즐겨 받지 못하는 자들로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자들로 있었다는 것이요, 그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 이후 오늘 본문으로 연결이 되는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이 세대’란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로 대표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는 자들,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들, 좀 더 나아가서는 세례 요한이 증거 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들이 이 세대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동무를 불러 놀이를 하게 될 때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피 울면 가슴을 치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결혼과 장례식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놀이인지 모른다고 해서 본문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피리를 불면 춤을 추는 것이 맞고 슬피 울면 가슴을 쳐야 하지만 지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춤을 추어야 할 때 춤을 추고 있지 못하고, 가슴을 쳐야 할 때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18절과 19절을 통해 언급이 되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기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고, 거기에 걸맞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옷으로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으며 음식으로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마3:4).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9장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논쟁한 것이 금식 문제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제자들만이 아니라 요한 역시 규칙적으로 금식을 하는 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엄격하게 생활하던 사람, 절제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에 대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생활도 엄격하다면 엄격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전해져오던 전통에 대하여 열심이 특심한 자들이었습니다. 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이나 금식의 규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의하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눅18:12), 어떤 면에서는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분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바리새인들 그리고 율법 교사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하면 저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자들. 겉으로는 깨끗하고 경건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속은 더럽고 추한 것이 가득한 자,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꼬집기라도 하듯 세례 요한은 저들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요한의 세례는 분명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떤가? 세례 요한의 가르침 앞에서 회개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회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은 저들 스스로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다소 강한 어조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다시 말해 너희는 합당한 열매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들 스스로 의롭다 여기기 때문에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비유처럼 그들은 그들의 의와 공로만을 나열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들이 받아 들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7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눅7:30).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달가워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먹지도 않는 자, 마시지도 않는 자라는 표현은 실제로 그의 생활이 엄격하고 절제된 면도 있었지만,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례 요한에 대한 비난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엄격함이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요, 다른 이상 세례 요한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비난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런 엄격함에 대하여 귀신이 들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들도 금식을 하면서도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비난 일색인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신 것은 무엇인가?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받아 들여야 될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은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더란 것입니다. 역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례 요한은 받아 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것을 시비 걸고 있다면 먹고 마시지 않는, 오히려 엄격하게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를 해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겁니다. 양 편 다 시비를 걸고 있고, 꼬투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먹고 마신다고 할 때 저들이 한 말이 뭐냐?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금식해야 할 때 금식하지 않는 것도 눈에 가시 같고, 또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자체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겁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금식 논쟁 이전에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런 내용이 잘 증거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말씀하신 것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저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도 받지 않는 자들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반면, 예수님은 먹고 마셨기 때문에 가르침에 있어서도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동일한 가르침입니다. 다만 그들의 삶의 모습만 달랐을 뿐입니다. 요한은 엄숙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좀 더 자유롭고 친밀하게 행하셨습니다. 요한의 경우 우레와 같은 기세로 회개를 촉구하면서 책망을 했다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와 같이 친밀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요한의 경우 마치 애곡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전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즐거움의 노래를 전하듯 그렇게 전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복음이 증거 될 때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받아 들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춤 춰야 할 때 춤추지 않았고, 가슴을 쳐야 할 때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들춰냈으면 죄인인 줄 깨달아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의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죄인의 친구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였는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세례 요한을 대하는 태도나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나 일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 그것이 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는 것,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진리 앞에서의 무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회개해야 할 자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고, 회개만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외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너희는 죄인이라 말씀하실 때 그것은 결코 거짓일 수 없습니다. 참된 가르침입니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고 해서 의인인가? 세리와 같지 않는 것 자체로 죄와는 상관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 경건인가? 경건의 모양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경건의 능력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서 무감각할 뿐이었습니다. 변함없는 진리가 다양한 모습 속에서 제공이 되고 있었으나 늘 거절하는 자로, 거절하면서 마치 진리를 제공하는 자 쪽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빛이 비춰지지만 빛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이 온 줄도 모르는 그런 무감각한 모습, 이것이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오늘날도 있습니다.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진리가 들려지고 있지만 아무런 감각도 없이 그냥 자리만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이라는 것을 외쳐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외쳐도 무감각할 뿐입니다. 슬피 울어야 할 때 가슴을 치지 않으며, 피리를 불 때 춤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 때문에 가슴을 치거나 춤추기보다는 세상의 것으로 가슴을 치거나 춤출 때가 더 많습니다. 즉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세상에 민감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무감각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19절 후반부에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혹은 ‘행한 일’에 대하여 각주가 있을 텐데, 거기 보면 어떤 사본에서는 ‘자녀들’로 번역하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은 행한 일이 아니라 자녀들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5절을 읽어드리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그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매우 다양한데, 문맥상 진리 앞에서 무감각한 자들이 있을지라도 지혜는 그 행한 일, 혹은 그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 살폈던 말씀 중에 14절과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눅7:29-30) 누가 받아들였는가? 모든 백성과 세리들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인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에 대하여 회개하는 자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즐겨 받는 자로 있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그것은 곧 그의 가르침 또한 배척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즉 세례 요한에 대하여 즐겨 받는 자들만이 귀 있는 자요, 들려지는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럼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어떤 자들인가? 육신의 귀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귀가 없습니다. 여러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는 자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 19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무감각해서는 옳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귀가 있다면 들어야 하고, 들은 바 되었다면 들은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하고, 슬피 울며 가슴을 쳐야만 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다시 말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기보다는 천국이 침노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침노를 당한 자들의 마땅한 바는 무엇인가? 천국을 향하여 침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옳다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무감각한 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 그가 바로 바리새인이요 율법 교사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은 어떠한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종교 지도자로 있었지만 참된 지혜를 가진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참된 지혜를 가진 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있지만, 그리스도가 지혜와 지식이란 사실을 모른 채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그러한 자가 아닌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란 무엇인가? 그들 스스로 지혜로운 자녀인 것처럼 행사하면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한편은 좀 더 엄격하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전할지라도, 혹은 그와는 반대적인 모습으로서 자유분방한 모습처럼 보이면서 전할지라도 진리라면 그것을 받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다만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폈지만 천국에 대하여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기 때문에 천국을 마치 인간의 힘과 지혜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금 전에 ‘행한 일’ 대신에 ‘자녀들’로 번역되기도 한다고 했는데, 지혜는 누구로 인해 옳다 함을 얻느냐? 그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 = 행한 일’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행함으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녀인 자들은 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29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도 말씀하시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행한 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믿지 않았습니다.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너희는 믿지 않았지만, 너희가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방해할 수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 11장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계속해서 20절 이하 24절의 말씀을 보시면 이처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 그렇기 때문에 무감각 자들이 받게 될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앞서는 ‘이 세대’를 향해 말했다면 여기서는 몇몇 고을들을 예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라고 할 때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였다면 몇몇 고을들이라고 할 때는 좀 더 확대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20절에서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권능을 행했다는 것은 소위 기적의 역사를 행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내용에 보면 분명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듣지 않으면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그 앞에 있어도 복음을 듣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적과 같은 일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유효적인 역할을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했다는 것은 권능만 행한 것이 아니라, 권능을 행함에 있어 초점이 되는 복음의 선포가 같이 있었다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권능까지 행했다는 그런 뜻이란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능을 행했다는 것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이런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마치 말씀만으로는 부족한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 믿었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권능을 많이 행한 지역조차 믿지 않았다,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세례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것 때문에 배척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고 마신다는 것 때문에 배척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권능을 많이 행하면 복음을 더욱 강력하게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권능을 많이 행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죄악만을 더욱 확고히 할 뿐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분명 복음은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돌아서서 주의 뜻을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런 복음에 대하여 믿지 않아서 좀 더 복음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이적들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라는 것을 드러내셨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면 믿어야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심판을 말씀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너희에게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을들의 죄악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완고하고 완악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소돔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돔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멸망하였습니다. 불과 유황을 내려 저들을 진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돔 성조차 너희에게 행한 많은 권능을 그곳에서 행했더라면 오늘날까지 그 성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주의 권능을 많이 베푼 고을들의 죄악이 소돔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소돔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너희는 이미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느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이렇게 세 고을을 언급하고 있지만 회개하지 않는 모든 도시,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저들은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교만함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할 정도로 교만하며,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교만합니다. 그런 교만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가? 하늘에까지 높아져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땅에까지 내려와 친히 말씀하시며, 기적과 기사까지 보여주시는데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신 그분을 대적할 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향하여 심판을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신 겁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단순히 겸손케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돔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한 것처럼 마지막 날 그와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하며, 복음 앞에서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피리를 불고 있는데 춤을 추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슬피 우는데 가슴을 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혹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만약 무감각하다면 이런 심판 외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이것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마11:25).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누군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고 말씀하신 대상입니다. 가버나움이요, 고라신이요, 벳새다입니다. 이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슬기 있다고 여기는 자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그들은 교만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잠16:5).
참된 지혜는 어디 있는가? 오늘 본문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다시 말해 복음 앞에서 무감각한 자가 아닌, 복음 앞에서 완악한 자가 아닌, 복음을 통해 회개하라고 한다면 회개하는 자,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 거기에 참된 지혜가 있습니다. 다만 노파심에서 다시금 말씀드리자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다음 주 살피게 되겠지만, 오늘 본문 이후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26절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5절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란 겁니다. 외적으로는 분명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도 증거 하였고, 예수님을 통해서도 증거 하였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자를 통해서도 증거 하였지만, 먹고 마시는 분을 통해서도 분명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으로 있었습니다. 반면 어린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대상들, 저들에 의하면 세리와 죄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혜롭지도 슬기롭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요, 그런 지혜를 따라 복음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달라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뜻대로 실행이 된 것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은 감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지난주 본문이지만 15절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되고 또 말씀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이사야를 통해서도 말씀하셨고(사43:8),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말씀하셨고(렘5:21), 에스겔을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겔12:2). 마태복음 13장을 통해서는 어떤 말씀까지도 하시느냐? 내가 비유로 말하는데, 비유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분명 하나님의 뜻에 의해 유기된 자들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들이 심판 받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완악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이 증거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동일한 복음을 세례 요한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의 무감각함과 무지함과 완악함 때문에,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교만함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학적 의미로서 말씀드리면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으나, 정죄의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통해 참된 신자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복음이 가르치는 바 그 말씀을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셔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다양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양 극단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진리를 증거 하는 것이라면 이런 외적인 모습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다양한 모습일 수 있으나 그들을 통해 진리가 증거 되고 있다면 진리라는 것 자체로서 진리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무감각함, 그리고 무지함, 완악함을 몰아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주의 것만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