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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대한광복단기념관
1.선비의 고장 영주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 가운데 풍기는 선비고장 중의 으뜸이다. 풍기는 소백산 동쪽 기슭에 위치했다. 소백산은 어머니의 산이다. 크고 넉넉하며 완만한 능선, 깊고 안온한 계곡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같다. 이중환은 『택리지』 복거총론에서 도사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더니 말에서 뛰어내려 절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로구나’ 외쳤다고 적었다. 그래서인지 소백산 자락에는 천하의 명당, 수려한 계곡이 많다. 정감록에서 천재지변이나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 중 첫 손가락에 꼽는 금계리도 풍기에 있다. 조선후기에는 정감록을 신봉했던 사람들, 사회적 혼란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풍기로 숨어들었다. 한국전쟁 때 이북피난민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곳도 풍기다. 오늘날 풍기가 인삼과 인견의 본고장이 된 것도 개성과 강화도 피난민들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외침과 박해를 피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 자족할만했던 풍기를 지배층들이 외면할 리 없다. 풍기 일대에는 명문가들이 많다. 출세한 인물보다는 학식이 높고 지조 높은 인물이 더 많다. 조선시대 전국 400여 고을 가운데 문과급제자 수가 네 번째였을 만큼 학문 수준도 높았다. 통일신라 때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곳도 풍기 인근이다. 고려 후기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도 풍기와 이웃한 순흥면 사람이고, 조선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도 영주 출신이다.
풍기를 거쳐 간 훌륭한 선비들도 많다. 풍기의 자연을 벗하며 시와 글을 남긴 시인 묵객들은 더욱 많다.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순흥이 안향의 고향임을 알고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뒤에 부임한 퇴계 이황은 주세붕의 높은 뜻을 나라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게 했다. 안향의 「죽계별곡(竹溪別曲)」, 주세붕의 「도동곡(道東曲)」, 이황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도 모두 소백산을 배경으로 지어졌다.
풍기의 선비들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을 때 단종복위운동에 앞장섰다. 한일강제병합 후 수많은 의사, 열사들이 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학문과 지조의 고장이라고 할 만하다. 최근 영주시는 ‘선비정신’ 확산에 팔을 걷어 부치고 있다. 영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도로에 ‘선비로’라는 이름을 명명했다. 소수서원 옆에는 ‘선비촌’을 조성했고, 2008년부터 영주한국선비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선비정신의 한국화, 세계화에도 열심이다. 단순한 지배층이 아니라, 학문과 교양, 의리와 지조 있는 품격 있는 선비상을 구현하려는 노력이다.
2.풍기 선비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
‘대한광복단’은 풍기지역 선비정신의 발현이다. 대한광복단은 1913년 채기중을 비롯해 10여 명의 동지들이 결성했다. 풍기지역 인사들이 중심이라고 해서 ‘풍기광복단’이라고도 부른다. 대한광복단은 국권상실 뒤 국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비밀무장결사였다. 대한광복단을 조직한 채기중은 경북 함창 출신이다. 을사늑약(1905)에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에 뜻을 두고 풍기로 이주했다. 일제강점기 풍기는 팔도 인사들의 출입이 빈번해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대한광복단 동지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한편 비밀회의를 통해 조직의 나아갈 방향과 투쟁계획을 수립했다. 나중에는 의병출신, 계몽운동가, 영남유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대한광복단은 공화제 국가건설을 지향했다. 보수적 영남유림이 득세했고 복벽주의가 대세였던 경상도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7월 대한광복단은 대구에서 박상진이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 일부세력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로 명칭을 바꿨다. 조직과 역량도 확대 강화됐다. 대한광복회는 창립목적을 국권회복과 독립 쟁취에 두었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무관과 군인을 양성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는 것을 독립방략으로 삼았다. 독립군 활동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켜 둔전을 개간하고 식량과 병력을 공급받으려고 했다. 회원들 중에는 대한제국의 장교출신이 많았다. 조직도 군대식이었으며 만주지역과 긴밀하게 연락하며 친일파 처단, 독립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이었다. 이석대가 부사령이었고 이석대가 전사한 뒤로는 김좌진이 역할을 대신했다. 대한광복회는 총사령이 국내활동을 책임지고 부사령을 만주로 파견하여 이상룡의 부민단, 신채호, 양기탁 등과 손을 잡고 독립군양성을 준비하도록 했다. 또 대구 박상진의 집과 삼덕태상회에 본부를 두고 영주의 대동상점, 해주의 여관, 광주, 삼척, 예산, 인천의 곡물상회,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 장춘의 상원양행 등 국내외 100여 곳에 거점을 마련했다.
1917년 말 대한광복회는 회원 400여 명의 비밀결사단체로 성장했다. 이들은 방대한 조직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친일부역자와 군자금모금에 응하지 않는 부호들을 처단했고 만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시도했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우선 회원들의 자산을 기탁하게 했으며, 일제가 징수한 세금마차를 습격하거나 영월의 중석광산, 운산금광, 직산금광 수송마차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자 일제는 대한광복회를 주시했다. 결과 1918년 1월 충청도지부가 발각되면서 조직의 일부가 드러났고, 이후 각 지부들이 발각되면서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까지 체포 처형됐다.
전국적 조직망을 갖췄고 공화제정부 수립과 무장투쟁이라는 분명한 독립운동 방략을 갖췄던 대한광복회는 비록 조직이 발각되어 와해됐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한 김좌진, 노백린은 북간도와 연해주 무장독립투쟁의 중심인물로 활동했으며, 김상옥, 황상규는 의혈단원으로 종로경찰서를 폭파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3.1운동 뒤에는 대한광복회원 출신의 한훈이 광복단결사대, 우재룡이 주비단을 결성했다. 해방 후에도 남아 있던 회원들이 조직을 재건하여 반탁운동 등을 전개했다.
3.대한광복단 기념관, 기념공원
한국전쟁 뒤 풍기에서도 대한광복단이라는 존재는 잊혀 갔다. 신출귀몰한 이들의 활동은 일부 노인들의 기억과 구전으로만 전승되었고 유적에 기념할만한 표석조차 세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5년 김계하씨가 나서서 사재를 털어 자료를 모으고 기념비를 제작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립을 하지 못했다. 1993년 이것을 지켜본 뜻있는 인사 10여 명이 모여 사업추진을 결의했고 이듬해 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같은 해 제1차 운영위원회에서는 사업규모를 확대하여 기념비 뿐 아니라 광복동산을 성역화하자고 결의했다. 민간의 노력으로 1995년에는 부지매입을 시작했으며 각계각층에서 기부금이 답지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감격적인 상징탑 제막식을 거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1996년 6월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가 창립됐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는 1997년 제78주년 3.1절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 행사를 계기로 정치권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정치권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관심과 지원으로 1997년에는 ‘광복공원’ 실시설계 용역이 발주됐고 대한광복단 관련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1998년 8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기념관 내부전시실 설계를 위한 전문위원협의회 심의를 실시했다. 이처럼 지난한 과정을 거쳐 1999년 10월 대한광복단기념관을 기공했으며 1년이 지난 2000년 1월에 준공했다.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는 기념관 준공에 만족하지 않고 이후 10여 년 동안 각종 기념탑과 추모비, 연못 등을 만들어 광복동산을 성역화 했고 채기중, 이관구 등 대한광복회 관련 인물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풍기읍에서 소수서원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좌측으로 ‘대한광복단기념공원’ 표지판이 나온다. 기념공원은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됐다. 주차장에 올라서면 흡사 중세의 성채 같은 기념관이 눈앞에 보인다. 기념공원 안에는 추모탑과 기념비, 광복탑, 국가유공자충혼탑, 무공수훈자전공비, 평화통일기념탑, 연못과 체육시설이 함께 있지만 주차장에서는 기념관 외에 다른 시설물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기념관 답사에 집중하게 했다.
기념관 내 전시실은 모두 5개다. 제1전시실은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이다. 대한광복단 결성과 활동 배경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개항 후 일제의 침략과 저항의 역사,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의 의열투쟁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제2전시실은 대한광복단의 활동이다. 1913년 대한광복단이 결성되는 과정과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손잡고 대한광복회로 발전하는 과정, 그리고 대한광복회의 주요 활동이 소개됐다. 제4전시실은 대한광복단의 정신을 담고 있다. 1918년 박상진, 이관구를 비롯한 핵심 간부들이 처형되고 회원들이 투옥되면서 대한광복회는 해산됐지만 3.1운동 후 김좌진의 청산리대첩, 임시정부 중심의 무장투쟁을 전개한 노백린, 한훈의 광복단결사대, 우재룡의 주비단, 김상옥의 의열단 활동으로 대한광복단 정신이 확대 발전한 과정을 설명한다. 4전시실은 영주지역에서 전개된 의병투쟁, 3.1운동, 1920년대 부문별사회운동, 신간회영주지회의 활동을 소개한다. 제5전시실은 사진체험실이다. 체험실 안에는 김구, 안중근, 한용운 등의 등신대가 있는데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어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4.무엇을 기억하려는가?
대한광복단기념관은 스토리텔링과 전시기법에서 배울 점이 많은 박물관이다. 독립운동사라는 것이 자칫 지루한 나열과 설명, 의미부여로 끝나기 쉬운데 기념관은 동선도 체계적이고 알기 쉬운 설명, 유물과 그림, 연표, 체험시설의 적절한 조화가 매우 인상 깊었다. 자연스런 동선을 따라 5층 사진체험실까지 오르면 산 정상부의 추모탑과 기념비, 광복탑, 국가유공자충혼탑 등이 있는 기념공원이 나타난다. 전시실에서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추모탑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영주시, 좁게는 풍기읍이 이 같은 기념관을 갖게 된 것은 풍기사람이라는 정체성과 독립운동에 대한 자긍심이 높기 때문이다. 그 자긍심이 김계하 같은 분을 낳게 했으며, 그의 간절한 염원이 잠자고 있던 풍기사람들을 일깨워 대한독립단기념공원을 만들게 했다. 공원 조성과정도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선양사업들이 기념사업회를 먼저 만들고 정치권의 도움을 받아 기념관이나 기념물을 만드는데 비해 풍기는 주민스스로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고 학술대회를 열어 객관성을 확보한 뒤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을 거쳤다. 실시설계 후에도 학계의 도움을 받고 몇 차례 내용을 검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박물관은 기억의 공간이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어떤 가치, 어떤 역사상으로 살 것인가?’와 맥을 같이 한다. 풍기 한국광복단기념관과 기념공원은 작지만 이 같은 요소를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는 훌륭한 박물관이다.(2020.11. 평택시사신문)
관람안내 ▶위치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소백로 2045 ▶관람시간(겨울) : 오전9시~오후 5시(전시안내 가능) ▶주차장 및 입장료 : 무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