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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신명 32장-34장
신명 32,1-52 모세의 축복과 모세의 노래
‘모세의 축복’과 ‘모세의 노래’는 신명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노래의 기본 형식은 고대 근동의 소송문 형식을 닮았다. 증인 요청과 고발,주군이 베푼 호의에 관한 기록,계약 위반의 내용,처벌 선언 등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에는 지혜 문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있고,예언자들의 가르침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절들도 있다. 정확히 어떤 배경에서 이런 색깔들이 입혀졌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지만,분명한 건 이 노래가 다양한 색깔을 지닌 작품이라는 것이다.
전체 노래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눠볼 수 있다. 머리말(1-3절) ; 하느님의 충실함과 이스라엘의 불충(4-9절) ; 하느님의 돌보심(lO-14절); 이스라엘의 배신(15-18절) ; 하느님의 심판 결정(19-25절) ; 원수들의 어리석음(26-35절); 하느님의 복수와 당신 백성의 구원(36-43절).
먼저 머리말에서 모세는 하늘과 땅의 주의를 환기하고 자기 노래의 의미를 밝힌다. 여기서 하늘과 땅을 부른 것은 자기 말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자기 노래를 들어달라는 뜻에서 하는 초대의 말이라는 견해가 요즘에는 더 우세하다. 모세가 자기 노래를 ‘가르침’이라고 일컬은 것은 지혜 문학적 성격을 드러낸다.
모세는 노래에서 하느님의 충실함과 이스라엘의 불충을 대비한다. 하느님은 바위처럼 강인하고 충실하지만,이스라엘은 어리석어서 비풀어져 있고 뒤틀려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광야에서 힘없이 방황하던 그들을 좋은 땅으로 이끄시어 배불리 먹이셨다. 하지만 살이 찐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버리고 그분을 업신여겼다. 그러고는 낯선 신들을 모시며 역겨운 짓을 하여 하느님을 분노하시게 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이다. 먼저 그분은 이스라엘에게서 얼굴을 감추시고 그들의 끝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실 것이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재앙을 퍼붓고 당신의 화살을 쏘악 그들이 굶주림과 질병 전쟁과 공포에 시달리게 하실 것이다. 다만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켜 기억에서 지워지게 하시지는 않을 것인데,이는 원수들이 어리석은 탓에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이겼다 생각할까봐 그런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소견이 없는 백성이며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끝이 어떠할지를 깨닫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패배는 그들의 바위,곧 그들의 신이 한 일이 아니며,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그들의 포도와 포도주,곧 그들의 승리와 성공도 참 하느님을 아는 데에서 옹 축복이 아니라 거짓과 잔혹함의 쓰디쓴 열매일 뿐이다. 그러니 그들의 최후는 파멸임이 자명하다. 다만 아직 하느님이 그날을 선포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침내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 다함을 보시고,그들의 권리를 옹호하시며,당신 종들을 가없이 여기실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분이시니, 그분은 공정한 재판관으로서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시고 당신 땅과 당신 백성의 죄를 풀어주실 것이다.
모세는 다시 한 번 율법의 모든 말씀을 명심하고 실천하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생명이며,그 말씀 덕분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오래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세는 마침내 하느님의 명을 따라 느보 산으로 가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한다.
32장의 내용을 세분해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중개자 모세는 이제 마지막으로 노래 두 개를 바치는데,첫 번째는 ‘모세의 노래’(31,30-32,44),두 번째는 ‘모세의 축복’(33장)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노래는 종합적 성격을 지녔다. 찬미,지혜,교훈,예언,역사 등 실로 다양한 요소가 들어있다. 이 노래는 크게 모세의 말씀(1-18절)과 주님의 두 가지 말씀(19-42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노래의 중심 주제를 전하는 4-6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이 노래는 본디 25절까지가 1차 편집 본문이고,26절 이하는 후대에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32장의 노래의 전체 형식은 예언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불의한 상황에 대한 고발은 모세(인간 예언자)의 말씀이지만,미래에 일어날 심판과 구원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되어있다. 한편 이 노래는 이집트 탈출은 언급하지 않지만,광야 시대와(7-14절) 약속한 땅에 정착한 시대(15-18절)를 기억하는데,이런 묘사에서 유배에 대한 암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이스라엘의 불충과 수많은 전쟁 등 왕국 시대를 묘사하고(20-25절),유배 중이나 이후의 신학 논리를 반영하는 듯한 묘사도 있다(37-42절). 그러므로 모세의 노래가 지금의 형태로 고정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기원전 11세기에서 5세기까지로 무척 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신명기계 에언자인 예레미아 에제키엘,제2이사야 등이 활약한 시대와 겹친다. 이들은 모두 모세의 권위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고,이들의 신학은 자연스레 이 노래의 전승과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늘아, 귀를 기울여라. 내가 말하리라. 땅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라”(1). 하늘과 땅이 이 노래를 들으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누구나 다 들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세상 만민의 주의를 환기하며 시작하는 양식은 지혜문학과 시편에서 볼 수 있다(욥 34,2;시편 49,2; 78,1). 그런데 이 표현은 또한 ‘들어라’라는 명령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앞에서 주님과 맺는 계약에 하늘과 땅이 우주적 증인으로 묘사된 적이 있는데 이제 모세의 마지막 노래에서는 청중으로 참여한다.
“4바위이신 그분의 일은 완전하고 그분의 모든 길은 올바르다. 진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느님 의로우시고 올곧으신 분이시다. 5그분께 못된 짓을 하여 그 허물로 이제는 그분의 자녀가 아닌 그들,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일 따름이다. 6주님께 이렇게 보답하느냐?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백성아! 그분은 너희를 내신 아버지가 아니시냐? 그분께서 너희를 만들고 세우시지 않았느냐?”(4-6).
이 노래의 주제를 전하는 4-6절의 문학적 구성은 아래와 같다. 각 절은 세 가지 신학적 주제를 전한다. 해당 구절의 해설을 보아야 한다.
- 주님은 바위이시다(4절)
- 이스라엘은 비뚤어진 자녀이다(5절)
- 이스라엘은 아버지께 보답하지 못한다(6절)
“진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느님”에서 ‘불의’를 뜻하는 말은 이따금 ‘허물’로 옮기기도 한다. 이 말은 본디 인간 사이에서 명예와 정의를 저버리는 행위를 지칭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에게서 ‘허물(불의)’을 찾고 다른 신을 찾는 자를 꾸짖었다(예레 2,5). 모세는 오직 하느님만이 불의가 없으신 분임을 여기서 확인한다.
모세는 주님을 ‘바위’로 선포한다. ‘바위’는 이 노래를 지배하는 열쇳말이고,4절에서는 특히 구문론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바위로 표현한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편 저자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반석’이라고 노래하였고(시편 18,32),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 외에 “다른 반석은 없다”고 확언했다(이사 44,8). 고대 근동에서 최고신은 흔히 바위에 비유되어 구원자요 도피처로서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었다. 여기서 모세는 오직 하느님만이 참된 바위임을 역설한다(31절). 바위이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전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초기 유다교에서는 창조주로서 하느님을 찬미할 때만 ‘바위’라는 표현을 썼다.
한편 “완전하고, 올바르고, 진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신 하느님 의로우시고 올곧으신 분이시다”라는 4절은 하느님의 속성을 묘사했다. 여기 쓰인 다양한 표현들은 하느님의 속성을 친절하게 밝혀준다. 또한 지금까지 설교와 법률의 형태로 제시된 신명기의 가르침이 하느님 속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도 잘 드러내 준다. ‘완전하다’는 18,13에서 ‘흠이 없다’로 쓰인 말과 같다. ‘올바르다’는 앞에서 ‘법규’로 옮긴 말이며,‘진실하다’는 앞에서 ‘아멘’으로 옮긴 말이다(27,15 등). ‘의롭다’는 16,20에서 주님께서 판관에게 강조하신 말씀이다. ‘의롭다’와 ‘올곧다’는 9장과 호응하는 표현이다(9,1-6). 이렇게 다양한 하느님의 속성은 ‘바위’라는 상징으로 종합된다.
5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고발한다. 여기서 쓰인 일부 표현은,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죄를 묘사하는 데 쓰인 말이다. “못된 짓”은 앞에서 모두 ‘타락’으로 옮긴 말인데(4,16),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저지른 불충을 묘사하는 대표적 표현이다. “허물”은 앞에서 모두,제물의 “흠”으로 옮긴 말이다(15,21). 주님께 드릴 제물은 가장 깨끗한 것을 골라야 한다. 흠 있는 것을 바치면 죄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백성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해야 마땅하지만,이스라엘은 죄를 지었다. ‘비풀어지다’는 지혜문학에 자주 나오는데, 대개 ‘빗나가다’로 옮기는 말이다(잠언 2,15),
모세는 결국 이스라엘의 가장 큰 불충은 하느님을 거스른 것이라고 질타한다. 의문문과 감탄문을 번갈아 사용하면서,모세는 복잡하고 답답한 내면을 솔직히 드러낸다. “그분은 너희를 내신 아버지가 아니시냐”라는 문장의 뉘앙스는 ‘도대제 너희들이 하느님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또는 ‘도대체 너희들이 하느님에게 이런 것을 보여드릴 수 있느냐?’에 가깝다. 모세는 참된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이 말씀은 지혜문학의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이다(“어리석은 백성’온 21절을 보라). 그러고 나서 모세는 창조주 하느님을 거론한다. ‘내셨다’로 옮긴 말은 주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뜻이다(창세 14,19). 그는 이어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만들고 세우셨음’을 상기시킨다. 모세는 하느님을 ‘너희의 아버지’로 부른다. 모세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임을 확실히 하는데,뒤에서는 하느님을 어머니처럼 묘사하기도 한다(18절),
7-18절은 지금부터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본다. 이 단락은,모세가 장차 태어날 자손들이 알아들으라고 그들에게 먼 미래 일을 알려주는 형식으로 되어있다(시편 78,3-6 참조). 우선 그는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의 역사(7-14절)를 개관하는데,이는 아래처럼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7절 권유: 과거를 떠올려 보아라.
8-9절 하느님은 선조를 선택하셨다.
10-12절 하느님은 광야에서 인도하셨다.
13-14절 하느님은 약속한 땅에서 배불리 먹이셨다.
7절에서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라. 말해주리라”는 말은 전통의 지혜를 탐구하지 않고 개인적 판단에만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조상과 노인들에게 지혜를 요청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 관습이었고,구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다(욥 8,8-10). 그러므로 교부는 이런 성찰을 남겼다. “감히 자기 자신만의 판단과 지혜를 신뢰하는 자는 뻔뻔스러운 장님과 같다”(요한 카시아누스). 여기서 노인으로 번역한 말은 ‘원로’로 옮긴 말과 같다.
“주님께서는 광야의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만 들리는 삭막한 황무지에서 그를 감싸주시고 돌보아 주셨으며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주셨다”(10). “광야의 땅에서 울부짖는 소리만 드리는 황무지에서 그를 감싸주시고”를 직역하면 ‘광야의 땅에서, 그리고 야생의 울부짖음의 혼돈에서 그를 찾으셨다’이다. 여기서 두 낱말이 눈길을 끈다. 첫째는 ‘혼돈’을 의미하는 ‘토후’인데 창세1,2에서 태초의 혼돈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둘째는‘찾다’이다.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찾으셨다’는 말은, 굶주림과 위협에 빠진 광야의 방랑자를 구원자가 찾았다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곧 한편으로는 힘든 광야 시절을 회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아 주셨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광야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보살피고 구해주신 일은, 이스라엘의 생존에 결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혼돈을 이기시고 질서를 세우는 하느님의 우주적 권능이 드러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눈동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상징한다(잠언 7,2). 우주적 권능을 지닌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겨 지켜주셨다(시편 17,8).
“13주님께서는 그가 이 땅의 높은 곳을 달리게 하시고 들의 소출로 그를 먹이셨다. 바위에서 나오는 꿀을 빨아 먹게 하시고 차돌 바위에서 나오는 기름을 먹게 하셨다. 14엉긴 소젖과 양의 젖을 어린양들의 굳기름과 함께 먹게 하시고 바산의 숫양과 염소들을 기름진 밀과 함께 먹게 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붉은 포도로 빚은 술을 마셨다”(13-14). 모세는 13-14절에서 역사를 돌아보며 하느님이 주신 땅의 풍요를 묘사한다. 곡식(13절), 포도주(14절), 기름(13절)은 팔레스티나의 대표 농작물이다. 여기에 더하여 ‘바위’라는 상징에서 두 가지 풍요가 흘러나온다. 우선 ‘바위에서 나오는 꿀’은 바위틈과 동굴에서 지은 꿀벌집에서 채취했을 것이다. 요한 세례자가 사막에서 먹은 들꿀도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마태 3,4). 그리고 ‘바위에서 나오는 기름’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움푹한 바위 두 짝을 눌러 기름을 짜는 방법에서 비롯된 것 같다.
“엉긴 소젖”은 발효된 유제품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크림, 버터, 치즈 등에 해당한다. “양의 젖”은 비교적 신선한 젖으로서, 이 표현은 가축의 신선한 젖과 발효된 젖 모두 포함한다. “굳기름”이라는 말은 가장 좋은 부분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일찍이 아벨은 하느님께 맏배와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4). 땅의 가장 좋은 것을 표현하는 데도 이 말이 쓰였다(창세45,18). 그러므로 ‘기름지다’는 가장 좋은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밀은 “기름진 밀”이요, “양들의 굳기름”은 양들의 가장 좋은 부위를 뜻한다.
15절에 ‘여수룬’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는 구약성경에서 다섯 번 나오는 이름인데 신명기 끝 부분에서 세 번 나오다. 언제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이 이름은 발음도 ‘이스라엘’과 비슷하여, 이스라엘의 상징어로 이해한다. 어근 ‘야사르’는 ‘올곧다’란 뜻이므로, ‘여수룬’은 ‘올곧은 권위’ 또는 ‘올곧은 민족’으로 새길 수 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한계를 지적하고 주님의 정의와 권능을 찬미하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올곧다고 우쭐댔지만 실제로 하느님을 저버렸다. 진정 올곧으신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바위를 무시하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18). 18절은 이스라엘의 죄를 요약한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잡신을 섬긴 죄는 결국 우리를 낳으신 하느님을 무시하고 잊은 것이다. 이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어긴 죄이다. 이미 광야에서 하느님을 어머니로 고백했다. 모세는 두 개의 동사를 사용하는데, 앞에 쓰인 ‘낳다’는 좀 더 일반적인 출산의 역할을 표현하는 말이다. 뒤에 쓰인 ‘세상에 내다’는 본디 출산의 고통을 강조한 표현이다. 출산과 관련된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여 여성의 역할을 세심하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이런 표현을 통해, 어머니께서 낳아주신 고마움을 무시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어버린 이스라엘이야 말로 천륜을 거스리는 불효라고 질타한다(19절).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불효자는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한편 하느님을 어머니로 묘사하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이따금 등장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큰 모성애를 지닌 존재로 표현한다(이사 49,15).
“그들은 신도 아닌 것들로 나를 질투하게 하고 헛것들로 나를 분노하게 하였다. 나 또한 내 백성이 아닌 자들로 그들을 질투하게 하고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을 분노하게 하리라”(21). “헛것”으로 옮긴 히브리어 ‘헤벨’은 본디 ‘한숨’이라는 뜻이다. 이 낱말은 인간의 숨결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신도 아닌 것”, 곧 헛된 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의 이웃나라들의 문헌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종교심을 표현하는 낱말이다. 헛것을 섬기는 것은 주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일이며,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하고 ‘헛것’을 섬겼기 때문이다. 열왕기 저자는 ‘헛것을 좇다가 스스로 헛것이 되었다’고 질타한다(2열왕 17,15).
헛것을 버리고 오직 살아계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신명기의 신학은 신약 시대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바오로는 구약성경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바르나바와 선교 여행 중에 리스트라에서 일어서지 못하는 이를 고쳐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 14,15).
“23나는 그들에게 재앙을 퍼붓고 나의 화살을 모조리 쏘리라. 24그들은 굶주려 쇠약해지고 열병과 모진 괴질로 죽어 가리라. 나는 그들에게 짐승들의 이빨을 먼지 위를 기는 것들의 독과 함께 보내리라”(23-24). 32,23-24절은 모두 7개의 재앙을 나열한다. ‘재앙, 화살, 굶주림, 열병, 괴질, 사나운 짐승, 뱀의 독’은 ‘전쟁, 굶주림, 사나운 짐승, 질병’이라는 네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심판을 넷으로 분류하는 에제 14,21과 비슷하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내가 예루살렘에 네 가지 해로운 심판, 곧 칼과 굶주림과 사나운 짐승들과 흑사병을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잘라 낼 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에제 14,21).
열병으로 옮긴 히브리어로 ‘레셰프’인데, 이는 본디 가나안의 라샤푸 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신은 ‘불의 신’이나 ‘빛의 신’이었고, ‘타는 재앙’, 곧 ‘열병의 신’이기도 했다. 고대에서 매우 무섭고 강력한 신으로 이해되었지만, 신명기계 신학자는 이런 두려운 신도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도구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질병을 내리시는 분도, 참된 치유를 하신 분도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바쿡 예언자의 말도 비슷하다. “흑사병이 그분 앞에 서서 가고/열병(레셰프)이 그분 발꿈치의 뒤를 따른다”(하바 3,5).
“우리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린다 하더라도 정녕 그들의 바위는 우리의 바위와 같지 않다.”(31). 32,4절에 하느님을 ‘바위’에 비유하였다. 원수들도 저마다 자기들의 최고시을 바위로 숭배하였다. 이스라엘도 야훼 하느님을 바위로 고백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이 모신 바위는 다른 바위와 전혀 다른 존재이다. 비록 고대 근동 신화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다르다. 모세의 말에서 유일신 신앙의 시작을 읽을 수 있다. 원수가 패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반석을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적은 곧 하느님의 적이므로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친히 “우리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표현은 특정 민족을 폄하하거나 차별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과 백성이 승패와 고락을 함께 하는 운명 공동체와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당신 백성의 힘이 다함을, 노예도 자유인도 남아 있지 않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당신의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36).
이제 모세의 노래를 마무리할 말씀이 펼쳐진다. 주님은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지만(7-14절),이스라엘은 불충하고 배신하였다(15-18절).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려 하셨었지만(20-25절)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계획을 품으셨다(26-35절). 왜일까? 그 이유가 이제 밝혀진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크나큰 자비 때문이다(36절). 주님은 결국 이스라엘을 위해 승리하실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이 두 번째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노래는 비극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노래로 마무리된다.
“노예도 자유인도 남아 있지 않음을 보시고”라는 말은 노예도 자유인도 없이 처절하게 패배한 상황,곧 하느님 백성의 사회 구조적 기반이 모두 사라진 상황을 의미할 수 있다.
주님의 두 번째 말씀(36-42절)을 이끄는 36절은 이 노래의 시인이 한 말이다. 모세는 백성의 불쌍한 처지를 하느님께서 ‘가엾이 여기셨다’고 전한다. 이 말은 ‘위로,후회,위안’을 의미한다. 주님께 불충한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시려는 주님의 계획(20-25절)이 바뀐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힘이 빠지고 패배한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주님의 자비하심과 백성에 대한 측은지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주님의 측은지심은 추상적 의미에 머무르지도 않고 일시적이지도 않다.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백성의 권리를 옹호”하시는 직접적 행동을 취하신다. 시편의 저자도 주님의 측은지심은 직접적 행동으로 드러남을 찬미한다(시편 135,14).
“이제 너희는 보아라! 나, 바로 내가 그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나는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한다. 내 손에서 빠져나갈 자 하나도 없다”(39).
“나,바로 내가 그다”를 직역하면 ‘나는, 나는’이다. 1인칭 독립대명사를 반복하여 주님께서 당신을 직접 드러내시는 문장은 구약성경에서 매우 드물다(이사 48,15; 호세 5,14). 이런 수사법은 주님 말씀을 생생하게 그대로 전달하는 효과를 발휘하여,뒤따라 나오는 유일신 선언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는 ‘유일신 선언’으로서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일맥상통한다. 일찍이 솔로몬은 기도할 때 이 선언을 사용했다(1열왕 8,60). 역시 신명기계 예언자인 이사야는 이 선언을 거듭하여 주석한다(43,10-13; 44,6-8). 특히 이 유일신 선언은 신명기의 신론을 함축한다(4,35,39). “나 말고는”을 직역하면 ‘내 곁에’이다. 곧 주님 곁에는 어떤 신도 없고 오직 주님만이 계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12절에서 “그 곁에” 낯선 신은 없다는 모세의 고백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다. 주님 곁에는 어떤 신도 없고 오직 대 예언자가 주님을 모시고 있을 뿐이라는 신명기의 유일신적 고백이 잘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라는 고백은 주님의 무한한 권능을 표현하는 말이자,매우 오래된 신앙고백이다. 일찍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며 39절과 같이 주님을 찬미하였다(1사무 2,6). 고대부터 생사의 문제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능이었다(2열왕 5,7). 하느님이 죽이신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죽음,질병,전쟁 등 죽음을 일으키는 다양한 재앙을 보여준다는 폭넓은 개념이다. 그래서 주님은 끔찍한 재앙을 일으키기도 하시지만 그 재앙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치유해 주기도 하신다는 말이 자연스레 뒤따른다(호세 6,1-2). 이런 주님의 무한한 권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고백은 어떤 신도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37-38절과 호응한다.
교부 아프라하트는 주님께서 이렇게 생사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기에 우리가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다고 해설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에서 주님의 측은지심과 바오로 사도에게 내리신 신비를 성찰하였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셨다. 그분은 분노하시고 치신다. 또한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신다. 그분은 분노하셔서 죽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살려주신다. 그분은 하나의 인격 안에서 이렇게 하선다. 또한 어떤 사람은 죽이시고 어떤 사람은 살리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하신다 ... 그분은 훗날 바오로라 불리는 사울을 낮추시고 또한 높여주셨다. 그분은 불신자인 사울을 낮추셨지만 신앙인 사울을 높이셨다. 그분은 박해자 사울을 낮추셨지만 설교자 사울을 높이셨다... 그분은 치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신다”
“민족들아, 그분의 백성에게 환호하여라. 그분께서는 당신 종들이 흘린 피를 갚아 주시고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복수하시며 당신 땅과 당신 백성의 죄를 풀어 주신다”(43). 모세의 노래를 마무리 하는 43절은 주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승리를 노래한다. 그리고 모든 죄를 풀어주실 미래를 기약하는데, 이 노래의 도입부처럼(3절) 하느님의 승리가 우주적 사건임을 선포한다. 하느님의 승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니라 전체 땅의 죄를 사하는 사건이다. “당신 땅과 당신 백성”은 ‘당신 백성의 땅’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번역이 신학적 의미를 더 해준다.
신명 32,45-46 생명의 유일한 원천인 율법
45모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 모든 말씀을 끝까지 들려준 다음, 46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를 거슬러 증언한 모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명심하여 실천하게 하여라. 47이 말씀은 빈말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는 이 말씀 덕분에,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가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45-47).
46절의 “율법의 모든 말씀”으로 강조된 “말씀’은 이 짧은 단락에서 5회 반복된다(45절,46절 2회; 47절 2회). 이 ‘말씀’은 곧 ‘생명’이다(47절). 이로써 바로 앞에서 불린 모세의 노래는 노래 형식에 담긴 주님의 가르침(토라)이요 생명의 말씀임이 잘 드러난다.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은 교육 신경(6,20-25)뿐 아니라 역사 신경(26,5-8)에서도 잘 드러난다. ‘명심하여 실천하라’는 십계명을 담은 5장과 이어지는 6장을 열고 닫은 강한 실천적 권유이자 신명기 법전에서 꾸준히 반복 되는 표현이다.
“빈말”을 직역하면 ‘너희로부터 빈 것’ 또는 ‘너희로부터 헛된 것’이다. 이 표현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주님의 말씀은 “생명”인데(4,1),그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단지 육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은 육체와 정신,과거와 현재,지상과 천상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반대말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의미가 없는 것,곧 ‘헛된 것’이다. 둘째 ‘너희로부터’는 이런 경우에 잘 쓰이지 않는 매우 드문 표현인데,유다교의 미드라쉬는 이렇게 풀이하였다 “토라에 빈 것이란 없다. 그러나 만일 빈 것,곧 부정하거나 의미 없는 것을 발견했다면,그것은 ‘너희로부터’ 온 것이다. 곧 토라 공부를 철저히 하지 않는 너희의 오류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토라 공부를 철저히 하면 “너희의 생명”음 찾을 것이라는 뜻이다.
신명 32,48-52 모세가 느보 산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을 받다
이 단락은 민수기의 이야기들과(27,12-14) 깊이 관련되었다. 하지만 민수기가 여호수아에게 정통성이 계승되는 데 관심이 많다면(민수 27,15-23) 신명기의 이 단락은 모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34,1-9 참조). 학자들은 이 단락에 다양한 전승들이 보존되어 있는데,특히 민수기의 전승과 사제계 원천(P)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특히 50.51절). 또한 이 단락은 모세와 아론의 죄를 상기시킨다(51절). 그리고 그 죄에 따라 모세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는 것이 재확인된다(50절). 그러므로 33장부터 이어지는 모세의 두 번째 노래는 모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여긴다(33,1),이 노래를 부르고 모세는 숨을 거둔다(34,5.7).
48절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에서 그날은 과연 언제일까? 바로 1,3의 “그날”이다. 또한 이날은 모세가 죽는 날(34,5)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모든 말씀은 하루에 일어난 일이 된다.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기 바로 전날이니 광야살이가 끝나는 날이다. 이날에 오경을 맺는 신명기가 선포된다. 또한 모세가 숨을 거두는 날이요,그의 권위를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물려주는 날이니,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 시대가 마무리되고 구세사의 새 장이 열리는 날이다. 신명기는 이날의 큰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신명기 1,4에 ‘탈출 40년 11월 1일’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아바림은 사해 동쪽의 산맥이고,그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느보 산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느보 앞 아바림 산"(민수 33,47-48)에 마지막으로 진을 쳤다고 기록한다. “예리코 맞은쪽 모압 땅”도 요르단 동편의 땅을 지칭한다.
하느님은 모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단정하신다. 죽음이란 저승에 모여있는 죽은 조상들과 합류하는 것이다. 신명 10,6절에서 아론이 묻힌 장소는 호르 산이 아니었다. 그런데 민수기는 이곳과 같이 호르 산으로 제시한다(20,22; 33,38). 이렇게 아론이 묻힌 장소를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오경에 다양한 전승이 충실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51그것은 너희가 친 광야에 있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를 배신하였고, 이스라엘 자손들 한가운데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52너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을 멀리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가지는 못한다.”
“므리밧 카데스”는 ‘거룩한 므리바’라는 뜻이다. 친 광야는 파란 광야(1,1)의 일부다. 파란 광야 남쪽을 일컫는데,백성이 들어갈 약속한 땅의 남쪽 경계를 이룬다.
51절에서 “너희가”라는 복수형으로 말하였으므로 모세와 아론의 죄를 함께 일컫는다. 민수 20,1-13에 따르면,미르암이 죽고,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모세와 아론은 하느님께 청하였다. 그러자 하느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할 일을 일러주셨다. 그런데 그 둘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을 글자 그대로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백성은 하느님
이 아니라 마치 모세의 지팡이가 어떤 마술적 힘에 의해서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민수 20,11). 그러자 하느님은 백성에게 물을 주셨지만,이 둘에게 약속된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벌을 주셨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명기는 모세와 아론의 죄를 다르게 설명한다. 모세의 경우에는 백성의 죄 때문이고(1,37; 3,26; 4,21) 아론은 송아지 우상을 만든 일 때문이라는 것이다(9,20-21).
신명 33,1-29 모세의 축복
“이것은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한 축복이다”(1). 이제 모세의 마지막 말씀이 시작된다. 이 축복이야말로 모세의 두번째 노래이자 마지막 말씀 곧 그의 유언이다. 평생 하느님 명을 받아 이스라엘을 이끌어 온 훌륭한 지도자답게 그의 유언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후손의 복을 벌어주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모세는 죽는 순간까지 백성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려 하였다.
죽기 전에 후손을 축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일찍이 이사악은 죽기 전에 야곱을 축복했으며(창세 27,27-29),야곱도 죽기 전에 후손을 축복하였다(창세 49,3-27). 모세가 이사악이나 야곱처럼 후손을 축복하며 생을 마감하는 장면은 그가 창세기의 조상들과 비교될 만큼 훌륭한 인물임을 시사한다. 모세의 마지막 축복은(33,6-25) 야곱의 마지막 축복과 문학적으로도 긴밀하게 관련된다. 하지만 야곱이 각 지파의 장점과 단점을 하나씩 나열한 것에 비해 모세는 각 지파의 거룩한 면만 지적한다. 또한 야곱의 축복에서는 ‘주님야훼)’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 데 비해 모세 의 축복에서는 여섯 번 등장한다(7.11.12.13.21.23절).
이제 모세의 두 번째 노래가 시작된다. 첫 번째 노래가(31,30-32,44) 끝나고,마치 모세의 사후를 준비하듯 후계자 여호수아와(32,44) 율법의 소중함이(32,45-47) 언급되었고 모세의 죽음이 재차 확인되었다(32,48-52). 두 번째 노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된 본문이기에 다양한 성격을 지녔지만,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도입(2-5절)과 마무리(26-29절)는 공통점이 많고 내용이 이어지기에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시편이다. 훗날 이스라엘 지파의 축복이 삽입되어 현재의 르우벤(6절),유다(7절),레위(8-11절),벤야민(12절),요셉(13-17절),즈불룬 · 이사카르(18-19절), 가드(20-21절),단(22절),납탈리(23절),아세르(24-25절) 순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처럼 모세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하듯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다. 모세의 축복은 창세기에서의 야곱의 축복과 다른 점이 있다면,모세의 축복에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이 없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축복이라기보다는 특정 지파나 그 지파가 차지한 땅에 관한 설명에 가깝고,또 어떤 부분은 미래보다는 현재의 삶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도입부(2-5절)는 4절을 제외하면 고대의 신화적 표상을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언급하는 지명은 모두 가나안 지역이다. 모세는 이런 문학적 장치를 통해 원래 이 지역에서 숭배하던 최고신들보다 하느님이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백성이 찬미한다고 고백한다(5절). 이 도입부는 마무리(26-29절)와 긴밀하다. 시나이 산에서 나타나시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신 하느님께서는(2절) 결국 이스라엘에 임금을 세우신다(5절). 그리고 주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은 결국 승리한다(26-29절). 이렇게 도입부와 마무리는 역사적으로도 잘 이어지는,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시편이다.
2절에 나오는 지명(시나이, 세이르, 파란 산, 므리밧 카데스)은 1-2장에서 자주 등장했는데,일종의 문학적 효과를 노린 것 같다. 독자들은 이런 지명을 보며 모세의 마지막 노래에서 신명기의 처음 곧 모세가 가르침을 전해주기 시작할 때를 상기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신명기 전체의 가르침을 회상할 것이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시나이 산에서 받았지만(탈출 19장),신명기는 호렙 산이라고 한다(5,2). 히브리어로 호렙 산의 어원은 ‘황폐하다’ 또는 ‘폐허’를 뜻하는 ‘하랍’이다. ‘호랩’의 의미는 ‘마른 곳’,곧 ‘광야’라는 뜻으로서,시나이 ‘광야’를 연상할 수 있다. 이 이름은 신명기계 신학자들이 시나이 산과 광야 시절을 한꺼번에 의미하도록 고안한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설명은 시나이 산이 광야 시대의 시작점이요,시나이 산의 계약과 광야 시대의 사건들이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의미와도 잘 맞는다. 신명기에서 시나이 산을 언급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한데, 역시 광야 시대의 시작점으로서 나온다.
세이르는 에사우의 후손들이 사는 곳으로 앞에서 자주 나왔고(2.4.5.8.12.22.29) 파란은 요르단 동편 지명이다(1,1). 32,51에서도 나온 므리밧 카데스는 ‘만 명의 거룩한 이들로부터’로 옮길 수 있다. 그렇다면 거룩한 천상의 무수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3절의 “거룩한 이들”과 관련 있을 것이다.
“정녕 민족들을 사랑하시는 분. 당신의 거룩한 이들은 모두 당신 손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 발 앞에 엎드려 저마다 당신의 말씀을 받습니다”(3). 고대 근동 문헌과 유다교 전통에서 임금에게 수여된 칭호 가운 데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민족들을 사랑하시는 분”은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요 이스라엘의 참된 임금은 하느님이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곳의 “민족들”을 이스라엘 12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19절 참조). 칠십인역이 단수인 “민족’으로 옮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마 그러나 세상의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하느님은 매우 보편적인 신으로 이해된다. ”거룩한 이들”도 전통적으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선조들,또는 이스라엘인 가운데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섬긴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신화적인 천상의 존재나(즈카 14,5: ‘거룩한 이들’) 하늘의 천사를(시편 103,20)이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천상 존재가 하느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복종한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지상과 함께 천상을 다스리신다는 뜻으로서 그분의 무한한 권능을 의미한다(2절).
2절이 주로 역사의 하느님을 찬미한 반면,3절은 신화적 표현으로 천상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이렇게 역사적 승리와 우주적 신화적 승리가 공존하는 점이 이 시편의 특징이기도 하다.
“르우벤은 죽지 않고 살리라. 그러나 사람 수는 많아지지 않으리라”(6). 6-25절은 이스라엘 지파를 하나씩 거론하며 축복하는데,대개 남쪽에 자리 잡은 지파부터 시작해 북쪽에 자리 잡은 지파로 올라간다. 그런데 모세는 11지파를 축복했다. 앞의 27,12-13에서 그는 분명 12지파를 거론했다. 그 명단은 창세기의 명단과(35,23-26) 일치하는 데,여기서는 시메온 지파가 빠졌다. 유다교 라삐 전승은 이 문제를 7절 2행에 주목하여 해결하려고 한다. 창세기에서 시메온의 어머니 레아는 아들을 낳고 “주님께서 ... 들으시고”라 말하며
아이의 이름을 ‘들음’과 관련된 ‘시메온’이라 지었다. 그런데 7절 2행에서 “주님 ... 들으시고”라는 똑같은 구절이 나오므로,7절은 실제로 유다와 시메온 두 지파를 축복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위 지파 명단에서 시메온은 대개 르우벤 다음에 유다와 함께 나온다는 점과 18-19절에서 즈불룬과 이사카르를 함께 축복했다는 점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시메온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시메온과 유다는 영토가 상당히 겹쳐서(여호 19,1-19) 분쟁이 잦았다. 그러므로 유다만 축복하고 시메온은 그 흔적만 남긴 채 삭제되었을 것이다.
본문에서 모세는 열두 지파를 하나씩 축복한다. 맏아들인 르우벤의 지파는 짧은 축복을 받는다. 그는 비록 경솔한 짓을 했으나 계속 살게 될 것이다. 다만 그에게는 아들이 적을 것이다. 이어서 모세는 유다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청한다. 유다는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전쟁을 해야 하겠지만,그의 힘이 더 강해지고 하느님이 그들을 도우시어 원수를 물리치게 해주시길 희망한다.
“레위를 두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당신의 툼밈과 당신의 우림을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마싸에서 그를 시험하시고 므리바의 샘에서 그와 겨루셨습니다. ”(8).
레위 지파에 관해서는 먼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기시킨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툼밈과 우림을 맡기셨고 마싸와 므리바에서 그들을 시험하셨다.
툼밈과 우림이라는 히브리 말의 원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물건과 함께 낱말도 이스라엘 이전의 가나안 문화에서 빌려온 것 같다. 그리고 툼밈과 우림을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금속이나 보석, 또는 나무로 주사위처럼 만들지 않았나 하고 추측된다. 이렇게 만든 두 개에 각각 다른 표시를 하였거나 색깔을 달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툼밈, 다른 하나는 우림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툼밈과 우림으로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볼 때에는 질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공격할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다(1사무 23,11-12). 사제는 이러한 질문을 놓고 먼저 툼밈과 우림이 각각 어떤 답을 의미하는지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머니나 그릇 속에 든 툼밈과 우림을 흔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둘 가운데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면 그에 상응하는 답을 내놓았다. 사제는 때로 자기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조금 자세히 대답하기도 한다(1사무 30,7-8). 구약성경에는 ‘아니다’나 ‘하지 마라’처럼 부정적인 대답이 나오는 경우가 전해지지 않는다. 툼밈과 우림을 흔드는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거나 둘 다 떨어지면,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툼밈과 우림을 대사제만 관장하였는지, 모든 사제 또는 특정 사제가 이 일을 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탈출기 28장 30절과 레위기 8장 8절에 따르면, 대사제만 툼밈과 우림이 든 가슴받이를 걸친다. 그러나 신명기 33장 8절에서는 레위 자손 사제들이 다 툼밈과 우림을 이용하는 것으로 되어있다(에즈 2,63과 느헤 7,65도 참조).
툼밈과 우림의 용도는 제한되어 있었다. 우선 예로 든 두 이야기에서처럼, 임금인 사울, 그리고 이 임금의 경쟁자로서 독립된 무리의 지도자인 다윗이 에봇 또는 툼밈과 우림을 이용한다. 왕정 이전의 판관 시대에는 단 지파를 대표하는 다섯 사람이 자기들의 지파 일로 사제에게 주님의 뜻을 물어달라고 요청한다(판관 18,5-6). 또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툼밈과 우림을 통한 하느님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인들을 이끈다(민수 27,21). 툼밈과 우림은 이렇게 임금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공적인 일로 하느님의 뜻을 묻는 데에 이용된 것이다. 툼밈과 우림은 곧 특수하고 공적인 경우에 쓰이는 ‘거룩한 제비’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레위와 그의 사제 지파들이 당신 율법을 해석하고 판관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스승 역할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제단에서 향을 피우고 봉헌물을 바칠 특권도 주셨다. 그러니 모세는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그들 노고의 열매를 받아주시길 청한다.
벤야민 지파는 짧지만 훌륭한 축복을 받는다. 벤야민이 야곱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그의 지파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 하느님이 그를 늘 지켜주실 것이기에 그는 평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지파의 축복은 매우 길다. 그들이 차지한 땅은 비속할 것이며,그들은 요르단 강 양쪽 땅을 차지할 것이다. 비와 이슬,그리고 땅 밑 샘과 우물은 당신 백성을 좋은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증거한다. “그는 맏이로 난 소, 그에게 영예가 있어라. 그의 뿔은 들소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 에프라임의 수만 명이 그러하고 므나쎄의 수천 명이 그러하리라”(17). 그는 ‘맏이로 난 소’인데,이는 요셉의 군사력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두 뿔은 에프라임과 므나쎄를 가리킨다. 요셉 지파는 이 두 뿔로 모든 원수들을 물리칠 것이다.
즈불룬과 그의 형 이사카르는 안팎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들은 기쁨을 누리게 될 터인데 민족들을 자기네 땅에서 바치는 희생 제사에 초대할 것이고,바다에서 나는 온갖 보화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다의 풍요’란 생선과 자색 염료를 의미하고 ‘모래 속에 감추어진 보화’는 유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고운 모래를 의미한다.
가드는 요르단 강 동쪽에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한다. 그들이 차지한 길앗은 소와 양을 치기에 좋은 땅이고,그곳에서는 상인들에 게 팔 향료를 비롯한 여러 좋은 것들이 난다. 가드는 또한 군사적으로 뛰어나 가나안 정복 때 용맹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단에 관해서는 그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 새끼’라는 말만 하는데,사자 새끼는 단이 가지고 있는 전사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야곱이 그를,말 뒤꿈치를 물어 그 위에 탄 사람을 뒤로 떨어지게 하는 “길가의 뱀”이자 “오솔길의 독새’라고 한 것(창세 49,17)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바산을 언급한 건 의외다. 바산은 단이 차지한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산 지역에 사자가 많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납탈리는 바다와 비옥한 남쪽 지방을 차지한다. 여기에서 ‘바다’는 갈릴래아 호수를 뜻하는데,이들이 차지한 지역은 비옥한 계곡이 있는 산악 지역과 훌례 호수 주변의 푸르른 평야를 모두 포함한다.
아세르를 위한 축복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기름’,곧 올리브 기름인데,올리브는 성경에서 매우 귀하게 여겨졌다. 음식뿐 아니라 건강과 청결을 위해서도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풍요와 기쁨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는 말은 아세르가 매우 풍요로울 것이라는 의미다. 아세르 지파는 북쪽 맨 끝에 자리 잡았기에 적이 공격하기가 어려워 비교적 안전 했다. 그래서 그의 빗장이 쇠와 구리라고 불린다고 한 것이다.
야곱의 축복과 비교할 때 시메온에 대한 축복이 빠져있다. 이는 시메온 지파가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유다 지파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메온 지파가 빠진 자리는 요셉의 지파가 둘로 나뉘어 메꾼다. 그래서 열두 지파라는 구조는 여전히 유지된다.
“이스라엘아, 너는 복되어라. 주님께 구원을 받은 백성아, 누가 너와 같겠느냐? 그분은 너를 도우시는 방패이시며 너를 힘 있게 하시는 칼이시다. 너의 원수들은 너에게 아부하지만 너는 그들의 등을 짓밟으리라”(29). “이스라엘아, 너는 복되어라”라는 말에서 복이란 히브리어로 ‘아쉬레’라는 말로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적을 쓰러뜨리고 발바닥으로 밟는 행위는 승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고대 근동의 벽화 등에 자주 묘사되고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여호 10,24;1열왕 5,17). 이를 시편 저자는 ‘원수를 발판으로 삼는다’고 표현했다(시편 110,1).
신명 34,1-12 모세의 죽음
모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34장은 신명기의 마지막 장일 뿐 아니라 오경 전체의 마무리다. 34장은 모세가 느보 산 꼭대기에 서서 약속한 땅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1-4절) 이는 32,49과 직접 연결된다(민수 27,12-14 참조). 모세는 마지막까지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 주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장래 이스라엘의 영토를 보여주셨다(5-9절). 비록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모세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것이 훌륭한 결과를 맺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며,그의 인생을 격려하셨다. 그리고 모세라는 큰 인물의 묘비명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문장으로 오경은 끝난다(10-12절). 34장은 새로운 신학적 주제를 제시하기보다 앞에서 강조한 것을 재확인한다.
모세는 마침내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 이스라엘이 차지할 땅을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죽은 뒤 그는 모압 땅 뱃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는데,그가 묻힌 자리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마지막에 성경 저자는 모세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예언자였다고 증언하며,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힌다. 하지만 모세 스스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라 했다(18,15), 또한 성경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히즈키야 임금에 관해 성경 저자는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5)고 말하지만,뒤에서는 요시야 임금 같은 이는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3,25)고 진술한다. 그럼에도 모세가 하느님의 가장 충실한 종이었으며,하느님과 가장 특별한 관계에 있던 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이것은 모세가 하느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었다는 증언이나, 그가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이루었다는 증언에 잘 드러난다.
이 마지막 장에는 아쉽고 안타까운 정서가 스며있다. 모세는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이 백성의 죄 때문임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1,37; 3,26; 4,21; 32,50-52). 결국 모세는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었고 무덤의 위치도 모르고 장례도 이방인의 땅에서 치렀다(5-8절). 하지만 모세의 이런 죽음은 유배 중의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조상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낯선 땅에서 대를 이어 장례를 치러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은 모세의 운명과 자신들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이 주실 약속의 땅을 마음에 그렸을 것이다(2-3절). 모세의 가난한 죽음과 장례는 예수님의 그것과 닮았다.
“1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1-3). 1-3절에 묘사된 지명은 한 곳에서 육안으로 볼 수 없다. 이 구절은 미래의 이상적인 이스라엘 영토를 요르단 동편의 남녘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차례 차례 묘사한다. 요르단 동편의 남북을 차지하는 단과 길앗의 땅은 이미 정복한 땅이다. 요르단 동편의 북녘 땅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려 납탈리 지파의 땅으로,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의 중앙부를 차지한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으로, 그리고 남쪽 유다를 관통한다. 특이하게도 오직 유다의 땅만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이라고 강조되어 있다. 이는 남유다왕국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남쪽 경계인 네겝과 초아르로 향한다. 초아르는 사해에 인접한 봉우리로, 사해의 남쪽 끝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하느님께서 주님의 종(5절) 모세에게 베풀어 주신 격려와 은총은 인간의 참된 성공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한다. 모세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일은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고 후계자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흠 있거나 모자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세의 삶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히 따른 최고점을 보여준다. 모세는 하느님이 보여주신 미래의 땅을 보고 불평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침묵한다. 신명기 전체가 모세의 설교였고,지금까지 주옥같은 가르침을 풍부히 주었지만,오직 34장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의 의미 깊은 침묵은 하느님의 명령을(3,26) 수행하는 것으로서,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는 자의 기쁨에 찬 응답이요 확신이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히 살았고, 평생을 바친 일의 최종적 성과까지 온전히 하느님께 드리고, 그의 인생을 침묵으로써 완성했다(6절).
이런 침묵 속에서 34장은 이집트 해방 사건을 완성하실 메시아를 예고한다. 모세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독자는 과연 하느님의 약속을 완성하는 자는 누구인지 궁금해 하게 된다. 물론 모세는 여호수아를 안수하였다(9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백성은 모세의 비명에 묘사된 인물을 염원하게 되었다. 곧 ‘주님의 종'(5절)으로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10절)가 ‘이집트 탈출 당시의 파라오에 맞서 일으키신 표징과 기적’(11절)을 온 이스라엘 앞에서’(12절) 보일 그날을 고대하였다. “10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10-12).
여기서 율법서인 모세오경은 비교 불가능한, 영원히 통용되는 계시로 표현되고 있으며 모세는 예언자이며(신명 18,18: 34,10) 율법의 해석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모세는 주님의 얼굴을 마주한 사람, 곧 주님의 현존을 반영했던 인물로 주님 현존의 영광스런 표지를 백성들에게 발산했던 하느님의 사람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에는 죽음과 삶이 하나가 된다. 죽지 않고서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차원의 것으로 승화되고 있다. 모세의 죽음이 바로 이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모세를 통한 출애굽 체험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으로 받아들여져서, 모든 구원사건들을 뒷받침하는 배경과 원천이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모세오경 마지막 권의 이 대미(大尾)에는 이상하게도 우수 같은 것이 서려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본래부터 의도한 해방을 고대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집트 탈출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세가 아쉬웠다"(베네닥토 16세) 모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스스로 훌륭하거나 정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주님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가 마주 보면 사귀던’(10절) 가장 친밀한 사람으로서,훗날 ‘아빠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여주실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신명기의 완성이요,신명기와 오경의 마지막 장은 예수님을 고대한다.
<신명기를 마치며 신명기의 메시지>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맨 마지막에 있는 책이고,앞에 나온 내용을 요약 설명하는 복습서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신명기의 사상은 오경의 정신을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역사서와 예언서에 무수한 담론을 제공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신명기를 오경의 핵심 가운데 핵심이자 구약 신학의 결정체라고도 한다. 또한 종교학이나 사회학적으로도 신명기의 제례 중앙화나 유일신론은 후대 이스라엘 신앙과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신명기가 전하는 메시지들은 오경과 구약성경 전체가 전하는 메시지와도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 크게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신명기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모습을 가르치는데,그 핵심은 ‘신앙을 함께 배우는 공동체’,‘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는 공동체, ‘형제를 돌보는 공동체’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율법을 배우는 공동체다. 이때 ‘배움’은 하느님이 보내신 스승 모세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되새김으로써 가능해진다. 신명기는 이를 위해 기도문과 신경,노래 등을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예를 들어, 자손들이 율법에 관해 물었을 때 부모가 가르쳐 주어야 할 ‘교육 신경’(6,21-25)이나 추수 감사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을 때 바치는 ‘역사 신경’(26,5-10),탈출 체험의 보존과 구현을 위한 윤리 강령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5,6-22),7년마다 초막절에는 백성에게 율법을 읽어주라는 규정(31,9-13),백성이 대대로 따라 부르게 하려고 알려준 ‘모세의 노래’(32,1-43) 등은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함께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또한 그분 앞에서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는 공동체다. 신명기에서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웃과 함께 어울리는 나눔의 장이다. 그리고 축제의 핵심은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제는 하느님 제단에 봉헌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다른 이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완성된다. 원래 가족 단위의 잔치이던 파스카도 신명기에서는 공동체 행사가 된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집트 탈출을 기억하는 파스카와 무교절을 통해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백성은 형제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다른 동족들을 배려하고 돌보는 공동체다. 사실 이스라엘에 왕정이 들어서면서 하나의 형제요 자매인 이스라엘 백성 안에 계급이 생기고 양극화가 극심해진다. 하지만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십일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사소한 일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회다.
2. 투쟁으로서의 신앙 여정: 신명기에는 ‘싸우시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이집트를 벌하시고,가나안 땅의 이민족들을 쓸어버리실 분이다. 하느님의 전투적 성향은 그분의 명령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민족들과 타협하거나 공존해서는 안 되며,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려 가나안 땅을 정화해야 한다.
현대인은 이렇게 과격한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한다면,싸우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하느님의 참모습인지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이 가르침을 해석한다면 신명기에 담긴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느님은 지금도 쉴 새 없이 당선 백성을 죄의 노예로 삼으려는 악의 세력과 싸우고 계시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조금의 타협도 없이 하느님과 함께 악과 싸워야 한다. 특히 하느님 군대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서서,예수님이 택하신 삶의 방식대로 살아감으로써 영적인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결국 모든 악을 물리치신 후,당신과 함께 싸운 모든 신앙인들을 약속의 땅인 하느님 나라로 받아 들이실 것이다.
3.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신명기는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섬기고,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6,5).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10,17)이시며,“살아계선 하느님"(5,26)이시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가르침이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신론인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사실 신명기는 하느님이 오직 한 분 계시다는 주장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곧 이민족들이 자기네들 선을 믿으며 자기 신이 진짜라고 아무리 주장하더라도,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니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이다.
4. 신명기와 신약성경: 오경 가운데 신명기는 신약성경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러므로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본다면 전체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도 2-5장에 묘사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은 신명기가 꿈꾼 ‘하느님 백성’의 모습이다.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며,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사도4,34) 공동체를 일구어 가는 모습은 “너희 가운데에는 가난한 이가 없을 것"(신명 15,4)이라고 한 신명기의 이상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은 한 분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큰 계명으로 여기고(마르 12,28-30),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계명을 지키는 것(요한 5,42; 8,42)으로 여기는 관점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셋째,신명기의 가르침은 율법에 관한 바오로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끊임없는 반란과 불순종에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 하느님 은총 때문이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오로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일찍이 모세는 이렇게 가르친 바 있다.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러 들어가는 것은,너희가 의롭거나 마음이 올곧아서가 아니다. 다만 저 민족들이 악하기 때문에 주 너희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시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저 좋은 땅을 차지하라고 너희에게 주시는 것은 너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녕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신명 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