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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순신 장군의 칼>의 줄거리:
아산 현충사에는 각각 보물 324호와 326호로 지정 된 두 자루의 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쓰시던 이 두 칼에 담긴 의미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과 통곡의 눈물을 함께 이해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렇게 이해하다 보면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참 부럽습니다. 베드로식의 예수 부인과 눈물이 없으면 참 신앙으로 나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칼
(막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이순신 장군의 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아산 현충사에 여러 번 갔습니다, 전도사로 있으면서 교회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고 또 한 번은 목사님들끼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아산 현충사에 들어가서 관람을 하고 있는데, 어느 목사님께서 불러요.
그래서 갔더니, 이순신 장군의 칼을 가리키면서, 이 설명을 한번 보라고.
설명을 보니까, 당대 최고의 도공이 이순신 장군의 칼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태귀련이었습니다.
이 순신 장군의 칼은 길이가 2m 가까이 되는데 (1970mm이니까 1m97cm이잖아요) 그리고 다른 칼도 그 보다 2mm 작으니까 거의 2미터 되는 칼인데, 이 칼들은 태 목사님 집에 걸려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러면서 다들 농담을 했습니다.
아마 그 칼을 만든 도공의 이름이 태 귀련이 아니라 김 귀련이던지 이 귀련이었다 그러면, 김씨 성 가진 목사님이 아무리 많이 계셔도 이런 농담은 안 했을 거에요.
태씨가 하도 이제 희성이다 보니까, 태 귀련이라고 하는 도공의 이름을 보고는 아.. 태 목사님의 집에 이 칼들이 걸려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농담을 했고, 제 자신도 잠깐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찌 어찌 하다가 이순신 장군이 칼이 망가져서 칼날이 다 패어 가지고, 다시 태 귀련 도공한테 칼을 맡겨서 수리를 해 달라고 그랬는데, 그만 이 순신 장군이 돌아가셔서 태 귀련씨가 그 칼을 대대로 물려가다가 나한테 들어왔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 잠깐 해 봤지요.
그런 생각할 때, 제가 칼을 산 기억을 합니다.
독일에 유학 갔을 때, 저희 집사람보다 3개월을 먼저 들어가 있었는데, 가지고 간 돈이 몇 푼 안 되는 중에도, 살림을 좀 장만해야겠다 싶어서 장만한 것 중의 하나가 그 유명한 독일의 쌍둥이 칼이었습니다.
독일에 머물고 있는 기간 동안에, 5년이 넘게 머무른 그 기간 동안에 해 먹고 산 음식은 그 칼 밑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러나 아산 현충사에 이순신 장군의 칼을 생각할 때는, 이런 실용성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 칼로 무를 썰겠습니까? 배추를 썰겠습니까? 하다못해 뭐 소시지라도 썰겠습니까?
전혀 실용성과는 관계없는, 실용성 제로의 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의 칼입니다.
이 이순신 장군의 칼에 담긴 이 실용성과 연관된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일과 베드로가 운 것, 마가복음에는 단순히 울었다고 얘기하는데, 마태복음에는 심히 통곡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베드로가 통곡한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연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순신 장군의 칼에 얽혀있는, 실용성의 의미와 아주 깊이 비유적으로 연관돼서 설명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 사건을 쉽게 생각합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잘못되었고 나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점을 좀 다르게 봅니다.
서울에서 부산 갈 때 서울에 있는 사람은, 떠나보낸 아들이 대전쯤 갔으면, ‘아~ 서울에서150Km 갔구나’ 그러지만 부산에서 기다리는 아들의 애인은 ‘300Km 더 와야 되는구나’ 이렇게 봅니다, 관점에 따라서.
그런 것처럼 조금 관점을 바꿔보면, 우리가 그 동안 몰랐던 의미가 이 베드로의 눈물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그 행동 속에 들어있다는 얘깁니다.
자,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눈물을 같이 이해해야 하는데, 이 눈물이 단순한 죄책에서 나온 눈물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베드로가 단순히 무서웠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세 번이나 맹세하면서 저주까지 하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사랑을 묻게 되고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을 합니다.
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인한 것, 이 모든 것이 다 이 눈물과 어떻게 연관지고 얽혀있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예수님,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단순히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든지 겁이 났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는데, 더 깊은 이유는 무엇이었냐 하면, 실용성이 제로인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겁니다.
베드로 말이 맞아요, 71절에 보면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부인합니다.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런 예수님은 몰라요, 베드로가, 실제로 모릅니다, 그런 예수님은 상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을 것을 예고하심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예수님이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고, 그런 예수님을 알아 본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부인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자기가 예수님의 실용성을 고려해서 인생을 설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향해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 인생을 얹어놓은 그 예수님이 자기가 착각한 예수님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이 세상 안에서 이 땅 위에서 자기 인생에 대하여 쓸모가 있는 예수님인줄 알고 있던 착각에서 벗어나서, 자기 이 세상의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예수님인 걸 알고, 예수님 자기 인생에 대해서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을 부인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땅 위에서 병 안 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십자가로 가는 예수님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내가 나라의 독립을 꿈꾸고 소원하고 있는데, 그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실용성이 제로입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고 인생을 명예롭게 살고 싶은데, 그러한 내 인생의 꿈에 대해서 예수님이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부자로 살고 싶은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을 베드로는 부인한 것이에요.
근데 참 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에게서 베드로 자신의 이 땅 위에서의 인생을 위한 실용성이 완전히 다 제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이상한 것은 자기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예수님, 마치 고기에서 기름을 제거하듯이 쓸모가 제거되어진 그 예수님이 마음 한 복판에 남아 있는 것을 베드로가 느끼게 됩니다.
이젠 아무 도움이 안돼요.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있는 거예요.
왜 부인했습니까?
저렇게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저런 예수님은 모른다고 생각을 한 거에요.
막~ 부인했어요.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아주 마음 놓고, 대놓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여기에 도움이 되고, 내 인생에 이런 면에 도움이 되고 저런 면에 도움이 되고 이렇게 생각했던 예수님이 도움 다 없어졌는데, 예수님 자체가 딱 마음속에 남아있는 겁니다.
마치 무 하나 썰지 못한 채, 배추하나 썰지 못한 채 유리 상자에 담겨서 아산 현충사에서 보관되어 있는 이 순신 장군의 칼처럼,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참 이상한 거예요, 신앙이라는 게.
예수님의 실용성이 없음을 발견하고,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실용적이지 않잖아요, 우리 삶에 도움이 안돼요, 실제 도움이 안돼요, 쓸모가 없어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쓸모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삶에 실용성이 없음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이, 예수님 자체가 내 마음에 보존이 됩니다.
무 하나 썰지 못하는 이순신 장군의 칼이 나라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내 인생의 실용성을 다~제거해 버린 예수님 자체, 이제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나한테 아무 도움이 안돼요,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그런데 그 실용성을 다 예수님에게서 제거하고 났는데 예수님이 마음에 딱 남아 계시면서, 아산 현충사에 이 순신 장군의 칼처럼 내 마음에 보물이 되어버립니다.
이 보물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끼어 안고 베드로가 지금 통곡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실용성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쫓고 있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향해가는 예수님이 실용성 제로인 것을 알 때 부인할 것을 아셨어요.
그리고 실용적인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매여서, 실용적인 예수님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는 그 베드로의 마음속에,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이 아산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 칼처럼 베드로의 마음에 보존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베드로를 만나서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내가 이 땅 위에서의 네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도, 지금 네 마음 안에는 내가 보존되어 있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주님이 아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참 역설적인 거예요.
예수님을 부인하고서야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실용적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인되어야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내 사업의 도움이 되고, 내 자식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고, 내 건강에 도움이 되고, 내가 승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부인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실용적인 예수님이 완전히 부인 될 때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통하여 부인 될 때, 그 실용성이 완전히 제거돼 버릴 때 순수하게 기름 뺀 고기처럼, 예수님 그 자체가 내 마음에 보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보배로 얘기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요, 자기 인생의 이 땅 위에서의 자기 인생의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설계한 주체가 되어서 디자인 한 자기 인생에 전혀 쓸모가 없는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현충사의 이순신 장군의 칼처럼, 전혀 칼로서의 실용적인 의미가 없는 그 칼이 나라에 보물이 되었던 거예요.
저희 집사람도 부엌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칼이 바뀌어요.
요즘은 컬러풀한 칼을 또 이용 하더라고요.
녹색 칼, 분홍색 칼, 웬 칼이 또 색깔을 다 입혀놨어요, 희한해요.
실용적인 칼들은 쓰다가 버립니다.
근데 실용성 제로의 이순신 장군의 칼은 대한민국이 존립하는 한 남아서 보물로 남아있을 거예요.
참 희한한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실용적인 예수님 내 삶에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이제는 쓸모없는 예수님입니다, 쓸모없다 예수님.
그런데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맨 날 베드로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우리보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부인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겁니다.
왜 우리가 부인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베드로가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그 죽음으로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교리화 시켜 버려 가지고 몇 마디 말로 다 처리해 버립니다.
근데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실 때, 자기 인생을 예수님 위에 설계했다가 그 예수님 위에 설계한 자기 인생 전체를 다 상실하는 그 아픔 속에서,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겁니다.
이 땅 위에서 나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예수님 부인하는 겁니다.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보는 게 믿음인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한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는 데에.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아요.
실용적인 예수님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해 버립니다.
실용적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는 여전히 실용적이다 이겁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살고 있는 내 인생에 여전히 실용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부러운 거죠.
왜? 실용적인 예수님,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서 꼼짝 못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부인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내 마음에 보물이 됩니다.
아산 현충사의 보물처럼 실용적인 예수님이 부인되어야, 예수님이 실용성이 빠진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 예수님 그 자체가 내게 보물이 될 텐데, 여전히 베드로가 부인하기 이전의, 십자가 이전의 구간에서, 십자가 이전의 상태에서 우리는 신앙이 머물러 있다는 것이에요.
자, 베드로의 삶을 보면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면서 십자가 이전의 자기가 꿈꾸었던 삶을 머리터럭 하나만큼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뭐라 그래요?
‘네가 젊었을 때는 네 스스로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이제는 남이 너에게 허리띠를 띄우고 끌고 갈 것이다’ 무슨 얘깁니까?
베드로가 실용적인 예수님을 십자가를 통해 부인하고 예수님자체, 실용성 제로 자기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그 예수님 자체를 마음의 보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에게 실용적인 인물이 된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 인생에 대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실용성 있는 존재로 모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먼저, 예수님이 전혀 실용성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해야 됩니다.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을 붙잡아야 됩니다, 실용적 제로의 예수님을.
말이 좀 이렇게 헷갈리죠, 여러분? 저도 헷갈리는 것 같아요.
실용성 예수님,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하고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이 마음에 남아야 된다는 거예요, 아산 현충사의 칼처럼.
그때 예수님이 내게 보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때 아산 현충사의 칼이, 사실은 무를 썰지 못하고 배추를 썰지 못해도 독특한 차원이 다른 실용성을 갖고 있어요.
그 칼 하면, 이순신 장군의 나라를 구한 충성이 담겨져 있고, 그 칼 하면 나라 전체의 보존과 존립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새로운 차원의 실용성의 칼로 바뀐다는 겁니다.
무 썰고 사람 죽이고 배추 써는 그런 칼이 아니지마는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보물이 되실 때, 말로만 듣던 천국이 실제 지금 현재 내 것으로 마음에 부딪쳐 온다는 거예요.
말로만 듣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 내 아버지로서 내 마음을 터치하신다는 겁니다.
천국의 실용성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땅에 대해 실용성 제로의 존재가 되신 겁니다.
이 땅의 삶에 대해서 실용성 제로인 예수님이 마음에 보물이 된 사람, 내 인생에 쓸모 있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 더 이상 쓸모없다 십자가를 보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깨닫고 예수님자신을 보물로 삼은 사람, 그 사람에 대해 천국이 주어지고, 천국이 주어져서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는 이루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 될 때에, 드디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실용적인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된다는 얘깁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쓸모 있는 존재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를 쓸모 있는 존재로 붙잡으신다는 겁니다.
어떨 때?
예수님이 실용적인 예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아산 현충사의 칼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 인생에 내가 설계한, 내가 주체가 돼서 설계한 내 인생의 도움이 되는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부인해야 됩니다.
그리고 실용성 제로의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마음에 부여안고 우세요.
그것이 참 신앙으로 나가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향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실용적인 예수님으로서는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인합니다.
실용적인 예수님, 내 인생에 실용적인 예수님을 부인하고서야 예수님 그 자신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을 베드로가 보고 웁니다.
우리도 이 부인과 이 눈물의 과정을 거쳐 베드로처럼 하나님에게 실용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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