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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성당 저녁 7시 2층 대성전에서
예언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곧 성삼일이 다가옵니다. 일년의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삼일이 "목, 금, 토" 입니다.
주일까지 포함, 옛날 전통을 포함해서 목요일 저녁시간 부터 시작한 삼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전례 참석은 의무적인것은 아니지만 전례의 등급으로 보면 주일 미사보다 높습니다.
신부님께서 본당 신부셨을 때, "성삼일의 전례는 다 참석하셔야 합니다. 시간 안되시는 분들도 시간을 내셔서 꼭 참석하십시오."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지난시간까지는 하느님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의 역사를 되집어 보았습니다.(이야기 관점에서)
예언 문학은 이야기 문학이 아닌(narative), 시문학입니다.
할머니가 손주들을 잠재울 때 이야기 해주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불러 준다는 것입니다.
운율이 있고 리듬이 있는 시문학인데 문제가 있죠? 시는 이야기보다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언어의 어감을 살려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어려운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살짝이 즈려밟고 오시옵소서." 이런 부분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예언 문학은 히브리 시문학을 바탕으로 우리가 알아듣게 되는데, 현대의 번역가들은 다 고충을 갖고 있습니다. 신부님도 성경의 번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은 주교회의에서 신부님께 연락이 와서 "최신부 성서 공부를 했으니....우리 성경 시편 번역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계속해서 바꿔 나가야 겠죠?"
"그러면 어느정도나 수정을 해나가야 될까?"
"시편 1장 1절부터 바꿔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부분인데, 본문에 가까운 번역, 직역을 하여서 밝힐 것인가? 시적인 감동을 높이기 위해서 의역할 것인가? 대한 선택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주교회의에서도 전례에 쓰기 편한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전례용 시편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빠른 시간 안에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예언, 영어로는 prophecy
1. 우리말 한자로 쓸때, 豫言(예언) 동물의 뼈모양 글자가 보이고, 그 동물뼈를 던져서 점을 치는 예언과
2. 다음 예자는 預言 맡길 예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맡기셔서 예언자가 우리에게 그 말을 전해주었다는 뜻으로 일반적인 예언이 있늗데,
성서적인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자는 이야기를 처음에 일본 신학자들이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개신교 신학자들이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필요 없이 일반적인 예언과 성서적인 예언을 한자로 구분해서 쓰자라는 일본 개신교 신학자들의 의견을 수용한 예언(預言),
영어에서 prophecy 처럼 점치는 사람들이 쓰는 예언이나 성서적 예언을 따로 사용하지 않으니 그냥 첫번째 예언(豫言)으로 사용하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부님는 우리 그리스도교는 맡길 예자를 따로써서 사용하다는 의미를 주는 것보다, 豫言 이라는 글자도 충분한 하지 않을까? 생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예언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아 짐작하여 말함, 이라는 국어사전적 의미가 있는데
"다음주 월요일에는 비가 올겁니다."( 예언 x)
"다음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우승을 할 것입니다."(예언 ㅇ)
어떤 것을 예언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희망 내지는 예고라고 할 것이냐에 대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그 예언이라고 하는 말에는 무게감이 있을 것이고, 그 공동체에 주는 어떤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심판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심판은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적 의미에서의 예언이란?
성경에서 정의하기를 "야훼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예언 문학의 정식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가 이야기 하고
그 예언의 끝무렵에 "이는 주님의 말씀이다." 라고 마무리하는 정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직접 인용됩니다.
예언자들의 말들에서 하느님은 직접 "나", "내가" 라고 말합니다.
미사 안에서 독서자가 주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예언자 흉내를 내면서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
또는
"엘로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예언에 대한 정의.
예언자를 부르는 히브리 말
나비(נביא)- ״불림 받은 자"
우리나라 말과 비슷하지만 뒤에 나오는 비소리가 길게 발음됩니다. 아카디아(메소포타미아, 즉 이라크 지역에서 사용하던 말)말이 히브리 말로 넘어온 것. 따라서 예언자는 내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불림을 받은 자.
신부님도 신학생 때 "저는 불림을 받아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로에(ראה)- “본다" 무언가는 보는 사람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부분에서 천사가 나타나 사용되었던 "야훼 이레"에서 야훼 "이르에"
"라아" 본다, 라는 동사가 자리 잡고 있다.(하느님께서 보아 주셨다)
호제(חזה)- ״본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환시한다" 라는 의미로 나쁘게 말하면 헛것을 보는 것. 좋은 표현으로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는 비젼을 보는 것.
이사야서 6장에서 천상을 환시하는 부분에서 "나는 이제 망했구나.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며 탄성하는 부분
구약성경에서 가장 일반적인 환시는 "꿈"입니다(요셉과 야곱의 꿈)
오늘날에는 꿈을 프로이드의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해석하는데 예전의 사람들은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보여주신다고 생각하였다. 꿈 해몽가들이 등장하는 부분(다니엘 예언서)
환시를 통해서 하느님의 세상을 보게되는 종교적인 체험에 이르게 되는 한가지 방법(성령 세미나, 개신교의 부흥회)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떨어질 무렵에 잡아주는, 조절해주는 역할이 필요함.
반면에 우리의 심장 박동을 느리게 하여 신적 조우(종교적 체험)를 하는것에는 "묵상", "관상"
이렇게 아래쪽으로 내려갔을 때의 문제는 "잠이 듭니다."
부처의 눈이 반쯤 감긴 이유도 깨있지도 잠들지도 않은 그 상황.
보통의 사람이 묵상이 가능한 경우가 15분정도.
훈련시 3시간 혹은 특별한 경우엔 하루 종일도 가능.
묵상의 단계에 내려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을 충만하게 느끼는 멋진 체험이 될 것입니다.
밑으로 내려가는 묵상을 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스님들이 묵상할 때 염주알을 돌리는 행위, 우리가 묵주알을 돌리며 기도하는 행위.
모든 인간들은 종교적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에 대한 갈증이 있다.
이슈 하엘로힘 - "하느님의 사람" 그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다.
프로페테스(προφητης, 그리스어) - "대신 말하는 사람" 변호사나 대변인의 개념
전기 예언자
- 사무엘(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마지막 판관이자, 전기 예언자 중에서는 첫번 째 예언자)
모세도 예언자이기도 하지만, 모세오경이 지나가고 나서 이스라엘 역사서에 왔을 때 첫번 째 등장하는 예언자는 사무엘.
- 나탄과 갓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궁중 예언자들.
사제들 복장 중에서도 우림과 툼밈이 있기에 아마도 사제들이 점치는 도구가 아닐까? 라고 오늘날의 주석학자들이 생각한다고 함
- 아히야 : 1열왕 14,1-18
- 엘리아와 엘리사(스승과 제자) : 1열왕 17-21장; 2열왕 1-9장; 13,14-21
나탄과 갓(궁중 예언자들)을 빼놓으면 사무엘, 엘리아와 엘리사는 모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들이었다.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있기에 예언 운동이 활발했지만, 성전을 갖고있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에서는 예언활동이 활발했다.
후기 예언자(문서 예언자)
글을 써서 남겼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예언이 문서화 돼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 12소예언자들
▶그렇다면 다니엘서는?????
다니엘서는 문학적인 관점에서 묵시 문학이다.
예언 문학은 일정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한다 ( 그날이 오면, ...) 반면에 묵시 문학은 종말에 관해서 이야기 한다.
다니엘서는 종말론적 묵시문학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에서는 다니엘서는 예언서로 보았을까?
왜냐? 복음서에서 다니엘서의 내용이 예언서처럼 활용되었기 때문.(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었다.....)
이사야
히브리 말로 발음하면, 요시야 야후입니다. 요시야는 구원하신다. 야후는 야훼.
따라서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
요시야 야후를 거꾸로 하면 여호수아입니다.
요시야 야후 = 여호수아, 뜻으로 본다면 같은 소리이고 여호수아가 아라메어로 오게 되면 요수아, 그것이 그리스 말로는 예수스,
따라서 요시야 야후, 이사야 예언자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은 의미상 같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상류층이었음을 짐작( 언어가 고급, 교육수준이 높고)
주전 8세기 남유다의 예언자였다. 이사야서는 1장-66장으로 되었있는데, 1-66장이 모두 이사야 예언자의 작품이 아닌 듯 하고
1장- 39장 역사적으로 이사야와 관련
40장 -66장 이사야 예언자가 아닌 이사야 학파
1장- 39장은 주전 8세기에 존재한 이사야라는 인물에 예언을 후대의 편집자가 편집하였다. 이사야 40장-66장은 그 뒤에 쓰여진 작품으로,
40장 -55장(제 2이사야)은 유배 중 어떤 한 인물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이사야의 수제자 쯤? 되는 인물)
56장- 66장(제 3이사야)은 유배에서 돌아와서 이사야 학파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한 예언을 묶어놓은 예언선집.
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라고....
▶우리가 주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제1 이사야입니다.
제 1이사야는 유다의 임금 아하즈와 히즈키야 시대의 예언자였다.
아하즈(주전 735년-715년), 히즈키야(주전 715년- 687년) 남유다를 다스렸던 임금들
역사적 예언자 이사야와 아하즈의 만남에 대해서는 이사야서 7장과 8장에서 엿볼 수 있다.
아시리아가 점점 커지자,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이집트와 힘을 합쳐서 아시리아에 대항하려고 하면서, 그들이 먼저 남유다에 내려오는데 임금인 아하즈에게 북이스라엘과 시리아에 연합군이 아하즈에게 협박을 합니다.
"너 우리와 동맹에 가입을 해서 아시리아에 함께 맞서자. 싫어? 그러면 우리가 너희를 먼저 쳐들어 갈거야!'
남유다는 강하지 않았기에 아하즈는 고민에 빠지고 이사야 예언자가(이사야서 7장) 아하즈를 찾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임금님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겪는 것은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아서니, 이제라도 야훼 하느님께 충실합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시리아던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연합군이던 다 물리치실 것입니다."
아하즈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야 7,13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는 것입니까?......
앞의 부분에서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표징을 청해보라고 하였었다.
아하즈는 굉장히 기특한 말로 표징을 청하지 않았다.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소." 거의 예수님 급.
그렇지만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표현으로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겠소." 입니다.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대답이
이사야 7,13-14
"........보십시오. 젋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마리아에게서, 마태오 복음에서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사야 7,14절을 전문인 것처럼 인용했지만
이사야 7,15(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에게 말하고자 하는 표징)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될때, 그는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입니다."
엉긴 젖과 꿀을 먹는다는 의미는 굉장히 잘지낸다는 뜻(한우 ++?)
이사야 7,16
"그 아이가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혐오하시는 저 두 임금의 땅은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 7,16절에서 나오는 두 임금은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임금을 뜻함.
이사야 7,17
"주님께서는 아시리아의 임금을 시켜,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의 부친의 집안에, 에프라임이 유다에서 떨어져 나간 날 이후 겪어 본 적이 없는 날들을 닥치게 하실 것입니다."
- 7,17절 신부님의 다른 번역
"주님께서는 아시리야 임금을 시켜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 부친의 집안을 위해, 에프라임이 유다에서 떨어져 나간 날 이후 겪어 본 적이 없는 날들을 닥치게 하실 것입니다."
즉 임금님, 하느님께서는 남유다를 위해 북이스라엘에게 큰 재앙을 닥치게 하실 것입니다. 라는 의미
언제? 그 아이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할 때쯤 되면( 우리식으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인 7~8살?)
이사야 예언자가 여기서 말하는 젊은 여인은 아하즈의 부인 중에 하나이고 그 부인이 임신해서 아이를 낳은 경우이고, 아하즈의 뒤를 이은 임금은 히즈키야였다.(주석가들의 생각)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의 이 부분을 예수님을 위한 예언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면?
이사야 예언자가 여기서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고 하였기 때문이고 그 태어나는 아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기에...
이사야 예언자가 아하즈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 하지 말고 하느님께 충실하십시오. 라는 이 부분의 말을 듣고 아하즈 임금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2열왕 16,5
"그때 아람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르말야의 아들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아하즈를 포위하였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열왕 16,7-9
아하즈는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임금님의 종이며 아들입니다. 올라오시어, 저를 공격하고 있는 아람 임금과 이스라엘 임금의 손아귀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
아하즈는 주님의 집과 왕궁의 창고에 있는 은과 금을 거두어, 아시리아 임금에게 선물로 보냈다.
아시리아 임금은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아시리아 임금은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로 올라가 그곳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 주민들을 키르로 사로 잡아 가고, 르친은 죽였다.
- (주전 732년의 사건)이 때는 이스라엘은 멸망하지 않고 그 뒤 십년 후인 722년에 멸망하였다. 아하즈는 이런식으로 위험에서 벗어났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아하즈가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했다고 생각되지만,
신앙, 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이사야 말을 따르지 않았다. 다시 하느님께 충실한 민족으로 되돌아 가지 않았다.
이 일 이후에,
아시리아 임금이 다마스쿠스로 올라가 사람들을 잡아가고 르친을 죽인 다음에 아하즈가 다마스쿠스로 간다. 그리고 아시리아 황제를 만나고, 다마스쿠스에 지어진 아시리아의 신전을 보고서, 예루살렘에도 다마스쿠스에 있는 신전처럼 지으라는 명령을 한다. 그렇게 성전을 리모델링을 한 후에 아시리아의 신상을 가져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긴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에 전부 반대로 한다. 이에 이사야 예언자는 크게 실망하였다.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한 아시리아를 섬기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 아하즈.
이로부터 십년 후 북이스라엘도 멸망하고, 남유다의 임금이 아하즈에서 히즈키야로 바뀐다.
꽤 괜찮은 임금처럼 히즈키야는 보였다. 열왕기에는 히즈키야와 요시야는 성전을 정화하고 야훼 하느님께 집중하게 하는 임금이었다. 히즈키야는 성전의 우상들을 전부다 버리고, 반아시리아 정책의 성향이여서 아버지 아하즈가 모아놓은 신상들을 전부 없애 버리게 했다. 그에 화가 난 아시리아가 쳐들어 온다(주전 701년)
그러자 히즈키야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사람을 보내고, 이사야 예언자는 말한다.
이사야 37,6-7
"너는 아시리아 임금 종들이 나를 모욕하는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내가 영 하나를 그에게 내려 보내면, 그는 뜬소문을 듣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자기 나라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겠다."
여기서 남유다를 쳐들어 온 아시리아의 황제는 산헤립, 실제로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다.
아시리아의 역사 기록엔 당시에 산헤립이 가나안 지역에 정복했던 도시의 이름이 있는데, 예루살렘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열왕기를 읽다 보면 아시리아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고 했는데, 밤에 하느님의 천사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와 아시리아군들을 무찔러 그들이 다 도망갔다. 고 하는데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토론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대로 아시리아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두번의 예언을 맞춘 이사야(아시리아가 망할 것이라는 예언,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
신명기 22장에서 모세가 마지막 연설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내 뒤에 나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주실 터인데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백성들이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냐고 묻자,
"그 사람이 예언한게 이루어지면 참 예언자고, 안이루어지면 거짓 예언자다." 하고 말하였다.
신부님께서 기도할 때 안이루어진 기도는 하나도 없으시다고, 안이루어진 기도는 아직까지 기도하고 있으니까...
두번의 예언을 맞춘 이사야의 인기가 확 올라갔다.
남유다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성전 중심의 남유다, 나탄이나 갓과 같은 궁중 예언자들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예언자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문제는?
히즈키야는 이사야 예언자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몸이 아프게 된 히즈키야가 죽을지경에 이르자 이사야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야훼께서 히즈키야의 수명을 열 다섯해를 더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히즈키야와 도성을 구해내 주겠다고 하였다.
이 표징으로 지는 해를 따라 돌아간 아하즈의 해시계를 열칸 뒤로 돌리겠다고 하셨다.(이사 38,7-8)
하지만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는 히즈키야는 반아시리아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바빌론과 손을 잡는다.
이에 크게 실망한 이사야 예언자.
이사 39,6-7
"보라 네 궁궐 안에 있는 모든 것과 네 조상들이 오늘날까지 쌓아온 것들이 바빌론으로 옮겨져, 하나도 남지 않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 주님이 말한다. 너에게서 태어날 아들들 가운데 더러는 끌려가서 바빌론 왕궁의 내시가 될 것이다."(바빌론 유배 예고)
이사야은 아하즈에게도 히브키야에게도 충실히 간곡히 이야기하였지만,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야기한,
두려워 하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백성을 다스리는데는 두 임금다 미치지 못했다.
이 이사 39,7절을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멈추었다.
신부님은 역사 교육에 관해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삼국 통일때,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등에 업고 고구려와 백제를 점령하는 이야기에 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볼수는 없을 것이고, 우리들이 정말로 하느님께 충실한 하느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판단에서 자유로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여느 국사학자가 신부님께 하신 말씀 중에
"신부님, 임진왜란 때는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았는데, 임진왜란 때는 의병 활동이 있었는데 한일합방을 할때는 의병 활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도에는 워낙 부정적인 정치인들이 많아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각에는 "누가 다스리던 무슨 상관인가?"가 다수였었다.
한일합방 직전에 동학이 일어났을 때, 짓밟는 권력의 모습을 보면서 의병활동이 없었다.
결국 우리가 서로 아껴가며 단단한 나라를 만들었을 때 누구도 넘보지 못할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제 1 이사야(1-39장) 문학적인 구조
이사야 1장-12장 :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
이사야 13장 -23장 : 주로 주변 민족에 관한 예언과 묵시적 보도가 뒤따른다
- 여기까지가 전반부
- 이사야 후반부는
유다와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 그리고 33장-35장에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향한 내용.
그리고 마지막은 묵시적 보도
▶이사야 36장- 39장에서 이사야와 히즈키야의 내용이 나오고, 전반부의 내용과 후반부의 내용이 한바퀴 돌고, 또 한바퀴 도는 두번의 싸이클을 볼수 있다.
첫번째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 시작이고
그 다음에는 주변 민족과 세상에 관한 내용이 뒤따르고
마지막에는 보도를 가지고 전체를 리포트하는 형식으로 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의 지도층을 위해서(종교적, 정치적) 예언하였는데,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야훼께 신뢰하며 유다를 다스려라. 하느님께 충실하라. 결국 너희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겠지만 하느님에게 충실한 소수의 남은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은자들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다."이라는 이사야 예언의 중요한 메시지.
오늘날 주석학자는 이사야 예언서를 두고,"메시아 사상과 묵시문학적 종말론"
이스라엘도 유다도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겠구나..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이다.
이사야 예언은 남유다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왕조 신학이 예언 문학으로 포장 된것.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권은 영원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질것처럼 보이지만 몇몇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들 가운데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고, 그 메시아를 중심으로 다시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이다.
- 이사야 예언의 중심-
이사야 예언자로부터 시작한 메시아 사상은 후에 예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는 "크리스토스"라는 그리스말인데, '크리스토스"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이"메시아"다
이사야가 약속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서 예수를 설명하는 첫번째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구약을 읽는다면 염두해 두어야 할 예언자는 이사야다.
히즈키야가 죽고 요시야와 다른 임금들이 등장하는데 히즈키야 이후에 므나쎄 시기가 있고, 므나쎄 이후에 요시야의 시기가 있고 요시야 이후에 여호야킴의 시기가 있다.
히즈키야- 므나쎄 - 요시야- 여호야킴(기억하자!)
므나쎄는 대놓고 친아시리아 정책을 펴서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우상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아시리아의 힘에 기대어 외적으로 보면 므나쎄 시기는 엄청난 유다의 번영된 시기였다.(유다는 영토도 넓었고, 군사들도 풍요로웠기에 이점에 있어서 역사가들은 당혹스럽다. 신학적으로 보면 가장 나쁜 인물이었던 므나쎄 시기라서)
따라서 신명기계 역사가 신학자들은 므나쎄를 나쁜 임금으로 보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그렇지 않고 아시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어 유다를 부강하게 했는데???
신명기계 역사가들은 결국 므나쎄의 통치로 남유다가 심판받았다고 생각하였다. 십계명의 텍스트에서 예수님께서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벌을 주시는데, 3-4대에게 준다는 말이 있다.
므나쎄 통치후 3년을 지나서 "그때 우리는 타락했고 우리는 망한것이다." 이것이 신명기계의 역사관임.
요즘 OECD 삼십 개 나라를 조사해 보면, 잘사는 나라에 속한 우리는 행복도가 낮은 나라에 속하고,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임을 관심있게 바라봐야겠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던 그 관계보다도 돈을 우선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는 서구에서 들어왔는데, 우리는 서구 사람보다 더 자본주의고 개인주의고 더 불행해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가, 신부님이, 우리가, 할일이 참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므나쎄를 지나 요시야 임금의 시기가 왔다. 요시야는 칭찬받은 임금이었다. 성전을 다시 한번 더 정화하고, 나라를 하느님으로 똘똘 뭉치게 하는데, 너무 이른 나이에 죽고만다.(전쟁에 나갔다가 이집트군에 의해 죽는다)
즉 요시야는 친바빌론적인 임금이었는데, 이집트 군대와 바빌론이 전쟁을 하는데 요시야 임금이 죽어버렸다. 신명기계 역사가들이 가장 당혹해 하는 것은 요시야의 빠른 죽음이었다.
요시야 시기를 지나서 여호야킴 시대에 남유다는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유배를 간다.
그 예언이 실현되면 참 예언자, 실현되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인데 예레미야 예언자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어떤 예언자가 예언하는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얘기하면 그 사람은 참 예언자이고,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도 하느님의 말씀인척 얘기하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이다."
예레 28,15-16
-하난야는 당시 유다 종교 권력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인물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
그리고 하난야는 일곱째 달에 죽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들과 충돌합니다. 예레미야시대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은 안전할 것이다고 예언하였고, 하난야도 그와 같은 예언자 중 하나였는데,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어. 너희는 망할 것이다. 너희가 하느님에게 충실하지 않았어. 하느님은 이제 너희에게 벌을 내리고 심판할 것이야." 라고 말한 그 예언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좋아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살아있는 동안 갖은 핍박을 받았고, 바빌론이 유다를 쳐들어 오자, 유다인들이 도망을 가면서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간다.
친바빌론자가 아니었던 예레미야를 당시의 유다의 권력들이 예레미야를 친바빌론주의자로 생각하고 이집트로 데리고 가다가......더 이상 예레미야의 기록은 없다.(아마도 가다가 죽지 않았을까? - 역사가들의 생각-)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고 싶었던 예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벌을 주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심판은 단지 심판이 아니라, 그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을 정화하실 것이다."
인간의 죄때문에, 이스라엘의 죄때문에 커다랗게 묻은 때를, 하느님께서 심판을 통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거야. 라고
"하느님의 뜻에 우리를 맡기면 된다. 벌을 달게 받고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
-예레미야 예언자 예언의 중심-
뒤따른 예언자는 에제키엘이고 "엘은 강하다", 하느님의 강함을 뜻하는 표현
바빌론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유배를 갔는데, 유배간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고향으로 인도하실 정도로 하느님은 강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에제키엘은 사제였고, 풍부한 어휘를 갖고 있었고, 다양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예언문학에는 묵시문학적, 지혜 문학적 요소들이 함께 발견되어 있고, 에제키엘의 시간과 장소는 주전 593~571년 칼데아의 크바르 강가(바빌론 보다는 조금 북쪽에 위치)
크바르 강가는 에제키엘이 바빌론에게 끌려갔던 시기. 하지만 이 연도에 관한 의문이 생기는데???
남유다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은 587년이니까, 그전인 597년에 바빌론이 한번 쳐들어 왔는데, 그때도 유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에제키엘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쯤 전에 바빌론으로 끌려간 첫번째 포로들 가운데 한명이 아니었나? 하고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생각한다.
에제키엘의 구조도 역시.
-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 주변 민족에 대한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구원으로 하느님에 심판이 먼저있고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예언이 에제키엘서의 큰 구조이다.
가장 특징적인 "파수꾼" 이라는 표현은 3장, 33장에 나온다.
파수꾼은 예언자를 이야기하고, 예언자인 에제키엘에게
"너희들, 예언자는 파수꾼이다. 그런데 파수꾼이 다른 군대가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깨우지 않아서 성이 무너졌다면 그건 파수꾼의 책임이다. 반대로 파수꾼이 깨웠는데도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람들으 책임이지 파수꾼의 책임이 아니다." 따라서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할 말씀을 듣고도 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예언자의 죄를 묻겠다.
에제키엘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해야하는가? 하는 예언자적 변명으로 "파수꾼" 이라는 심볼리즘을 알아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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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의 신학 중에 특징적인 신학은?
에제 18,2-4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는 속담을 말해대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신명기 신학과 부딪히는 것, 신명기 신학은 "하느님은 삼대 사대까지 심판하신다." 즉, 므나쎄가 잘못했는데 사대째가 되어서 남유다가 멸망하더라.
신명기 신학은 죄의 연대성을 말하고 있고, 우리의 환경 오염은 결국 우리의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까지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죄의 연대성(신명기 신학= 상선벌악)
에제키엘의 예언자는 상선벌악의 신학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상선벌악의 신학을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백성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와서, 신명기 신학에 근거해서 계속해서 "조상 탓"을 하고 있었다.
에제키엘은 그렇지 않다는, 너희들의 고통은 너희들의 잘못 때문이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에제키엘은 신명기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신학이 잘못 해석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역시 거짓 예언자들(이사야의 제자들=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주장한 이사야의 후계자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말하는 평화는 거짓 평화고, 거짓 예언이다." 이사야의 예언을 과도하게 잘못해석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우리 신앙 역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것이 잘못된 해석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왜곡될 때...사교들이 등장하게 되고 세상이 어지럽혀진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지켜가면서, 우리의 신앙은 건강한가? 우리의 신앙은 나와 우리의 공동체, 우리 사회를 밝고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천주교회는?! 그런 질문을 갖는 시간을 가져보자.
성삼일을 보내면서 하느님 앞에서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사야, 에레미야, 에제키엘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살아려고 애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너무 훌륭한 강의를 듣는 시간이었고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신부님의 예언서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주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먼길 달려간 보람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네, 주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