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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 맨부커상 수상]‘채식주의자’ 등 한강의 작품세계 /// 선연한 영혼의 목소리로 상처입은 삶을 구현 /// 강동호 문학평론가 /// http://news.donga.com/3/all/20160518/78153708/1
문체가 특별하다는 말은 작가에게 바치는 다소 상투적이고 맥없는 칭찬같이 들리는 감이 있지만, 한강의 소설에 대해서라면 이 말은 그 자체로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진실에 가깝다. 1993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하고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낸 이력이 보여주듯, 시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섬세하고도 단단한 문체는 상처 입은 영혼의 목소리를 선연하게 되살리는 한강 소설의 미학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언어와 결합한 그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과 인간의 고통을 체험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그녀의 오랜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그녀의 소설은 치유나 위로를 섣불리 말하기에 앞서 참혹하기 그지없는 삶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강조하는 것이다. 맨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소설 세계에서 하나의 이정표이자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세 편의 중편소설로 엮인 이 아름답고도 섬뜩한 연작 소설집은 한강의 소설 중에서도 탐미적인 성격이 가장 짙다.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의 폭력과 광기 어린 욕망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정상’이라는 미명 아래 영혜의 삶을 부정하고 그녀의 일상을 포박하려는 주위의 탄압을 냉정하게 기록하는 한편 그와 같은 폭력에 맞서는 영혜의 식물적인 관능성을 환상적이고도 섬뜩한 필치로 그려냄으로써, 한강은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인 영혜를 통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삶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자’ 이후 한강은 개인의 구원과 역사의 화해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는 촉망받는 화가의 의문사를 추적함으로써 진실한 삶을 향해 한걸음 나아가려는 작가의 강렬하고도 절실한 의지를 표현했다면, 최근작 ‘소년이 온다’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 잠들어 있는 망각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역사를 증언하기 위한 윤리적, 정치적 상상력에 대해 치열하게 성찰한 바 있다. 앞으로도 더 넓어질 것이 분명한 한강의 소설 세계야말로 한국 문학의 현재성과 동시대성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깊이이다. 강동호 문학평론가 출처: 2016.5.18 동아일보 소설가 한강의 서재는 전화부스다 출처: 네이버/ navercast 인물과역사> 지식인의서재
저에게 서재는 '전화 부스다.'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유리문을 닫으면 바깥세계가 보이긴 하지만 소리는 차단되잖아요. 그곳에서 수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며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는 그런 공간인데요. 서재는 대부분 죽은 사람들 또는 지금 옆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꽂아놓고 펼쳐보는, 세계의 한가운데지만 조금은 떨어져 있는 그런 곳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책과 나의 이야기
어릴 때 집에 책이 많았어요. 책을 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죠. 사교육이 없는 시대에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세상에 널려있는 것은 책과 시간, 그런 느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글자가 안 보이는 거예요. '왜 안 보이지?'하고 얼굴을 들어보니까 해가 진 거죠. 그래서 일어나서 불 켜고 또 책 읽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책 속에 파묻혀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행운이 어디 있나 싶어요. 더 좋았던 것은, 아버지(소설가 한승원)께서 책을 좋아하셔서 집에 많은 책을 들여놓으셨는데 책을 장서로 잘 보관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무 데나 쌓아놓고 방치하고 가져다 읽고 흔적을 함부로 남기고, 이런 독서법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래서 저도 책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어려운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순수한 오락거리로 저의 즐거운 유희로써 아무렇게나 쉽게 읽고, 있던 자리에 꽂지도 않고 그냥 놔두고. 그렇게 어떤 억압도 없이 책 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데 도움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도요. 어릴 때 권정생, 마해송, 이원수, 이런 동화 작가 책들도 읽고요. 그리고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전혀 간섭하지 않는 분이셨기 때문에 집에 굴러다니는 어른들 책도 많이 주워서 읽었어요. 그래서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도 읽고.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부터는 문예지도 읽고요. 뜻도 모르면서 작가들 사진 보는 게 재미있어서 읽다가 시도 찾아 읽고 소설도 읽고. 그런 기억이 참 좋네요. 어릴 때 읽었던 책들 다 기억에 남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죄와 벌>을 읽었어요. 굉장히 어려운 책이었지만 충격을 받으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고요. 그 세계가 굉장히 어두운 세계잖아요. 그런데 그 어두운 세계에서 이상하게 손을 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읽어 가면서 뭔가 저의 존재가 이 책 때문에 굉장히 흔들리고 있다는 그런 무거운 충격을 받았어요. 책 읽기에서 글쓰기로 어릴 때부터 늘 인간이 궁금했어요. 인간이라는 게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잖아요.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하고 또 지하철 선로에 아이가 떨어지면 가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분도 있잖아요. 인간이라는 것이 그토록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는 게 어릴 때부터 신비하고 무섭고 그래서 더 알고 싶고 알수록 두렵고 그랬거든요. 그러면서도 늘 질문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소설도 쓰게 된 것 같아요. 인간에 대한 질문,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법으로써 계속 글쓰기를 붙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해하지 않으며 한 걸음씩 글을 쓸 때 어둡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어둡게 쓰는 건 아니고요. 제가 섣불리 화해하거나 치유하는 건 잘 못 해요. 화해하지도 않고, 치유하지도 않고. 제가 믿을 수 있는 만큼만, 걸음이 느리더라도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만큼만, 그만큼만 나아가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우리는 계속 세계를 서서히 잃어가는 사람들인 거잖아요. <희랍어 시간>을 쓸 때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이야기를 쓰면서 이건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떨어질 데를 향해서 빠르게 또는 느리게 날아가는 그런 존재들이라고요. 그런 유한성을 잊지 않는 게 또 글쓰기의 방식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소년이 온다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소설 속에 어떤 내적인 투쟁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그런 의문과 의심과 회의 속에서 언제나 글쓰기를 통해서 그걸 뚫고 나가보려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인간을 껴안고 싶고, 그렇지만 그게 잘 안 되고, 그렇지만 더 나아가고 싶고.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되었는데 <희랍어 시간>이란 소설을 쓸 때 제가 인간을 껴안는 일에 근접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거기서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소통하기 위해서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대화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 대목을 쓸 때,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장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 소설을 끝마치고 나서는 아주 따뜻한, 인간의 아주 환한 지점을 더듬는 그런 소설을 쓰게 될 거라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 쓰려고 노력을 했는데 의외로 잘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왜 안 되는가를 더듬어가는 과정에서 80년 5월, 제가 어린 나이에 간접 체험했던 광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당시 제가 느낀 것은 신군부에 대한 분노라든지 증오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인간은 이토록 잔인한 존재인 것인가, 그런데 그런 죽음을 무릅쓴다는 건 또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이 깊이 새겨졌던 사건이거든요. 그리고 그걸 계속 묻어두고 긴 시간을 지냈던 거고요. 그런데 내적인 탐색의 과정에서 '왜 내가 인간을 껴안기가 이토록 어려운가?'라는 질문의 끝에 80년 5월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든지 글쓰기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저는 이 자리에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됐고요.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다룬다는 점이 굉장히 큰 부담이었어요. 지금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계시기 때문에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리고 당시의 참혹한 이야기들을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취재를 하면 할수록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잔혹했던 그런 야만의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늘 그만 쓰고 싶었지만, 또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제가 알았기 때문에 더 써야 한다는 생각도 강해진 거죠. 정말 그걸 겪은 분들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러니까 잘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힘드니까 그만 쓰고 싶다는 생각과 그러니까 더 잘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계속 부딪히면서 어떻게 끝까지 쓰게 됐어요. 그리고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처럼 소년이 34년을 건너서 우리에게 한발 한발 걸어오는 그런 이야기였으면 했고요. 저의 개인사도 거기 파편처럼 넣어서 이것이 지금 여기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담고 싶었어요. 광주라는 게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보통명사처럼 얼굴을 바꿔서 우리에게 계속 돌아오고 있고 어쩌면 우리가 지금도 광주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라는, 소년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그런 느낌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고요. 정말로,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인간, 그리고 존엄성 인간이라는 것은 아주 복잡하고 위태롭고 깨지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해요. 특히 인간의 존엄함은 무척 연약한 것이고요. 유리가 거기 있는지도 몰랐지만 깨지고 나면 유리가 깨졌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요. 되돌릴 수 없는 거라서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인간의 존엄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을 끈질기게 응시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 그런 거란 생각을 요새 하고 있어요. 요즘 저의 고민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생각으로 많이 나가고 있는데요. 특히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 인간의 참혹과 동시에 인간의 존엄을 들여다보게 됐고요. 그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소설을 썼어요. 생각해보면 이전 소설들에서도 주인공들이 육식을 밀어내면서 또는 언어를 밀어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잠깐 이 세계로부터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엄을 확보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앞으로 쓰게 될 소설도 제가 <소년이 온다>의 마지막에 굉장히 간절하게 닿고 싶었던 그런 존엄에서 출발할 것 같아요. 인간의 존엄을 고민한다는 게 인간을 껴안고자 하는 사랑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음 소설은 바라건대 어둡기보다는 사랑에서 출발하는 그런 소설이었으면 해요. 일생을 잘 표류하기를 보르헤스가 만년의 인터뷰를 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백발에 주름진 얼굴로 '나는 일생을 표류하면서 살았고, 조언할 말은 한마디도 없다.' 이렇게 말했던 것이 저는 참 좋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바라는 것은 일생을 화해하지 않고 누구에게 어떤 조언도 하지 않고 잘 표류하면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해요. (지식인의 서재 '한강' 편은 양재동 작업실에서 촬영했습니다.) 내 인생의 책
저는 글자가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는데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는 저한테 가장 많은 영향을 줬던 작가라고 생각돼요. 감성이라든지 사람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려는 의지 같은 것을 보며 어릴 때부터 충격도 받고 영향도 받았어요. 10대부터 20대 초중반까지 계속 읽었던 작가예요. 이 책은 특히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에 '빨리 읽고 자야 되는데…'하는 생각만 하면서 결국 밤새도록 읽고 아침이 밝는 걸 봤던 작품이라서 기억에 남고요.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파고들어서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으면서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시인의 죽음>은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의 에세이에요. <의사 지바고>도 좋지만 전 이 에세이가 좋더라고요. 이게 만남에 대한 책이에요. 아주 어릴 때 잠깐 만났던 릴케라든지 이웃에 살던 작곡가 스크리야빈, 그리고 첫사랑의 여자, '시인의 죽음'이라고 할 때 시인인 마야코프스키. 이들과의 만남을 얘기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이 만남을 따라가다 보면 파스테르나크가 자신을 만나게 되는 그런 과정을 목격하게 돼요. 제가 좋아했던 대목은 파스테르나크가 청년일 때 작곡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쓴 곡을 정말 존경하는 작곡가이자 이웃집에 사는 스크리야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가요. 그에게서 아주 친절한 조언을 듣죠. 당신에게는 재능이 없다는 아주 친절하고 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게 돼요. 돌아오는 길에 가슴속에서 뭔가가 뛰쳐나올 것 같은 마음으로 밤새 모스크바 밤거리를 걸으면서 청년이 음악과 작별을 고하는 그런 장면이 있는데 뭔가 깨끗한 마음의 움직임이 느껴지면서 깊은 감동으로 남았던 장면이에요. 이 책은, 독일의 2차대전을 청년 시절에 겪고 전후에 2년 정도 활동하다가 1947년에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죽은 보르헤르트의 유작이고요. <이별 없는 세대>라는 제목으로 묶인 단편선이에요. <문밖에서>라는 아주 강렬한 희곡도 발표했고 시집도 냈지만, 저는 이 책이 좋더라고요. 아주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고요. 이 사람은 러시아까지 파병이 됐지만, 정작 감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러시아 전선에서부터 이미 국가사회주의 나치즘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열악한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병을 얻죠. 그래서 결국은 이른 나이에 죽게 된 건데요.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뭔가를 이루어보겠다는 마음 없이 마치 혼자서 성냥불을 켜보고 그게 꺼지는 걸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짧고도 내밀한 그러면서 아주 따뜻하고 진실한 기록들이에요. 그래서 좋아하는 책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 저는 이 사람의 삶에 항상 감동하게 돼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굉장히 예민하게 응시하고, 자신의 작업에 무척 진지하게 임하고, 죽는 날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마지막 유언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얘기를 했더라고요. 그럴 수 있을 만큼 아주 치열하게 살았죠. 판화도 좋지만 저는 이 사람의 자화상이 변모해가는 과정이 좋더라고요. 젊을 때부터 만년까지의 자화상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미술가이자 좋아하는 어떤 인간이라서 얘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임철우 선생님의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임철우란 작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그 당시에 아주 젊은 작가셨는데 막 한 권의 책을 냈을 때였죠. 선생님의 <아버지의 땅>이라는 단편집을 읽으면서 완벽주의에 가까운 문장들에 놀라고, 특히 <사평역>이라는 소설이 쓰이는 방식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어떤 특정한 주인공도 없이 오직 눈 오는 밤, 막사 그리고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 분위기만으로 소설을 끝까지 밀고 가는 그런 독특함이 좋더라고요. 기회가 된다면 나도 언젠가 이렇게 뭔가 독특한 방식을 가진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켜 줬던 소설이고, 제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처음 갖게 된 작품이라서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