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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이 되고 싶다
-김선태 시집 그늘의 깊이의 시세계
안서현(문학평론가)
“바다 한 가운데 섬이 있다//그 섬이 되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전문)라는 정현종 시인의 시 「섬」을, 김선태 시인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바꾸어 읊었으리라 상상해본다. 본래도 ‘바다의 시인’이자 ‘남도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김선태 시인이지만, 이번 시집 그늘의 깊이에서는 유독 ‘섬’의 이미지에 대한 천착이 두드러진다. 특히 스스로 섬이 되고자 하는 지향을 담은 시편도 눈에 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섬의 시’들이 지니는 울림에 새롭게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시인의 길, 혹은 섬으로의 귀의
시인의 지난 시집 살구꽃이 돌아왔다에 수록되어 있었던 「자산어보」를 기억한다. 이 시는 고독한 시인의 운명을 노래한 시인론 내지는 시인으로서의 시적 자상(自像)으로 읽혔었다.
흑산도 사리마을 사촌서당 마루에 걸터앉아
이곳에 쓸쓸히 뼈를 묻은 한 사내를 생각한다
그가 남긴 고독의 무게를 생각한다.
(중략)
적소인 사리마을은 한참 외진 바닷가
옛날엔 길도 없어 쪽배로나 당도할 수 있는 곳
죄 없이 푸른 바다와 파도소리만 기슭을 치며 우는
거기서 그는 다만 물고기와 벗하며 놀았으니
물고기와 벗하며 고독을 견디었으니,
사람들아, 고독이 물고기 비늘처럼 뚝뚝 떨어지는
그 한 권을 오백 권의 무게와 견주지 마라
유형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월척이라 치켜세우지도 마라
하마 이마저도 후세에 전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존재가 물고기 한 마리만도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 한 권의 무게를 무엇으로 측량하겠느냐.
눈보라치는 한겨울 사촌서당 마루에 걸터앉아
그가 들었을 저 징그러운 파도소리에 몸서리친다
그 극단의 고독과 불행에 또 한번 몸써리친다.
(「자산어보-흑산도에서」, 부분)
유배지에서 하릴없이, 하염없이 물고기들만 들여다보며 말년을 보낸 정약전의 생애에 관해 쓴 시다. 그런데 자꾸만 정약전의 모습 위에 시인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눈보라치는 한겨울 사촌서당 마루에 걸터앉아 / 그가 들었을 저 징그러운 파도소리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나’라는 사실이 마지막 연에서 결국 밝혀진다. 생의 참모습인 ‘고독’과 끊임없이 마주하는 한편, 다른 산 것들의 약동을 지켜보고 그것들과 ‘교감’하며 위로를 받는 정약전의 삶은 시인의 그것과도 닮아 있는 까닭이다. 그러한 시인의 일―살아내는 일의 ‘고독’과 산 것들 간의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을 비록 “불행”이라 쓰기는 했으나, 실은 “그 한 권의 무게를 무엇으로 측량하겠느냐”는 물음 끝에서 그러한 시의 길에 대한 남다른 자부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이 시집의 수록시들―「꽃게 이야기」, 「주꾸미」, 「숭어회꽃」, 「우럭,」, 「개불」을 비롯하여― 역시 물고기들의 모양과 특징을 하나하나 짚으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주었었으니, 이 책이 바로 한 권의 현대판 자산어보가 아니었으랴.
이번 시집 그늘의 깊이의 「흑산도」가 이 「자산어보」와 같은 계보상에 놓이는 시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제 시인은 이 섬으로의 유배를 더 이상 ‘불행’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오히려 섬으로의 적극적 ‘귀의’를 꿈꾸고 있다.
상한 짐승처럼 절뚝거리며 스며들고 싶었다 더는 갈 수 없는 작부들의 종착역
슬픔은 더 깊은 슬픔으로 달래라 했던가
늙은 작부 무릎에 슬픔을 눕히고 그네의 서러운 인생유전을 따라가고 싶었다
삭을 대로 삭은 홍어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며 쓰디쓴 술잔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렇게 파란만장의 시간을 가라앉혀 제대로 된 슬픔에 맛이 들고 싶었다
때론 누추한 패잔병처럼 자진 유배를 떠나고 싶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천형의 유배지
절망은 더 지극한 절망으로 맞서라 했던가
후미진 바닷가에 갯고둥 하나로 엎어져 흑흑 파도처럼 기슭을 치며 울고 싶었다
다시는 비루한 싸움터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애간장 까맣게 타버린 한 점 섬이 되고 싶었다 (「흑산도」, 전문)
이 시에 나타난 ‘흑산도’라는 시적 공간은 ‘세상의 끝’의 의미를 지닌다. “서러운 인생유전”의 “종착역”이자 “천형의 유배지” 같은 이곳으로 “자진 유배”를 떠나오고 싶다고 화자는 노래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루한 싸움터”인 세상은 버려야 한다. 이러한 ‘끝’으로의 행보는 보다 “깊은 슬픔”과 “지극한 절망”을 통해 생의 근원적 비애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뜻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늙은 작부”의 슬픔의 수작을 배우고 한갓 미물인 “갯고둥”의 절망의 몸짓을 자기화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제대로 된 슬픔에 맛이 들”고, “애간장이 까맣게 타버”리도록, 다시 말해 자기의 몸이 슬픔과 절망으로 탄화(炭化)하도록 내버려둔다. 자기 자신을 다른 생들을 위한 슬픔의 ‘위로주’와 절망의 ‘영토’로 내어줌으로써 역설적인 자기 정화를 얻고 궁극적인 자타의 구원을 모색하는 길이 바로 이러한 귀의의 길인 것이다.
섬은 이와 같이 시인으로서의 운명적 공간이자, 생의 슬픔이 농익고 절망이 곰삭는 내면적 성숙과 심화의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스스로 “한 점 섬”이 되고자 하는 원망(願望)과 의지는 그러한 슬픔과 절망을 통해 스스로 다른 존재들이 깃들 수 있는 ‘장소’가 되고자 하는 궁극적인 시와 삶의 목표까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생과 사, 혹은 섬에서 배운 순명
김선태 시인의 이번 시집에 선명하게 사생(寫生)되어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섬의 풍경들이라는 점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숨은 의미는 다름 아닌 ‘순명’이다. 삶의 잔을 받는 법, 목숨의 질서에 순응하는 법을 섬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쓸쓸할 때
깨끗한 외로움 하나만을 데불고 추자도에 가리
바닷가에 조개껍데기처럼 엎어진 민박집을 얻어
아무도 몰래 꼭꼭 숨어 한겨울을 견디리
밤낮으로 바람 소리 파도 소리만 듣다 질리면
혼자서 사무치는 객수감에 몸을 떨기도 하리
나라 안에서 제일 힘센 바람과
제일 사나운 파도가 산다는 추자바다
거기 징검돌처럼 점점이 놓여 있는 섬들
그래서 추자도의 옛 이름은 후풍도
모진 풍랑을 피해 숨어들기 좋은 곳
배도 사람도 바닷새도 물고기도
모두들 이곳을 기항지 삼아 숨을 골랐다지
때로는 유배객들이 제주에 이르기 전
이곳에서 갓을 벗고 그만 절명하기도 했으니
저 눈썹처럼 떠 있는 마흔두 개의 섬들이
어쩌면 그들의 억울한 영혼은 아니냐
몽돌들이 자갈자갈 우는 짝지에 앉아
춥고 눅눅한 마음을 널어 말리며 바다를 본다
오늘도 파도는 기슭을 하얗게 물어뜯지만
섬은 끝끝내 견고한 성채를 포기하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은 자존들이 섬들로 떠 있는 추자도
나도 그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근 섬이 되어
깨끗한 외로움 하나를 담금질하고 싶다
(「추자도」, 전문)
추자도는 절명한 유배객들의 억울한 한(恨), 그리고 파도에 닳아가며 “자갈자갈 우는” 몽돌들의 비애로 가득 찬 섬이다. 이들이 끈질기게 삶의 허무를 환기하지만,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견고한 성채”와도 같이 자기를 지켜내는 섬과도 같이 “굴복하지 않은 자존들” 가운데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오히려 “사무치는 객수감”과 “외로움”에 대한 “담금질”을 통하여 자기 완성을 모색한다. 허무를 끝내 부정하는 강력한 삶의 질서에 ‘나’는 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이도 돈목해수욕장 모래는
모래 같지 않다 하도나 잘아서
손으로 한 움큼 쥐면 그만 주르르
흘러내린다 너무나 가벼워서
먼지처럼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그 바닷바람이 수억만 년 동안
시간의 흰 뼈들을 날라다 쌓은 곳에
우이도 모래언덕이 있다
잘 마른 시간의 무덤이다
거대한 시간의 공동묘지다
처음엔 저 모래알들도 굵은 자갈들처럼
서로 부딪치며 자갈자갈 울었을 것이다
그 자갈들 거친 파도에 닳고 닳아서
울음을 제 속에 희미하게 감추었을 것이다
저 울음 속에 감추어진
소멸한 시간의 내력을 종일토록 읽는다
오늘도 하루를 소진한 해가
저 모래언덕 너머로 묻힌다
모래 한 알로 몸을 누인다
머잖아 너의 시간도 닳고 닳아서
저 모래 한 알처럼 바람에 불려갈 것이다
(「시간의 무덤」, 전문)
그러한 순명의 시간들이 쌓이면 위 시에 그려진 우이도의 모래언덕과 같은 또 다른 생의 풍경이 펼쳐지게 된다. “굵은 자갈들”이 파도에 닳고 닳아 “모래알들”이 된 것처럼, 그리하여 그들에게서 생의 비애가 아니라 “소멸한 시간의 내력”이 읽히게 된 것처럼, “견고한 성채”로 지키려 했던 ‘너’ 자신 역시 “닳고 닳아서 / 저 모래 한 알처럼 바람에 불려갈” 때가 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순명은 뒤집으면 결국 모래 한 알이 되어 가볍게 몸을 누이는 죽음에 대한 순명과 같다. 둘은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 같은 것―시간에 대한 순명―의 다른 양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두 시를 통해 우리는 ‘젊은’ 섬의 풍경과 ‘늙은’ 섬의 풍경을 동시에 보면서 서로 다르면서도 사실은 하나인 두 시간성을 읽는다. 파도에 굴복하지 않고 우뚝 서서 “담금질”을 견디는 강인한 생의지를 드러내는 청년의 시간과 자기의 육신 역시 “바람에 불려갈 것”임을 깨닫고 “모래 한 알로 몸을 누”이는 담담하게 죽음을 예비하는 말년의 시간이, 그리고 그러한 두 시간성에의 순명과 운명애(運命愛)가 바로 이 섬의 풍경이 나타내주는 돌올한 의미인 것이다.
사랑의 축제, 혹은 섬의 리비도
이번 시집 속 「섬의 리비도」 연작에 묘사된 섬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섬에서 건져올린 또 다른 깨달음을 선사한다. 그것은 삶이나 죽음의 질서에 대한 순응을 넘어서서, 삶과 죽음 사이의 화해를 통하여 그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축제’의 원리이다.
서남해 섬마을에는 산다이가 지천이지요 산다이란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며 노는 놀이판이지요 (중략) 산다이가 벌어지면 섬 전체가 들썩대지요 사람이며 바다며 산이며 들판이 온통 질펀한 놀이판으로 바뀌지요 이때만큼은 무슨 도덕 따위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오로지 본성을 따라가지요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죄다 한데 녹아들지요 산 사람이며 죽은 사람이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에야디야자 에야디야자 에헤여 에야 에야자디어라 산아지로구나”* 한덩어리가 되어 돌아가지요 그렇게 질펀하게 놀다보면 남녀가 자연스레 눈이 맞아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도 허다했다지요 남편 잃은 아낙들이 오죽하면 “산다이 땜시 이 징한 세상을 산다잉” 했겠어요 정녕 그렇다면 시시때때 노래방으로만 몰려가는 오늘날 산다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놀이의 본향 아닐는지요(*가거도 민요 <산아지 타령> 후렴구. 가거도에서는 ‘산다이’를 ‘산아지’라고 부른다. 「섬의 리비도 1-산다이」, 부분)
노래와 춤의 땅 진도에는 다시래기라는 희한한 장례풍습이 아직 남아 있지요 죽음을 삶의 끝으로 내몰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끌어들이는 제의이지요 그래서 마을에 호상이 나면 초상집은 한바탕 축제의 마당이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도 잠시일 뿐 노래하고 춤추고 굿판을 벌이는 놀이마당이 밤새 펼쳐지지요 (중략) 특히나 사당이 아기를 출산하는 장면은 죽음의 아픔을 딛고 새 생명의 탄생을 보여주는 상징이니 다시래기의 참뜻인 ‘다시 나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섬의 리비도-진도 다시래기」, 부분)
섬의 “질펀한” 놀이 문화는 모든 것이 맺고 거칠 것 없이 하나가 되는 “한바탕” ‘풀이’의 통합적 질서를 보여준다. 그 안에서 사랑과 이별이 섞이고, 슬픔과 기쁨이 서로 구분없이 그저 ‘흥’이 되며,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우러진다. 인생길의 숱한 굴곡과 매듭과 단속(斷續)을 이렇게 놀이하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극복해내는 섬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시인은 강인한 생명력을 읽어낸다. 이와 같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사랑의 축제적 힘, 즉 리비도를 통해 생명은 끊임없이 역동하고 재생하며 순환한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태어나는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로써 섬은 “놀이의 본향”만이 아닌 사랑과 생명의 본향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결국 ‘섬의 시인’ 김선태 시인의 시 속 ‘섬’이라는 공간은 삶의 근원적 감정들을 대면하고, 생사의 질서에 몸을 맡기며, 죽살이의 크고 작은 구비들과 화해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시인의 ‘섬’ 철학은, 나를 버리고 스스로 미물의 슬픔을 안거나 스스로 다른 생명이 깃들 수 있는 섬이 되는 ‘무아(無我)’로부터, 파도에 부서져 모래알이 되어 흩어지고 마는 허무에도 그저 말없이 순응하는 무념(無念)으로, 그리고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낌이나 마음에 맺힘이 없이 그저 노래하고 춤추는 ‘놀이’를 통해 맞아들이고 보내고 ‘풀이’해버리는 ‘무애(無碍)’를 향해 이행해가고 있다. 이렇게 시집 그늘의 깊이 속 섬의 풍경과 그 안 섬살이의 사정들을 바라보노라면, 또한 그 안에 펼쳐진 섬의 인생론을 음미하다 보면,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 바다로 돌아가 한 줌 모래알로 부서질 섬들이라는 새삼스러운 비밀이, 자꾸만 떠올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