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10월 8일. 미군 보병 82사단 328연대의 병사들은 독일군의 기관총에 꿈쩍도 못하고 있었다. 버나드 얼리(Bernard Early) 하사가 이끄는 17명의 병사들은 우회공격을 할 것을 명령 받아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썰렁하게도 아침식사 중이던 독일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독일군들은 포위되었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두 손을 번쩍 들어 항복했으나 얼리 하사 일행이 독일군 포로들을 접수하기도 전에 강렬한 기관총 사격이 우회조를 휩쓸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얼리 하사를 포함한 8명의 미군 병사가 피를 뿜고 절명했다. 적군의 위치 조차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알빈 요크는 살아남은 동료들을 지휘하여 독일군 포로들을 감시토록 하고 기관총 사대를 찾아 홀로 이동을 하여 곧바로 30야드 떨어진 곳의 독일군의 기관총 사대를 발견해 냈다. 그는 M1917 엔필드 라이플과 M1911로 무장한 채 기관총 사대로 최대한 접근하기 시작했다.
M1917 엔필드 라이플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은 요크가 접근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포로로 사로잡힌 독일군 병사들을 함께 날려 버리지 않기 위해 그들의 맥심 기관총 위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관측을 하고 있었다. 얼리는 엔필드 라이플의 조준선을 침착하게 기관총 사수의 심장에 겨누었다. 목표물을 찾아 헤메던 독일군 기관총 사수와 얼리의 눈빛이 서로 교차한 순간....적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독일군 기관총 사수가 거꾸러 졌다. 총소리로 요크의 위치를 파악한 다른 독일군 지원병들은 산개하여 요크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얼리는 참착하게 대응사격을 하여 원샷 원킬로 잡아내고 있었다. 요크의 고향에서 라이플은 그들의 식량을 조달하는 생필품이었으므로 이정도 사격술이야 일도 아닌 셈이었다.
앨빈 요크 상사
결국 기관총 사수를 포함하여 5명의 동료들이 목숨을 잃고 나자 엔필드 소총의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독일군 병사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요크가 몸을 숨기고 있던 방향으로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독일군 병사들과 요크의 거리가 권총 사거리 까지 가까와 지자 다시 한번 독일군 병사들이 하나 둘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요크의 M1911이 불을 뿜은 것. 역시나 이번에도 한발에 한명 씩이었다. 당황한 독일군 병사들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요크는 엔필드 소총을 재장전 할 시간을 벌었고 재장전이 끝나기 무섭게 요크는 소리도 없이 이동하여 독일군 병사들을 연이어 쓰러트렸다...
결국 요크는 '혼자서' 25명의 독일군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132명의 병사들을 포로를 붙잡을 수 있었다. 1계급 특진과 함께 미군 최고의 훈장인 의회 명예훈장(Medal of Honor)를 수여 받게 되는데,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1차 대전의 수많은 일화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전설적인 무용담이기도 하다.
앨빈 요크의 무용담을 그린 게리 쿠퍼 주연의 영화 <요크 상사(1941)>
놀랍게도 앨빈 요크를 시작으로 미국에서는 25년에 한번씩 콜트 M1911을 사용한 군인이 의회 명예훈장을 받게 된다.
1993년 소말리아 사태 당시 추락한 미군의 블랙 호크 헬기의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죽을걸 뻔히 알면서도 델타 포스 대원인 게리 고든(Gary Gordon)과 랜디 슈가트(Randy Shughart)가 지상으로 내려가 수백명의 소말리아 민병대와 전투중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 장면은 얼마전 영화 <블랙 호크 다운>에도 자세히 소개 되어 있는데 살해된 두 델타 포스 요원의 시체를 성난 군중이 끌고 다니는 장면이 TV에 방영되기도 해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의 한장면
영화상에서는 소말리아 측을 피에 굶주린 좀비들 처럼 묘사해서 두 델타 포스 요원의 비극적인 최후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지만 소말리아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 또한 자신들의 정부 각료를 납치해 가려는 불순한 자들일 뿐이었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도구처럼 사용되는 군인들의 목숨이지만 그들의 희생은 어떤 상황에서나 숭고한 법...
랜디 슈가트(Randy Shughart)
결국 랜디 슈가트와 게리 고든은 죽어서 의회 명예훈장을 받게 되었으며 랜디 슈가트가 사용했던 총은 M14와 M1911A1이었는데 25년 주기설을 정확히 지켜냈다...
랜디 슈가트의 귀환....
M1911의 등장
M1911의 기본 설계는 브라우닝(John Moses Browning)이 했지만 결코 혼자만의 천재성으로 만들어진 총은 아니다. 미군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요구된 사항이 집약된 '실전을 위한 군용 총기'인 것이다. 지난 1편에 기술했지만 .38 Long Colt caliber탄을 사용하는 M1889 리볼버가 모로족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란 것이 밝혀지자 미군은 인체에 좀더 확실한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총을 찾게 된다.
Colt M1901. 연식은 틀리지만 M1889 모델과 거의 동일한 물건
급한 대로 이미 군수품 창고에 묵혀 두고 있던 .45 Colt 탄을 사용하는 콜트 SAA를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에게 재지급 하기도 했다. 사실 SAA는 이미 .38 구경 리볼버에게 현역 자리를 넘겨준 지 오래인 모델이었지만 적어도 필리핀의 광신적인 모로족에게는 확실히 효과적인 물건이었다.
Colt 1873 Single Action Army(기병대 버전). 1876년 모델
하지만 재장전의 불편함과 속사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미군에서는 새로이 채용될 권총은 가능하다면 자동권총 구조였으면...하길 바랬던 것이다. 사실 군인들이란 아주 보수적인 집단이어서 당시 유행하던 자동권총 등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여전히 믿음직한 리볼버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 리볼버와 자동권총 구조가 짬뽕된 (리코일의 힘으로 실린더를 회전시킨다는.....) 영국제 웨블리-포스베리(Webley-Fosbery) 리볼버를 써 보면 어떨까 궁리했다 하니...
Webley-Fosbery automatic revolver. 리볼버와 자동권총의 장점을
섞어놨다는데 결국 리볼버와 자동권총의 단점만 갖춘 총이 되고 말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콜트사의 .45ACP 자동권총이 제식 권총으로 채용되어 곧바로 실전 투입되었는데 가장 초기의 실전 참가 기록을 알아 보도록 하자.
모로족 Again
처음부터 모로족과 미군의 첫 대면이 피터지는 싸움판이었던 건 아니었다. 스페인을 제압한 미국은 필리핀을 거둬 들이면서 지역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모로족이 살고 있는 섬 지역에 진출 하게 되는데, 1899년 8월,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베이츠(John C. Bates) 장군과 모로족을 대표하는 술루섬의 군주 자말-울 키람과 불간섭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1903년 모로족의 영토가 미국에 완전히 귀속 당하면서 모로족의 오랜 관습이었던 노예 제도가 금지되고 이슬람식 교육이 아닌 근대적인 교육과정이 강요 되었다. 사실 모로족은 단일 민족도 아니었고 단지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필리핀 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남부 지방 사람들을 지칭 하는 말이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던 종교(토착 신앙과 결합된 이슬람 교)적 결속이 끊어짐에 따라 모로족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하던 사회 기반에 반기를 든 각 지역 정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또한 새로운 법 제도가 이슬람의 법률인 '샤리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법은 스페인의 그것보다 좀더 반 이슬람 적이었는데, 점차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1901년과 1903년에 걸쳐 모로족은 민다니오 섬에 주둔중인 미군을 공격해서 미군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는 등 모로족과 미군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미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집요하게 반란세력을 추적하여 1906년, 화산섬 다조의 분화구에 은신해 있던 600여명의 모로족이 우드(Leonard Wood)장군이 이끄는 미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 당했다. 이는 분열 조짐을 보이던 모로족을 분노케 하였으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결과가 되었다.
모로족 최후의 전투. 모로족이 살던 지역은 밀림이 우거진 곳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승부는 육탄전으로 결말지어졌다.
당연히 소총보다는 권총이 활약할 여지가 더 많았다. 미군 병사의 손에 들려진 M1911에 주목.
그러나 1913년 6월 11일부터 15일 까지 사흘간, 필리핀 졸로(Jolo) 섬에서 퍼싱(John J. Pershing) 장군이 이끄는 미군과 필리핀의 정찰병들은 남아 있던 모로족의 반란 세력을 찾아 내어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결국 스페인에도 굴복하지 않고 수백년간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 왔으며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던 모로족의 긴 투쟁의 역사가 일단락 되고 말았다...
M1911은 제식 채용되자 마자 필리핀에 주둔하던 미군에 지급되어 모로족 진압에 사용되었는데 그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기존 리볼버용 탄자 무게의 2배에 달하는 .45ACP 탄자는 속도는 느렸지만 인체에 전해지는 데미지는 엄청난 것이었다. 수십발의 리볼버 탄을 맞고도 죽기 직전까지 칼자루를 놓지 않았던 모로족 전사들이었지만 .45ACP의 위력은 그들로써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판초 빌라를 잡아라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빼았은 필리핀은 아시아 진출을 위한 미국의 포석이었다. 20세기 초엽의 미국은 아시아 뿐 아니라 중남미 기타지역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멕시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910년대 당시 멕시코는 혁명가 판초 빌라를 중심으로 농민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판초 빌라. 본명은 돌테오 아랑고( Dorteo Arango)이며 16세 나이에 그의 누이를 겁탈한 자를 살해하며 그의 인생과 이름이 바뀌게 된다. 프란치스코 빌라로 개명했으나 훗날 악명을 떨치며 판초 빌라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우게 된다.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판초 빌라(Pancho Villa 1878-1923).
우리나라로 치면 임꺽정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은행강도와 가축 도적질로 입에 풀칠하며 살던 판초 빌라는 프란치스코 마데로(Fancisco Madero)의 혁명군에 참가하여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었던 포피리오 디아조( Porfirio Diaz)를 전복시키는 일로 업종을 바꾼다. 디아조는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너무도 행적이 흡사한 위인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판초 빌라는 임꺽정 보다는 김두한 쪽으로 설정을 바꾸는게 이해가 빠르실 듯.
그는 친하게 지내던 부랑아, 무법자, 한량, 건달들을 규합해 마데로의 반란세력에 끌어들였으며 이들을 직접 진두 지휘하며 대지주의 땅을 접수해 미망인과 고아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판초 빌라와 같은 든든한 참모 덕분에 마데로는 승승 장구를 하며 결국 디아조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 내리는데 성공했지만 얼마후 암살당하고 만다. 그의 사후 판초 빌라와 몇몇 경쟁자들은 치열한 권력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국은 공식대로 Carranza라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내세워 사태 수습에 들어간다.
1916년 판초 빌라를 대장으로 한 무장한 멕시코 반란군들이 미국 국경을 넘어 뉴 멕시코의 콜럼버스를 습격해서 미국 시민들과 군인들을 살상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판초 빌라를 토벌하기 위해 기병대 1개 연대 약 1만1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이번에도 다시한번 퍼싱 장군이 지휘를 맞게 되는데...
멕시코 원정당시 퍼싱장군(오른쪽 3번째)와 참모들. 오른쪽 두번째는 훗날 명성을 떨치는 패튼( George S. Patton) 이다. 비록 멕시코 원정에서 좀 헤메긴 했어도 명장 소리를 들었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딴 전차까지 등장. 그의 허리춤에 M1911전용 M12홀스터에 주목.
하지만 판초 빌라가 이끄는 반란군은 모로족 원정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드넓은 멕시코 일대를 휘저으며 신출귀몰 하며 퍼싱 장군의 기병대를 농락하기 시작했다. 모로족 원주민들에게 그렇게 효과적이었던 M1911또한 이곳 멕시코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없었다. 결국 판초 빌라를 생포하려 했던 퍼싱 장군의 기병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압정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가 승리하거나 패배하여 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지만 판초 빌라는 좀 예외이다.
"죽음으로써 내 몫의 생을 다 못 사느니 잠시 비겁자가 되는게 낫다"
며 은퇴를 선언해 버린 것. 하지만 1923년 그가 유일하게 목숨걸고 충성했던 마데로의 뒤를 이어 암살자의 흉탄에 파란 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1차 대전에 데뷔하다
콜트사에서는 M1911을 1912년 1월 4일부터 생산을 개시하여 미군에 납품할 초기 생산분 31,344정을 생산한다. 그리고 같은해 민간 버전을 생산하기 시작하는데 민수용 모델에는 그 유명한 "거버먼트 모델"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 명칭은 약간의 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정부를 위해 만들어진 총'이라고 오인되었던 것.
M1911이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 하면서 부터이다. 초기에 M1911은 보병의 부무장 용도 혹은 장교나 포병이 간단히 다룰 수 있는 호신용 무기 정도로만 인식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은 M1911이 휘두르기 편리하고 장전이 간단하고, 일발필살의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참호전에서는 소총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에게 M1911은 참호나 진지에 짱박혀 있는 적군을 제거하거나 덤불속에 숨어있는 적군을 벌집으로 만들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반면에 1차대전 당시 주무장으로 사용되던 볼트 액션식 소총들은 1m가 넘는 길이에, 속사가 자동권총에 비하면 엄청나게 느리고 거추장 스럽고...기타 등등의 이유로 근접 전투 상황에서는 M1911에게 주무장의 자리를 넘겨 줘야만 했다.
계산기 메이커가 M1911을?
몇 달간의 실전 경험 끝에 군인들은 자동권총의 놀라운 위력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당연히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한 직후 재고로 남아있는 M1911의 수는 약 75,000정에 불과 했다. 곧바로 콜트사로 추가 주문이 들어왔고 콜트는 대량생산 체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당시 콜트사와 함께 M1911을 만들던 곳은 스프링 필드 조병창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 미국이 전쟁에 참가하기 직전인 1917년 사이 26,000정의 M1911을 제조했다. 하지만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조병창에서는 1911의 생산을 중단하고 소총제작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콜트사 혼자 만으로는 M1911의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제조된 M1911
미군은 콜트사와의 독점 공급 계약 수량이 완료되자 M1911을 주문할 만한 타 업체를 찾기 시작한다. 놀랍게도 총이라고는 한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제조 업체에도 상당수의 주문이 들어가게 된다. North American Arms, Savage, Winchester 같은 대형 총기 메이커야 그렇다 치고....Borroughs Adding Machine 같은 계산기 제작 업체나 Lamston Monotype, Remington-UMC(산탄총으로 유명한 그 레밍턴 사가 아니라 타이프 라이터 메이커)같은 타이프 라이터 제조 업체까지 선정되었다는 점은 얼마나 M1911의 수요가 많고도 다급했는지 짐작케 한다.
Borroughs Adding Machine 사가 원래 만들던 것은 이런 물건
이들 메이커와 계약된 M1911의 수는 전쟁기간 동안 1차분 2백만 정에 달했으며 추가로 백만정 가량이 더 주문될 예정이었다. 문제는 1911의 추가 생산을 맞게 된 다른 메이커에서 1911생산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콜트 사에서 조차 1911의 정밀한 부품도면을 따로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다. 여전히 숙련공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해 조립 생산하고 있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도 1918년에 접어들 무렵 콜트사는 하루에 470정의 M1911을 찍어내고 있었다. 5월에 이르러 하루 생산량은 1000정에 달했고 여름에 접어들 무렵에는 무려 하루 2200정이라는 가공할 만한 양을 생산하고 있었다. 한편 콜트사에서도 완벽한 도면이 만들어 지게 되어 하청 업자들도 본격적인 생산에 뛰어들게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1차 세계대전이 곧 끝이 나고 말았다. 결국 대전중 레밍턴(Remington-UMC) 정도에서만 그나마 22,000정 가량이 미국 정부의 손에 인계되었다.
Remington-UMC의 1911
North American Arms 에서는 100정 가량이 만들어 졌지만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인계되지는 못했다. 오늘날 남아있는 NAA의 오리지널 1911에는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있다.
NAA의 1911
그밖에 새비지(Savage)같은 메이커에서는 극소수의 1911용 슬라이드만 제조되어 부품용으로 사용되어졌으며 나머지 메이커들의 경우 계약이 대부분 취소되었다.
Savage의 1911. 하부는 콜트사의 프레임이다.
사라진 M1911
M1911은 1차대전 당시 쓰인 무기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스 전선의 경우 60% 이상의 미군이 M1911을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 반수가 종전당시 분실 처리되었다. 전투중 유실된 것도 있겠지만 병사들이 기념품으로 슬쩍...한 것도 상당수이다. 그러나 민간인들이 군용 총기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1911을 슬쩍 해간 병사들은 대부분 "UNITED STATES PROPERTY" 각인을 지워 버리고 표면처리를 다시 하곤 했다.
M1911의 개량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워낙에 많은 수의 1911의 만들어 졌기 때문에 1911의 재고가 충분했기 때문에 혹시 모를 다음 번 전쟁에 대비할 수도 있었지만 미군 병기과에서는 M1911에 대한 전투 평가가 이루어 졌다. 전장에 투입된 병사들 대부분이 리볼버에만 익숙해 있다가 자동권총은 대부분 처음 사용해 보았기 때문에 조준선이 너무 낮다고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손가락이 짧은 병사들에게 1911의 방아쇠는 너무 멀......찍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전쟁 해머와 그립 세이프티 사이에 손이 끼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1911을 사용했던 병사들의 사고 사례와 실전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개선사항이 요구되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오랫만에 도래한 평화의 시기였기 때문에, 군에서는 추가로 권총을 구입할 여유가 없어서 1911의 '차기 생산품' 부터 개량된 형태로 생산할 것을 결정했다. 어쨋건....새롭게 달라진 개량형 1911의 면모를 살펴 보도록 하자.
M1911 vs M1911A1
1. 방아쇠를 짧은 것으로 교체하고 표면에 체커링 처리
2. 방아쇠 뒷부분과 인접한 프레임에 릴리프 컷을 넣음
3. 그립 세이프티의 뒷부분을 좀더 길게 늘려서 손을 짓이겨 놓는 사고를 대비
4. 해머의 스퍼 길이가 짧아짐
5. 해머의 스프링 하우징을 곡면 처리한 것으로 교체하고 체커링 처리
6. 풀 체커링 스타일의 목제 혹은 플라스틱 그립 패널로 교체
7. 프론트 사이트의 형상이 정면에서 봤을때 테이퍼 형상에서 직사각형으로 변경
8. 리어 사이트의 형상이 뒤에서 봤을 때 U형상에서 직사각형으로 변경
WA SCW M1911 에어건(상), WA SCW M1911A1 에어건
두 물건의 비교기사는 좀 나중에 올라갈 예정.
방아쇠가 짧아지고 릴리프 컷이 추가된 것은 손가락이 짧은 병사들을 위한 조처이다. 그리고 프론트 사이트가 약간 두터워 졌는데 밝은 대낮에 기존의 1911로 조준을 하면 햇빛때문에 프론트 사이트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세세한 사양 변경은 2차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주욱 계속되었지만(예를 들어 슬라이드 앞부분을 열처리 하여 깨져 나가는걸 방지하거나 해머가 손에 끼는 사고가 빈번하자 해머의 스퍼 길이를 줄인다던지..)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보통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콜트 .45 자동권총이라 함은 바로 이 개량형을 의미한다. 표면 처리는 초기에는 건블루 처리였으나 1941년 모델 이후 파카라이징(Parkerrized) 처리로 마감 되었다. 건블루 처리보다 저렴하고 부식에 강한 처리법이었기 때문이다. M1911A1의 다양한 바리에이션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더 징하게 자세히 다뤄 보도록 하자.
여하간...이러한 변화는 1926년 6월 15일 생산분에서 부터 적용되어 'AUTOMATIC PISTOL, CALIBER .45, MODEL OF 1911A1'라는 명칭이 따라 붙었다. 또한 여러 별칭들도 따라붙게 되었는데 'Colt .45 Automatic'이라든지, 간단하게 'the Army .45' 등이었다. 여느 총과 달리 1911계열을 지칭하는 단어가 제각각인 것은 다 이런 다양한 별칭들 때문이다.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유럽의 형국을 바라보며 미국도 뭔가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는지...1939년 말부터 병기과에서는 전쟁기간에 사용할 무기를 각 민간 업체에 주문을 시작했다. 콜트 외에도 3군데의 총기 메이커가 1937, 1938년 그리고 1939년에 걸쳐 M1911A1을 생산하기로 했는데 예산상의 문제로 이들에게 주문된 수량은 10,000정에 그쳤다.
예상대로 1940년, 유럽에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미국이 참전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동안 찬밥 신세이던 국방부에 돈줄이 트이자 총기 메이커들과 계약을 맺고 구식 장비들을 신형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콜트사 또한 M1911A1의 추가 수주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대량 생산에 들어갔으며,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 지자 콜트사의 M1911A1 생산라인이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역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2차 세계 대전은 1차 세계 대전의 형국을 답습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규모와 사용되는 화기, 동원된 병사의 수 등은 이미 1차 대전 때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M1911A1에 대한 수요 또한 엄청나게 늘어 났으며, 미군뿐 아니라 연합군에서도 대량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여러 메이커에서 M1911A1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2차 대전 기간 동안 약 250만정의 M1911A1이 만들어 졌다. 대부분 미국에서 만들어 졌으며 1차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업체에서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가장 많이 생산한 곳은 레밍턴 랜드(Remington-Rand, 무기업체 '레밍턴'이 아니라 컴퓨터, 타자기, 사무기기, 전기 면도기 같은 걸 만들던 업체)로, 총 103만정을 뽑아냈다. 2위는 콜트(48만정), 그리고 이사커(Ithaca)에서 37만정, 유니온 스위치 앤 시그널(Union Switch and Signal)에서 5만5천정, 싱어(Singer Sewing Machine)에서 500정을 제조했다.
어째 오리지널 메이커인 콜트보다 레밍턴 랜드사가 더 많이 찍어 낸게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사실 콜트사는 전쟁 기간 중 권총보다는 기관총 쪽에 비중을 두어 생산했다는 점을 알아 두어야 한다.
레밍턴 랜드 M1911A1
이사커 M1911A1. 이사커는 3번째로 많은 335,466 정을 생산했는데
품질관리 문제로 여러차례 생산 중단을 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유니온 스위치 앤 시그널 M1911A1. 미군이 1943년에 M1911A1의 필요량을
재평가 할때까지 정확히 50,000정을 생산하고 중단했다.
콜트사 외의 메이커에서 만들어진 총들의 품질은 대부분 우수했고 동일 규격의 부품을 만들어 사용했으므로 모든 파트가 호환 가능했다. 정부의 감독관들은 각 메이커에서 만들어지는 생산품을 모두 감독/관리 했으며 생산품들 중에서 샘플을 선정하여 규격과 성능을 체크해 나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달랑 500정만 만들었다는 싱어(Singer Sewing Machine -이하 SSM)의 M1911A1이다. 전쟁기간동안 만들어진 최고의 1911이라 불리우며 컬렉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다는 SMM사의 1911A1, 당췌 어떤 놈이길래?
M1911A1 최고의 명품 - The Singer .45 Caliber Automatic Pistol
보급 문제는 1차 대전 부터 있어 왔지만 2차 대전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병기청에서는 총기제조 경험이 없는 민간 제조업체에게 설비를 갖추게 하여 원하는 수량의 무기를 트러블 없이 뽑아 내려고 노력했다. 이미 1차 대전 당시 그 효과가 입증된 군수품 조달 방식이었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미국의 막강한 물량 지원이 가능한 것이었다.
1925년 미군 병기청은 M1911의 대량생산 가능성 여부를 재봉틀 메이커인 SMM사에 시험적으로 의뢰한다. 의뢰건은 SSM사의 엘리자베스 포트 공장에서 약 1년간 진행 되었다. 월 25,000정의 생산을 위해서는 기존의 설비와 공정으로는 부족하다고 평가 되었다. 아울러 전시 체제를 대비하여 SSM사에서 시간당 100정의 1911A1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가 수록된 자료가 만들어진다. 이 자료에는 제조공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도면, 사진자료, 각 공정별 가공 시간에 대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각 파트의 제조를 위한 제조 설비와 조작법까지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전쟁이 촉박해 지려는 낌새가 보이자 1925년의 평가서를 기본으로 1939년에 SMM사에는 M1911A1 제조를 위한 설비가 추가로 지급되고 이듬해 4월 17일 시험적으로 500정의 M1911A1을 주문 받는다. 물론 시간당 100정이라는 수치는 달성되지 않았고 싱어 사에서는 M1911A1을 대량 생산 하지도 않았다.
SSM사에서는 회사가 갖추고 있는 기술과 생산능력을 고려하여 초기 생산량 500정을 끝으로 권총의 생산을 중단한다.
1941년 말에 주문이 종료되었는데 500정이 병기청에 수령되어 지급되었는데 주로 공군에게 주어졌다. 아직 남아 있는 이 희귀 아이템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역시나 소수만 만들어진 North American Arms사의 M1911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SSM의 제품은 2차대전 당시 만들어진 M1911A1중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SSM에서 만들어진 M1911A1은 그립을 제외하고(SSM 제품에 사용된 그립은 Keys Fiber Company에서 생산) 전부 자사에 갖춘 설비로 만들어 졌는데 표면처리는 Du-Lite 피니쉬라 불리는 좀 색다른 방법이었다.
시리얼 넘버는 S800001-S800500이 주어졌는데, 알려지지 않은 몇정이 싱어사의 종업원들을 위해 만들어 졌다. 이 물건들은 시리얼 넘버나 검증 마크가 새겨지지 않은 것들이다.
Singer .45 Caliber Automatic Pistol. 사진의 모델은 몇군데 표면을 재처리한 부분이 있지만
Du-Lite 피니쉬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 오리지널 SSM 제품이다.
SSM의 M19111A1은 컬렉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희귀 아이템이다. 일단 생산 수량이 워낙에 적고 표면 처리등이 여느 M1911A1과 달리 예뻐서 상당한 고가이다. 이런 이유로 짝퉁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부분의 짝퉁은 레밍턴의 초기형 M1911A1을 베이스로 가공된다. SSM사의 생산설비는 대부분 레밍턴 사로 넘어가고 소수가 이사커로 넘어가서 레밍턴의 초기형은 Singer의 오리지널 생산설비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 올라가고 덩달아 짜가가 판을 치고 있는데, 시리얼 넘버는 위조품 판정을 위한 중요 체크 포인트로 사용된다. 까다로운 컬렉터들은 이 총을 입수 할 때 혹은 소장중이던 물건의 진품 여부를 판독하기 위해 X-ray 테스트를 하기도 한다.(슬라이드 각인이나 시리얼 넘버를 리 스탬핑 했는지...)
오리지널 SSM 제품은 컬렉터들에게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원형 보존율이 96~98% 정도인 것들의 경우엔 $25,000, 92%-95%인 것들은 $18,000, 85%-95%인 것들은 $12,000 정도이다. 그리고 그럭저럭 쓸만한(65%-85%) 것들의 경우엔 $7,000, 거지같은 상태인 물건이라도 $3,500을 호가한다.
Transitional 모델
1911시리즈는 워낙에 다양한 버전이 존재해서 이것들을 모두 소개하려면 읽는 분이나 쓰는 사람 모두 실신해 버릴지도 모른다. 2차 대전 전후로 만들어진 '클래식'류에 한정해서 콜트사 제품을 제외하고 한번쯤 짚고 넘어갈 모델중 하나가 앞서 소개한 SMM의 '한정판' 모델이나 지금 소개할 트랜지션 모델, 컨버전 모델 정도가 아닐까 한다.
Colt M1911 "Transitional" .45 cal. 시리얼 넘버는 700004.
너부대대...한 그립 패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트랜지션 모델은 M1911에서 개량된 M1911A1이 정식 채용되기 전에 생산된 모델이다. 콜트사가 M1911의 개량을 지시받고 만들어진 모델로써 형태는 M1911A1과 거의 흡사하며 1924년 미군으로부터 10,000정을 주문받아 만들어낸 모델이다. 보통 1911 개량형이라고도 불리우나 컬렉터들 사이에서는 트랜지션, 즉 과도기 모델로 불리고 있다. WA에서도 에어건으로 발매된 바 있다.
Conversion 모델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다량의 M1911A1을 필요로 하는 영국이나 소련등지로 보낼 재고가 떨어지자 급한대로 미국내에 재고로 남아있던 민수용의 구형 버전을 보내기로 한다. 콜트사는 재고로 남아 있던 6,575정의 민수용 거버먼트 모델을 밀리터리 스펙으로 개수하여 미군에 납품하는데 이 모델이 컨버전, 즉 민수용을 군용으로 살짝 재처리한 짬뽕 모델이다.
M1911A1 민수용 모델
Colt M1911A1 Commercial to military conversion (1942)
컨버전 모델은 민수용의 시리얼 넘버가 지워지고 군용 시리얼 넘버와 마킹이 새겨졌다. 원래 건블루 처리였던 표면은 파카라이징으로 마무리되고 검수를 거쳤다. 위 물건은 2차대전 기간 동안 영국으로 원조된 총이다. 1950년대에 원조된 M1911A1들이 영국의 규정에 따라 검수와 실사검증을 통해 다시 미국으로 역수출 되기도 했다.
슬라이드에는 민수용을 의미하는 커머셜 마킹은 그대로 살아 있지만 프레임에는
군용 시리얼 넘버가 새로 새겨져 있다. 원래의 민수용 총기번호가 지워진 흔적이 보인다.
이 버전들의 또다른 특징은 슬라이드와 프레임 내부의 스와츠 세이프티(Swartz Safety)가 제거 되 있다는 점이다. 1938년 이후 생산된 거버먼트 모델에 채용된 오발 방지용 안전장치인데 이것은 이후에 등장하는 민수용 버전인 시리즈 80에 장비될 파이어링 핀 세이프티의 원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밀리터리 스펙에 맞추기 위해 스와츠 세이프티(Swartz Safety)가 제거되어 있다.
잠시...딴길로 새 보자면, 시리즈 70과 80모델은 WA에서 제품화한 모델로 에어소프트건 컬렉터와 게이머들에게 익숙한 모델인데 에어건 에서야 두 모델의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하지만 실총에서는 80시리즈가 발매되면서 꽤나 논란이 일었다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다뤄볼 예정. 다음시간에는 해외에서 만들어진 1911피스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WA의 거버먼트 시리즈 70과 80모델 |
첫댓글 ㅋㅋㅋ진짜 잘보고 가네요. 제가 좋아하는 총기인 만큼 애착이 가는게 맞나봐요
M1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멋져횻!!!
콜트!! 정말 믓져부러요...!! ㅋㅋㅋ
역시 권총중에 콜트가 최고라니까............
저도 콜트를 좋아하지만 혹시 콜트 시리즈가 끝나면 우리 글락이도 써주시면 안되요?
음...스프링필드...호머 심슨?
콜트 M1911 첫편 보고 지름신 강림!!!!! 마루이꺼 칭구랑 사고 말았음 ㅡㅡ;; 그것두 새거 쩝... 고넘의 환율 때문에 재고가 거의 없고 실제 있어도 가격 올라갔을때 팔라고 안파는 샵도 즐비하였음ㅡㅡ^ 갱신이 모든 싸이트 뒤져서 이전 가격 비스므리하게 쌌음 ㅜㅜ;;
007 총 월터 ppk 도 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