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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사람됨
주 제 : 종말론
성 경 : 다니엘1
설 교 자 : 이동원 목사
날 짜 :
비 고 : 지구촌 교회
논 지 : 다니엘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우상 생활을 강요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인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책은 요한계시록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문자나 개념, 혹은 사상 등이 상당 부분 다니엘서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장1,2절은 다니엘서의 서론입니다. 유다 왕국의 최후를 보여 주는 대단히 비극적인 서론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다니엘서의 역사 철학이 드러나 있습니다.“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位)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유다 왕국의 멸망과 최후는 다분히 유다 백성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교도소에 갇힌 수인(囚人)들도 일을 합니다. 아마 봄철이 되어서 씨를 뿌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간수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어느 수인에게 “무엇을 뿌리고 있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죄수가 대답했습니다.
『뿌리는 것이 아니라 거두는 것입니다.』
아마 자기의 행위대로 거두고 있다는, 즉 죄의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확실히 1절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도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닙니다. 2절을 주목해서 보십
시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주께서”라는 단어입니다.
“‘주(主)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神)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寶庫)에 두었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가고 성전은 다 불에 타고 성전에 놓여져 있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의해서 바벨론 땅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아마도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섬기는 신(神)의 우월성을 자기 백성들에게 선전할 목적으로 전 기구들을 바벨론 땅까지 실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유다 민족의 대단히 슬픈 종말이요 비극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단순히 비극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글리슨 아처라는 유명한 신학자도 다니엘서의 중심된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니엘서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이 이 역사의 주인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슬프고 슬픈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 본문의 사건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인생을 안이한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불신자들과 역사 앞에 조롱거리로 삼으시기도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세속 사가(史家)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의 역사는 끝났다고 단정지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징벌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징벌이 반드시 그들의 최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다만 새로운 내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 징계라는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비록 유다 백성은 그들의 나라를 상실하여 포로요 노예요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될 것입니다.
결국 유다 백성들이 경험했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셨던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다니엘서의 주제는 실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불신앙을 선택하느냐 하는, 신앙과 불신앙간의 전쟁터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다니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과 함께 시작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
첫째 시험/신앙고백에 대한 시험
유다 백성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시험은그들의 이름을 개명(改名)하라는 압력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벨론 땅에 끌려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입니다. 또 그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들의 본명이 아닙니다. 1장6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
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니”(6,7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로 끌려간 후에 개명된 이름들이었습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입니다. 『엘』이라는 말은 언제나 “하나님”을 가리키며 『단』은 “심판”을, 『니』는 소유격 “나의”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합치면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가 됩니다.
그의 이런 이름 속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부모의 신앙적인 기대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도 이름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지만 유대 민족도 이에 못지 않아,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이름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에는 개명을 해서라도 삶과 이름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이것은 다니엘 가문의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판단자가 되신다.”
그런데 그 이름을 벨드사살로 바꾸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벨”이라는 말은 이방신(異邦神)의 명칭이며 이 신은 “느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대의 보호자 벨. 그대의 보호자 느보.”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의 우상신이 그대의 보호자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기분 나쁜 이름을 다니엘에게 준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벨의 왕자”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벨드사살은 이방신과 관련된 명칭입니다.
『하나냐』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런 이름을 “태양신에게 배운다”는 뜻의 “사드락”(“락”은 우상신이었던 태양신의 이름)으로 개명하게 했습니다. 결국 “이제부터 이방신에게 배우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지어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사엘』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메삭으로 바꿉니다. “삭크”는 정욕과 욕심의 신의 이름입니다.
“욕망의 신과 같은 자가 누구랴.”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는 뜻의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꾸었습니다. 『느고』는 바벨론의 또다른 우상신인 달의 신의 이름이며 『아벳트』라는 말은 “종”을 뜻합니다.
“너는 느고의 종이다.”
이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들을 바벨론의 우상신과 관련된 이름들로 바꾼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과거 일본이 우리의 국민성을 말살하기 위해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단행했던 것과 비슷한 사례를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각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유망한 청년들은 개명부터 강요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 5:9)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귀신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름이 군대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여 줍니다.
이름을 바꾸라는 유혹과 시험에 대해 다니엘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우선 중요한 사실은, 비록 자신의 이름이 정복자의 입장에서 바뀌어지기는 했지만 다니엘이 그것을 받아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을 틀림없이 벨드사살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다니엘로 자처했습니다. 그 증거가 다니엘서 8장1절에 나옵니다.
“‘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이상(異象) 후 벨사살 왕 삼 년에 다시 이상이 나타나니라.”
그는 자기 자신을 “나 다니엘”로 호칭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다니엘이었던 것입니다. 8장15절을 보십시오.
“‘나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마귀는, 어두운 역사는 다니엘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다니엘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적인 영향으로, 혹은 그간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이루어진 자기의 존재됨에 대한 확신으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판단자라는 신앙고백 앞에 여전히 성실했던 것입니다. 9장2절을 보십시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다니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나 다니엘”이라고 강조한 데에서 자기에게 가해진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진정한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다니엘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시대, 곧 신약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저와 당신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이름, 그리스도인. 당신은 혹시 이 이름을 포기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 되기를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를 나타내는 삶 앞에 충성스럽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신앙고백에 대한 시험에서 훌륭하게 승리하는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둘째 시험/신앙정절에 대한 시험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을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다니엘이 이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단순히 포도주를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태도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신학자들에 의하
면 당시 바벨론의 문화적인 혹은 종교적인 습관에 따라 왕의 상에 오르는 음식은 먼저 바벨론의 우상신에게 바쳐진 후에 진상(進上)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의 진미를 먹으라는 요구에는 그저 `포도주를 마실 테냐 안 마실 테냐', `고기를 먹을 것이냐 안 먹을 것이냐'라는 표면적인 질문 이상의 저의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즉, 포도주를 마시고 진미를 취함으로써 이제는 바벨론의 우상신에게 나도 마음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다니엘은 도저히 그 요구를 수락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불신자들과 어울릴 때, 특히 남자들이 불신자들로부터 `한잔 하자'는 유혹을 받았을 때, 함께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그러한 제안에는 저의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잔을 받아들일 때 불신자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지 별수 없지. 네가 무슨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순히 마시느냐 안마시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확신 혹은 신앙의 정절에 관한 시험이 그 배후에 숨어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제안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번 양보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른 데에서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저의를 꿰뚫어 보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사건을 중심으로 시험을 받으면서 드러난 다니엘의 사람됨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징계와 시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일의 새로운 역사의 불씨를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등장시키셨습니다.
다니엘의 사람됨
첫째로, 다니엘은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8
절).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즉, 마음에 확고한 목적을 정했다는 말입니다.
이때 다니엘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아십니까? 불과 16세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니엘의 출생 연도는 B.C. 621년입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 첫번째 시기가 B.C. 605년입니다. 다니엘도 이때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하여 나이를 계산해 보면 16살이 됩니다.
아니, 16세 된 소년이 이런 확고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 우리는 놀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런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가정에서부터 가치관에 입각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청소년부에서 수양회가 있었는데 우리 학생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강사가 한 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은 죄다. 부모의 유산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
그때 학생들은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유산을 받을 것을 진지하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가치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자녀를 교육하고 있습니까?
그 어린 나이의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의연함을 보였습니다. 이런 다니엘의 모습에 비춰 볼 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둘째로, 다니엘은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삶 속에서 이미 그가 오래 전부터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진미와 포도주를 다니엘에게 건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이었습니다. 눈 딱 감고 한 잔 받아 마시기만 하면 출세의 가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세보다도, 명예보다도, 황금보다도, 권력보다도 소년 다니엘에게는 자신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이 자신의 삶에서 거룩함을 얼마나 열망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저와 당신에게 만일 출세의 가도가 열리고 명예의 보좌가 눈 앞에 보이고 황금이 굴러 들어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모든 가능성 앞에서도 다니엘처럼 자기의 깨끗함을 견고하게 유지하기를 원할 이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셋째로, 다니엘은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12절 이하에서 그가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에 결정한 바가 있으니까 당신네들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오. 물러가시오”라고 항의하지 않고 비록 자신이 견고한 확신 가운데 있다 해도 그 확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온유하고 겸허한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습니다.
12절에서 그는 “청하오니”라는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합니다. 원문에는 이 말이 최고의 존경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써 씌어져 있습니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12,13절).
제 3의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아주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있는 다니엘의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확신에 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한 바를 펴나가는 자세나 태도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여 결국 선한 의도마저도 이해받지 못하는 비극을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이 그런 경향이 강합니다.
몇 년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마지막 증언 모습을 비디오로 보았습니다. 그의 발언에 항의하는 사람의 메시지와 내용이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그것을 겸손치 못한 자세로 피력했을 때 결국 그 메시지마저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의 결단력과 거룩함과 겸허, 이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삼위일체로 조화된 인격의 모습입니까? 미국 주일학교 노래 가운데에는 “다니엘이 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다니엘이 되라 홀로 서라 굳게 목표를 정하라 그 목표를 알게 하라.”소년 다니엘의 모습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당신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줍니까?
세속 사회 속에서의 그리스도인
오늘 이 시대는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보다도 훨씬 더 세속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역사는 더욱더 하나님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니엘 시대 후로 바벨론 도성은 언제나 세속화된 도시의 한 전형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 이전에도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몇 차례 나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점차 물량주의적이 되고 쾌락과 죄악이 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면할 수가 없는 세속 도시의 상징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다니엘 시대 이후입니다.
저 유명한 교부 성(聖)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시』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두 개의 도시를 제시합니다. 땅의 도시를 상징하는 바벨론과 하늘의 도시를 상징하는 예루살렘이 그것입니다. 바벨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점입니다. 이기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끊임없이 오염시킬 것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삶의 최고 명제로 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비로소 새로운 예루살렘일 수 있습니다.
땅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화된 도성에서 절망하지 않고 이 시대를 힘차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비전이 있다면 그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도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시』라는 책에서 어거스틴이 내린 유일한 결론입니다. 어거스틴도 그 당시 자기 조국이 서서히 망해 가고 있는 징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조국의 멸망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궁극적인 소망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지도자였던 느부갓네살은 세속 사회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의 한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4장28절 이하를 보십시오.“이 모든 일이 다 ‘나’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28-30절).
이 짤막한 구절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자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냥 왕이라고 말해도 좋을 터인데 꼭 “나 왕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실 우리도 “내가”라고 하면서 자꾸 자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쩐지 추해 보입니다. 끝없는 이기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높이고 자기 왕국을 자랑하는 그 순간에 몰락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도성에 포로로 끌려가 노예로서 짓밟히는 연약한 민초들이었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그리고 지극히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도도하게 흐르는 세속화와 이기심의 물
결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역사 속에 그분의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고 떠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 그들을 역사의 심판의 틀 안에 두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이 지극히 적은 소수의 몇 사람들을 통해서 노예의 땅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드라마를 지켜 보십시오. 아니 이 짤막한 드라마를 통해서 세계 역사의 미래를 예언하는 다니엘의 위대한 비전을 만나 보십시오. 그 비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하나님, 바벨론 왕국 못지않게 자기를 높히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혈안이 된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그리고 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주어진 짤막한 이 한 평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자기 만족을 위해서 허우적거리다가 의미 없이 쓰러지는 인생을 살지 않게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