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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향교 ▷ 이곡교 ▷ 지훈문학관 ▷ 주실마을
☆ 일월면 도계리 향교마을 ☆
면사무소가 있는 일월면 소재지에서 약간의 언덕길을 올라서면 영양향교가 있는 향교마을이다
향교마을에서는 영양향교를 비롯하여 수월헌, 사의정사, 충의정사 등의 고택들을 마을길을 따라가며 어렵지 않게 탐방할 수 있다
향교마을(kakaomap)
영양향교(英陽鄕校)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이 건물은 조선 숙종 9년에 처음 건립된 건물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은 처음 건립할 때 세웠고, 이후 육영루(育英漏), 동서무(東西廡), 동서재(東西齋) 등을 차례로 건립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철거되었다가 지금은 명륜당·대성전·신문(神門) 등이 육영루 대신에 건립한 문랑(文廊)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영양향교 전경(퍼온 사진)
향교는 출입문인 육영루의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퍼온 사진으로 향교의 전체 배치 상태를 짐작해 본다
앞에서부터 육영루 대신에 건립하였다는 문랑(文廊) - 명륜당(明倫堂) - *내삼문(內三門) - 대성전(大成殿)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내삼문(內三門)은 향교 안에 설치되어 있는 3칸인 문을 말하는데 향교나 서원의 출입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다
3개의 문 중 중앙은 신문(神門)이고 양쪽의 문은 인문(人門)이라 하는데,
신문은 평시에는 닫아 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문으로 출입할때는 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와야 한다
육영루(育英樓)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하마비에는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대인 소인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하바비는 보통 궐문, 능묘, 문묘, 서원 등의 입구에 세우는 비석으로, 향교 역시 문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졌다
향교는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담장 밖에서 빼꼼히 넘어다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던 명륜당(明倫堂)
향교는 공자와 우리나라의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공교육기관이지만
대부분 갑오개혁 이후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상실되고, 현재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 있다
가장 왼쪽 끝에 있는 건물이 선현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대성전(大成殿)이다
향교 밖에 설치되어 있는 화장실
영향향교의 부속건물
영양향교를 둘러본 후 사과밭을 사이에 두고 자리잡은 '수월헌'으로 향한다
수월헌(水月軒)
수월헌은 수월공 조유(水月公 趙儉, 1570~1664)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어 영남북부 유림들이 뜻을 모아 공의 사후에 건립한 정자이다
공(公)은 조모를 지성으로 봉양한 비리동효행(飛鯉洞孝行)으로 나라로부터 복호(復戶)의 은전을 받은 효자이며,
임진왜란 때는 약관으로 의병장 곽재우의 의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이미 늙은 몸이라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자 집 뒤에 단(壇)을 쌓고 전승을 하늘에 축원함으로써 축천단충절고사(祝天壇忠古事)를 남겼다
이 정자는 원래 출생지였던 영양읍 상원리에 세웠던 것이나 퇴락하여 후손이 1922년에 종택 사의정사 근처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으며, 2005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수월헌 앞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연못이 있다
수월헌을 뒤로 하고 한양조씨 영양 입향조의 종택인 사의정사로 이동한다
참판공종택(사의정사)
사의정사(思義精舍)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
한양조씨 영양 입향조의 종택
참판공종택은 한양조씨의 영양 입향조(入鄕祖)인 조원(趙源)의 종택으롤 350년 전에 건립되었으나, 2002년에 기존의 종택을 철거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수월공(水月公) 조검(趙儉, 1570~1644)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이곳 도계리(道溪里)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사의정사(思義精舍)라 편액(扁額)하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思義精舍'라는 편액이 걸린 잘 지어진 한옥이 깔끔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종택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다.
사의정사 안에 핀 꽃잔디
종택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좌측 담장 사이에는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워 종택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한양조씨 종택의 향나무 - 보호수
2003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이 향나무는 수령이 약 380년 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수월공 조검이 한양조씨 영양 입향조의 종택을 건립하면서 기념으로 식대하였다고 전해진다
조동흥가옥(趙東興家屋)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조동흥가옥은 원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후손인 한양조씨 18 세손 조관빈(趙觀賓)이 숙종 45년(1719)에 건립한 조선시대 고옥이다
현재의 가옥은 1899년에 중건된 것으로 보여지며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던 조종호가 1977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충의정사(忠義精舍)라는 편액이 걸린 사랑채가 서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 없어 밖으로 나와 건물의 외관만 둘러보고 지나간다
향교마을의 고옥들을 둘러보고 '배골(梨谷)마을'로 이동한다
'충의정사' 뒤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네~
이곡마을은 향교마을에서 멀지 않은 이웃마을이다
향교마을 언덕위에 서 있는 멋진 교회(일월교회)건물은 어릴적 그림에서 보던 시골 예배당의 모습이다
☆ 배골(梨谷)마을 ☆
향교마을에서 약 5분 정도 걸으니 배골마을이 나온다
집 모퉁이 기둥에 걸려있는 옥수수는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봄이 되었으니 이제 곧 밭에 뿌려져서 새 생명을 돋아내겠지~
배골마을 정자. '梨谷쉼터'라고 쓰여 있다. 배골=梨谷으로 풀이된다
배골마을 삼거리. 삼거리에서 우측길은 다음 구간에 걷게 될 '영양연결길'이과 좌측길은 오늘 탐방길의 종점인 '이곡교'와 '지훈문학관'으로 가는 길이다
무심코 다음 구간인 우측길로 들어서려다 돌아서 좌측길로 향한다
다음 구간에 걷게 될 '영양연결길'
'지훈문학관' 방향으로...
다시 지나온 향교마을에 서 있는 교회 건물을 돌아 보고..
이곡교(梨谷橋). 외씨버선길 6코스 조지훈문학길의 종점이다
이곡교에서 완주 인증사진 촬영을 하고 선택구간인 조지훈문학관이 있는 '주실마을'로 향한다
이곡교에서 바라본 배골(이곡)마을 전경
햇살을 받은 31번 국도의 가로수는 있는 그대로 봄의 풍경이다
주실마을로 가는 길은 장군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길이 좁은 곳에서는 수로 위에 데크를 깔아 길을 만들었다
주실마을로 가는 길은 맑은 물이 흐르는 장군천을 보면서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소나무 숲길이다
오래전 이 길을 따라 서당에 가고 있는 어린 조지훈의 모습이 그려진다
주실마을이 가까워지면서 길은 다시 데크길로 변한다
장군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시인의 숲'으로 불리는 '주실마을 숲'이 자리잡고 있다
녹음이 우거지면 방문객들에게는 아름다운 휴식처겸 시원하게 걸을 수 있는 건강한 산책코스가 될 수 있겠다
주실마을 숲
영양에서 봉화로 가기 위해서는 주실마을을 지나야 하는데 주실숲은 길목에 위치하여 마을을 살짝 가려주고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원래 천연림이었으나 100여년 전에 숲의 서북쪽 밭을 구입하여 마을 주민들이 소나무를 보식하는 등 오랜 세월 지극 정성으로 가꾸어 현재 규모의 숲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숲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으며 '2008년 제 9회 아름다운 마을 숲' 대상을 수상하였다
☆ 주실마을 ☆
지조 있는 선비들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조선 중기 때 환란을 피해 이곳으로 와 정착한 한양 조씨들의 집성촌으로서 1630년경 호은공 선생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며, 산골등짝이가 서로 맞닿아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注室) 또는 주곡(注谷)이라 부른다.
이 마을은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 또한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입향조 호은공의 증손자인 옥천 조덕린 선생의 옥천종택,
조선 영조 49년(1773)에 후진 양성을 위하여 건립한 월록서당 등 문화자원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지훈문학관과 지훈시공원, 시인의 숲 등 또 다른 볼거리가 가득하다.
주실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월록서당'의 화장실이다.^^
'월록서당'은 주실마을 동쪽 첫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월록서당(月麓書堂)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49년(1773)에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1718~1796)와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가 발의하고
한양조씨(漢陽趙氏), 야성정씨(野城鄭氏), 함양오씨(咸陽吳氏)등이 추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碩學)과 명현(名賢)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지훈 시인도 어릴 때 월록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월록서당 화장실
월록서당을 뒤로 하고 조지훈 문학관으로 이동
조지훈 문학관으로 이동하다 뒤돌아 보니 '주실마을 숲(시인의 숲)'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지훈문학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조지훈 선생의 부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쓴 문학관을 들어서면 170여 평 규모에 단층으로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ㅁ'자 모양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조지훈의 대표적인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동선을 따라 조지훈 선생의 삶과 그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관 내부로 들어가 여러가지 전시물들을 보지는 못하고 건물 겉모양만 휘리릭~
이렇게 둘러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승무(僧舞)
지훈뜨락
승무관
'지훈시공원'은 올라가려다 시간 관계상 포기하고...
'송의재(松義齋)'라고 쓰여 있는데...
주곡교회. 건물이 특이하여 담아 보았다
조지훈 본가(趙芝薰 本家), 방우산장(放牛山莊)
이 가옥은 청록파 시인이자 국학자인 조지훈(趙芝薰, 본명 東卓, 1920~1968년)이 유년시절에 살던 집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놓은 것이다
조지훈은 1920년에 호은종택(壺隱宗宅)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인 조헌영(趙憲永, 제헌국회의원이자 한의학자)을 따라 1936년에 상경할 때까지 성장기를 이 집에서 보냈다
조지훈의 일가가 떠난 이후 이 가옥은 여러 사람들이 거쳐 살면서 많이 훼손되어 상당기간 폐옥으로 남아 있던 것을 2010년에 복원하였다
방우산장(放牛山莊)은 조지훈이 생전에 방우산장기(放牛山莊記)라는 수필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와 화장실만 호젓하게 서 있다
방우산장은 호은종택의 뒷쪽에 자리잡고 있다
방우산장에서 노랗게 피어있는 산수유꽃을 보면서 토석담장을 끼고 마을길을 내려서니 바로 아래 '호은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호은종택의 옆 모습(서쪽)
호은종택(壺隱宗宅) -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이 집은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과 그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곳이다
주실마을 한복판에 있으며, 조선 중기 인조조에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정형(廷珩)이 창건하였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 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조지훈 선생의 태실(胎室)이 있다
.대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고 솟을대문이 있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복구되었다.
대문채
정침 - 사랑채
태실(胎室)
정침의 뒤쪽 안채 옆에는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다
창고와 대문채
호은종택의 옆 모습(동쪽)
<낙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옥천종택, 창주정사 가는 마을길
창주정사(滄洲精舍)
창주정사는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이 문하생을 가르치던 곳이다
창주정사는 한옥 스테이로 운영되고 있어 출입문에 '외부 관람객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다
창주정사 앞에서 보는 주실마을 전경
창주정사는 높은 곳에 자리 잡아 전망이 좋다.
'창주정사'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옥천종택'이 있다
옥천종택(玉川宗宅)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
이 집은 한양 조씨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의 고택으로, 17세기 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 17년(1671)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천종택 역시 창주정사 처럼 한옥 스테이를 하고 있어 종택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옥천종택의 별당인 초당(草堂)
옥천종택 앞 정자
학파헌(鶴坡軒)
주실마을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학파헌은 조운도(趙運道, 1718~1796)의 손자인 조성복(趙星復, 1772~1830)이 지어 공부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홑처마 맞배지붕의 작은 정자다
조성복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가학을 이어나간 인물로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고 한다
학파헌의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인데 진품은 후손이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 은거한 조성복에 대해 정약용은 그가 시대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며 한탄했다고 전한다.
주곡리 마을회관
주실마을 앞을 흐르는 장군천 건너편에서 보는 주실마을 전경
주실마을을 이곳저곳을 주마간산으로 대충대충 돌아보고 마을 앞을 흐르는 장군천을 가로지르는 주실교를 지나오는데 천변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두 개의 정자가 보인다
'만곡정사'와 '침천정'이다
만곡정사(晩谷精舍)
주실마을의 서쪽 천변에는 옥천종택을 지은 조덕린(趙德隣)의 손자 조술도(趙述道)의 정자인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자리잡고 있다
'만곡정사'는 1790년 영양읍 원당리(元塘里) 선유굴(仙遊窟) 위에 건립한 강정(江亭)을 문하생들이 주곡동으로 옮겨 미운정(媚雲亭)이라 하였고, 그 뒤 현 위치로 옮겨 만곡정사(晩谷精舍)라 하였다
침천정(枕泉亭)
'만곡정사'의 맞은편 천변 언덕 위에는 '침천정'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침천정은 만곡선생 조술도(趙述道)의 제자로 벼슬을 진사(進使)까지 지냈다는 조언유(趙彦儒)의 정자로 '강물이 정자 아래로 쏟아져 내려와 물소리가 들린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란다
문필봉
탐방을 마치고 우리를 태워다 줄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데 삼각형의 '문필봉'이 보인다.
주실마을의 대부분의 집들은 이 문필봉을 마주하고 있는데, 풍수가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를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오후 3시 30분 주실마을 앞 주차장에 도착함으로써 오늘의 여정을 마친다
지도상 거리 : 13.5km
트랭글 거리 : 15.62km
첫댓글 멋진 사진과 상세한 설명을 잘봤습니다. 며칠 지난후 다시보니 기억이 새롭구요. 멋지십니다~^^.
정리해 놓지 않으면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다녀온 곳은 잊혀지기 전에 되도록 메모해 두려고 노력한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네요 강바우님 수고 하셨습니다 산행길에서 다시 만날수 있을까요?어제는 여정님 가게에가서 회식 ( 모임) 하고 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어째 한 번 간 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네요?^^
이제 대간길에서 맘껏 뛰어다닐 남이 머지 않았군요. 체력단련은 열심히 하고 계신가요?
여정님 가게에서는 2기 모임이었나요?
즐거우셨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강바우 아~~2기님들 모임 아니고 라이딩 팀 모임 입니다 4월에도 여정헝아 가게에서 있습니다
님의 기록은 참 오래도록 남을것 같은 열정과 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덕분에 보는 저는 호강을 한답니다. 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