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사를 찾아서 (1)
이 재 익 (2010. 6)
[내 용]
[1] 금관가야
[2] 가야(伽倻) 연맹왕국의 발전
[3] 가야 사료와 유물
[1] 금관가야
가야는 김해 금관가야가 주도권을 잡아 번영하던 초기를 전기 가야라고 한다. 가야 건국설화는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가락국기>를 인용한 기록이 남아있다. 가락국기는 문종 때 금관지주사(김해지방장관)가 쓴 것이라고 하였고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1884년에 지은 허전이 지은 수로왕릉의 숭선전신도비에는 김양일(金良鎰)이라고 하였으나, 김양감(金良鑑)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
1) 김수로왕의 탄생
개벽후 나라 이름과 군신의 칭호가 없고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등 9간(干)이 추장이 되어 각기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峰 ; 김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촌인이 이곳에 모이니 형상은 보이지 않고
“여기 사람이 있느냐” 라는 소리만 들렸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가 어디냐? ” “구지입니다.”
“황천께서 나를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 하였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봉상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 하고 무도하면 대왕을 맞이하여 환희용약할 것이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구간들이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던 바 자색무지개 끝에 붉은 폭에 싸인 금함이 내려왔다. 그 안의 6개 황금알이 화하여 동자가 되었다. 10일후 신장이 구척이나 되었다. 처음 나타난 자를 首露라 하였고 그의 나라 이름을 대가락(가야)라 하였다.
▣ 구지가(龜旨歌), 구지봉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
이 구지가는 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이다. 김해 구산동 해발 20m 작은 동산의 서쪽 기슭에는 김해국립박물관이 위치해 있고, 박물관옆 오솔길로 정상에 오르면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하나 있다. 그 상석에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고 한석봉(본명 한호, 석봉은 호, 1543~1605)이 쓴 글씨가 새겨져있고,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탄강지(誕降地)로 신성시 해야 할 이곳에는 최근에 무슨 연유로 세운 것인지 알 수없는 선돌 하나가 서있을 뿐, 아무런 안내판 하나 없이 허술하다. 주민들은 개라봉(가락봉의 변형)이라고 불러왔다.
김해부사 김건수가 김해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금릉팔경이란 시에서 구지봉에 대해 읊었다.
▣ 구지석람(龜旨石嵐)
山非洛汭(예)自生龜 ; 물가도 아닌 산에서 스스로 거북이 생기니
不受文章也最奇 ; 문장은 받지못했지만 그 기이함이 으뜸이다
嵐(람)氣一邊工擔抹 ; 산에 서린 기운 모든 것 없애버린다지만
海桑可變此難易 ; 세월이 흘러도 이것만은 옮기지 못하리
소설가 최인호에 의하면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자 100만명이나 되는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집단이주하여 츠쿠시에 상륙한 후 동정하여 기내 지역을 정복하여 가와치 왕조를 건설하였다. 가야 유민을 이끈 불세출의 영웅은 응신이다. 그는 사실상 일본의 건국 시조이다. 가야 유민들이 집단이주할 때 토기 등 문명을 가져갔다. 가야인들에 의하여 일본 건국신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가미 교수 혹은 미시나 아키히데에 의하면 일본서기의 건국설화와 가락국기의 가야 건국신화의 공통점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2) 가야와 일본의 건국설화 비교
가야 건국신화 |
일본 건국신화 |
황천이 다스리라고 천손이 구지에 강림하였다. 김수로는 자줏빛 끈이 있는 곳에 위치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 속에 황금알로 모습을 드러냈다. * 구지봉은 가야의 성지이자 일본의 성지이 다. |
1) 일본서기 신대기에 의하면, 천조대신(태양신)은 자신의 직계 손자인 천진언을 내려보냈으므로 천손강림이다. 황조인 고황산영존이 상을 덮는 이불로 황손을 덮어서 내려가게했다. 황손이 사승국이란 사람을 처음 만나서 "여기에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 라고 물었고 "여기에 나라가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라는 대답을 듣고 머물렀다. [가야 구지가와 비슷하다.] 2) 천손이 강림한 장소는 쿠지후류 또는 소호리 라는 산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후류란 한국어로 마을의미, 쿠지후류란 구지마을을 뜻한다. 소호리는 백제수도를 소부리, 신라수도는 서라벌(서울) 3)천진언이 가라쿠니로 갔다, 가라쿠니는 가야를 가르킨다. |
▣ 김수로에 대하여 일연의 명
-구지봉에 내려와서 왕이 된 김수로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아졌네.
인륜은 생겼으나, 임금의 자리는 없었다네.
중국에서 여러대가 거듭되고,
둥국에서도 서울이 나누어졌네.
계림(鷄林)이 먼저였고,
가락(駕洛)은 뒤였다네.
처음엔 다스릴 이 없었으니,
뉘라서 백성을 보살필고.
드디어 하느님이 창생을 돌아보고,
부명(符命)을 주며 정령(精靈)을 보내시네.
산중에 알이 내려오니,
안개가 그 형상을 감춘다네.
안으로는 아득하고 밖으로는 캄캄하여,
형체는 알 길이 없고 음성만 들릴 뿐니라네.
여럿 모여 노래하고 떼지어 춤 바치니
칠일이 지난 후에 일시에 진정되네.
바람불고 구름 걷혀 하늘빛이 푸르니,
둥근 알 여섯 개가 자색 끈에 달려 내려오네.
생소한 지방에 기와집이 즐비한데,
구름 같은 구경꾼들 국 끊듯 왁자지껄.
다섯은 제곳 가고 한분만이 남으시니,
때도 같고 자취 같아 형님 아우 하였다네.
- 수로왕의 치세에 대한 일연의 노래
하늘이 보낸 임금 세상 위해 법 만드니,
왕위에 오르면서 나라 일을 잘 보시네.
궁궐은 옛날처럼 검소하고,
흙 계단은 높지 않네.
만사에 힘쓰시니 어진 정사 펼친다.
불편부당 이런 건가 한결같이 정성쓰니,
길 가는 자 땅 가는 자 서로서로 양보하데.
사방은 안정되고 만백성은 태평한데,
햇빛의 이슬처럼 누릴 수명 다하셨네.
천지기운 변하더니 온 백성이 통곡한다.
자취는 금처럼 찬란했고,
소리는 옥처럼 맑게 떨쳤네.
후손이 번창하니 제사상이 향기롭네.
세월이 흘러가도 모범은 변함없으리.
3) 허왕후와 파사탑
허황후를 맞이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신하들이 왕의 결혼을 간청하였으나 물리치고 인도 아유타 공주가 바다로 올 것을 미리 알고 망산도(현재 진해시 용원동 바닷가 어시장 부근)에 나아가 기다려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 허황후 수 157세에 구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 지냈다 10년 후 수로는 158세에 졸하였다. 구지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허황후릉에 이른다. 도로가 나서 끊겼지만 도로 위로 길을 연결해 두어서 구지봉에서 바로 연결된다.
※ 허황후 색다른 해석 ; 가락국기에 서기 42년 가락국 건국한 김수로왕이 진해시 용원동 망산섬에 상륙한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 하였는데 허황옥은 샤먼의 제사장(부족장)? 가락국 허황옥이 거느린 용원 부족 사회를 정복, 동화시킨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 진해시 용원동 망산도비각
- 안내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수로가 왕이 된지 7년, 그 때까지 왕비가 없자 신하들은 왕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은 왕비는 하늘이 정해줄 것이라고 답하고, 유천간을 용원동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보내 기다리게 하였는데. 그 섬이 바로 지금의 망산도이다. (용원이 아니라는 설도 있어서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른다.)
어느날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과 기를 단 돌로 만든 배가 나타났다. 유천간은 얼른 횃불로 그 배를 망산도로 인도하였다. 배에는 허왕후의 일행이 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직접 나와 왕후를 맞이하였다. 그날 밤 왕후는 자신의 신붕을 밝히면서 꿈 속에서 옥황상제가 나타난 이 곳으로 가락국의 왕비가 될 것을 명하였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혼례를 올리고 15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타고온 배가 바다 속에서 뒤집혔는데, 그 곳이 바로 망산도에서 동북쪽으로 70m 쯤 되는 곳에 있는 바위섬, 즉 유주암(維舟岩)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이 기록을 바탕으로 1908년에 비석을 세웠다."
|
▣ 허왕후릉의 파사석탑
삼국유사 등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서가 48년 수로 7년에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진다. 돌에는 붉은 무늬가 있는데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고 하여 신비를 더한다. 험한 파도를 진정시켜 준다고 하여 진풍탑(鎭風塔)으로 볼렸다. 원래 호계사에 있었으나 1873년에 절이 폐시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능역으로 옮겼다. 모양이 험한 것은 안전항해에 효험이 있다고 뱃사람들이 몰래 떼어갔기 때문이다. |
4) 수로왕릉
수로 왕릉 안내판, 사적 제 73호,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금관가야)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馬羊護石)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崇善殿)과 숭안전(崇安殿), 안향(安香閣),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문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서기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들어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13년(1580)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 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 모습을 갖추었다.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 제례는 경남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능원을 지키는 신물
"신라말 충지잡간 장군이 금관성을 공취하니 그 부하 영규 아간 장군이 묘향을 뺏어 잡사(雜祀)하다 대들보가 부러져 치어 죽었다. 두려워하여 진영을 그려 봉안하였더니 두눈에 피눈물이 나왔다. 도적이 능속에 보옥을 탐내자 갑주 맹사가 나타나 활로 쫓았다."
5) 수로와 탈해(脫解)의 경쟁
삼국유사에는 탈해는 완화국에서 온 탈해 역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 출신이라고 했다. 신장이 9척이나 되는 탈해가 바다로 와서 왕위를 요구하며 기술로 다투기를 신청하였다. 지금은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 서역의 어느 나라, 해양세력인 모양이다.
재주를 겨룸에 있어서 탈해가 매로 변하니 수로왕은 독수리로,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하여 쫓았다. 탈해가 항복하고 계림으로 도망갔다. 성이 석씨인 탈해는 드디어 신라로 가서 4대 임금이 되었다.
김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함은 북방의 기마민족 출신이 정복으로 나라를 세우고 해양세력으로부터 부단히 도전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김해읍성 호계천 연자루를 읊은 시문
-정몽주(1337~1392)의 연자루 시
옛 가야의 풀빛 봄을 찾으니
흥망이 몇 번 변하여 바다가 땅이 되었는가.
당시의 슬픔 속에 시객이 머물러
이로부터 마음의 맑기가 물과 같은 사람이다.
연자루 앞에 제비 새끼 돌아오니
낭군은 한 번 가고 다시 오지 않는다.
당시에 손수 심었던 매화나무
묻나니 봄바람에 몇 번이나 피었던가.
-주열(朱悅, 고려말)의 시
연자루 없어진 지 몇 해인가.
비단 주렴구슬 티끌이 되었거니
호계물 울어울어 언제 다하리.
구름이 흩어진 천년 세월에 옛 님은 보이지 않네.
燕子樓亡問幾春 碧紗珠玉已成塵
虎溪鳴咽何時盡 雲散千年不見人
7) 왕망의 화천 출토
190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이 발굴 조사한 김해패총의 발굴로 임호산 기슭까지도 당시에는 해안선이었으며, 부산대학교에서 발굴한 봉황동 유적지는 금관가야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봉황동 유적지에서는 김해토기와 한나라를 잠시 찬탈하여 신(新)을 건국한 왕망(王莽 ; 기원전 45년~ 24)이 사용했던 화폐인 화천(貨泉)이 출토됨으로써 이 무렵 가야가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벌이고 있었음을 알 수있게 되었다. 봉항동 유적지 부근 어딘가에 궁궐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가락국에 전래된 남방불교;
- 불교전래사 바로잡아야
김수로왕 2년(서기 43년) 신답평으로 행차하여 '이 땅이 협소하기가 여뀌 잎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니 십육나한이 머물 곳이 될만하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인데 소승불교에서 모든 번뇌를 끊고 사체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를 이르는 용어인데 절에서는 주로 십육나한을 모시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 6월 서기 372년에 전진왕 부견이 순도라는 스님과 불상 경문을 전했다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전래된 사실을 공인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을 통해서 들어 온 북방불교의 경우이며, 인도에서 가야로 직접 수입된 남방불교는 이미 기원 1세기에 전래되었다는 의미이므로 우리나라 불교관련 역사를 수정해야 마땅하다. 최인호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학문적 체계로 발전 되지 않고 오직 생활 불교로만 발전되어왔기 때문일 것으로 보았다.
- 장유화상, 허황후의 애끊는 모정, 7불사
[2] 가야(伽倻) 연맹왕국의 발전
1) 가야의 변천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던 여러 국가의 총칭
-가야에 관한 역사책 ;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 : 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이를 발췌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뿐이다. 매우 소략함.
- 《일본서기》에도 가야 단편적으로 언급, 왜곡된 점에 유의하여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卓淳)․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 가야의 명칭 ;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한다. 가야 명칭은 가장 일반적으로 伽耶로 쓰인다.
-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접도국(接塗國)․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순시국(古淳是國)․반로국(半路國)․악노국(樂奴國)․군미국(軍彌國)․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감로국(甘路國)․구야국(狗邪國)․주조마국(走漕馬國)․안야국(安邪國)․독로국(瀆盧國) 등이 있었다.
-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는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한 것, 이 시기는 가야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삼국유사》 ;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대가야(大伽耶: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소가야(小伽耶:고성)․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등-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 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 건국 : 42년 김수로 금관가야 건국
- 2,3세기 전기 가야 연맹 형성 ; 낙동강하류 변한지역, 김해 금관가야 중심 연맹체 형성
중계무역, 철생산, 낙랑과 일본 규슈지역 연결
- 가야 연맹 중심지 이동 : 고구려 광개토왕의 낙동강 진출로
5세기경 금관가야→ 대가야(고령)로 중심이동(후기 가야 연맹)
- 멸망 ; 금관가야 법흥왕때(532), 대가야는 진흥왕때(562) 신라에 통합됨(가야 완전해체).
- 가야가 중앙 집권적인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
: 지리적 고립성, 정치 발전 미숙때문
2) 전기 가야 연맹
- 김수로왕 설화는 9간으로 대표되는 김해지역의 토착세력과 수로 집단이 연합하여 금관가야국(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을 건국한 사실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그 국가를 중심으로 가야연맹체를 결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일반적으로 전기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 금관가야가 위치한 김해지역은 일찍부터 풍부한 철의 생산지로 알려져 있었으며,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으므로 《삼국지》 <동이전>에는 왜(倭)를 비롯한 한예(韓濊)와 중국 군현세력들이 여기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금관가야는 중국 군현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이를 경상도 내륙지역의 여러 국가와 왜 등에 공급하여 중계무역의 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가야연맹체를 형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전기 가야 연맹의 쇠퇴
- 4세기 이후 낙랑군․대방군의 소멸과 고구려의 남진이 본격화되면서 가야연맹도 커다란 변동을 겪었다.
-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 왜․가야 세력과 동맹을 맺고,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와 관계를 맺었다.
- 400년 왜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은 보기(步騎)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때 고구려 군은 신라국경에 집결한 왜군을 격파한 다음 임나(가야)의 종발성(從拔城 : 위치 미상)까지 진격하였다.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김해를 비롯한 경남 해안지대의 여러 가야국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쇠약해 지면서 전기 가야연맹도 와해되고 말았다.
※ 포상8국 ; 삼국사기에 신라 나해왕(서기 209), 창원 골포등 남해안 일대 부족 8국인 浦上8국이 가락을 침범하자 가락은 신라 원병을 청해 물리쳤다.
4) 후기 가야 연맹
- 가야 연맹의 중심 이동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후 고구려군 침입 때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5세기 후반에 가야의 여러나라들은 세력를 재편성하였다. 이것을 후기 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고령 지산동의 거대한 고분들은 바로 대가야 세력의 성장을 알려주는 고고학적인 증거이다.
대가야가 위치한 고령지역은 협소한 산간지대이기 때문에 주변이 트인 해양지역인 김해는 물론 다른 지역에 비해 지리적 조건이 매우 불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야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가야의 중심세력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철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령과 그 인근지역인 야로현(冶爐縣)․산음현(山陰縣)․삼가현(三嘉縣)에는 철 생산지가 있었다.
5) 대가야 건국 설화 ;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의거.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 왕의 조상인 이진아시왕(伊珍阿王)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한다.
- 이진아시의 '아시'는 '알지(閼智), 하지(荷知)'와 같이 대수장(大首長)이란 뜻이다.
-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한 것은 가야연맹을 주도한 대가야가 전기가야연맹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표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6) 경북 고령읍에 위치한 지산동고분군
- 해발 270m가 넘는 主山의 남쪽 산사면에 80여개의 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들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왜 대가야 왕들은 신화에서 가야산신의 자손이라고 자처한 것일까. 당시 가야인들은 그 지역의 진산인 가야산을 매우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대가야 왕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대가야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근 연맹국들에게도 신성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통치이념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가야산신의 후손, 즉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내용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7) 대가야, 제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다.
- 대가야가 부상할 즈음 나제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때 두 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전략상 가야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대가야는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남제서》 <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爵號)를 받았다는 자료가 전한다.
하지는 중국기록에 보이는 유일한 가야인으로서 이 무렵에 대가야가 중국과 교류할 만큼 세력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8) 대가야, 신라와 결혼 동맹
- 6세기 초반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강화, 510년 백제는 대가야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경남 하동․거창 등을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522년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였으며, 신라의 법흥왕은 대가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가야 왕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는 한편으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부체제를 굳건하게 정비한 다음, 서쪽 가야지역으로 무력진출을 적극 꾀하였다.
- 532년 신라의 지속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한 금관가야는 신라 법흥왕에게 항복하엿다.
9) 대가야, 줄타기 외교 ; 신라 압박으로 백제 왜와 연합
-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위협하였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백제․왜와 연합을 추진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이들 세력들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성왕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가야의 이러한 외교정책도 554년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관산성(管山城:옥천)에서 신라군에 대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고 가야정벌을 본격화하였다.
10) 대가야의 멸망
- 백제의 원조가 끊기고 일부 세력마저 가야연맹에서 이탈하자, 대가야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562년 이사부(異斯夫)가 이끈 신라 진흥왕군에게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이때 나머지 가야국가들도 차례로 신라에 병합되면서 가야제국은 소멸하였다.
- 가야 연맹이 통합되지 못한 이유
가야 제국의 각개의 세력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비등했던 점을 들 수 있다. 또 하나는 그들 연맹이 분열 상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통합의 노력이 부족한 일면과 신라와 백제의 침입 등 압력을 지적할 수 있다.
11) 가야의 유민
- 가야는 비록 멸망하였지만, 가야의 문화와 인물들은 신라 역사의 전개와 문화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들은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싸움에서 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대야주(大耶州 : 합천) 군주(軍主)가 되어 진평왕 대에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서현과 왕족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김흠순 형제는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그들의 누이인 문명부인은 태종무열왕의 왕비로서 문무왕을 낳았다. 김유신의 후손들은 중대 말기에 경주 토착귀족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다가 통일신라시대 말에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 6세기에 대가야의 가실왕(嘉實王)이 성열현(省熱縣 :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신의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우륵은 가야금과 더불어 12곡을 지어 바쳤다. 후에 우륵은 신라에 망명한 다음 신라인 제자들에게 가야금을 전수하였다. 가야금은 신라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어 거문고․비파와 함께 신라 3대 현악기가 되었다.
- 7세기 중엽 중국과의 외교문서 해독 및 제작으로 명성을 떨친 중원경 출신인 강수(强首)는 가야인의 후예이다.
[3] 가야 사료와 유물
사료
o 우리 : 가락국기, 최치원의 석순응 이정전 (동국여지승람, 고령가야 설화 단편을 엿볼 수 있음) 창녕 조씨 시조설화 (신라와 관계 설화 담음), 진흥왕 순수비
o 중국 : 삼국지 각주로 인용된 위략의 逸文, 진서 송서, 남제서, 양서, 위서
o 일본 : 고사기, 일본서기, 신찬 성씨록
* 일 학자들이 가야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동기
1) 고사기, 일본서기 등에 일본과 가야 관계 기사가 백제, 신라와의 관계 기사 이상으로 집중.
2) 기사 내용이 일본임나부 문제가 대부분이고
3) 명치이래 식민 통치라는 정책적인 관계에서 연구 필요성을 느낀 결과이다.
가야의 문화
1) 번영 : 농경 철기 문화, 중계무역 (한 군현, 왜)
2) 문화 : 정치는 미숙, 경제력 발전→ 철기문화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화 형성, 신라 문화발전에 영향줌, 일본에 문화전파.
3) 고분 : 고령 지산동(대가야, 금관발견), 부산 복천동, 함안 말이산, 창녕 계남리
4) 순장, 금동관, 철제 무기, 갑옷, 가야 토기→ 일본 스에키(須惠器)
유물
1) 금귀고리 ; 세환이 압도적
2) 토기 ; 특히 이형 토기(家, 舟, 馬, 車, 鴨形 : 제기로 쓰임)
- 특히 압형은 새의 깃털과 함께 죽은 영혼 운반을 의미
- 가야토기는 일본의 스에키(須惠器) 원류가 됨. 가야 토기인 일본의 회색경질토기로 대체로 5세기경 고분에서 다 출토되고 있다. 신라 백제 기야 문화의 일본 전파, 일본이주를 알 수 있게 한다.
3) 철의 생산 ; 철정(덩이쇠, 화폐), 가야문화 핵심은 고도의 철기 문화
4) 무구 ; 마면갑주, 말안장 장식
고분
1) 순장 가야 고분 ; 경북 고령군 고령면 지산동 고분의 예
- 금림 왕릉 지구, 지름이 32m 높이 7m 한 봉분속에 다석실 다석곽분 발견 (1977)
- 가운데 석실 4개(왕과 왕비) 둘레에 석곽 20여개 (시종 순장), 석실 위에는 말 뼈
- 석실하나 크기는 길에 6m 높이 1.5m 너비 1.5m
- 석곽은 길이 1.7m 높이 50cm 폭 50cm
2) 석실묘, 활석 석관묘, 판석석관묘의 세종류가 있는데 시기는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3) 동래 복천동 고분(1890년 발굴)
- 실전용 마면주(馬面冑) 발견. 삼국사기에 부산지방에 독로국이 있었던 곳.
4) 김해 대성동 : 1990년 이후 3차례 발굴되었다. 대형 구리 거울, 통(筒)형, 파(巴)형 동기 (卍자 모양 지름 12cm 대형이 출토, 일본고분에서는 지름 7cm 정도가 출토됨. 임나일본부설 반박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됨.
* 대성동 고분 ;136개가 넘는 왕급 무덤
패총
- 성산 패총 : 마산시 용지동 외동 부락 : 한의 오수전(선제, BC 61-58) 발견
- 김해 패총에서는 왕망의 화천(서기 42년) 이 지역의 세력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는 역사
※ 김해지방은 2000여년 전에는 삼각주 평야지대가 아니었다는 지리학 측의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