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수(鳳凰愁)
조지훈(趙芝薰)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핵심 정리]
지은이 :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東卓). <문장>지에 ‘승무’ 등으로 통해 등단.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했다.
갈래 : 산문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회고적. 고전적. 서정적. 향수적. 우국적
어조 : 망국(亡國)을 슬퍼하는 침통한 어조
심상 : 비유적 심상
구성 :
첫째 문장 - 퇴락한 고궁의 모습(기)
둘째 문장 - 사대주의의 슬픈 역사와 그 말로(승)
셋째, 넷째 문장 - 역사 무상과 비애 인식(전)
다섯째 문장 - 망국한(亡國恨)과 그 극복 의지(결)
제재 : 봉황의 용상(龍床). 고궁의 봉황
주제 : 망국의 비애와 그 극복 의지. 망국의 설움
출전 : <문장>(1940)
[시어, 시구 풀이]
두리 기둥 : 둥근 기둥
단청(丹靑) : 집의 기둥·벽·천장 등에 여러 가지 빛깔로 그린 그림이나 무늬
풍경(風磬) : 절이나 궁궐의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추석(甃石) : 바닥에 까는, 정육면체의 돌
패옥(佩玉) : 벼슬아치의 관복 좌우에 늘어뜨리어 차던 옥줄
품석(品石) : 대궐 안 정전(正殿) 앞뜰에 계급의 품계를 새겨 두 줄로 세운 돌
바이 : 전연. 다른 도리 없이
구천(九天) : 천계, 하늘 위의 세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통해서 외세에 침탈당한 나라의 운명을 사실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큰 나라 섬기던 거미줄 친 옥좌(玉座) : 패망한 왕국의 허망함과 망국의 슬픔, 곧 맥수지탄(麥秀之嘆)을 드러낸 시구로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이 엿보인다.
큰 나라 섬기다 -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 망국의 현장에서의 느낌을 형상화하고, 지난 역사의 그릇됨에 따라 비판과 반성을 제기하고 있다. 옥좌(玉座)는 임금이 정사를 보던 자리. 봉건 체제에서는 임금이 곧 주권의 상징. 옥좌에 거미줄 쳐져 있음은 왕조의 사라짐. 결국은 주권의 상실이라는 역사적 치욕이다. 사대(事大)하다 거미줄을 치고 말았다는 역사적 비판 의식이 보인다. 중국 황제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였기에, 우리 임금은 쌍룡 무늬를 그리지 못하고 겨우 봉황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봉황이 울지 못한 것을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활짝 펴 보지 못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반대로 작자의 서글픔이 투영되어 그림에 있는 봉황마저도 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어느 땐들 - 나의 그림자 : 억눌려 온 민족사에 깃든 커다란 슬픔을 체감한 서정적 자아의 비애를 표현한 것이다. 울지 못하는 봉황은 나라를 잃고 한 번도 활개를 펴지 못한 민족사의 모습인 동시에, 마음껏 뜻을 펼쳐 보지 못하는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패옥 소리도 - 바이 없었다. : 영화롭던 그 자리에 몸둘 곳조차 없는 망국적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눈물이 속된 줄 모를 양이면 - 호곡(呼哭)하리라. : 퇴락한 고궁에서 느낀 시적 화자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고궁에서 느낀 쓸쓸함과 함께 망해 버린 나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특히 속되고 부질없는 눈물이라도 마음껏 흘리고 싶은 서정적 자아의 비애를 봉황새에 감정 이입하여 표현하고 있다. 봉황은 국권 상실의 비운을 겪으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민족 또는 시적 자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작품 해설
박두진이나 박목월이 시의 음악성에 치중한 반면 같은 청록파에 속하는 조지훈은 유장한 가락 속에 우리 민족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노래했다. 그의 초기 시인 ‘고풍 의상’이나 ‘승무’ 등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 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고궁 앞에 서면 누구나 화려했던 과거와 퇴락한 현재를 대비하면서 감상에 젖기 마련이다. 시인은 사대(事大)와 권위(權威)에 안주하던 조선 왕조가 몰락한 것을 허망함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이는 단순한 회고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로 드러난다. 역사의 현장에 서면 느끼게 되는 감동에 공감하는 자세로 시에 접근해 보자.
몰락한 왕조의 고궁을 소재로 하여 나라 잃은 울분과 수심을 표현한 시이다. ‘봉황수(봉황의 근심)’란 망국의 우수와 근심을 말한다. 고궁을 퇴락시킨 요소인 벌레, 산새, 비둘기는 나라를 망하게 한 요소들로 볼 수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로서, 전체 6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첫째 문장은 나라를 잃은 후 그대로 방치되어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친 추녀 끝의 참담한 풍경은 봉황새의 모습을 더욱 비감스럽게 한다. 둘째 문장은 대궐 안 옥좌의 묘사이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라는 구절은 이 나라 몰락의 한 요인이 사대주의였음을 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셋째 문장의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이란 구절에는, 나라를 잃기 이전의 조선 왕조의 역사 역시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데 대한 탄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은 현재의 모습, 푸른 하늘 밑에서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은 더욱 비감한 일이다. 넷째 와 다섯째 문장은 ‘없었다’의 반복을 통해 궁궐 안을 거니는 나의 비감한 심정을 고조시켜 표현하고 있다. 망국의 현실 속에서 화자는 몸 둘 곳이 없는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비애의 정감을 봉황새에 감정 이입하여 호소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망국민이 된 자신에게는 그 어디에도 자신이 자리가 없음을 느낀 화자는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겠지만, 그 복받치는 슬픔 속에서 ‘눈물이 속된 줄’을 깨닫는다. 덧없이 무너진 옛 왕조의 역사를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부질없는 감상임을 깨닫는 데서 이 시는 복고적인 향수나 비애의 토로로 떨어지지 않고 날카로운 역사적 안목을 보여 주고 있다. 망국의 비애를 고전적 소재를 통해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안으로 절제하고 고전미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참고> ‘봉황수’의 형태상 특징
산문시는 시로서 지녀야 할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난 산문으로 표현한 시를 말한다. 그러나 일반 산문과의 구별을 위하여 산문시에는 형태상의 압축과 응결이 필요하게 되고 시 정신의 결정이 요구된다. ‘봉황수’는 시상의 전개 과정에 나타나는 고전적인 시어나 주제의 방향이 시를 침착하게 이끌고 나갈 필요가 있어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봉황수’의 회고적 경향
조지훈은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 정서, 전통에의 향수, 불교적 선미(禪美) 등을 표현한 시인이었다. ‘봉황수’는 기울어져 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느끼는 슬픔을 읊고 있다.
조지훈의 이 같은 회고적 경향은 전통의 자취를 되짚어 봄으로써 정신적 부활의 계기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참고> ‘봉황수’에 나타나는 객관적 상관물
시작(詩作)의 한 기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하다. 어떤 사물, 정황, 또는 일련의 사건을 빌어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사물이나 정황, 또는 일련의 사건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엘리어트(T.S. Eliot)에 의해서 설정되었으며, 개인의 감정은 언제나 객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는 주지주의자들의 입장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봉황’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속된 눈물이라도 마음껏 흘리고 싶다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