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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의 줄거리:
몽타주란 영화나 사진 편집 구성의 한 방법입니다. 따로따로 촬영한 화면을 적절하게 떼어 붙여서 하나의 긴밀하게 연결된 완전히 새로운 장면이나 다른 내용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 같은 겁니다. 자동차는 서있고 배경인 길만 움직이면 자동차가 가는 것 같은 효과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선민의 삶은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에 의해 진행 됩니다. 선민은 길을 가지 않습니다. 선민이 멈춰 있는 동안 길이 갑니다.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
(창40:1~23)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
요즘 우리가 접하게 되는 영화에서는 보기가 힘듭니다만, 60, 70년대의 영화들을 보면 몽타주기법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대표적으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 남녀가 덮개가 열리는 멋진 자동차를 타고 지중해의 해안 길을 드라이브하는데 눈에 보입니다. 자동차와 해안 길을 따로 찍어서 두 장면을 조합을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즘은 카메라를 트럭에 실어서 트럭이 주인공이 달리는 차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면서 찍습니다만, 옛날에는 촬영을 위한 물량을 대기 힘들거나 방법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 몽타주 기법을 썼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지중해 연안의 해안 길을 다 찍고, 자동차는 그냥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조감독들이 카메라에 안 보이게 뒤에 숨어서 자동차를 흔들거나 달릴 때의 입체감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자동차를 찍은 장면을 지중해 해안 길을 스쳐지나가며 찍은 장면과 조합해서, 자동차는 지금 뉴욕 스튜디오에 있는데 지중해 해안 길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몽타주 기법입니다.
1920년대 러시아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이라고 하는 감독이 이 방법을 영화에 적용하기 시작해서 영화 촬영에 굉장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인생길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도 내 인생의 길이 어디로 갈 것인가가 한 없이 궁금해서, 손금을 보고 점을 치고 관상을 보고 사주를 봅니다. 그리고 인생 성공의 지름길이 어디 있는가를 찾기 위해서 서점에 나가서 자기계발서를 뒤지고 다닙니다. 때로는 우회로가 진정한 지름길이라는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길, 잘된 길, 망한 길, 흥한 길, 길에 대한 관심은 말할 수도 없어요.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의 책 제목 자체가 “인생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문호만 인생의 길에 관심을 갖습니까?
철학자, 시인, 심지어는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인생의 길에 대한 관심이 다 있습니다. 사람치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니 어떤 생각이 드느냐?
사람은 자기의 인생길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과연 우리가 갖고 있었던 인생의 길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이 인생의 길을 접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우리 인생의 길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요청을 본문으로부터 접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인과 불 신앙인들의 길에 대한 이해가 달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불 신앙인들은 인생의 길을 가는데, 신앙인들은 인생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길을 가는 것이 불 신앙인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의 모습이라면, 우리 신앙인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길이 갑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길을 갑니까?
이 땅에서 목표를 세웁니다. 목표라는 것이 다 뻔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좋아했던 복, 그 복이 수미산처럼 쌓여있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인생의 길이고, 그게 목표라서 이 땅에서 발을 딛고 길을 갑니다.
발을 딛는다는 것은 육체의 발을 딛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여기서 힘주어 강조하려는 의미는 마음의 발이 땅에 닫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목표점을 향하여 길을 갑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명언을 만들어 놨습니다.
손자병법 같은 곳에서는 승리를 향하여 가는 길 중에 우직지계(迂直之計)라는 용병술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꾸 지름길을 찾는데, 때로는 우회로가 참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취지의 용병술입니다.
또 독일의 총리 메르켈 그 분이 아주 유명한 이야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먹입니다.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한 것인데 “혼자가면 빨리 가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말입니다. 멋있는 말입니다만 이 땅에서 길을 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신앙인은 길을 가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민은 길을 가지 않습니다. 선민에게는 길이 갑니다.
러시아의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처음으로 도입한 몽타주 기법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거의 4,000년 전에 요셉의 인생에 적용하고 계셨고,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어떤 길을 갈 것인가?’라는 길을 찾는 관심은 신앙인의 관심이 될 필요가 없는데, 신앙인들이 자꾸 길을 찾는 이유는 이 땅 위에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점을 마음이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마음에서 목표점을 없애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서 앞으로 이루시겠다는 목표점을 계시해주셨더라도 내가 마음에 목표점을 담을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목표가 있으시다면 목표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점을 향해 가는 길을 영화감독이 지중해 연안에서 길을 따로 찍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길을 따로 만들어 놓으시고 그 길이 우리를 지나가게 합니다.
우리는 스튜디오에 있는 차에 탄 사람들처럼 그냥 뉴욕 스튜디오 안에 멈춰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멈춰 있느냐?
내 마음에서 내 육체보다 가깝게 계신 하나님께 지금 붙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 그 하늘이 멀리 달나라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고 하는 곳과 다른 차원으로 겹쳐져있습니다. 그 하늘에 마음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마음이 하늘에 매달려 있으면, 육체가 가게 되는 길은 실제로 내 마음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애쓰고 힘쓰고 노력하고 수고하면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나를 갑니다. 나를 지나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 길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만들어서 촬영해 놓으신 길이 나를 지나가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오늘 본문의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보디발이 바로 왕의 친위대장이고, 바로 왕에게 직접적으로 위험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을 자기 집에서 관할하는 지하 감옥에 가뒀습니다.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오해로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친위대장의 감옥이므로 왕궁에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그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이 들어가 있는 감옥으로 바로 왕에게 포도주를 따라 올리는 술 맡은 관원장과, 바로가 먹는 음식을 만드는 떡 맡은 관원장이 바로의 미움을 사서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이 꿈을 꾸었습니다.
9-11절에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6-17절에 “떡 굽는 관원장이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꿈을 꾸고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이 두 관원장이 근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요셉이 묻자, 8절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소통의 현재진행형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우리가 어떤 느낌을 받느냐?
이들이 이 꿈을 꾼 것이 꿈을 안 꾼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꿈을 꾸었거나 안 꾸었거나 사흘 뒤에 바로의 생일날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될 것이고, 떡 맡은 관원장은 목이 잘려 죽을 것입니다.
꿈 때문에 복직이 된 것이고, 꿈 때문에 죽은 것입니까? 상관없는 거예요.
심지어는 그 꿈을 꾸었어도, 그 꾼 꿈에 대해서 요셉이 해석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거예요.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의 꿈이 복직하는 꿈이라는 것을 몰랐어도 복직을 했을 것이고, 떡 맡은 관원장이 자기가 사흘 뒤에 목이 잘릴 것이라는 것을 몰랐어도 목은 잘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꿈을 꾸었거나 안 꾸었거나 두 관원장의 인생길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꿈을 꾸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예요. 꿈을 꾸어서 근심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길은 그들의 꿈과 관계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꿈을 꾸었다고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근심하던 차에 요셉에게 말해서 해석을 해주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입장에서는 길몽으로 해석이 되고, 떡 맡은 관원장의 입장에서는 흉몽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러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엉터리라고 그랬을지도 모르겠고, 술 맡은 관원장은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나를 미워해서 여기 가뒀는데 사흘 만에 복직이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었고, 떡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해몽대로 죽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입장에서는 요셉의 해몽의 능력이 각인되었고, 요셉이라는 이름이 기억된 것은 맞습니다. 단지 요셉이 부탁한 대로 바로 왕 앞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몽할 사람들이 없을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이 2년 전의 요셉을 기억해냅니다만, 그 마음속에 요셉이 각인 된 것은 꿈을 해석한 지금입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꿈을 해석했고, 그 해석을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인 거예요. 그대로 다 진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을 해석하게 됨으로 술 맡은 관원장의 마음에 요셉의 이름이 기억된 것뿐입니다.
이것 말고는 이들의 인생길에서 꿈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거예요.
이게 뭡니까?
너무 의도성이 물씬 풍기는 하나님의 길 만들기 아닙니까?
요셉의 삶이 진행되어야 될 길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꿈과 해석인데, 완전히 요셉을 위해서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술을 따라 주는 자였고, 바로가 술을 마시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요셉을 심으신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으로 가서 길을 다 촬영해서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연결을 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길을 따로 만들어 놓으시고, 그 길이 요셉 앞으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요셉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떠돌이 히브리 부족의 열한 번째 아들이 대 왕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길을, 하나님께서 지중해 연안 길을 찍듯이 형들로부터 팔려가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대로 다 찍으셔서 요셉에게 길을 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길을 가게해서 총리 자리가 요셉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요셉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거예요.
요셉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왜 성경은 꿈 이야기로 시작해서 꿈 이야기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꿈을 내가 꾸거나 해석하거나 전부 하나님과의 소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남의 꿈까지도 내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준 꿈의 의미를 나에게 허락하실 때에 가능한 것인데, 하나님과의 소통이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재밌는 언어유희가 숨어 있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소통을 현재진행형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갔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에 왜 괴로움이 없겠습니까?
당연히 괴로움이 있죠.
그 괴로움이 어떻게 오늘 본문에 반영되어 있느냐?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길몽으로 해석한 뒤에 14절에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라고 합니다.
그 힘든 감옥생활 중에서 마음을 붙인 곳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고, 소통을 현재 진행형으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통이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꿈을 주시면, 그 꿈을 조금도 주저함과 자제함 없이 내뱉어 버립니다. 그 내뱉음 때문에 형들이 화가 나서 “꿈꾸는 자가 온다.”라고 하며 노예로 팔아버린 것 아닙니까?
오늘도 떡 맡은 관원장에게 꿈 이야기를 할 때에도, 19절에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합니까?
이게 바로 소통을 현재진행형으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냉담하고 무자비하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길한 것이든 흉한 것이든 주저 없이 내뱉어버리고, 반응이 일어나면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계속 길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단, 요셉이 한 일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소통을 현재진행형으로 유지했고, 소통 중에 주어지는 정보를 주저 없이 발설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저 없이 발설하는 바람에 노예로 팔렸고, 주저 없이 발설하는 바람에 떡 맡은 관원장이 사흘 뒤에 자기 목이 잘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있었고, 술 맡은 관원장은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한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있었기 때문에 요셉의 이름이 더 깊게 각인이 된 것이죠.
복직되어서 일이 바쁘고 자기 코가 석자라서 바로 왕에게 잘 보여야 될 판이라 요셉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던 요셉을 2년 뒤에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지금 길을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길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길이 자기가 알아서 나에게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뉴욕 스튜디오에서 멈춰 있는 차 속에 탄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보좌에 앉으신 우리 아버지이자 우리의 주님이 계시는 하늘에 마음을 드립니다. 십자가에 마음을 붙박이 시켜놓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단위가 있는 물건처럼 하나가 아니잖아요. 계속 생성되는 것이 마음입니다. 계속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계속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의 발걸음을 떼고 세상에서 죽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람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럼 세상은 어떻게 합니까?
몸이 있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따로 만들어 놓으신 길이 나에게로 지나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업하다 길이 막혔습니까? 빚은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데 경제적으로 뚫을 길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마세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경제문제가 있는 이 세상의 삶의 환경에 대해서 죽고 마음을 하나님께 매달아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만드십니다. 만드신 길을 몽타주 기법으로 나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오늘 두 관원장이 꾼 꿈을 생각해보세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꾸었으나 안 꾸었으나 마찬가지이고, 해석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사람을 위해서 꾼 꿈이 아닙니다.
요셉의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두 사람에게 꿈을 꾸게 하신 겁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신 것이고. 요셉은 주신 지혜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좋아하거나 말거나 내뱉습니다.
그로 인해서 길이 자꾸 만들어져 가면서, 형들은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떠돌이 히브리 족속의 열한 번째 아들이 대 왕국인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길은 세상에 없는 길입니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찾듯이 있는 길을 잘 찾아가면 총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이건 하나님의 억지입니다. 엿장수 마음대로 하듯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임의대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하나님께 매달려 있으니 요셉의 육체가 있는 이 땅에서 그 길을 흘려보내시고 계십니다.
지중해에 가서 찍은 길이 계속해서 지나가는 것처럼, 요셉은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동안에 계속해서 그 만들어 내신 길이 보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길을 찾습니까? 길을 하나님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언어유희가 있다고 했는데,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려서 소통의 현재진행형을 유지하고,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의 내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언제나’라는 말은 영어의 Always입니다. 앞에 Al을 빼면 ways 즉, 길입니다.
언제나 하늘에 매달려 있으면 길들(ways)은 계속 나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만드신 몽타주 기법에 의해서 길이 나를 지나가게 되어 있어요.
왜 내가 힘들게 애쓰며 길을 갑니까?
요셉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동안에, 총리되겠다고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못할 일을 하나님의 손으로 주물러서 요셉 앞으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이게 우리 선민들의 사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몽타주 기법으로 우리의 길을 다 따로 만들어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말고, 길을 가지 마세요.
어디로 가겠다는 것이고 어디서 길을 찾겠다는 것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길을 찾으려 하고 지름길로 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름길도, 우회로도 찾지 않고 매달려 있으면 됩니다. Always(언제나) 하나님께 매달려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있으면 그 속에 길들(Ways)이 있어요. 만들어 놓으신 길들이 다 나를 지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길을 찾아 떠나는 자들은 선민이 아닙니다.
‘길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는 자세가 선민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나는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께 붙여드리면 됩니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길을 따라서 내 마음이 하나님아버지께로 가서 붙어 있습니다.
하늘에 가는 길만 붙잡고 있고, 하늘에만 매달려 있으면 이 땅에서의 길은 하나님의 몽타주 기법에 의해서 나를 지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길 떠나는 자들도 아니고 길 가는 자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따라 하늘에 매달리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음이 매달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최선의 지혜와 능력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으로 만들어 놓으신 길들이 우리를 지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