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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산소
밭에서 이삭을
룻 2:1-7
김삼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베들레헴에 살다가 흉년을 만나자 모압 지방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모압 땅에 가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을 잃게 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갓 결혼한 두 아들까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때 맏며느리인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였던 룻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은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이삭을 줍던 밭의 주인인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삭 줍던 여인이 주인의 아내가 되고, 슬픈 여인이 한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이나 절망과 재난이 우리 성도들을 가로막을지라도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어떤 장애물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고 만군의 하나님 창조자가 만드신 온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룻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슬픈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교회는 밭입니다.
이곳은 이삭을 줍는 곳입니다. 기도의 이삭을 줍고, 은혜의 이삭을 줍고,
말씀의 이삭을 주우러 나오는 곳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은혜를 받습니다. 이삭을 주우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자에게는 이삭을 통하여 문제가 해결됩니다.
룻이 이삭을 통하여 보아스를 만나게 되듯이 우리는 이삭을 통하여 부유한 삶으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라도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못난 채로 나오고, 죄 지은 채로 나오는 것입니다. 답을 교회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모든 사정을 아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 의 손길을 펴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면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새벽제단을 쌓으면
쌓을수록, 무릎을 꿇으면 꿇을수록 주님과 우리 사이는 가까워집니다. 열매를 거두는 날이 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에게는 언제나 좋은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를 잊어버리십시오. 미래를 이야기하십시오. 성공하는 인생,
발전하는 국가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명성교회목사
군대로 계수된 자들입니다
민 1:1-4
김재남
현대인에게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잃고 사는 데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깨우쳐 주십니다.(3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실패한 이유가 있다면,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군대라는 점을 잊은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게 불러내실 때에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출12:17)
오늘 본문 말씀 중에 “군대”라는 단어는 원래 “싸움을 위하여 조직화된 군인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이 조직화된 군인의 모습을 민수기에는 각 지파대로 계수함과 함께 깃발아래 모이게 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장) 그러므로 대단한 훈련과 군인정신이 요구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결단코 구경꾼이나 여행객이나 순례자나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의 군대다우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전의 것을 벗어버려 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벗어야 할 것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가졌던 열등의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출애굽할 때에 은금보화를 가슴에 달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군중들 앞에서 보인 것이 무엇 입니까?
바로 열등의식을 드러낸 일입니다. 정탐꾼 10명은 그저 열등감에 사로 잡혀서, 그 땅의 사람들은
아낙자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메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나발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의 양각나팔이 되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14:9) 하나님은 갈렙의 이러한 담대함과 그 열심을 보고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민14:24) 여기서 ‘마음’ 은 히브리어 원어에 ‘영’이란 단어를 씁니다. 즉 영적으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을 지닌 자처럼 당당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이기에 영적 도전과 싸움이 따릅니다만, 이 영적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에게 담대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1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합시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마 4:18-25
김창인
1. 만남의 지경 (18-19)
평생 바다에 나가 배만타고 고기만 잡아야 했던 어부들에게 예수님은 다가가셨고 친히 불러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참된 만남이 없는 경우를 봅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만남에서 시작이 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참된 만남은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성부 성자 성령을 날마다 구체적으로 만남으로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해 질 수 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삭개오가 만났을 때 그는 변화되었고 새로운 삶을 즐기며 살수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그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만남의 지경이 넓어질 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2. 생각의 지경 (20-22)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인 다운 생각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생각의 지경이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이 그물 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거기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이었지만 그들은 더 넓은 세상을 맛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 생명을 소유하게 된 사람은 이처럼 생각이 넓어지게 됩니다. 무엇이 생에 있어서 더 우선이 되어야 하고 값진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의 지경이 넓혀질 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삶의 지경 (23-25)
신앙인이 예수를 믿지 않을 때와 믿고 난 뒤의 삶은 분명히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삶의 변화를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천국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고침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 의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치유된 삶이 그 들 앞에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일로 인하여 제자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났다고 하면서도 그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 삶의 지경은 전혀 넓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 처럼 삶의 지경이 넓혀질 때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광성교회목사
기도로 이긴 싸움
에 4:13~17
장성규
형태는 달리하지만 인류는 계속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대표적 싸움은 정보 전쟁, 경제전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싸움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적 전
쟁, 영적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이 전쟁의 대상을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혈과육이란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쟁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적입니까? 세가지입니다. 정사와 권세입니다. 이것을 악한 정부, 악한 권력을 뜻합니다.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입니다. 그들은 곳곳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불의한 기업가들, 나쁜 국회의원이나 교사들, 조직 폭력배, 부패한 관리, 악덕상인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불의와 악독이 가득합니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입니다. 사단, 마귀, 귀신들이 그들입니다. 그것들은 화해하고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의 적들과 싸울 때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본문 말씀에서 그 답을 주십니다. 본문은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만의 음모로 파멸되기 직전 모르드개와 에스더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건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싸움에서 취한 에스더의 행동입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에스더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1. 모르드개와 동족들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모르드개로부터 하만의 음모를 왕 에게 보고해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은 에스더는 “나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비록 왕후이지만 왕이 부르지 않을 때는 왕에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열게 하실줄 믿었습니다.
2.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3. 기도를 끝낸 후에 행동했습니다.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마가 11:24)는 믿음 대로 믿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매달릴 뻔한 나무에 하만을 달게 했고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도로 이긴 싸움입니다. 우리도 모든 싸움을 기도 로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로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면목교회목사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에4:7-17
김재남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책 옆을 보면, 금분으로 칠해져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어떤 모양
을 내기보다도 실용적인 면을 고려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속지 옆면들을 금분
으로 칠해두지 아니하면 얇고 얇은 종이가 끝이 말려 들어가 사용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금분이 밖에서 지켜 주듯, 무엇이 우리의 삶을 지켜 줄 수가 있습니까?
이솝의 우화가운데 농부의 딸에게 구혼한 사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사자가 찾아
와서 농부에게 딸을 달라고 합니다. 농부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전전긍긍합니
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딸을 자네에게 주고 싶어도 자네의 이빨과 발톱을 보면 우리 딸이 자네에게 가려
고 하지 않을 것일세. 그러니 그것을 모조리 뽑고 오면 딸을 자네에게 줌세!” 얼마 후
에 사자가 이빨과 발톱을 죄다 뽑고 농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곤봉으로
그 사자를 정신 없이 때려잡았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일들도 많습니다. 일제의 급격
한 우경화로의 선회가 그것입니다. 역사를 왜곡시키려 할 뿐만 아니라 지나온 날의 잔학
상을 은폐하고, 심지어는 미화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
까? 일제의 선하지 못한 이런 모습들 앞에서 어리석을 정도로 미력할 뿐입니다. 100여
년 전, 구한말 우리 조상들이 좀 하나가 되고. 선견지명이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되라고 명하십
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러합니다. 유대민족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이방 땅에서 삽
니다. 바벨론이 망하고 대신 바사의 아하수에르왕이 천하를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2인자인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대민족을 몰살시키려 합니다. 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에게 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에 미색을 겸비하여 왕후의 자리에 있던 에스더의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
하심 속에서 하만이 처형되고, 죽을 뻔한 유대민족은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 맛소라 사본 중에는 에스더서가 가장 많은 사본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춘향전만큼이나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에스더서인데, 거기에는 동족을 위기 가운
데 구출한 사람,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신앙적 결단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동산교회목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시 81:8-16
김창인
1. 말씀 공부하기를 원하십니다 (8-9)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
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행17:11-12). 한마디로 성경공부의 결과가 믿음에 큰 도움이 되는가 하면 절
대적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열심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공부 중에
는 하나님 공부가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사람을 알고 자연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공부를 하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2. 입을 넓게 열기를 원하십니다 (10-12)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넓게 열어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
아나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4:48).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시 43:21)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는 것이 구속함을 얻은 백성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부르
기 위해서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크
게 외쳐 간구하는 자에게 그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
로 하나님은 입을 열어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3. 행동 신앙하기를 원하십니다 (13-16)
한번은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
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 7:21). 입
술의 교인은 쭉정이 교인으로 구원과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즉 생활
신앙하는 자가 구원의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을 행동화 하기를 원하십니
다.
본문에 보면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
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감독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
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약 1:22). 이처럼 하나님은 믿는 대로 행동하기를 원하
십니다. 행동하는 자에게는 만족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광성교회목사
건강한 믿음
빌 3:1-9
류철랑
우리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한 믿음을 유
지할 수 있을까요? 먼저 삼가 할 것들이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2절) 개는 건강한 믿음에 전염
병을 옮겨주는 거짓 교사를 말합니다. 믿음은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말다툼도 삼가 해야 합니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
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합니다. 또 영적지도자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
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주의 종들에 대
한 존경심과 순종하는 마음을 통해서 건강한 믿음을 유지하게 됩니다. 삼가 조심하여 영
적 건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둘째, 배설물을 배설해야 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알렉시스 케럴은 세포에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배설물을 계속 제
거해 주었더니 조직 세포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배설물을 방치
해두니까 부패해서 죽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율법대로 낳은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 이스라엘 열 두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라는
것,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라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8,9절). 우리
들에게 있는 잘못된 습성, 삐뚤어진 성격을 버립시다.
셋째, 성령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먼지투성이인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나드향유 한 옥합을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요12:1-3).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희생하여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
니다. 봉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
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0-11) 봉사 할 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는 것은 곧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봉사는 결코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부천동광교회목사
두 문, 두 길, 두 종말
마 7:13-14
장성규
주님은 본문에서 “두 문, 두 길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넓은 문, 넓은 길로 가지말
고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결과 때문입니다.
1. 먼저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습니다. 넓은 문은 활짝 열린 문이요 누구나 다 들어가
고, 무엇이든지 들고 들어 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보일 듯 말 듯한 조
그마한 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치 바늘 문 같이 작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빈손
으로만 들어가지 안으면 안되는 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쉬운 넓은 문을 택하지만 주님
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넓은 문이 쉽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도 그 문은 생명의
문이 아니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께서 들어 가라시는 좁은 문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문이 좁은 문입니
다. 이 문은 생명의 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
다. 회개하는 삶이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제일 먼저 요구받는 것이 회개
입니다. 회개는 참된 신앙의 관문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회개하는 일이란 그리쉽지 않
습니다. 육신적인 자기를 죽이는 일이 좁은 문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죽이는 작업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를 죽여야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사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2. 이제부터 넓은 길, 좁은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넓은 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길은
책임적인 신앙생활을 가르킵니다. 제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지금은 좋지만 멸망으
로 가는 길이고 좁은 길은 지금은 어려워도 생명과 영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
님은 좁은 길로 가라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비록 좁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영
생의 길이면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신
앙의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습니까? 우선 목표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목표가 있
는 길과 없는 길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목표를 향해서 갈 때만이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해야합니다. 술과 담배 노름과 같은 것을 끊으라는 것
은 극기와 절제 생활을 하라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잘 믿으려면 이런 좁은 길을 걸어가
야 합니다.
면목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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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도 아버지 집, 늙어서도 아버지 집
눅 2:41-51
김삼환
우리는 너무 험한 세상에서 어렵고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는 길을 잃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평생동안 길을 잃지
않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잃어버린 길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서 인간이 잃어버렸던 축복을 다시 받게 하고 회복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
님의 집, 곧 교회가 가지고 있는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때 이미 성전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
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이 사흘동안 집으로 오지 않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다가 그를
만난 곳은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
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
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인 줄 믿습
니다.
현대인들이 모든 분야에서 방황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4천년 동안 그렇게 무지하고 우상 숭배하던 우리 나라는 예수를 믿어 문화가 발달하고
선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
의를 이루게 되고 그밖의 여러 가지로 지금 우리 나라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어디
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주의 교회가 이 땅 방방곡곡에 세워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 민족 위에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은혜 받는 집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집이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집입니다.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이 교
회를 통해서 형성됩니다. 행복한 가정과 좋은 국가를 이루는 모든 은혜가 교회를 통하
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와 우리 사회는 심히 병들어 있습니
다.
어린아이들부터 노인까지 모든 계층이 다 썩어서 어떤 방향도 없고 목표도 사라졌습니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번 기도의 불을 붙이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아버지 집에만 나오면 길이 열립니다. 민족이 삽니다. 가정이 살고 기업이 일어납니
다. 어려서도, 늙어서도 아버지 집에 나아가는 믿음으로 설 때 우리의 가는 길이 시온
의 대로처럼 열려질 줄 믿습니다.
명성교회목사
복중의 복
계 2:1-7
김창인
1. 인정의 복 (1-3)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를 잘 보살피시는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편
지하면서 복 중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내가 알고(2절) 아노라(3절)”고 하셨습니다. 말을 바꾸면 “내가 너
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인정하셨
고 또 악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고 끝까지 참고 열심한 것을 인정하셨습
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인정받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2. 깨달음의 복 (4-5)
우리에게 충고도 하고 권면도 하여 깨우쳐 주는 것은 큰 복입니다. 자녀이기에 충고와
권면과 책망을 합니다. 그 목적은 깨달음을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
구가 권고나 책망을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충고와 동시에 책망을 합니다. 이로
인하여 에베소 교회는 무엇이 잘못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첫사랑을 잃었으니 속
히 회개하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달음이 복 중의 복입니다.
3. 제자의 복 (6-)
사람은 누구를 닮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석가를 닮는 자는 석가의 제자가
되고 공자를 닮는 자는 공자의 제자가 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일
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 가는 자입니다.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인들은 니골라당의 행위 즉 패거리 짓는 일을 미워했는데 예수님
도 그것을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
하는 것이 예수 닮는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됨이 복 중의 복입니다.
4. 승리의 복 (7-)
군사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목적입니다. 패하는 것은 수치와 치욕입니다.
본문에서 “이기는 그에게“라는 말씀은 군사적인 용어로서 계속적인 승리를 의미합니
다. 성도는 예수님의 군사로서 마귀의 유혹과 핍박에 맞서 계속적으로 승리해야만 합니
다. 승리가 복 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겁니
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말
씀이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광성교회목사
진정한 예배자들
시 99:6-9
류철랑
진정한 예배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진정한 예배자들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실천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말씀의 내용만 듣지 말고, 말씀이 일으키는 에너지의 파동을 잡는 영적인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예배는 말씀을 듣는데서 머물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예배자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진정한 예
배가 완성됩니다.
둘째, 간구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진정한 예배자들은 믿음으로 간구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예배에는 말씀 선포가 있고 기
도가 있습니다.
말씀 선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이고,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시간
입니다. 예배자가 진정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 위에서 그들의 기도를 들
으십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사무엘은 민족의 문제를 놓고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그
들의 기도가 백성들의 재앙을 막았고,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면할 수 있었고, 모세
가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여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
습니다(출17장). 모세, 아론, 사무엘은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진정
한 예배자의 모델입니다.
셋째,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6,9절) 우리가 하
나님을 높여 찬양하고 경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말씀이 귀하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 감
사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말씀을 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힘을 다해 찬
양합시다.
시편22:3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이 있는 곳에 계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찬송을 했습니다.
그의 찬송은 옥터를 뒤흔들고 쇠사슬이 풀어지게 했습니다. 찬송이 있는 곳에 하나님
이 함께 계심을 보여준 것입니다(행16장).
내가 어둠 속에 있고 핍박과 시련 중에 있을찌라도 주님이 내 곁에 계심을 느끼며 찬양
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찬송합시다. “너 선한 마음 가진 자 다
주를 찬양하라!”
예배 때마다 말씀을 들으며 새 힘을 얻읍시다. 말씀을 실천하여 축복을 받읍시다. 구하
는 것을 받으며 삽시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신령한 예배자들이 됩시다.
부천동광교회목사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장성규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다가 양문 옆에 있는 베데
스다 라는 간헐천 행각에 누워있는 한 환자를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38년이나 된 환
자로서 그 간헐천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누군가가 거
기까지 갔다 놓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
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환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서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했습
니다. “낫고는 싶은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낫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입니
다. 그렇게 대답하는 환자에게 주님은 세 마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환자는 그 명령
을 좇음으로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 세 가지 명령이 무엇입니까?
1.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구를 붙들고 일어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서 붙들어 주신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부축해야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나라, 네 믿음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 중에도 항상 의존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이끌어 주어야만
되는 사람은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병이 낫지 않습니다. 자기의 병을 진정으로 고치
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일어나야 합니다.
2. 네 자리를 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자리는 이 환자가 이제까지 깔고 있던 자리입
니다. 이 자리는 자기가 병자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자리요, 다른 사람의 도움
을 기다리던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만 누워있으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돕던 자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건강하게 된 자로서 주체성 있게 살아라. 책임적으
로 살아라’ 라는 말씀입니다.
3.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움직이라, 활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병이 나
았으니 이제는 건강한 사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하라는 말씀입
니다. 움직이는 사람, 일하는 사람은 건강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
해서 활동을 해야 합니다. 신앙의 건강을 위해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서, 전도하기 위해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38년된 환자는 예수님의 이 세 마디 말씀에 순종하여서 낫고 돌아갔
습니다.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면목교회목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6-8
지은재
한국교회는 90년대 종말론과 관련하여 심한 몸살을 앓은 일이 있습니다. 돌연한 종말
을 목표에다 놓고 신앙을 부추기면 세상을 등지기 마련이고 현실도피적인 형태로 나가
기 일수입니다. 성경적 종말론은 이 세상을 끝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허락될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는 것이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
라에 불러들일 하나님의 백성을 회집하는 바로 그 일에 현실적인 관심사에 되어야만 합
니다. 이것이 내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주님의 마지막 당부에 부응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종말 교회가 증인이 되는 구체적인 내용을 ‘마28:19-20’에서 세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제자를 삼으라/세례를 주라/가르치라’라고 하는 세가지 대 위임을 받고 있습니다.
* 제자 삼는 일이 사라진 교회
‘제자를 삼으라’ 라는 말은 증인이 되는 구체적인 일입니다. 옛날에는 사제지간이 된다하면 부자지간의 관계와 버금가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스승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살면서 평생을 같이 하면서 사상과 삶을 학습해야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도와 제자를 삼는 일은 상당한 의미상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선포행위가 전도라면 제자 삼는 일은 내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상대방을 설득하라는 책임까지가 포함된 강력한 일, 집요하고 더 끈질긴 행위인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바라는 신앙형태가 뭡니까? 교회 생활에 참여치 않고 신앙생활 하자는게 아닙니까? 이 교회나올테니 부담갖게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과거 무슨일을 했는니 심방 할테니 이름, 주소 적고 여전도사 보내어 심방하게 하고 그런일은 딱 질색입니다. 소위 ‘묻지마 교인’들의 경향성에 목회자도 부화내동한다고 하면 심한 얘기로 ‘공생하는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화 작업-스승의 삶이 내 속에 어떻게 용해되고 스며들어 다시 화육(말씀이 육신 되듯)의 과정으로 리모델링 되어야만 하는데 이런 일이 차츰 사라지고 기독교문화인이나 기독교 관광인들로 전락하는게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목회자의 뇌리 속에 스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여!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되고 나와 관계한 모든 이들로 하여금 제자화가 이루어지도록 종말교회로서 목숨을 걸고 증인이 되실 분들은 여기 없습니까? 제자를 삼는 일- 바로 예수 증인이 되는 일은 우리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 나라 앞에
발가벗고 서는 일입니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알몸으로서는 작업이 일어나야 합니다.
* 신자와 불신자의 확실한 차별을 선언하자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신자도 세상속에 살아가는데 불신자와 유달리 행동할게 뭐냐? 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화 작업을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그 나라(하나님 나라)가 전부인 줄 알도록 인식해야 하고 그들이 신자들을 대하면 두려움과 경외감을 갖도록 하는 ‘차별화’작업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교회는 나만 제단이라고 하는데 목회자는 수십만이 양산되고 있고 무인가 내지 초인가 신학교(인가를 초월한다고 하는 자들)를 책임없는 목회자들이 경쟁적으로 신학생들을 쏟아내는데도 이런 차별화 작업을 귀하게 받드는 목회자들은 별로 볼 수 없다는 아픔이 현실 목회자인 제게도 있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땅의 것을 전부인양 알고 살아간다. 목표를 땅에 것 배부른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저력의 신은 배 소위-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크리스챤은 뭡니까? 세상 사람들의 목적과 목표에다가 플러스 알파입니까? 그 플러스 알파가 예수의 권능과 권세, 성령충만입니까? 도무지 차별화가 사라지고 있는데 오늘 교회의 모습이라는 너무 비관적입니까? 유대인의 철저한 신앙은 그들만의 독특한 ‘의식과 칙’이 있었기에 유대주의가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물론 유대주의라는 형식, 바리새파의 형식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식이 없으면 내용도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 것을 꼭 염두에 둬야 합니다. 성수주일하기, 십일조 생활화, 새벽기도 사수, 성경읽기 생활기록표 만들기 등등 이런 기본적이고도 원색 적인 형식을 무시해 버린다면 신앙의 내용/복음의 내용도 사문화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 증인으로서 목숨걸 자들이여 나서자
종말교회는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 ‘증인’이라는 말은 영어의 martyr입니다. martyr라는 말은 순교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내가 믿는 진리 내 모든 과거의 것을 버리고 예수 앞에 항복한 그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 는 목숨까지도 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전투야말로 심각한 투쟁이요 자기 몸부림, 고민입니다. 이 심각함이 없어졌다는 것은 교회의 병입니다.
초대교회는 제자삼는 일과 증인으로 나서는 일 - 곧 선교의 일에 최선을 쏟았는데 그것이 제1 우선 순위였는데 그것이 교회의 존재함의 1차적인 설명이었는데 교회들이 정말 목숨을 걸고 우선 순위로 생각하고 있는가? 반문해야만 돼요!
우리는 증인으로서 목숨을 모두 걸고 나서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나서면 죽는 일 같지만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이잖아요!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을 내 생활 현장에서 구현하는 종말교회 되시길 기도합니다. 고신 일산백석교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