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자고 일어나면.. 숨 고를 사이도 없이 터지는 숨이 턱. 턱 막히는 기가 막히는 뉴스..
그런 뉴스를 보다보면..
이것은 필연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바이든의 불출마로 헤리스가 새로운 후보가 되면서.. 꺼져가던 촛불이 횃불로 바뀐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도 볼만했지만..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도 흥미진진했으니.. 특별히 정봉주 후보 최고 위원 탈락이 눈에 띈다.
윤석열이 일으키는 사건에 비하면 난쟁이만한 그리 커다란 사건이 아니지만..
정봉주와 친한 사이라는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이 더불어민주당을 매우 크게 흔든 사건이었고..
전당대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지나고 보니.. 전당대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정 후보가 민주당 최고 위원이 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처럼 보였다.
그 이유는 민주당 안에서는 이미 최고 위원에 원외 인물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인정이 있었기에..
설사 득표수로 다섯 명 안에 들지 못한다 해도 그를 지명할 것이라는 게 바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랬는데 결과는 정 후보는 40여 년을 지켜온 민주당을 떠나야 할 만큼 최악이 되고 말았다.
정치의 천재라는 소릴 듣던 그였는데.. 그것은 그가 모르고 있던 그의 운명이었던가..
전당 대회에 대한 평으로는.. 그와 친하다는 자의 입빠른 소리 보다 그에 대응하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오만한 실수라 하는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기에.. 평소의 그가 아닌 어리석은 행동을 연발했다는 것인가..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말이 빛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일 일이 우연이라면 트럼프나 윤건희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고,
필연이라면 천기를 보는 자들이 활개를 칠 것이다.
요새 유튜브에는 역술인[무꾸리]의 동영상이 엄청 뜨고 있다.
그들은 자신 있게 말한다.. 올해 안에 누가 죽을 것이다.. 엄청난 전염병이 유행할 것이다 등등..
보통 사람들의 바람에 은근히 기대어.. 그리고
내일에 대해 불안은 점술에 의지하여
미래를 결정하려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필연은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과 연결되고,
우연은 유물론 또는 과학과 연결시키는데.. 그것도 100%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과학은 잘 모르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려는 학문이 아닌가.. 인과의 원리를 기반으로..
그에 반해 불교는 이미 정해져 있는 필연이 아니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우연은 더욱 아니다.
나의 미래는 나의 생각, 말, 행동인 행위와 조건[환경]에 의해 정해지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행위와 조건에 의해 정해진다는
인연론을 가르친다.
필연론이나 우연론이라 해도 앞에서 말했듯이
완전히 신에 의해서만 결정되거나 전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닌 게..
우리의 행위가 미래에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럼에도 인연론은 필연론의 신이나 우연론보다 훨씬 더 인간의 의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한 보통사람[서민, 시민]의 행위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대의민주주의란 간접 민주주의라 하듯.. 시민이 대표를 뽑아 대표가 권리를 행사하는 제도다.
그런데 대표로 뽑힌 자들이 뽑아준 시민의 뜻과 달리.. 자기들 뜻대로 정치를,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그것을 막는 제도가 탄핵이다.
어느 누가 탄핵이 되는 것은 그가 어떻게 행위를 했느냐에 대한 국민의 선택이다.
만일 탄핵되는 고위 공무원이 있다면 그것은 필연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필연이나 우연이 아닌 그가 행한 업의 결과가 된다.
그것이 인연론이다.
그런데 근본 불교는
'나'라고 할 그런 나가 없다[무아]고 하듯이..
나의 언행과 조건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다는 인연론이 아니다.
필연이나 우연 그리고 인연을 다시 보면..
필연론이란 나를 전제하고 그 나에게 벌어질 일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요,
우연론은 전제하는 나에게 벌어질 일이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연론은 나의 의지와 조건인 연이 결합해서 미래의 일이 결정된다는 것으로 그것 역시 행위의 주체인 나가 있다.
그러면 무아라면 무엇이 원인이 되어 결과를 일으키는가..
업(業)이 원인이고, 업보가 결과다.
업이란 6내입처와 6외입처가 만나 생긴 5온이 짓는 행위다.
이때 6내입처는 마치 나처럼 여겨지지만 그 나는 항상하는 게 아닌.. 행위를 하고 나면 머물지 않고 마술처럼 사라진다.
모든 비구들아, 보는 자(안입처)는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자(眼)는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 소멸하고 마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작자(作者, 나)는 없다.
이 음(陰)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잡. 335. 제일의공경 에서>
경 내용을 조금 더 설명해 보면..
본다는 것은.. 보는 자[안입처]는 보이는 대상[섹입처]을 만나 생기는 인식인데..
보는 행위는 분명 있지만 보는 자는 존재가 아니다. 즉 보는 나는 없다.[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
그렇게 볼 때 보는 자는 나타나지만 보는 행위가 끝나면 보는 자는 사라진다.
그렇게 보는 자는 보는 행위가 있을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기에 업이란 행위가 있고, 그 행위에 대한 업보도 있지만.. 행위를 일으키는 주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6내입처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나라고 여긴다.
해서 어제 보는 자와 오늘 보는 자는 같은 자로 여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사는 사회는 행위의 주체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공간이요 시간이다.
즉 업의 주체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럴 경우 필연이나 우연 또는 인연법을 생각하게 된다.
어째서 주체가 없다고 가르치는가?.
주체가 생기면 일체 괴로움이 그 주체에 생겨 머물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는 이유는 주체인 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완전히 괴로움을 멸하길 바라는가..
그러길 바란다면 주체인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깨치면 된다.
그것도 바라지만 일단 내가 사는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선함이 살아있는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면..
인연론에서 보듯 내가 우리가 되어 악행을 깨뜨리는데 앞장을 서야만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공짜로 얻는 자유는 없기에..
매일 전쟁 치르듯.. 추악한 탐욕으로 숨 쉬고 있는 이 사회가 징그럽게 느껴진다면..
행위하는 자를 나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라고 하는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유업보 무작자]는..
무아를 깨치려 나아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