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3장 1-11절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은 세 번의 유월절을 언급합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과 요한복음 6장 4절(“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55절(“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기록하고 있고, 곧이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으로 가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고(요12:1),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예수님께 향유 부은 사건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이때가 유월절 이틀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요12:12).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으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습니다(요12:24).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특별히 유대인의 관리로 있던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나게 말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에 이어 오늘 본문은 유월절 바로 전에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내용입니다. 일단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본문 앞에 있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지 않았다, 혹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것처럼 하자면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주를 따르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세하게 구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으로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생각과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생각이 같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기까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들었지만, 수없이 많은 표적을 보았지만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듣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들은 말씀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우리의 이해력에 따라 말씀을 깨닫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은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야지 만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오면서 그의 죽음 또한 가까워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뜻과 일치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고, 믿는다 하면서도 사람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조차 이 땅의 영광만을 생각하는 자들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은 무엇을 증거 하느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겁니다. 물론 이때 비로소 아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하셨을 때 하나님이신 성자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아셨다는 것은 몰랐다가 아신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실이 이제 실행의 역사로 다가온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냐? 유월절 전이라는 겁니다.
사실 유월절과 예수님의 죽음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는 출애굽과 관련해 애굽을 향한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과 관련이 있는데, 이 사건은 출애굽기 12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홉 가지의 재앙 이후 마지막으로 애굽 전체에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을 내리시기로 하셨습니다. 즉 애굽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 나아가 애굽 땅 자체에 대한 심판을 행사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규례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 규례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한자 표현을 써서 유월절, 즉 넘을 유(逾), 넘을 월(越)이라고 해서 넘어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본래는 죽어야 하지만 죽음에서 넘어간다고 해서 유월절이란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3절에서 그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중요한 것은 이 유월절 규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고전5:7 참조).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예외 없이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유월절 어린 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해 그 진노와 저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 이 유월절 의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본래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넘어가는 그런 놀라운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리고 이미 구약에서부터 유월절 의식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예표하기까지 하셨는데, 이런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셨는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보통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말할 때 유언의 성격이 있고 그런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고자 하셨다고 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죽음과 관련해서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님께서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까지를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죽음이 이러한 죽음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고 할 때 세상을 떠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을 실제로 아버지로 여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할 때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는 자들이 있고, 또 그분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하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에게만 돌아갈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죽음조차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단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은 경건한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죽음을 귀중히 보신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시116:15).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다른 표현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께로 가지 않는 자들은 영생이 아니라 영벌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알리고자 하신 사실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죽음이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1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자기 백성에 대한 마음이 한결같다고 하십니다. 가까이 있을 때만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사랑이 함께 있는 것과 동일한 사랑을 베푸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 주셨고, 그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멀리 계시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십니다. 어떻게 일하십니까? 그의 말씀으로, 그의 성령으로 일하십니다. 승천하셨지만, 그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지금도 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계십니다.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로 신성은 인성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분리할 수 없습니다. 칼빈의 성찬 이해에 따라 표현하자면 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함께 하는 것은 아니나 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친히 일하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로 오시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 제외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특히 이 말씀과 함께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어떻게까지 말씀하시는가?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나중에 보겠지만 여기서 깨끗하다, 깨끗하지 않다는 것은 중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가룟 유다에 대해 깨끗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가 중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중생하지 않았는가? 혹은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중생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베드로만인가? 나머지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자들입니다. 물론 외적으로는 제자들 모두가 배반하였으나 가룟 유다와는 달리 베드로의 경우는 회개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베드로의 경우 택자로 부르신 반면 가룟 유다의 경우는 유기지로 부르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중생의 은혜를 받은 것이고 가룟 유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회개는 이런 측면에서 선택의 열매로 있을 뿐인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3장 18절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룟 유다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택한 자가 아닌 자로,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떡을 먹지만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로 사용될 뿐입니다(시41:9 참조). 잠언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자신을 위하여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지으셨던 것입니다(잠16:4, 한글번역 수정).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기 때문에 가룟 유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따지기도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를 불러 사도로 세우셨지만, 그리고 사도로서 수많은 말씀을 듣고 주께서 주신 능력으로 이적도 행하였지만, 그 스스로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향하여 다음의 말씀도 하셨던 겁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눅2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작정된 대로 간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위해 누가 사용되도록 작정되었느냐? 가룟 유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무엇을 말하느냐? 인자를 판 자, 바로 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정죄의 원인이 작정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판 가룟 유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1절과 2절을 통해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배반을 통해 팔려가게 된다는 것이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주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일을 끊을 수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을 통해서도 잘 증거 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그 사실 때문에 환난도, 곤고함도, 박해도, 기근도, 적신도, 위험도, 칼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 인생에 있어 환난도 있습니다. 곤고함도 있습니다. 때를 따라서는 박해도 있습니다. 기근도 있고 적신도 있고 위험도 있고 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강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남달라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이요, 한번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그 사랑은 불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3절에서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녁 먹는 중에 아셨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아신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영원 전 작정하실 때부터 아셨지만 여기서 아신다는 것은 실행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아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시는 것을 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기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그 권세를 행사하시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죽음의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아셨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이 3절은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실 것인데, 그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셨는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나타내시고 죽음 이후 모든 만물을 다스림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본문 4절 이하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으로 그것을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분명 가룟 유다의 발도 씻기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가졌지만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 나간 것은 요한복음 13장 30절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발을 씻기실 때는 가룟 유다도 있었던 겁니다. 그럼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할 때 가룟 유다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로 있는가? 그리고 이런 내용을 통해 그리스도는 유기자까지도 택자와 다를 바 없이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신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9장 13절에서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 중생과 관련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만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가룟 유다에게 행하신 이 발 씻는 행위는 행위 자체는 있을지 몰라도 그 유효성은 받지 못하는 자로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 사람도 있지만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넘어집니다. 또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가룟 유다는 여기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주고자 하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는 것 자체보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이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것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 그것은 그의 죽음조차 그 사랑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을 통해서는 무엇을 교훈한다고 할 수 있는가? 택자와 더불어 유기자까지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9장 22절이 사실로 있다는 것을 증거 할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그러니까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유다가 이미 그리스도를 배신하기로 마음에 결정을 내렸을 때 이 발 씻김이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참을성, 곧 그처럼 사악하고 흉측한 배산자의 발을 묵묵히 씻어 주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유기의 원인은 분명 하나님께 있지만 그들이 정죄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악함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앞서 누가복음 22장 22절을 읽어드린 것처럼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데, 4절과 5절에 보시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여기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후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시자 그가 밖으로 나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성찬을 행하셨는데, 지금 저녁 잡수시던 자리는 성찬에 앞서 저녁 먹던 자리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매튜 풀 주석을 보면 베자의 경우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먼저 일반적인 저녁 식사를 하셨고, 그런 후에 유월절 식사를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저녁을 잡수시다가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을 발을 닦는 모습을 반복해서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는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는데, 6절을 보시면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쉽게 말하면 “어떻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을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얼핏 보면 겸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일반 사회에서 볼 때 칭찬 받을만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스승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소위 스승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버려둘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베드로의 자세에 대해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사건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분명 스승을 위하는 마음은 칭찬 받을 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앞섭니다. 그리고 그 뜻 앞에 순종하는 것이 주를 위하여 수없이 많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시는 것은 어떤 뜻을 가지고 하시는 일입니다. 특히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의 뜻에 대해 지금 베드로는 모르는 자로 있습니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 때문에 자기 뜻을 말하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자세여야 합니다. 혹은 모르기 때문에 무슨 뜻으로 행하는지 물어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8절 상반부를 보시면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을 정도로 완고함을 나타냅니다.
6절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이해 해 줄만하지만 8절과 같은 자세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심은 있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닌 겁니다(롬10:2 참조). 주를 따르면서도 주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만이 옳은 것인 양 그렇게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지만 내 뜻을 꺾지 않고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지만 내 것을 가지고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주를 따르지만 내 생각으로써 주를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시점에까지도 여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8절 하반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왜 발을 씻기시는지에 대한 이유는 저들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와 상관이 있으려면 누가 씻겨줘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씻겨주셔야 합니다. 내가 씻어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씻어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니 지금 육신을 씻는 것으로 말씀하시지만 그 뜻은 보다 높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죄에 대한 것입니다. 때문에 죄에 대하여 사람이 씻을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씻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너와 상관없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9절을 보시면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로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뜻을 자주 말하는 베드로였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10절 상반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시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 상관있는 자가 되는가? 그리스도께서 씻어주셔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단지 육신을 씻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좀 더 높은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바로 죄 문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이미 목욕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온 몸을 씻어서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을 중생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는다는 것은 그의 희생제사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말끔히 씻어 버림으로써 이것이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을 누가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죄 사함의 은혜, 중생의 은혜는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본래는 죄 아래 있었습니다. 깨끗한 자가 아니라 더러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때 온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모든 면에 있어서 순결하게 만드신다는 의미, 다시 말해 아무런 점과 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지배가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중심 부분이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의가 장악하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몸이 깨끗하나 발은 더러움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도 이 땅에서는 여전히 죄를 지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를 죄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그리스도 때문에 의인으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으면 살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발 씻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다만 그 일까지 누가 하시느냐?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명령을 받는 쪽은 우리이지만, 그리고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지만, 실제로 회개케 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가 너를, 즉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씻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사실을 씻는다는 표현을 통해 알리십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온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시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십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깨끗한 자, 의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에 우리가 한 일이 있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겁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왜 하필 발이냐? 칼빈은 발이란 우리가 날마다 이 세상과 접하면서 대하는 모든 욕망과 염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두 발을 딛고 살면서 죄에 물든다는 것입니다. 중생했을지라도 하늘이 아니라 여전히 이 땅에 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에 대하여 회개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까지도 주님께서 씻어주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종종 성화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리는 일들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화란 무엇입니까?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죄에 대해서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이것을 표현할 때 앞서 이런 말을 분명히 합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값없는, 즉 거저주시는 은혜의 사역입니다(제35문). 은혜의 사역, 즉 그리스도께서 친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1절이 있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백성의 온 몸을 깨끗하게 하셨는데, 발이 더럽다는 이유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해서 버리시지 않습니다. 점과 흠이 있다고 해서 버리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점으로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부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아니 앞서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을 경고까지 하십니다. 그런 경고에도 부인하게 되는데, 그런 심각한 죄를 범했다고 해서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십니까? 그런 경고가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마음에 부끄러움을 주시고 탄식함을 주십니다. 회개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후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만나 그 마음을 굳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연거푸 물으십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베드로를 굳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알리시는 겁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에게만 그 사랑을 주시겠습니까? 다른 사도들 역시 주를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의 공로로 우리 모두는 중생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주께서 행한 것을 거저 얻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원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지으면 삽니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시고 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시되 언제까지 사랑하시느냐? 중도에 포기되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런 일하심 앞에 우리의 마땅한 바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교훈을 따라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말씀을 따라 우리 자신의 죄를 살피고 회개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마땅한 자리로 항상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가 아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하반부와 11절을 보시면 가룟 유다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가룟 유다는 목욕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목욕한 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도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사도로써 주께서 주신 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낫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주님을 부르며 주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주의 백성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자로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은 왜 주께서 그를 택하지 않으셨느냐고 따지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런 내용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따집니다. 마치 하나님이 불의하기라고 하는 듯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9: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고 따지지만, 성경은 그때도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9:20)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죄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고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정죄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열어야 할 입은 유기자가 아니라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그 사랑을 나타내실 때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 은혜에 대하여 감탄과 감사로만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부분 더러운 발로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베풀고 계시는 겁니다. 어떻게 베푸십니까? 죄를 용서하심으로 베푸십니다. 본문의 내용처럼 더러워진 발을 씻기고 또 씻기시는 것으로 나타내십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과 감사로만 우리의 입을 열어야 합니다.
본문 앞에 있는 내용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믿지 않는 자, 믿어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