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응순(應順)이고 자(字)는 건중(健仲)인데, 박씨(朴氏)는 나주(羅州)에서 비롯되었다. 공의 증조 휘 임종(林宗)은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 휘 조년(兆年)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휘 소(紹)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는데, 3대가 추증된 것은 공의 귀(貴)로 인한 것이다.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사섬시 정(司贍寺正) 휘 사부(士俯)의 딸이다. [원문에는 정경부인에 追贈되었다고 하였는데, 1569년에는 반성부원군의 어머니 홍씨가 살아있었으므로, 죽은 사람에 붙이는 추증은 틀린것으로서 율곡이 誤記한 것이다.]
공의 가문은 대대로 미덕을 계승해 왔다. 공의 선친 의정(議政)이 벼슬아치들 사이에 명망이 있었는데, 권력을 쥔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아 합천(陜川)의 고향으로 물러나 세상을 떠났다. 공이 선대의 빛을 키워나가다가 크게 남을 경사를 받아서 우리 중전(中殿, 선조비(宣祖妃) 의인 왕후(懿仁王后))을 낳아 삼궁(三宮)의 대표가 되었는데, 박씨의 가문이 이때부터 더욱더 커졌다.
공이 태어난 지 3세에 공의 고모, 군수(郡守) 박수영(朴秀榮)의 아내가 자신의 아들로 삼아 길렀고 공이 9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외할아버지 홍정(洪正, 사섬시 정 홍사부)이 사문(斯文) 유조순(柳祖詢)을 초빙하여 공과 여러 손자들을 가르칠 적에 공이 게을리하지 않고 잘 배웠고 조금 장성하여 아우 참판(參判) 박응남(朴應男) 공과 같이 소선(笑仙)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유학할 적에 소선이 칭찬하였다.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공이 소선의 집에 이르렀다가 공의 형제를 보고 ‘사간(司諫)이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면서 감탄하였다. 양부(養父)가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할 때 공이 따라갔는데, 그 고을은 번화하기로 유명하였다. 공이 기생을 좋아하지 않고 조용히 빈한한 선비들과 같이 글을 강독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었다. 중종(中宗)의 건강이 좋지 않자 도성의 사람들이 혼인을 서둘러 하느라 대부분 예절을 갖추지 않았다. 가문의 어떤 어른이 공에게 풍속을 따를 것을 권하니, 공이 굳이 사양하였는데, 훗날 그때 혼인한 가문을 소급해 탄핵할 적에 그 가문들의 어른이 연좌되었다. 홍정이 공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현명한 네가 아니었으면 나 또한 연좌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나이 20세에 양부의 상복(喪服)을 입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몸소 제전(祭奠)의 음식을 마련하였다.
가정(嘉靖)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그때 조정의 여론이 공의 선친 의정공(議政公)이 소인배들에게 미움을 사 재능을 펼치지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아들 중에 훌륭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에 공을 추천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삼았다.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법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가 신유년(辛酉年, 1561년 명종 16년)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가 관리와 백성을 간이(簡易)로 거느리고 또 호족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 봄에 양모(養母) 상(喪)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었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심상(心喪)을 입었다.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에 상복(喪服)을 벗자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내섬시(內贍寺)로 전직되었다. 12월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에 임명되었다. 용인현이 3도[西道]의 요충 지대에 위치해 있어 손님들이 폭주(輻輳)하였으나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고 겉치레를 하지 않았다.
융경(隆慶)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에 공의 따님이 선조(宣祖)의 왕비(王妃)로 정해지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승진 임명되었다가 11월에 따님이 중전(中殿)이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몇 단계 뛰어 임명되었고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 봄에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다. 만력(萬曆) 무인년(戊寅年, 1578년 선조 11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해 양주(楊州)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다가 야위어 병환이 났는데,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4월에 주상이 내시(內侍)를 보내어 고기를 먹을 것을 권하자 애써 따르다가 얼마 안 되어 처음처럼 하였고 요양을 하기 위해 서울의 집을 교외로 옮기었다. 이해 겨울에 주상의 건강이 좋지 않자 공이 놀라고 우려하다가 병환이 위독해지자 자제들이 안방으로 들어갈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때는 11월 아무 날이었다. 가정(嘉靖)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에 태어나 이해 경진년까지 55세를 살았다. 공의 부음(訃音)을 보고하자 주상이 깜짝 놀라고 슬퍼하면서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관청에서 염습(殮襲)과 장례(葬禮)에 소요되는 물품을 대주었다. 그 이듬해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 월 일에 공의 어머니 묘소 곁에 장사를 치렀다.
공은 용모가 단아하고 담소가 화평하였다. 성품이 검소한 것을 좋아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상에게 하사받은 표범가죽옷을 평소에 감히 입지 않았다. 가례(嘉禮) 때 뇌물을 받지 않고 외부에도 요구하지 않은 채 다만 궁중에서 하사한 물품으로 간소하게 치렀다.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종족들과 화목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생질(甥姪)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돌봐 주었다. 큰형을 아버지처럼 섬기어 무슨 일을 할 때 반드시 여쭈어 하였고 유무간에 반드시 같이 사용하였다. 자신이 국구(國舅)가 되어서도 의복, 음식, 거처가 옛날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문이 조용하여 빈한한 선비의 집과 같았고 같이 대화하는 사람은 한미한 신분으로 있을 때 친구들뿐이었다. 선량한 인사가 등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는가 하면 세자(世子)가 늦어지자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히는 등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였다.
공이 종실(宗室) 문천정(文川正) 이수갑(李壽甲)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딸은 바로 중전(中殿)이고 아들 박동언(朴東彦)은 부사(府使)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나와 공은 그리 가깝지 않았으나 선대에서는 아주 친밀하였다. 고귀(高貴)하지 않았을 때 일찍이 서로 알았고 비록 공이 고귀해진 뒤로 시종 교유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욕심이 없어 근세 외척(外戚)의 묵은 습관을 답습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공의 아우 박응복(朴應福)은 나와 동년(同年, 같은 해에 함께 급제한 사람)인데, 그가 나에게 공의 묘지명(墓誌銘)을 써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감히 사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온화한 빛이 얼굴에 드러나고 겸손한 태도가 몸에 축적되었으니, 화평한 그 사람의 미덕이 고귀한 지위에 손색이 없었도다. 하늘이 어찌 수명을 더 주지 않아 중도에 세상을 떠났단 말인가? 나무가 울창한 선영(先塋)의 곁에 이 묘지(墓地)를 택하여, 견고하고도 체백(體魄) 편안하니 끝없이 자손을 비호하리도다.
[출처] 나의 조상님들 II (반남박씨 반성부원군파)|작성자 윤중 박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