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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날(1-6)
종종 악인들이 형통을 보면서 낙심하는 경우를 봅니다.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의와 정의의 나라가 서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을 부추겨 바벨론을 치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를 치되 2내가 타국인을 바벨론에 보내어 키질하여 그의 땅을 비게 하리니 재난의 날에 그를 에워싸고 치리로다 3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옷을 입고 일어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의 활을 당길 것이라 그의 장정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며 그의 군대를 전멸시켜라 4무리가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질 것이요 관통상을 당한 자가 거리에 있으리라 5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 6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1-6)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을 치기 위해 한 나라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서 쭉정이에 불과하니 바람을 일으켜 키질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들은 그들을 무겁게 여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⑴ 심판 선언(1-2)
여호와께서 바벨론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을 깨워 바벨론과 렙-카마이(갈대아) 주민들을 치게 하십니다.
2절에 키질의 비유가 나오기에 ‘멸망시키는 자의 심령은 열망시키는/파괴하는 바람’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바람은 자주 파괴적인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참조, 4:11-12; 13:24; 18:17; 22:22; 49:36). 북쪽에서 ‘큰 민족의 무리’를 일으켜 바벨론을 쳐들어가게 하신(50:9, 참조 41) 여호와께서 파괴하는 바람을 일으켜 바벨론을 치게 하십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로 번역은 ‘나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의 마음의 주민들’ 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갈대아 주민들’의 암호로 간주하는 것이 앞에 나온 ‘바벨론’에도 일치합니다. 바벨론은 그대로 사용하고 ‘갈대아’만 굳이 암호를 사용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2a절은 기질의 비유를 사용해 바벨론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키질하는 자들’(타국인)을 보내 바벨론을 키질해서 그 땅이 비게 하십니다. ‘타국인’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낯선 사람, 곧 본토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사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을 공격하는 자들은 북쪽에서 오는 민족이기에, 또 동사 ‘키질하다’가 나오기에 키질하는 자로 읽는 것이 문맥에는 더 적합합니다. 원래 키질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작업입니다. 바람이 적당히 부는 곳에서 마른 곡식을 던지면 가벼운 쭉정이는 날려가고 무거운 알곡만 남습니다. 분리 작업이기에 보통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쭉정이뿐만 아니라 알곡까지도 ‘파괴하는 바람’에 다 날려갑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키질하는 자들이 바벨론 땅에 있는 것을 모두 광풍에 던져 날려버립니다. 바벨론 땅이 깨끗하게 비워집니다. 주민들이 다 쫓겨나고 땅은 폐허가 됩니다. 2b절에서는 바벨론의 심판이 사실적으로 선포됩니다. 재앙의 날에 침략자들이 바벨론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공격합니다(50:14-15, 29).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포위한 침략자들에게 무자비한 공격 명령을 내리 십니다.
⑵ 전투 명령(3)
‘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옷을 입고 일어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의 활을 당길 것이라 그의 장정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며 그의 군대를 전멸시켜라’(3). 침략군이 퍼부어 대는 화살에(50:14) 바벨론의 활잡이들이 감히 반격도 못합니다. 바벨론의 젊은이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그 군대는 궤멸합니다(50:30). 동정심을 모르는 침략군의 잔인한 공격으로 바벨론이 죽음에 넘겨집니다.
⑶ 심판의 묘사(4)
갈대아 땅에는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고, 거리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들뿐입니다(4). 바벨론의 멸망이 확정적이기에 살고 싶으면 바벨론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바벨론 한가운데서 도망쳐 저마다 제 생명을 구하고 바벨론의 죄악 때문에 함께 죽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6a; 50:8). 전쟁의 심판이기에 바벨론에 남은 자는 누구도 칼을 피하지 못합니다.
⑷ 이스라엘의 구원(5-6)
바벨론에서 도망치라고 경고를 받는 ‘너희’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지만, 5절의 문맥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배 민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6b절은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보복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6b) 이제 여호와께서 바벨론에게 책임을 물으실 때가 왔습니다. 바벨론이 민족들에게 행한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보복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5)은 여호와에 의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자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이스라엘을 ‘여호와에게 버림받은 홀아비’로 표현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여호와께 저지른 넘치는 죄과로 멸망하고 사로잡혀 가 유배살이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반면에 이사야 54:7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감사 버렸다고 말하고(참조. 52:3), 시편 44:12에서 시인은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하고 탄식합니다. 이사야 50:1은 많은 바벨론 유배민이 유배를 여호와에 의한 쫓겨날(이혼)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예레미야 31:31-34).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7-10)
행한 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셨다면 우리는 이미 멸절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시고 받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당연하게 받지 말고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께, 그리고 사랑스럽지 않은 이웃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심은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사역들을 감사하며 간증하길 원하셨습니다.
7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8바벨론이 갑자기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말미암아 울라 그 상처를 위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9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10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7-10)
바벨론은 한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온 땅에 쏟아 부어 심판하는 수단이었지만, 갑자기 넘어져 파멸하게 하십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 멸망을 믿을 수 없어 이스라엘마저 유향을 구하여 낫게 해보자고 하지만, 멸망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⑴ 여호와의 손에 잡힌 금잔(7)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멸망 선포(1-4절)에 뒤이어 예언자의 탄식이 뒤따릅니다. 바벨론이 이미 멸망에 떨어졌음을 전제하고 탄식합니다. 바벨론이 여호와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예언자는 먼저 바벨론의 화려했던 과거와 절망적인 현재를 대비합니다. ‘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 바벨론이 갑자기 넘어져 파멸됐다’(7-8a).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는 바벨론이 여호와께서 역사를 경영하는 데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25:9에서 여호와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으로 부르십니다.
⑵ 치료가 불가능한 바벨론이 병(8-9)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집행자로 삼으셨기에 민족들은 바벨론의 술잔을 마시고 취해야 했습니다(참조. 25:15-29). 바벨론에 의한 민족들의 정복은 여호와의 역사 의지를 구현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금잔은 바벨론의 넘치는 부와 패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점령지의 금은보화가 바벨론의 창고를 가득 채웠고, 바벨론은 주변 모든 나라를 발아래 굴복시켰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영화가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바벨론이 갑자기 쓰러져 멸망합니다. 갑자기는 여호와의 간섭에 의한 멸망을 시사해줍니다. 맡겨진 역할이 끝나면 지체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떠나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는 자들의 반응이 바벨론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묘사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남은 자들이 죽음을 애도해 통곡하듯이 바벨론의 멸망을 애도해 통곡합니다(8a). 바벨론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음에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유향을 발라보지만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8b절). 고대 세계에서 유향은 상처를 치료하거나 진통을 완화하는 약제였습니다. 바벨론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에 맞아 생긴 중한 상처이기에 일반적인 치료제로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참조. 8:22; 46:11). 바벨론의 멸망을 막아보려 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납니다. 바벨론과 함께 죽지 않고 살려 면 바벨론을 버리고 저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9a). 바벨론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는 바벨론을 돕는 그의 동맹군을 바벨론을 떠나는 ‘우리’는 바벨론에 사는 이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중상을 입은 바벨론이 홀로 남겨져 죽음을 맞습니다.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9b)는 바벨론이 파멸적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징벌의 크기가 하늘에 닿았음은 바벨론의 죄과가 하늘에 미칠 정도로 엄청났음을 시사해줍니다(50:46)
⑶ 구원의 고백(10)
바벨론 심판은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는 구원사이 기도 합니다. 바벨론에서 도망친 자들이 시온에 와서 바벨론의 멸망을 ‘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신’ 사건으로 고백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합니다(10). ‘우리 공의’는 아마도 유배민들의 구원과 관련한 언급인 것 같습니다. 구원이 의로움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유배살이로부터의 해방과 귀향은 우리 공의가 됩니다.
신앙은 안 만큼 믿고 삶에서 경험한 것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터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을 묵상과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여 체득해야 합니다. 공허하고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네용과 개념을 갖춘 제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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