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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안 좋아하기 비용>의 줄거리:
무엇이든지 좋아해야 비용이 들지 안 좋아하는데 무슨 비용이 드나 싶지요? 골프를 안 좋아하면 전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좋아하면 참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 안 좋아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 좋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떤 상황까지도 감수하는지를 알면 깜짝 놀라실 걸요.
하나님 안 좋아하기 비용
(마태복음 23:25~26)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안 좋아하기 비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안 좋아하기 비용’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내리신 다섯 번째 저주의 선언이 나타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저주의 선언은 비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예배당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비용이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를 의미합니다. 골프나 사이클 같은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골프나 사이클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면 비용이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안 좋아할 때에 오히려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장사를 하는 분들에게 임대료는 항상 큰 부담입니다. 자기 건물이라면 세를 내지 않으니 어지간한 위기는 견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와 닮았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비용을 치르지 않기에 훨씬 행복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많은 비용을 치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비용 때문에 삶은 피곤하고 지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을 때에 발생하는 비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비용이 탐욕과 방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의 위선이란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열매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서 제시된 탐욕과 방탕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섯 번째 저주와 내일 살펴볼 여섯 번째 저주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과연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7절에서 이들의 타락상에 대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란 예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의로움이 아닌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서의 행위를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더해 613가지의 규정을 만들어 지키고 있었습니다. 생활에서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세세한 규정들을 만들다보니 613가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결코 나쁜 의도에서 행해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강한 동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 이러한 규정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613가지나 되는 규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탐욕과 방탕에 빠질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선에서도 탐욕과 방탕은 범죄자들이나 탕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깨끗한 척하고 뒤에서는 더러운 짓을 일삼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상태에 있었습니다.
탐욕은 헬라어 하르파게(ἁρπαγή)로써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욕구가 탐욕입니다. 일찍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쫓겨난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탐욕은 기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습니다. 탐욕을 부리기 위해서는 기쁨을 포기하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탐욕을 부리는 이유 또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기쁨을 포기하게 되었으니 참 모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들어오시기 위해 하나님 크기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 흡입력은 매순간 작용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구로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채우시기 위해서 만드셨지 비워두시고자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마음을 본래 채워야 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해진 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서 기쁘고 만족하려는 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배우자나 자녀를 주셨다고 해서 이들을 마음에 담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내 몸조차 마음에 담을 관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직업이나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만드실 때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욕구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을 하면 참 좋겠다, ~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는 식의 생각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탐욕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3억 빚을 지고 쫓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3억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바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준으로 보자면 이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반대로 빚쟁이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쫓기는 중에도 시간을 내어 말씀과 기도로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면 탐욕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실지는 하나님의 몫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예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에게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탐욕입니다.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좋아하기를 시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좋아하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에서부터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가신 예수님을 따라 갈 때에만 하나님 좋아하기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면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 대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낫게 하실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그대로 죽게 하셔서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아픈 상태를 유지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든 마음에는 기쁨과 만족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건강은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돈을 구한다면 탐욕입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만 행복할 것 같다면 탐욕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속성인 추구함은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향할 때에 탐욕이 됩니다.
탐욕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결혼도 직업도 재산도 심지어는 취미까지도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일로 행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가치에 대해 구하고 찾고 두드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삶을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탐욕을 부리는 순간 말씀드린 대로 앞으로는 기쁨이 없이 살겠다고 맹세를 한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기쁨이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을 잃었다는 것은 탐욕과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탐욕에 이어 방탕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시간이 주어져있고 육체와 감정과 의지와 생각이 있습니다. 가족과 재산과 직장과 신분도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채워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방탕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는 방탕하지 않았습니다.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문란한 생활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윤리적 기준에서는 이들을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들의 마음은 지옥을 가기에 합당하도록 방탕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꿈과 비전을 추구하였다면 방탕입니다. 방탕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주어진 것들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10년 뒤에는 이 정도는 되어야겠다”는 계획과 기대조차도 방탕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져 있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꿈과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완벽한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십자가 생활화를 본업으로 삼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길 밖에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시간과 생각과 육체의 사지백체 오장육부까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됩니다.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멋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면 삶은 방향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모든 것으로 모든 순간에 방탕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방탕하다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일탈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일탈에 대해서는 깨끗했습니다.
이들에게서 나타난 방탕의 시작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위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니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어진 것들을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적하신 방탕이었습니다. 탐욕이 잘못된 구함이라면 방탕은 잘못된 쓰임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쓰임의 결과는 지침과 허무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하나님께 방탕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몸은 선로 위의 기차와도 같은 방향성을 띄게 됩니다.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데 몸이 지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삶의 방향성은 사라집니다. 기차를 선로에서 끌어내려 밧줄로 묶어 끌고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이 지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과 상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한 분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분은 이대 체육과를 나와서 헬스클럽의 지도자로 일하시며 강의도 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화려한 독신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마음은 지쳤고 몸은 망가져 버렸다고 방탕한 삶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탕함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을 때에 나타나는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윤리적으로는 전혀 방탕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시작된 방탕함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있는 돈을 쓰는 것은 쉬운 일처럼 여겨지지만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방탕함으로 쓰는 돈이라면 삶을 힘들게 합니다. 인생을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돈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이 예배당에 바치는 헌금일지라도 내 뜻대로 하는 것이라면 방탕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외에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울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이라도 십자가를 향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덧칠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기도가 아니라면 세상에 대한 추구를 강화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없다면 똑같은 말씀을 들을지라도 하나님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방법으로 들립니다. 오히려 말씀이 탐욕과 방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좋아하기는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하면 좋겠다”는 탐욕의 마음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대로 쓰고자 하는 마음 또한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란 재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관계에 대해서도 먼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 배우자에 대해 갖는 기대나 불만조차도 방탕이 될 수 있습니다. 기차를 모래밭으로 끌어내려서 끌고 가려고 하니 부부관계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탐욕과 방탕입니다. 방탕은 선로 위의 기차를 끌어내리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져 있는 것을 쓰면서 지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탐욕은 기쁨과 만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좋아하기는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며 하나님을 좋아하기 위한 길을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돈 버는 일은 절대 쉽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평생 애를 씁니다. 건강관리도 자녀양육도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좋아하기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일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말씀 듣고 기도할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탐욕과 방탕을 벗어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벗어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 또 말씀과 기도로 벗어버리기를 지속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탐욕과 방탕을 비용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인생은 저절로 펴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펴기 위해 대단한 일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풍선이 빵빵하게 펴지듯이 여러분의 인생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그렇게 펴지는 모습을 보고 듣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마음에 하나님을 가득 채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 좋아하기를 실천하며 탐욕과 방탕을 씻은 듯이 벗어버리게 해주시옵소서. 탐욕과 방탕의 비용을 끊어서 삶이 활짝 펴지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