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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따라 신성 모독하기(?)>의 줄거리:
우리는 그동안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에게 신성 모독죄를 억지로 뒤집어씌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마음속에서 진짜 신이 무엇인지 하는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시종일관 그들의 진짜 신을 모독하셨습니다. 그들로서는 마땅한 판결을 내린 셈입니다.
예수님 따라 신성 모독하기(?)
(마가복음 14:53~65)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따라 신성 모독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따라 신성 모독하기(?)’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죄로 판결을 받으십니다. 참으로 부정한 재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정황상 궁금증이 생길만한 부분이 있기에 먼저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65절을 보면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말한 선지자 노릇이란 보지 않고도 일어날 일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을 천으로 둘러싼 후에 얼굴을 치고 누가 때렸는지를 맞춰보라며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공회의 재판에서 신성모독죄로 판결을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신성모독 죄로 판결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판결을 내린 산헤드린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백성의 장로들의 관점에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헤드린공회원들이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과거에 부정부패한 검사나 판사들이 재판 전에 죄를 정해놓고 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광경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실제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성모독죄의 대상이 되는 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입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서 좋아하여 섬기고 있었던 것은 돈과 권력과 명예 같은 세상의 가치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섬기는 신이 하나님이 아니었기에 하나님만을 섬기셨던 예수님은 이들의 말대로 신성모독 죄인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이들이 신으로 섬기는 세상의 가치들을 모독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타락 상태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마음으로 섬기는 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는 세상의 신을 섬기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 뻔뻔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신으로 섬겨지는 가치들을 모독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신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생을 일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상황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신이라는 개념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을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입니다. 그 다음 계명은 4절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 이 두 계명은 같은 내용으로 혼동됩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는 다른 신과 우상의 개념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신의 개념을 주인과 섬김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섬겨지는 대상이 바로 신입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은 두 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재물을 섬길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재물을 다른 신의 대표로써 말씀하신 이유는 재물 즉 돈이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신의 속성이란 바로 좋음입니다.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마음에서 신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신이신 하나님과 일개 재물이 동등한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돈을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애를 씁니다. 섬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돈을 갖고 싶어 하고 가진 돈을 잃지 않고 더 늘리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섬김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벌고 싶어 하고 더 늘리고 싶어 합니다.
흔히 다른 신으로 여겨지는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이름들은 다른 신을 섬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를 우상 즉 가짜 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장 대표적인 다른 신은 재물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기나 명예 혹은 권력이 다른 신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마음에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다른 신이 됩니다. 우상은 그것들을 얻기 위해 동원하는 수단으로써의 인간이 만들어낸 가짜 신입니다.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다른 신이었습니다. 줄리엣만이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줄리엣에게는 로미오가 다른 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줄리엣이 죽었다고 착각한 로미오는 자살하게 되고, 줄리엣 또한 나중에 깨어나서 로미오의 죽음을 보고 자살하게 됩니다. 이들의 죽음은 마음으로 섬기는 다른 신을 위한 순교였습니다. 돈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돈을 벌다가 죽은 사람은 돈을 섬기다 순교한 것입니다. 등산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산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등산을 하다 죽었다면 그것도 순교입니다. 이제 이러한 다른 신과 우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재판하던 사람들의 마음에서 섬기던 신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 이들의 마음에서 섬기던 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은 장사꾼들과 계약을 맺고 성전 뜰을 내주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준비한 제물은 모두 부당하게 판결하고 장사꾼들이 파는 제물만을 합당하게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대가로 장사꾼들로부터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던 이유는 이들의 마음에서 재물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이나 헤롯당은 현세지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세에서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겼기에 재물과 권력을 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천국과 영생도 믿었으나 이들 또한 현세의 연장으로써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믿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뱀이 배를 땅에 붙이고 기어 다니듯이 마음 채움을 오직 땅에서 찾으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음에서 섬기던 신은 동일하게 돈과 권력과 대중의 인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우상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돈과 권력과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마치 이방인들이 바알과 아세라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수단으로 삼아 풍요와 다산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외에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바로 다른 신이고 그것을 섬기는 수단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뿐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산헤드린공회원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섬기던 신은 재물이고 권력이고 대중의 인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산헤드린공회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즘도 재물과 권력과 대중들의 인기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신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이 이루어지게 되고 예수님께서는 아무 변호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62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산헤드린공회원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솔로몬보다 더 큰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윗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로마제국을 파괴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셨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젊은이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귀족 출신도 아니었으며 갈릴리 촌구석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산헤드린공회원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던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못했던 예수님이었기에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에서 신으로 섬기던 재물이나 권력이 어느 정도라도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예수님에게 신성모독 죄를 걸었습니다만 이들의 마음에서 모독당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들에게서 하나님은 돈과 권력과 인기를 얻기 위한 우상으로 섬겨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젊은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임을 자청하니 자신들이 섬기던 돈과 권력이 모독당한 것입니다. 이들의 기준에서 그리스도는 솔로몬과 같은 재산을 가져야 했고 다윗과 같은 권력을 가져야 했으며 황제보다 더한 대중들의 인기를 누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그러한 분이 아니셨기에 신성모독의 죄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목사님들 중에 십자가 복음방송을 통해 십자가 생활화를 공유하며 십자가 한솥밥 식구로 살아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이 노회의 모임이나 목사님들 모임에 참석하실 때마다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십니다. 직접 경험하시고 깨달으신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권유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열 분 중에 한두 분이 될까 말까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분들이 작은 목회를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선배 목사님께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웃으십니다. “태 목사가 십자가 생활화로 3년 안에 천 명이나 이천 명 목회를 하게 되면,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지 않아도 목사들부터 벌떼처럼 배우러 몰려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알리고 싶으면 먼저 큰 목회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가건물에 있는 개척교회에 무슨 구원이 있겠냐고 여깁니다. 교인이 열 명도 안 되는 목사님으로부터 무슨 구원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공회원들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가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을 살아가신 방식은 이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이 크게 성공하여 명성을 얻고 부와 권력을 가지시리라 여겼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머리 둘 곳 없이 사실 것임을 강조하시며 그러한 오해로는 따를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공생애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신으로 섬겨지던 재물과 권력과 인기를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신성모독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재물이 없어도 기쁘고 만족할 수 있으며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으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예배당에 왜 이렇게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류 구원에는 어떠한 예산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믿는 재물이라는 신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신성모독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총독 빌라도 앞에서 조금도 존경하거나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이시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의 마음에서는 대권이 신입니다. 대통령이 되어야만 마음이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대권에 도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대통령자리를 모독하십니다. 권력이라는 이름의 신을 모독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마음의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주실 수 있으시며 행복의 근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뿐만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에게는 대중의 인기가 마음의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저 역시 목회를 하며 그러한 광경을 봐왔고 경험해왔습니다. 인류는 이러한 다른 신을 믿기 위해 수단으로써의 가짜 신인 우상과 종교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처해있는 상황도 마음으로는 다른 신을 섬기며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우상시합니다. 복음은 완전히 죽어버리고 다른 종교들과 똑같이 가짜 신인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신성모독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75억 인류의 마음속에서 섬김을 받고 있는 세상의 다른 신들을 모독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신성모독 죄를 짓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마음이 하나님만으로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면 돈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권력이 있든 없든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형통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권력과 형통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돈과 권력과 대중의 인기와 같은 다른 신들을 배설물로 모독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월급과 연금과 저축을 마음에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배설물로 여겨본 적이 있으십니까? 배설물로 여기라는 것은 재산을 어느 단체에 바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재산이 있든 없든 마음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배설물은 빨리 몸에서 내보내야만 하듯이 우리 마음에서 빨리 내보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재벌회장은 단지 돈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지 못하는 마음의 변비에 걸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대통령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 정치가들도 모두 마음의 변비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삶을 통해 이들의 마음에서 섬겨지는 다른 신들을 신성모독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는 외아들이 다른 신이었습니다. 아들이 형통해야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진다면 아들이 형통하지 않더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다른 신들에 대한 신성모독이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재판에서 하늘 보좌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여 올라가신 하늘 보좌 우편에서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다른 신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나는 돈이 없어도 권력이 없어도 인기가 없어도 성공과 형통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웃을 수 있다.”는 세상에 대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배짱을 부리며 신성모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벌려고 애썼듯이 하나님을 벌기 위해 애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가서 이런저런 직분을 맡아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수중에 돈이 생겼을 때에 기뻐했듯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이 섬기는 모든 다른 신들을 끊임없이 신성모독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신들이 없이도 밝게 웃으며 행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른 신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며 신성모독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다른 신들을 끊임없이 신성모독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마음에 하나님을 가져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