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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요석공주가 살던 소요산
Dr. Gold
높이는 587m이고, 주봉(主峰)은 의상대(義湘臺)이다. 서울특별시에서 북쪽으로 44km, 동두천 시청에서 동북쪽으로 약 5km 지점에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워서 경기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645년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개산(開山)하여 자재암(自在庵)을 세운 이후, 974년(고려 광종 25)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중대암(中臺庵)·소운암(小雲庵)·소요암(逍遙岩)·영원사(靈源寺) 등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자재암은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로서, 원효대사가 수행 도중 관세음보살과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소요산에는 청량폭포(淸凉瀑布)와 원효폭포가 있는데, 이 지대를 하백운대(下白雲臺, 500m)라고 한다. 그 북쪽에 원효대(元曉臺)가 솟아 있다. 원효가 도를 닦아도 깨우치지 못하자 원효대에 올라가 수십길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문득 득도하였다는 높은 대이다.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이라고 전하는 옥로봉(玉露峰)을 넘어 북동쪽으로 나한대(羅漢臺, 510m)·의상대·비룡폭포가 나온다. 또 원효대에서 약 30m쯤 되는 절벽 위를 상(上)백운대라고 하며, 그 밑으로 선녀탕(仙女湯)을 볼 수 있다. 자연석굴인 나한전과 산중턱의 금송굴도 유명하다. 산 입구에는 구한말에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덕문의 추모비가 있다.
2013. 10. 14(월)
월간지 << 山>> 10월호에서 인용.
일주문
원효폭포
원효굴
달마스님
관음봉
원효대 앞 계곡
해탈문
백운선원
화장실
자재암 전경
자재암비
자재암 건물
국화
단풍
대웅전
독성암
옥류폭포(청량폭포?)
독성암
원효약수
나한전 내부
나한전 입구
원효 元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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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설사(薛思) |
출생 | 617년 신라 금성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
사망 | 686년 3월 30일 (70세) 신라 금성 |
사인 | 병사 |
거주지 | 신라 금성 |
국적 | 신라 |
별칭 | 아명(兒名)은 설서당(薛誓幢) · 설신당(薛新幢) · 설모(薛毛) 별명은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 복성거사(卜性居士) · 서곡사미(西谷沙彌) · 백부논주(百部論主) · 해동법사(海東法師) · 해동종주(海東宗主) |
학력 | 한학 수학 |
직업 | 승려 · 사상가 · 음악가 · 작가 · 저술가 |
종교 | 유교 → 불교 |
배우자 | 요석공주 |
자녀 | 아들 설총 |
부모 | 아버지 설담날 어머니 조씨 |
친척 | 할아버지 잉피공 형 설을신 장인 태종무열왕 처남 문무왕 |
사제(師弟)로는 신라의 고승 의상이 있었다. | |
웹사이트 | 경주 순창 설씨 대종회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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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고려 조선 현대 |
사상 |
이제합명 불국토 호국 일심 화쟁 무애 화엄 유식 정토 교관 정혜 무심 돈오점수 돈오돈수 |
인물 |
승랑 원광 자장 원효 의상 원측 제관 의천 지눌 나옹 휴정 경허 성철 숭산 |
종파 · 목록 |
5교9산 5교양종 선교양종 조계종 조동종 진각종 진언종 천태종 태고종 |
대장경 · 소의경전 |
고려대장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
논서 · 주석서 |
간화결의 금강삼매 기신론소 직지심체 정혜결사 천태사교 해심밀경소 법계도 |
사찰 |
삼보사찰 오대총림 분황사 황룡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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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617년 ~ 686년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시)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淨)이다. 아버지는 내말 설담날이며,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이고 설총이 그의 아들이다.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이외에도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라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고,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본명은 설사(薛思)이나, 보통 한국에서는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불교 최초의 깨달은 스님,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하였다.
원효는 신라의 귀족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이다.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1]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원효는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乃末) 설담날(薛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로 상주(湘州)[2] 경산현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의 사라수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금성 사람이라고도 한다.[3] 그의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압량군(押梁郡)의 남불지촌(南佛地村) 율곡(栗谷)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沙羅樹) 아래 이르러 갑자기 낳았는데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출타했다가 마침 집에 돌아오던 중 불지촌 율곡 고개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통이 있어 해산하였다. 급한 일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나무 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때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했다. 원효가 태어난 곳의 밤나무의 밤은 크기도 크고[4] 굵으며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렀다.
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명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 중 1명인 설을신(薛乙臣)의 이름이 현재 전한다.
원효는 후일 유명한 승려가 된 뒤, 자신이 태어난 곳의 집을 희사(喜捨)해서 법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밤나무 근처에도 법당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이름했다.
어려서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불렸으며, 또다른 이름은 모(毛)였다. 뒤에 이름을 사(思)로 정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나,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이 뭔가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沙羅寺)라 하였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설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자 허락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났다.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5]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 |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 |
” |
라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6] 그 뒤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7]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분황사에 있을 때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어 간행하였다.
7세기 원효는 3세기 용수가 만든 대승불교의 승려였다. 그러나 12세기 중국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개발한 것이기에, 원효는 전통적인 불교 명상법인 수식관을 익혔을 것이다. 또한, 화랑이었기 때문에 도교의 조식법을 익혔을 것이다. 오늘날 간화선이 지배하는 한국불교에서 원효가 별로 논의대상이 아닌 것은, 명상법이 달라서라고 할 수도 있다.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며 요석궁의 홀로된 둘째 공주—흔히 요석공주—를 짝되게 하니, 과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8]을 낳았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둘째 딸이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스스로 실계(失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 그만두었다.
원효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와 상앙의 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두 번째 구법 여행 중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를 깨달아 구법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원효는 과부였던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고, 불교를 민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효는 당시 전하던 거의 모든 경론(經論)에 대해 주석(註釋)을 하여 100여 종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미(一味) 화쟁(和諍)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그는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되는데, 그 자세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을 죽음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 추정한다.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음력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주었다.
원효는 실로 불교 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이며 또한 으뜸가는 저술가이기도 하였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을 사제(師弟)로 삼아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처음으로 중창한 법당의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법명을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의 빛이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은 중국 한자를 한국식 발음에 맞춘 이두의 창시자이자 이두 문학의 창시자였다. 설총은 최치원·강수 등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9경(주역·시경·서경·예기·춘추·논어·맹자·주례 등)을 처음 우리말로 해석하여 유교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후일 고려시대에 인종때 원효대사의 18대손 설자승(薛子升)은 이자겸의 난 당시 화를 피해, 순창으로 옮겨가 순창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후손인 설귀창의 후손들은 그대로 경주 설씨로 이어갔다.
바다 용 또는 임금의 부탁을 받은 원효는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삼매경소를 다 지은 뒤 원효는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이를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를 들은 대안법사(大安法師)가 구경온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고 와서, 소뿔위에 서 있는 붓과 벼루에 종이를 붙였는데 후일 일연은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승려는 결혼할 수 없다는 불교의 원래 교리를 깨고 한국 최초의 대처승[12]이 되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도 한국에는 대처승이 유행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대처승의 전통이 일본으로 전래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불교정화운동 당시 대처승들의 승직이 박탈되었으나, 이후에도 대처승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원효는 그밖에 무속의 신으로도 숭배되고 있다.
요석공주(瑤石公主, ? ~ ?)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영창부인(永昌夫人)의 딸로 김흠운(金歆運)과 원효(元曉)의 아내이자 설총(薛聰)의 어머니이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서는 원효와 만나기 전에 김흠운(金歆運)에게 시집 갔으나 김흠운이 백제와 전투에서 전사하여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소생으로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둘째 딸이 자신의 남매이자 신라 30대 국왕인 김법민(金法敏)의 큰 아들인 소명태자와 혼인하였으나 소명태자가 일찍 사망하여 시동생인 정명태자(政明太子)와 재혼하였으며 그 후 정명태자는 훗날 31대 국왕인 신문왕이며 그녀는 신문왕의 비인 신목왕후(神穆王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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