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된 의’라는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적 틀 속에 “새롭고 급진적인 해석”을 집어넣은 것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 점에서 루터는 “내적인 의”를 강조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차이가 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인 의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루터에게 의는 “외적이고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일하셔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외적 의”라는 개념은 나중에 멜란히톤과 칼뱅 등에 의해 “법정적 칭의”로 발전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법정적인 의미에서 의롭다고 선언될 뿐이다(멜란히톤).” 이럼으로써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었다. “칭의는 하나님이 밖에서 하는 일이요, 성화는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물론 칼뱅은 이 둘이 구별되는 것이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이신칭의와 의의 전가 개념을 중요한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초기 개신교에서 발표했던 신앙고백서들, 즉 아우구스부르크(1530년), 프랑스신앙고백서(1559년), 영국국교회 39개 조항(1571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등은 “그리스도의 공로” “은혜” “복종” “완전한 만족” “거룩” 등이 “전가”되어 혹은 그를 믿는 “믿음” 때문에 죄인들이 칭의 된다고 고백해왔다.이렇듯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칭의의 기반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분이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셔서 얻은 의”에 전적으로 의존된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칭의를 얻을 만한 “충분한 의”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될 뿐이다.
제임스 뷰케넌(James Buchanan)은 로마서 5장 18-19절을 근거로 “의는 ‘한 사람의 의’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불리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표현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즉각적으로 연결시키는 한편,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개인적 순종들을 배제”하면서, “우리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이며 자비롭게 수여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그 의는 “주입”이 아니라 “반드시 전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가 말하는 전가의 일반적 교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다: 첫째, “아담의 첫 번째 범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된 것”이고, 둘째, “우리의 죄들이 우리의 대속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전가된 것”이며, 셋째, “우리들의 칭의의 직접적인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4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