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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빵 터짐~~^*^
당연히 보기 좋은 사진이 만들어졌습니다. 웃음은 사실 평화의 손님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기 좋은 웃음을 우리끼리 나눔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그리고 오늘 부득불 참석하지 못한 형제들과도 나눔을 해야 겠습니다. 형제적 친교라함은 평화의 나눔이죠. 그리고 그것을 확장해 나가 이 세상 천지 사방을 평화의 물결이 넘치도록 해야 합니다. 피정의 언약으로 우리모두 평화의 사도가 될 것 입니다 하고 하느님께 약속을 드려봅니다. 그럼 지금부터 월례회 속으로 천천히 평화의 걸음을 옮겨 보겠습니다. 언제나 평화와 선을 약속하며, 형제, 자매님들과도 평화의 나눔으로 형제적 친교를 선언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형제, 자매님! ~~^&^ 언제나 샬롬. 샬롬 샬롬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避靜(피정)의 뜻도 중요하지만 믿는 자에겐 종교적 의미와 그 역사에 대하여 익히 알고 피정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카돌릭 교회에서 정의하는 피정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성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정기간 동안 묵상과 성찰의 기도 등과 같은 종교적 수련을 행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피정은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했던 일을 그의 제자들이 본받아 수행하게 되면서부터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피정이 공식적으로 소개된 것은 반(反)종교개혁 시대로,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그의 책 〈영성수련 Exercitia Spiritualia〉에서 실제적인 피정의 수련방법을 발전시키면서부터입니다.
교황 피우스 11세는 그를 '피정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으며, 많은 가톨릭 성인들의 지지로 피정은 더욱 확산되어 피정의 집'이 만들어져 신자들의 피정을 돕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19세기 이후 성직자를 위한 연례 피정을 실시해 현재는 교회법으로 성직자들은 최소한 3년에 1번, 수도자는 1년에 1번 피정에 참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피정의 방법은 종래의 기도·묵상·성찰·강의 등과 함께 요즘은 '만남'과 피정 주제를 놓고 대화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깨달음과 변화 그리고 앞으로 삶에 있어 지향하는 바를 바탕으로 나눔의 대화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재속의 삶을 살아 오면서 쌓인 불편한 마음을 정화시키고. 초심으로 돌아 가 평화의 자유인으로 거듭나자! 내 자신이 선택한 주제였습니다. 그 힘을 형제적 친교 안에서 회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겠다는 의지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형제님들 께서도 피정에 임하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궁금합니다. 아무튼 고덕동 8단지 울타리 도로변에서 만나 차에 오른 후 서울 외곽도로를 타고 도착한 성 라자로 마을, 이경재 신부님이 원장님으로 계실 때 여러모로 심신을 다모아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과거가 저에겐 있었습니다. 회비를 납부하고 행사에 참석하고 전교하며 회원을 늘려 끌어 들이고....그런데 지금, 그 열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의 신자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살펴 보면 동안 하느님을 수없이 배반하고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통찰하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될 것 같습니다.
맛세오 형제, 자매님들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피정에 참석하셨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자신의 십자가츨 찾아 본다면 어느것 일까요? 저에 것은 우측 상단에 반은 가려진 고상이 바로 저에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 용서를 청하오니 부디 내치지 마시고 용서하옵소서. 아멘.
그렇다면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따라 온전한 용서를 통해 화해하고 정의로운 복음적 삶으로 회귀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피정이란 이름빌려 진리와 정의로운 마음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첫발을 딛기 위하여 아론의 집 현관문을 들어 섰습니다.
주님 이 탕자를 용서하옵소서~~^*^ 아멘.
명찰을 받고 월보와 피정 일정표와 피정 주제를 기술한 자료를 부여 안고 걸어서 504호로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노크를 보내자 아무 기척이 없어 문을 열고 입실하였습니다. 남으로 열린 창, 밖의 모습은 도시를 떠나 온 것이 아니라 도심속에 갇혀 있는 형극이었습니다. 아파트 등 건물이 지척에서 성 라자로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형극이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등 쳐 보아도 재속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그릇이 바로 도시이기에 떠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대부분 소요가 많습니다. 재속인은 재속을 떠나서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정화시켜야 제대로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방도가 생김니다. 피정을 통해 은총의 지혜를 얻어 정화시키고자 되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재속의 삶입니다. 재속에서 우선 나를 변화 시키고 상대를 지성껏 사랑으로 모시면 리트머스 종이처럼 평화가 사회와 이웃 그리고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제가 묵은 방입니다. 작은 십자가 그리고 모자께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벽면에 걸려 있으시며 어서 오너라 하시는 음성을 주지 않으셨지만 음~~ 너를 지켜 보겠다. 제대로 하거라 하시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주모경으로 자신을 정화 시키며 동시에 경애의 마음을 전해 올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일정의 시작 시간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냉큼
대강당으로 내려 갔습니다.
대강당으로 입실하기 전 로비의 모습입니다. 각자 위치에서 형제들의 피정을 돕기 위해 열혈하게 노력해 주신 평의원 형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평화 안에서 은총으로 거듭 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리고 대강당으로 입당, 봉사자게서 등단하셔서 형제회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가며 사진촬영을 시작하였습니다.자세한 공지사항및 기타관련 소식은 월보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함께 주일 낮기도, 성무일도를 통해 피정자들의 마음과 형제회 모든 것을 알려 드렸습니다. 분명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앞자리 모서리에 영성 담당 평의원과 부봉사자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무엇인가 책임을 맡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입니다. 그것도 다중을 상대하는 일이란 더욱 더 힘이들죠. 평의원들의 수고에 대해 늘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양성담당 형제께서 피정 일정을 공지하고.
영보님께서도 피정과 관련하여 안내를 해 주셨습니다.
避靜 일정상 이제는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재속인이라 함은 속세에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속세에 주인은 다름이 아니라 경쟁하여 이긴 후 포식하는 자입니다. 포식하는 자를 중심으로 기생하는 자도 생기고 상생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에 처한 삶의 환경안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개인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어떤방식이든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적인 질서 안에서의 원칙과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은 개인의 이익에 따라 하느님의 창조성을 무시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독창적인 못된 이기심이지요 그래서 회계는 지속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이 필요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이뤄나가야 하는 자연의 법칙 안에서 유독 인간은이 집착하는 것은 바로 오만함이 깃든 이기적 지배욕심입니다. 스스로 조절의 기능을 상실한 재속 안에서의 삶을 통하여 정화와 평화의 질서를 찾는 일은 분명 사랑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어 실천방향의 결심을 공고히 한 후 주님께 보여드리고 성 라자로 마을을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준비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린 그런 일을 막간이라고 즐겨 사용합니다. 幕間이란? 무엇인가? 시작 하기 전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 시간을 이용하여 맛세오 형제들은 성가를 선택한 후 기도의 의미로서 성가를 불렀습니다.
로비로 나가 출석을 체크하고 심호홉 등을 한 후 피정 강의를 열공하는 착한 청중으로 변신의 수순을 밟았습니다.
기도하시듯 조용히 등단의 때를 기다리시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이영근 아오스팅 신부님 이십니다.
스님 들처럼 빡빡 깍으신 머리가 인상적이시지요.
불가에서는 머리를 가리켜 "무명초(無明草)"라고 합니다.
무명초라는 말은 어둠의 풀이라는 뜻이죠.., 결국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머리로 인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하죠...
쉽게 설명하면 머리로 인해 매일 감고, 다듬고, 빗고 관리를 해줘야 합니다.
결국 수행자는 이러한 군더더기를 없애는 일로 부터 수행이 시작된다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신 생각에서 머리 모양을 그렇게 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신부님께서 등단 하신 후 자신을 소개하시고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강의 주제: 끊임없는 회개의 삶
강의 차례
1. 시작하면서
2. 회개의 신비
3. 끊임없는 회개의 삶
4. 끊임없는 회개의 구체적인 삶
5. 마치면서
기도를 주관하신 후 강의는 이어져 나갔습니다.
1.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은 재속프란치스코회(OFS - Ordo Franciscanus Saecularis)의 회원이다. 그리고 이 회의 본 이름은 (회개의 형제 자매회)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자들의 회에 속해 있다. 곧 여러분들의 신원은 회개한 이들이다. 또한 이 이름에 들어 있는 회개의 라는 의미가 회개하는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지금도 끊임없이 회개하는 이들이다.
이처럼 회개는 여러분들의 속해 있는 이름이며 본질이다. 당연히 회개자는 여럽누의 이름이며 여러분들의 정체성이요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회개라는 용어는 회개자들의 회가 1221년 법적으로 창설되고 첫 공식회칙인 우골리노회칙 생활지침(Memoriale Proposit)이 교종 호노리노 3세로부터 승인되기 이전에 이미 성 프란치스코께서 1209년에 교종 인노젠시오 3세로부터 구두승인(authorized)을 받은 내용이기도 하다. 곧 성인께서는 회개의 삶과 복음 선퐁의 생활 양식(Forma Vitae)을 승인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회개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본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신원과 삶의 본질을 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본질이란 그것이 그것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그것이 빠져 버리면 그것이 아니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곧 그것이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불가결의 것을 말한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우리되게 해주는 본질인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곧 회개의 형제 자매회 회원이 진정한 회원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에게는 회개라는 말이다. 회개는 이토록 중요하다.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니 회개 하고자 하는 오늘은 우리가 되는 날이다. 본래의 우리, 회개자요 회개하는 이들이 되는 날이다.사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첫 발설도 회개에 대한 선포이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발설은 이렇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가이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지금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회개의 때요. 믿음의 때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회개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곧 복음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야 할바임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이를 여러분의 현 회칙(Seraphicus Patriarcha. 1978년 교종 바오로 6세가 인준)은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데 제 4 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의 회칙과 생활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다. 회원은 특별히 복음을 자주 읽어서 복음에서 삶에로 삶에서 복음에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회개는 복음에로의 회개이며 복음의 믿음 에로의 회개이다. 그리고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 라는 선물이다. 따라서 회개는 선사되는 하느님의 나라 라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바로 그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가리켜주는 방향이요 목표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바로 에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요.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이다. 결국 회개는 에수님과 하난 되기 위해서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회개하는 이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를 여러분의 회칙 제 7 조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회개하는 형제자매로서의 회원은 자기 성소 때문에, 복음의 강력한 힘에 자극받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내적변화에 의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방식을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야 한다. 인간의 나약성 때문에 이 회개는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신자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1221년경)에서도
회개자들의 최고의 행복은 하느님 생명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겸손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지키고 실천하라 고 권고한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회원은 회개를 통하여 복음을 사는 것이요,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성인께서 이루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사는 것이요. 성인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인 것이다.
2. 회개의 신비
여러분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은 여러분들의 회칙에 제시되어 있다. 특별히 회개의 형제자매들에게 주신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인 머리말에는 성인의 이상과 회칙의 근본정신이 잘 드러난다. 사실 이 권고는 프란치스코께서 직접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09 년경) 이다.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칙 - 머리말 곧 이 편지에서 성인께서는 회개하는 이의 행복과 회개하지 않는 이의 불행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마음을 다하고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12.30)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마태22,39)하고 악습및 최악과 더불어 자신들의 육신을 미워하며,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오 그런 일을 실행하며 항구 하는 남녀 모든 이들은 얼마나 복되고 얼마나 출복받은 사람들인지!
이 첫 문장에는 회개의 본질적인 특성이 표현되고 있다. 곧 먼저 사랑이 나 중에 미움이 표현되고 있다. 곧 먼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나중이 악습과 죄악에 대한 마응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주 예 그리스도의 목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일에 가 닿고 악습과 죄악에 대한 미움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에 가 닿고 있다. 곧 회개가 구원의 신비에 가 닿음을 암시해 준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회개보다 먼저 베풀어지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밝혀 준다. 곧 우리의 회개가 하느님의 활동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이 우리를 회개시키는 것임을 알려준다. 마치, 하느님께서는 잃은 양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루카15,4-6)와 같다.
다시 말하면 먼저 베풀어지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곧 우리의 회개가 하느님의 활동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이 우리를 회개시키는 것임을 알려 준다. 마치, 하느님께서는 잃은 양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루카,4-6)와 같다. 다시 말하면 먼저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회개가 온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곧 회개는 우리의 노력이다 공로로 주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말이다. 이는 회개가 우리 자신의 너머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바로 이 점이 비 그리스도의인들이 하는 일반적인회개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교의 회개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하늘나라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왔고 먼저 은총으로 선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합당한 삶이 회개를 통하여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 잘 드러나고 있다. 곧 하느님깨서는 회개한 이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이다. 회개한 이들이 스승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들을 먼저 부르시고 회개 시키신다. 베드로도 그렇고 세리 마태오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를 부를 대도 그렇다. 그들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찾아 온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부름을 받고서 회개하여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의 사부 성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스폴레또에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에 차차 회개의 길을 걷게 된다.
성경에서 회개는 특히 에언자들에게 잘 드러나는데,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곧 뉘우치고 돌아 와라 이다. 뉘우침은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면의 전환이요. 돌아옴은 외연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동의 전환으로 메터노이아라는 전 인격적이고 존재론적인 전환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회개: 돌아서다. 슈브(히브리어) 수레바퀴를 돌리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다)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죄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하느님에게로 돌아와서 그분께 헌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신명 4,30, 호세14,2: 이모4,6,8,12: 이사9,12:옵22,23) 곧 죽음의 행실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그분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사도20,21: 히브6,1)
그러나 회계는 단지 죄를 뉘우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한다.
이는 죄(pecatum: 고녁을 벗어나다) 가 단지 도덕과 윤리적 선을 벗어난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뉘우침은 이러한 죄의 인식으로부터 오며, 돌아옴은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라서 회개는 죄를 뉘우치고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만난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에도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인 것이다. 그러니 회개는 죄를 깊이 보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며, 그 사랑에로 돌아옴이다.
그래서 죄에 대한 인식이 깊어갈수록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인식이 깊어가고 사랑이 깊어 가는 것이다. 감사와 찬양이 깊어가고 기쁨과 축복이 깊어가게 된다. 바로 여기에 회개의 신비가 있다. 그렇다 회개는 궁극적으로는 이미 만난 하느님께로 향함이오 방향전환이다. 나아가 이미 만난 그분에게로 건너가는 일이요 그분 안으로 돌아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열매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요 그분 안으로 돌아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열매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이요 구언의 신비를 이루는 일이다. 그러니 회개는 단지 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진리에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벗어났느냐보다 어디로 나아갔느냐가 중요하다. 곧 죄를 떠났느냐보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갔느냐가 중요하다. 그르기에,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개닫는 일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돌아갈 곳을 알게되 때문이다. 겨룩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비록 죄를 벗어났다 해도 돌아 갈곳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혹은 죄의 공백상태에서 또 다시 죄의 장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뉘우치고 돌아오는 회개야말로 기쁨이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벌어진는 축제요 잔치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맛봄이요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눔이다. 하느님 신뢰의 확인이요 우리의 존귀함이 확인이다. 빛과 진리의 포웅이다.
3. 끊임없는 회개의 삶
회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단 한 번의 회계로 모든 것이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한 가지 죄만 범한 것이 아니다. 또한 계속해서 죄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전반적인 회개가 필요하고 깊은 회개가 필요하다. 또한 끊임없는 회개 곧 자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나아가 회개는 마음 안에서 머누믄 것이 아니라 회개의 삶을 요청한다. 곧 삶 속에서 실현되어 진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끊임없는 회개의 길을 걸으며 복음전파와 함께 회개하는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회개한 이들은 복음을 따르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렇게 초대교회에서부터 복음전파와 함께 전개된 회개운동은 금욕자들, 동정녀들, 순례자들로 드러났다. 313년 콘스티나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박해받던 교회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381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지정되자 3세기 말과 4세기에 이르러서는 회개자들이 사막이나 동굴이나 산으로 와 외딴 곳으로 가기도 하였다.(Fuga Mundi)
그들은 숨어 살아가거나(Vita cenobitcal), 그리고 지속적인 회개 생활(Conversatio Morum)을 삶의 양식으로 서원하고서(수도승 서원의, 제2서원) 한 곳에 정주(Stabilita)하며 순명(Oboedienza)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승생활로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에는 교회의 복음화를 위하여 사도들의 복음적 삶으로 돌아가는 수도승생활로 구체화 되었다. 그리하여 사도적 추종은 수도승들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따라야 할 삶으로 인식되었고 사도적 삶은 순례자의 삶의 형식 안에서 가난을 모델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12세기에는 가난 속에서 순회설교를 사도적 삶의 근본 요소로 삼는 그릅들을 형성하기도 했으며 교회에 반기를 들고 떠난 이들도 생겨났다.(ex 카타리파, 발도파, 후밀리아티)
바로 이 시대에 가장 치열하게 회개의 삶을 통해 복음적 삶을 사셨던 성 프란치스코의 긴회개의 여정 곧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간단히 보고자 한다. 초기에 해당하는 부분만 발췌 나눔하려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91182 - 1226)는 전쟁의 시기에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황제는 교황과 전쟁을 하고 제후는 왕과 사우고 마을은 마을과 시민은 귀족과 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패배하고 1202년 감옥 갇혀 수감생활을 1년간 하기도 했다. 그는 그 후 몇 면 동안 축제와 향락의 생활을 하다가 23살에 병을 앓고 죽음의 문턱에 갔다 와서야 그러한 생활로부터 차차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회개의 길은 멀고 먼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게 된다.
1205년 그는 자신의 영혼이 황량하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영혼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를 찾지 못하다가, 여전히 세상과 허영을 찾아 기사가 되고자 브리엔의 월터군에 지원하기 위하여 가던 중 스폴레토 계곡에서 되돌아 오게 된다. 그곳에서 그를 병석에 던져 놓고 성찰과 깨달음으로 인도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 너는 왜 주인을 버리느냐? 종을 위해서 주인을 버리고 신하를 위헤서 영주를 버리느냐?". "너의 고향으로 가라, 거기서 네가 할 바를 알려주겠다. 네가 본 환시는 달리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중도에 아시시로 돌아왔으나. 주변의 냉대속에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 아시시로 돌아 가라" 는 이유를 알아듣고자 했다. 그는 수바시오 산 건너편 언덕에 있는 동굴 속에서 고통과 죄의식과 두려움과 싸우면서, 고독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응답해 가게 된다. 그 후, 그는 로마를 순례하면서 거지 옷을 입고 성당으로 올라 가는 계단에 다른 거지들과 함께 서서 가난을 직접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와서는 또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하면, 네가 지금까지 육적으로 사랑하고 탐했던 것들을 경멸하고 미워해야 한다. 네가 일단 이것을 시작하면 지금까지 달고 좋게만 보인던 것들이 모두 참을 수 없도록 역겹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지금까지 피하였던 것들은 모두 아주 달고 넘치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리고 1206년 그는 이 말씀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곧 무서운 병으로 뒤덮인 나환우를 껴안고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일에서 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 새로운 날에 마침내 그는 타인과 자신을 갈라놓은 심연을 뛰어넘어 사랑의 통찰을 지니게 되고, 그 사랑을 실천하여 평생을 살게 된다. 얼마 후 그는 아시시의 성빆 아래에 있는 반쯤 부서진 성 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 끓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 오 높으신 영광스러운 하느님, 제 마음의 어두움을 비추어주소서, 주님 당신의 거룩하고 참된 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올바른 믿음과 확실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감각과 깨달음을 주소서"
(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런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주소서
주여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
그리고 그는 성 다미아노 성당의 사제와 함께 살게 되는데, 이때부터 실제적으로는 프란치스코가 수도생활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는 일종의 수련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부터, 그는 성당보수를 위해 남루한 모습으로 거리를 다니며 구걸하였고,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가게 앞을 지나다가 붙잡혀 끌려가 마침내 주교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날 있었던 일과 그의 감동적인 선언을 기억하고 있다.
" 지금까지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게신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
이리하여, 그는 주교가 입혀준 망토를 입고 순례자가 되어 세상을 향해 떠났다. 아니 세상속으로 들어 갔다. 그는 굽비오 방향으로 출발하였다. 그곳에서 친구로부터 허리에 두르는 끈과 신발과 지팡이를 얻고서, 다시 성 다미아노 성당에 돌와 성당을 재건하기 시작한다.그 후 베네딕도 수도회의 성 베드로 성당을 수리하고, 그리고 조그만 경당인 포르치운쿨라(Porciuncula), 곧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을 수리 한다. 그리고 1209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에, 이곳에서 사도들의 파견에 대한 말씀인 마태오복음 10장 7- 13 절의 말씀을 듣고서 외쳤다.
이것이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온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은 바이다(1첼라노 22: 대 전기 3,1 세동료 25)
바로 여기서 성인은 긴 회개 여정끝에, 복음의 메세지들을 통해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알아듣게 된다. 곧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그것은 참되고 오래된 기쁜소식,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는 복음을 지니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곧 성인은 주님께서 그를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와 회개의 평화를 설교하라고 파견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들자, 그는 첫 동료들과 함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복음서를 통해서 응답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성 니콜로 성당으로 가서 사도들의 제비뽑기(sortes apostolorum)를 통해 복음서를 세 번 펼쳤는데 다음의 세 구절이 나왔다.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마태오 19,21) 여행중에 아무것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루카9,3) 나를 다를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16,24)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말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우리와 앞으로 우리를 따르게 될 이들의 회칙입니다.( 대전기 3.3/ 세동료 29)
성인은 이렇게 복음을 통해서 공동체의 성소를 찾게 되었으며 이를 훗날 유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룩한 복음의 양식에 다라 사라야 할 것을 주님이 친히 가르쳐 주셨다.
이는 성 프란치스코를 모범으로 따라 사는 여러분의 삶이 무엇보다도 어떤 사업이나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따르는 삶으로서 회개의 삶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사실, 그는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 회개자들 이라 불렀다. 또한 그와 초기의 동료들이 인노젠시오 3세 교종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구두로 인준받고 처음으로 받은 공식 소명도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평화와 회개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세 동료전기 39,40) 모든이에게 큰 열정과 기쁨으로 회개를 설교하였다.( 1첼라노 23)
4, 끊임없는 회개의 구체적인 삶
그렇다면 이러한 회개의 삶을 우리의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를 사도들의 제비뽑기를 통해 들은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슴을 통해 응답해 보고자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밀씀은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세 가지 조건, 곧 가난과 겸손과 추종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곧 오늘 우리가 해야 하는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을 세 가지로 제시 해주고 있다.
1) 자기 자신을 버리는 가난으로서의 회개의 삶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는 것은 가난과 내어줌과 연결된다. 이는 단순히 비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치게 되면 비워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비움은 그저 자신에게서 빼어내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향하여 비추는 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곧 자기 중심에서 타자중심으로 건너감이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회개가 지닌 자기전환을 잘 말해 준다. 그것은 그저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어 상대에게로 건너 가는 전환이다. 나아가 내어주어 비워진 그 자리에 상대를 받아들여 상호교환의 일치로 나아가는 일이다. 곧 자신이 비워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워진 그 자리가 빛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곧 사랑으로 차오르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가난으로서의 회개이다. 곧 가난은 사랑으로 채워지고 자신은 빛으로 채워진 것이다. 자신을 내어 줌으로 빛으로 채워지는 사랑의 전환이다. 그리하여 이제 그분과 함께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이다. 꼭 움켜진 손을 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못을 받아 들이는 가난과 같다.
2. 제 십지가를 지는 겸손으로서의 회개의 삶이다.
이는 회개자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곧 이미 자기 자신은 버렸지만 여전히 자기 십자가는 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다라는 말의 본래의 듯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안다, 소중한 것을 품다 라는 으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억지로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흔연하고 허허롭게 억매임 없이 사랑으로 끌어 안는 것을 말한다.
사실 십자가 진다 는 것은 자신을 매어 다는 사형도구를 지는 것이다. 곧 자신이 못박혀죽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과 시련을지는 일이요, 반대와 배척과 거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상처받고 못 박히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침 밷음과 옷 벗김과 조롱당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부끄러움과 수치를 지는 일이요, 불명예와 지욕을 지는 일이다. 나아가서 허물없는 채로 죄를 뒤집었는 일이요, 억울함을 기꺼이 당하는 일이다. 결코, 그것을 피하거나 제거하려 하지도 않고 견디거나 뛰어넘으려 하지 않고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순명과 사랑으로 끌어안고 품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어떤 상황에도 벼녕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는 일이다. 자신의 안전과 보호에 연연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일이다.
십자가, 바로 그 속에서 사랑하는 일이요, 그것을 통해서 사랑하는 일이다. 십자가는 오히려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 우리는 그 속에서 사랑하기를 배울 일이다. 이것이바로 겸손으로서의 회개의 삶의 모습이다.
3.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속적인 동행의 끊임없는 회개의 삶 이다. 여기서 다르다 라는 동사는 현재 명령형 형태로 쓰여, 그 행위의 지속성을 강조 해준다. 곧 위의 두 조건을 만족시키고 끈임없이 당신을 따라오라는 명령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삶, 곧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끊임없는 회개 지속적인 회개를 통한 순명을 말해 준다. 곧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는 것이요 복음 따르는 것이다. 곧 때거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말씀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이며, 그리고 복음을 따름으로 그 회개를 증거하고, 나아가서 다른 이들을 복음적 회개의 삶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곧 끊임없는 회개로서의 삶인 것이다.
이 셋은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이요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요 성인의 은사를 실현하는 삶이 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은사를 보나벤투라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방 - 이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고 종의 신분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시고 성부와 일치를 이루신 아들의 모습이다.
5. 마치면서
그렇다 가난이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겸손이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곧 작아짐이다. 작아진 자만이 아들이 된다. 그리고 작아진 이라야 작아진 아들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분은 구유에서처럼 작아지고 약해진 모습으로 오신다. 자신을 내어 놓고 작아져 오신다. 그러니 우리 역시 자신을 내려 놓고 애어주고 작아져야 작아지신 그분을 만날 수 있데 된다. 자신이 나누어지고 찢어지고, 훼손되고, 쪼개져 작아져야 만나게 된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항상 나보다 작아진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사실 주님은 나보다 작아질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곧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지라, 우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분이시다. 그것은 당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작아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결코 자신을 높이고 커질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작아진 모습이 회개자의 모습이다. 자신을 내어주고 작아진 모습이 자신의 진면목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보다 작아진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혹 크고 위대하고 높은 주님만을 만나고자 하는 바람에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제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 안에 활동하신 동일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인과 함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다. 곧 작고 가난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작아지고 겸손해 지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일이요 그 회개를 끊임없이 자신의 삶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고치는 일이 될 것이요,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통한 구원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요.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진정한 회원이 되는 일일 것이다. 아멘.
복음을 통한 회개의 여정
1. 인간의 소중함과 하느님의 사랑
아사 43. 1-7
1. 그러니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2.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3.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언자이다. 내가 이집트를 너의 몸값으로 내 놓고 에디오피아와 스바를 너 대신 놓는다. 4.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이다. 내가 너 대신 다른 사람을 내 놓고 네 생명 대신 민족들을 내놓는다.
5.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하지마라. 내가 해 뜨는 곳에서 너의 후손을 데려오고 해 지는 곳에서 너를 모아 오리라 6. 내가 북녁에 이르리라, 내놓아라, 남녁ㅋ에도 이르리라, 잡아 두지 마라 나의 아들을 먼 곳에서, 나의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너라. 7.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데려오너라
아사 49. 1-7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속에서 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강의를 마치시고 원고를 정리하시는 이영근 아오스팅 신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한 잔여 강의가 기다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 내면 깊은 곳가지 울림이 있었다는 증거이겠지요.
정체성, 동안 놓치고 살면서 가장 잘 조합된 교회와 나라는 모순이 드러났기에 이왕지사 전부 까놓고 더러워진 옷을 빨래를 하여
새옷처럼 입듯이 마음 세탁이 절실했던 것이지요. 새마음에 새그릇에 중요한 것을 담아두면 산뜻하잖아요. 보기 좋으면 자꾸 눈길이 가고 만지고 싶고 갖고 싶잖아요. 우리가 최초에 만났던 주님의 사랑을 강렬하게 느껴 초심으로 되돌아 가고 싶다는 의지가 아니였겠어요.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대화 내용입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면서 앵무새처럼 착각의 생각을 기도때 마다 달고 살아갑니다. 저는요.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회를 사랑한답니다. 틀림없어요. 정말이에요
모순을 갖고 살면 그것이 진리라 믿죠.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화석이되기 전에 이런 기회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죠.
막간의 모습을 스케치 해보았습니다. 이것이 사진이죠. 표현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 위해 여러가지 포장을 일삼는 종교적행위를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의 주인공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제가 그렇다는 이야기 입니다.
제 3강 - 질의 응답 시간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저녁식사 시간.
명일구역 형제, 자매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가벼운 산책을 하였습니다. 걸으며 강의 내용에 대하여 생각나는대로 떠올리며 되새김해 보았습니다. 부정적인 요소보다 긍정적인 내용이 더 많다는 판단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라는 단어 앞에서 자유롭지 않은 신앙적 생활 덕분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잠시 회개라는 바탕위에 누워보았습니다. 그러다. 본관 지하에 있는 성전에 입당 한 후 조용히 묵상을 하며 자신을 모듬어 보았습니다. 자존감이 상실된지 참 오랜 시간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참 많습니다.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 많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에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자괴감이 원인인것 같습니다. 지존감이라는 사유의 그늘에서 머물다 현실로 돌아와
묵상과 고해의 시간
영보님이 들려 주시는 오후 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안내를 받았습니다. 시계의 시침이 8시를 알리자 고해 성사가 가능하다하여 대기석으로 자리를 옮긴 후 순서를 기다려 위층에 준비되어 있는 고해소 문 앞으로 재차 자리를 옮겼습니다. 분명 분주한 생각과 과거의 일들이 출렁거리며 몰려 올 것이라 예상하였는데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순서가 와 살며 시 문을 열고 들어 가 신부님 맞은편 쇼파에 앉았습니다. 기도를 한 후 고해성사를 본 과거의 시간을 정리하고 고해가 필요한 중심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그리고 기억이 남아 있는 다른 부분과 생각나지 않는 이런저런 죄에 대하여 묶음으로 고한 후 신부님의 처방에 대하여 심각하게 듣기 위하여 자세를 고쳐 다시 앉았습니다. 신부님이 들려 주신 이야기는 분명 원론적인 것 같은데 피정이 끝나고 귀가한 후 지금까지도 참 명료하게 느껴집니다. 신부님의 처방이 분명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의 순간으로 돌려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명료성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답니다.
고해성사를 한 다음날 새벽 다시 본관 지하 성당으로 가 기도 후 찍은 사진입니다. 그것도 2층으로 올라 가 찍었답니다. 신자석이 있었다면 가만히 앉아 묵상과 기도를 병행하여 오랜 시간 머물다 내려왔을텐데 마침 2층은 피아노 그리고 안락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안락의자 누군가 고정으로 앉는 자리 같아 앉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형제,형제회를 사랑하는 것 중요한 일 입니다. 그렇게 할 것이라 약속을 분명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자신에게 말입니다.
첫댓글 세베리노 형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사진과 글들을 보며 다시금 되새깁니다.
고맙습니다. ^^
평화를 나눔하겠습니다. 환절기 건강 소원하면서....
글까지 다 입력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셔요ᆢᆢ사진도 훌륭하시고ᆢᆢ그 누가 이렇게 봉사할 수 있을까요ᆢ
평화와 선! 늘 은총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와우! 정말 놀랍습니다! 쓰시는 글이 예사롭지가 않고 방송작가 수준입니다.
정말 감사하고 경이롭습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되세요!
반갑습니다. 형제님!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데... 아무튼 과찬이시라 어색해 집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 하시고 언제나 은총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자주 방문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설된지 만 4년이지만 아직도 걸음마 수준입니다. 카페지기의 무능력 때문이지만,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꾸벅~~^&^
세베리노 형제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맛세오 형제회의 소중한 자료실 입니다.
회원님들이 많이 방문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미완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맛세오와의 인연, 갈수록 소중한 마음이 듭니다. 관심과 마음으로 주시는 후원 감사드립니다. 꾸벅~~^*^
소문 듣고 찾아왔는데, 과연 예사롭지 않으시군요.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보여주시니 감동이 넘쳐납니다. 굳이 형제회 봉사직을 마다하시고 숨어 계신 이유를 알 것 같네요. ^^
계속 멋진 봉사 기대합니다.
소문은 낭설이 대부분입니다. 현혹되지 마셔야 하는데~~^*^ 운둔자가 할 일 입니다. 관심이 있으신 방문, 산도 움직이는 힘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환절기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윤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