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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 한 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1974, 7중대 사건 이민수
생도생활 2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되면서 대대적인 중대 개편이 이루어졌다. 15중대에서 1년 반, 10중대에서 반년을 보낸 후 처음으로 1연대 지역에서 생활하게 됐다. 7중대, 코끼리 중대원이 된 것이다.
3학년이 되면서 새 꿈을 세웠다. 1,2학년 시절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긴 했지만 별을 달 만큼 우등생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3,4학년에는 반드시 별을 달겠다는 결심이었다. 성적에 대한 개인적 동기부여가 있었던 1학년 2학기에 전체 5등을 했고, 육사 입학 전까지 늘 우등생이었기에 못 할 것 없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더욱이 생도문화도 1,2학년은 '밀리터리'가, 3,4학년은 '아카데미'가 지배하는 일반적 전통이 있었기에 결심을 더 굳게 했다.
그런데 그 결심은 7중대로 옮겨온 첫날부터 흔들렸다. 3학년 21명이 가진 첫 회합에서 '동기임원'에 선출됐기 때문이다. 중고교시절로 치면 반에서 리더가 된 셈인데 학창시절 늘 반장으로 활동했던 터라 어려움은 없으련만 사실 동기임원은 반장보다 할 일이 훨씬 많은 봉사직이었다. 당연히 개인적 시간을 상당 부분 할애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극복 못 할 장애물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7중대 분위기였다. 개성이 넘치는 4학년 생도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이른바 3학년부터 가질 수 있다는 '아카데미' 분위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여느 중대에 비견해도 군인정신이나 능력에서 결코 뒤지지 않을 3학년들임에도 불구하고 4학년 선배들은 3학년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절대 과장이 아니라 마치 기초군사훈련을 다시 받는 것 같았다. 1,2학년이 보건 말건 각자의 개성에 따라 3학년들을 괴롭혀대니 기대했던 아카데미는 신기루였고 오직 밀리터리만이 넘실댔다. 그런 분위기 탓에 7중대 3학년들은 1,2학년 때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한 생도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리더격인 동기임원과 기수생도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와 같은 호실에서 생활했던 한 동기생은 힘든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엔 눈뜨지 말고 영원히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였다.
어디 그뿐이랴! 1,2학년 내내 나와 함께 생활했고 7중대마저도 함께 와 4년 생도생활을 모두 같은 중대에서 보내게 된 또 한 명의 동기생은 어느 날 차라리 퇴교하고 싶다는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듬직하고 모든 생활에서 으뜸이어서 내가 힘들 때마다 마음속의 표본으로 여겼던 그였는데 오죽했으면 그런 생각을 품었으랴.
그런 속에서 한 학기를 보낸 탓일까. 1학기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고 우등생의 꿈도 희미해져 갔다.
2학기에는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없었지만 학기가 바뀌면서 내게 기수생도 직책이 부여됐다. 동기임원에 기수생도까지 맡았으니 3학년 리더로서 영광이기도 했지만 내 개인 시간은 더욱 각박해졌다.
게다가 2학기에는 화랑제 행사가 곁들여 있어서 행사 준비로 기수생도는 정말 바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각종 포스터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지만 개성 강한 4학년들은 기수생도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느 날은 몇 군데를 불려다니며 "3학년들이 왜 그따위밖에 못 하냐"는 질책과 함께 모진 얼차려를 받고 들어온 후에도 밤을 꼬박 새워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그 다음날이 장말고사였는데 꼬박 밤을 샜으니 시험준비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점심시간에 교수부에 그냥 남아 그 짧은 준비만으로 시험에 임하기도 했다. 중식시간에 교수부에 남는 건 생도규정 위반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강자 명단에 놓일 수도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실상 그 과목에서 보강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간신히 턱걸이였던가 보다. 장말고사 후 새로 배치되는 좌석에서 맨 뒷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 동기생들이 의아해 하며 "공부 잘하는 네가 웬일이냐!"고 묻기도 했지만 창피한 생각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씨익 웃고 말았다.
정말 개성들이 남다른 탓인지, 아니면 3학년 교육에서 심리적 즐거움을 느끼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7중대 3학년들이 정말로 생도생활을 잘 못해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었던 건지, 어쨌거나 3학년 교육에 앞장섰던 열성파 4학년은 무려 7-8명에 달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7중대 3학년들이 4학년에게 당하는 모습은 옆 중대인 8중대 3학년들에게도 종종 노출되곤 했다. 그런 땐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카데믹한 분위기의 8중대 3학년들이 마냥 부럽기도 했지만 4학년에게 당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건 정말 창피했다. 그들 눈에 우리는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을까.
3학년을 내버려두지 못해 기승을 부렸던 7-8명의 선배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했던 생도는 중대선임하사였다. 직책이 일명 군기반장이기도 했거니와 그는 3학년을 수시로 하층창고에 집합시켜 얼차려를 주곤 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폭력이 동반됐다.
그가 1층 창고에 우리를 엎드려 시킨 다음 맨 먼저 하는 말은 항상 같았다.
"기수생도 몽둥이 가져와!"
그러면 나는 벌떡 일어나 청소도구가 있는 청소함에서 봉걸레 자루나 기타 체벌 도구를 가져다 주어야했다. 그때마다 비인간적 대우에 앞장서야만 하는 내 처지에 비애감이 들었지만 생도대의 교육 전통 '상명하복'에야 어쩌랴. 선임하사생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봉걸레 자루로 우리들의 엉덩이를 두들겼고 우리는 신음소리 하나 없이 모두가 얻어맞아야만 했다. 사실 구타에 의한 아픔은 인간다움의 상실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우리는 늘 행해졌던 그 비인간적 대우에 상처를 받았고 그가 창고를 나가면 그 상처가 말로써 터져 나오곤 했다.
정말이지 3학년이 되어서도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분노했다.
그 분노가 극에 달한 어느 날 선임하사생도가 나가자 우리는 대책을 논의했다. 더 이상 이런 대접은 받지 말자는 거였다. "훈육관에게 보고하자!" "아예 생도연대장이나 생도대장께 보고하자" 등 몇 개 안이 나왔지만 그건 너무 크고 또 먼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 제안했다. 선임하사생도를 겁박하자는 거였다.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자는 주장이었다. 대다수가 동의했다. 설마 후배들에게 두들겨 맞고서 창피하게 그걸 발설하겠느냐는 믿음이었다. 더욱이 그게 노출되면 폭행 당사자인 본인에게 맨 먼저 '퇴교'와 같은 불이익이 돌아갈 텐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느냐는 논리였다. 실제로 하급생 폭행 사실이 드러나 당사자가 퇴교 조치된 전례도 있던 터였다.
작전을 짰다.
"다음 번 집합에서 그가 '몽둥이'를 찾으면 내가 모른 체 한다. 재차, 삼차 명령하면 내가 일어서서 '못하겠다'고 항명한다. 화가 난 그가 나를 폭행하면 모두가 일어나 그를 에워싸 위협하고 여차하면 린치를 가한다."
우리는 이 작전에 모두가 함께 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해산했다.
그날은 일찍도 찾아왔다.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선임하사생도는 또 다시 3학년을 집합시켰다. 그런데 아뿔사, 집합장소가 웬일인지 하층창고가 아니라 7-8중대 사이의 로비였다. 그리고 여지없이 우리를 엎드려뻗치게 한 다음 어김없이 "기수생도 몽둥이 가져와!"라고 소리쳤다.
순간 혼란이 왔다.
"이게 아닌데. 그럼 약속했던 집단 린치는 미뤄야하나."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기에 그대로 버텼다. 실행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리고 훗날 되돌아보니 이 날의 결심이 '신의 한 수'였다. (이것이 1974년 그날 대폭력 사건의 시발이었고 어쩌면 이후 전개됐을지도 모를 7중대 전체의 비극을 막은 결정적 한 수였다).
나는 미동도 않고 엎드려 있었다. 두 번 세 번까지 "기수생도 몽둥이"를 부르짖자 벌떡 일어나서 항변을 했다. "우리가 1-2학년도 아니고 3학년쯤 되면 말로 해도 될 것을 왜 개돼지처럼 폭력을 쓰느냐. 더 이상 몽둥이는 못 가져오겠다."
그러자 선임하사생도가 쏜살같이 달려와 2단 옆차기를 내질렀고 그 발길질에 내가 쓰러지자 동기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그를 에워쌓았다.
이제 여차하면 약속대로 복수의 린치가 시작될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우리들의 웅성거림과 고성이 바로 옆방인 중대장생도 호실까지 들렸고 그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한눈에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인지한 중대장생도는 곧바로 3학년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시의 일과가 이어졌다.
하지만 지시불이행을 주도한 나는 물론이고 모든 3학년생도들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했고 폭풍속의 고요처럼 적막했다. 곧 닥칠 높은 파도를 앞둔 뱃사람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이윽고 자습시간이 끝나가고 점호시간이 다가오자 중대장생도의 지시가 전달됐다.
"전 3-4학년 생도는 중대홀로 집합하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두근대는 마음으로 홀에 도착하니 이미 4학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한결같이 살기등등한 모습에 양손엔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서슬이 퍼랬다. 그리고 시작된 맨투맨의 구타, 폭력들.
"3학년의 반항은 하극상이며 그 대가는 엄중하다"는 구실로 우리는 그날 엄청난 폭력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몽둥이 폭력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억울함도 없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한동안 계속되던 폭력의 춤사위가 끝나자 중대장생도는 3학년의 불만도 토로하게 하고 함께 잘 해보자는 마무리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두들겨 맞은 아픔들은 컸지만 한편으로는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하기도 했다. 3학년 모두가 함께 했던 그날이었기에 어쩌면 그날은 우리 3학년 모두에게 감동의 날이기도 했을 법하다. 우정과 동지애, 전우애가 함께 했던 그날, 그래서 우리는 중대 모임 때마다 종종 그날 벌어졌던 얘기들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건 추억이 되고, 추억은 아팠던 순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까.
그날 밤 늦은 시간임에도 나는 모든 동기생들 방에 들러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로비였을까? 늘 하층창고에 집합시키던 그가 왜 중대간 로비로 장소를 바꿨을까?"
그 의문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도 종종 그날 일을 되새기며 상상해 본다.
"만약 하층창고였다면 우리들의 약속은 계획대로 이뤄졌을 것이고 어쩌면 큰 사건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선임하사생도가 우리 생각대로 입을 다물었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 우리에게 대들었다면 어땠을까. 정말 집단 린치가 벌어졌을 테고 젊은 혈기에 어떤 일이 생겼을지 모르잖는가. 또 만약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기라도 했다면 선임하사는 물론이고 하극상의 주도자인 나를 비롯해 우리들 몇몇도 퇴교 됐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정말 다행이지. 장소가 바뀌었다는 게. 육사를 무사히 졸업하라는 운명의 계시였던 건 아닐지. 그렇다면 '신의 한 수'는 내가 아니라 선임하사생도의 몫이 아닐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그날의 사건을 통해 우리 코끼리 중대는 결코 작지 않은 자부심이 생긴 듯하다. 7중대는 32기 동기회에서 중대모임을 다른 중대보다 10여년 먼저 시작했다는 것, 여느 중대보다 더 강한 전우애와 동지애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괴롭혔던 4학년과 모임을 함께 한 유일한 중대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너희 7중대는 참, 속들도 좋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어떻게 4학년들과 함께 만남을 갖느냐?"
내 대답은 이렇다.
"지난 일은 시간이 덮어준다. 그때의 아픔과 고통도 추억이 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 당시의 아픔을 그들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식으로 사과했고 우리는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건 추억뿐인데 그 추억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잖느냐."
우리들 나이가 이제 70이다. 그 사이 두 명의 코끼리가 유명을 달리했다. 종종 그들이 그립다.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1974년 3학년 코끼리들이!
그때 그날, 참 고마웠네. 그때 맺은 우리들 우정 길이길이 잘 이어나가세.
ㅡㅡ
(후기)
졸업 후 수년이 지날 동안 나는 묘하게도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코끼리 4학년과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우연히 길에서라도 마주친 적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선임하사 생도였던 선배가 육사로 잠시 부임했다. 사무관 시험을 위한 보수교육차였다. 먼발치에서는 간혹 모습을 봤지만 가까이서 마주치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나를 만나는 데 대한 부담감 탓인지 일부러 피하는 듯 했다. 나 역시 일부러 만날 마음까진 없었기에 그냥 지냈다.
그렇게 한두 달이 지난 어느날, 그가 나를 결코 피할 수 없는 장소에 나타났다. 새해 철학과 교수들이 대선배교수님 댁에 세배를 간 자리였다. 그 교수님은 당시 행정연수원장의 직책이었기에 연수원생인 그가 세배차 그곳에 온 것이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두 사람간 졸업 후 첫 대면이 이뤄졌다.
그도 나도 계면쩍은 미소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세배만 마친 그는 곧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는데 물어볼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열성파 코끼리 4학년 선배를 마주칠 일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찾아왔다. 한 4학년 선배가 신임 육사관리참모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그도 생도시절 3학년들을 몹시도 괴롭혔던 선배였다. 하지만 육사라는 한 공간에 있어도 그 역시 가까이 마주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장관이 바뀌면서 육사발전에 필요한 제안서 작성을 위해 한시적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3일 밤낮을 함께 토론하게 되었는데 교수부 대표로 내가 선정됐고 주무부서가 관리참모였다. 선배 역시 더 이상 나를 피할 수가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외출도 외박도 통제된 채 3일간 배달된 음식을 함께 먹고 함께 자면서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도시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10년 전 마주쳤던 선임하사 선배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선배님, 생도시절 저를 비롯해 3학년들 왜 그렇게 괴롭혔습니까?"
내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가 애써 담담히, 마치 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하는 듯 말했다.
"그때는 너무 어렸어. 뭘 몰랐지. 미안하네."
2. 타고난 남다른 아르케, 한껏 펼쳐 보이시게 - K(경창호 동기)의 수채화전을 보고
반가운 얼굴. 훤칠한 키에 중후함을 곁들인 초로의 신사가 반갑게 손을 내민다. 그 옆에 희끗희끗한 흰머리에 영롱한 눈빛의 여인이 향기로운 미소로 눈인사를 해온다.
K 부부다.
K는 생도시절부터 그림 솜씨가 남달랐다. 특히 수채화에서 부러움과 감탄을 자아낼 만큼 탁월했다. 그래서 그의 첫 개인전에 대한 기대가 컸고 내심 전시회 오픈일을 손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헌데 그의 안내를 받아 첫 작품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내 기대가 허망할 만큼 작은 것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와~! 이게 K의 작품인가?"
내 마음은 감탄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건 기대가 아니었다. 실로 경이로움이었다.
놀라움은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으로 옮겨갈 때마다 더욱 커져만 갔다.
"이건 내가 아는 K의 그림이 아니야! 그의 화풍은 내가 잘 알고 있는데 이건 전혀 다르잖아."
마음속의 경탄을 그렇게 누그러뜨리면서 몇 작품을 둘러보자 그때서야 마침내 내게 익숙한 그의 화풍이 담긴 풍경화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그래도 감탄과 경탄은 여전했다. 세월의 흐름이 제법 있었다 해도 이토록 놀라운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 K는 정말 그림에 대한 놀라운 '아르케(잠재력)'를 지니고 있었구나.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그 순간 불현듯 오래 전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위탁교육시절 성당에서 있었던 성가 경연 무대였다. 노래 재능이 크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간혹 내 목소리와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기에 자신 있게, 준비한 만큼 열심히 노래했다. 반응도 괜찮은 듯했다. 적어도, 놀라운 실력의 또 다른 참가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처음 듣는 그의 노래였지만 정말 환상적이었다. 모두가 박수를 보냈고 우승자는 단연 그였다.
그때 느꼈던 그 감정. 경탄을 넘어 부러움까지 갖게 했던 그날,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이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역시 아마추어라는 사실이었다. 그 때 가졌던 어찌할 수 없는 혼란함. 성가 경연에서의 그 혼란을 나는 K의 전시회에서 또 한 번 느끼고 있었다.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극이라 스스로 여겨 현실을 정리하는 일이다.
"와! 정말 놀랍네. 자네 그림은 기존 화가들 수준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네. 정말 프로 솜씨일세. K화백 축하하네!"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찬사였다.
진심어린 축하였다.
그렇게 K를 프로 화가라 칭해 마음 정리를 하고 나니 작품들 감상이 편안해졌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자 K가 물었다.
"어떤 작품이 제일 맘에 들던가? 나는 이게 가장 좋던데."
그가 가리킨 그림은 일출의 붉은 태양빛과 강인한 바위산이 함께 담긴, 그래서 힘찬 미래를 향한 도약을 상징하는 작품이었다. 단연 최고였다.
나는 어차피 한 바퀴 더 돌아볼 요량이었던 터라 한 번 더 감상한 후 답하겠노라고 말했다.
사실 내 맘 속에 들어온 그림들은 방금 그가 꼽았던 작품보다는 그의 옛 화풍이 담긴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사이 변했을 진 몰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던 그의 화풍이 담겨있는 수채화들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 아마도 생도시절 그의 그림에 대한 친근함 때문일게다.
그렇게 한 바퀴 더 감상이 끝난 뒤 나는 작품 넷을 꼽았다. 모든 작품이 다 좋았지만 예술적 가치야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법. 해서 그의 화풍이 담긴 풍경화 석 점과, 그가 꼽았던 힘찬 도약의 그림 한 점을 열거했다.
그런데 그날 나를 놀라게 한 건 그림만이 아니었다. 그가 들려준, 전시회를 위해 준비해 온 6년간의 과정에 대한 얘기는 내게 또 다른 파장을 일으켰다.
내가 아는 K는 일찍부터 미대를 꿈꿀 만큼 화가로서의 기초가 탄탄했고 그 또한 내게는 부러움이었다. 헌데 그날 들려준 은퇴 이후 그림에 대한 열정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다시 시작한 그림에서 별 진전이 없자 K는 큰 결심을 하고 선생을 찾았다. 때마침 수채화로 명성이 높은 스승을 소개 받았고, 그 문하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는 이야기였다. 놀라움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왔다.
때마침 곁에 있던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감탄을 넘어 존경감마저 불러왔다. 은퇴 후 K는 그림 열정뿐만 아니라 성당 봉사활동에도 최선을 다했고, 운동도 꾸준히 해왔다는 얘기였다. (K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1년도 힘들다는 교민회장을 3년씩이나 했다).
생도시절 K와 나는 함께 수채화를 그렸다. 그 시절 나 역시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유학시절 그 바쁜 시간에도 손에서 그림을 놓지 않았던 나였기에 정작 이맘때쯤이면 나도 전시회를 꿈꿀만한 수준이 되었으련만, 정말 그동안 나는 뭘 했나 하는 자괴감이 스쳐갔다.
내가 했던 변명이라면 유학시절 배우기 시작한 '골프'로 내 모든 취미활동이 사라졌다는 핑계가 다였다.
하긴 돌아보면 골프는 내게 많은 것들을 안겨준 게 사실이다. 그 힘들었던 유학시절을 견뎌내게 했던 게 골프였다.
첫 학기 후 찾아온 매시간마다의 두통을 호소하자 의사는 운동을 권유했고 그렇게 시작했다. 부족한 영어로 전투하듯이 헤쳐 나온 그 많은 시험들, 페이퍼들, 그 과정을 이겨내게 한 게 골프 아니었던가. 역설적이게도 골프는 내게 집중력의 원동력이었다. 골프 후 몇 잔의 맥주, 포커게임 등,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시간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주일의 거의 모든 시간들을 오직 공부에만 집중해야 했었으니까.
그렇다 한들 이제 노년에 접어든 내게 싱글골퍼라는 찬사는 더 이상 허풍일 뿐이고 그저 골프와 친분이 두텁다는 것만 남았잖은가.
상념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가 느낀 자괴감은 기실 K의 놀라운 그림 솜씨에 대한 부러움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의 삶에서나 지나온 데 대한 회한도 있고 부러움도 있기 마련 아니던가.
그래도 잊지는 말자.
부러움이 자괴감에 머물면 자존감이 상처를 입게 되지만, 그 부러움에서 새로운 도전과 도약을 꿈꾼다면 자존감은 더 상승하지 않겠는가. 나이와 더불어 사라져가는 열정을 붙잡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쏟아 부을 동력을 얻는다면 오늘 보았던 K의 웅비를 담은 저 그림들이 더욱 웅장하고 아름답게 빛나지 않겠는가.
고맙소. K화백! 오늘 본 수채화들 진정 최고였네.(22.2.20)
3. 이 터에 새얼을! - 2016년, 졸업 및 임관 4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32기의 졸업 40주년 기념 잔치가 끝났다.
40년 세월 동안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으니 동기생들의 얼굴 또한 얼마나 변했으랴! 홍안의 아름다운 청년들이 어느새 머리가 희끗한 초로로 바뀌었구나! 그래도 정녕 반가웠던 얼굴들 아니던가. 즐겁고 흥겨웠던 그 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이 글을 쓴다.
새얼 동기회는 몇 해 전부터 졸업 중대별로 돌아가며 동기회 살림을 맡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했다. 졸업 당시의 중대가 16개니 한번 일꾼으로 1년 봉사하면서 고생 좀 하면 다음 16년 동안은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된다. 좋은 전통 아닌가. 무엇보다도 졸업중대 동기생들의 단합과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지난해 4월초 코끼리 7중대가 동기회 살림을 이어받았다. 동기회장을 비롯한 모든 간부직을 코끼리가 도맡으니, 중대 모임이 곧 새얼 동기회 임원회인 셈이다. 코끼리 모든 동기가 감투 하나씩을 집어 쓴 것이다. 하지만 코끼리 모두는 다 안다. 동기임원으로서 봉사해야 하는 1년 중 가장 큰 임무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졸업 및 임관 40주년 행사의 성공적인 완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31기 선배들의 ‘40주년 기념행사’가 육사에서 있었다.
새얼 동기회장을 비롯하여 사무총장, 40주년 기념행사준비위원장 등을 필두로 임원진이 선배들의 행사에 참석했다. 내년 우리들의 행사를 위한 벤치마킹이 주 목적이었다.
‘위대한 다수’라는 별칭답게 31기 선배들의 행사는 다채롭고 흥미로웠다. 밝은 주황색 모자를 쓰고, 손자 손녀들의 손을 잡고 화랑연병장을 행진하는 모습은 과거 어느 기의 축하 행사보다도 월등하게 빛을 발했다. 강당에서 이어진 2부 행사도 흥미진진했다. 해외에 살고 있는 동기생들을 초청해 소개할 때는 가슴이 뭉클할 만큼 감동도 느껴졌다. 가장 멋진 행사는 선배들과 가족들이 함께 만든 합창의 하모니였다. 여느 유명 합창단처럼 단복도 만들어 아름답게 단장하였고, 연습은 또 얼마나 하였을까? 저분들이 한때 그토록 철저한 야전군인이었고, 그 가족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정겨운 모습들이었다.
31기 선배들의 성공적인 행사를 보고나니 우리도 그 못지않게 잘 해야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우리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 다음 모임에서 우리 코끼리들은 31기 선배 행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본받을 건 본받고, 버릴 건 과감하게 버리자.” 이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많은 의견들이 오갔다. 서로간의 생각과 견해가 달라 의견 충돌도 있었다. 하지만 큰 가닥 몇 가지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그 하나는 손자 손녀들의 초청은 지양하자는 것이었다. 손주들과 함께 했던 연병장 행진이 너무나 아름답고 그 의미 또한 컸지만, 아이들이 너무 어려 2부 행사 진행이 산만했고, 무대 앞에 모여 아이들끼리 떠들어대는 바람에 진행이 중단되는 등 장애가 된다는 지적이 더 컸다. 31기 선배님들께는 고맙고 또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런 결정은 그 행사를 직접 참관하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또 참석하신 훈육관님을 모두 강당 앞으로 모시는 일도 하지 않기로 했다. 기왕에 단상으로 모신다면 기꺼이 한 말씀씩 청해 듣는 게 도리고 또 격식에도 맞으련만, 선배들은 훈육관님을 단상으로 모신 뒤 선물만 증정했다. 아마도 한 말씀씩 청해 듣고자 했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리라. 또한 행사비용을 크게 낸 동기생에게 수여한 감사패도 생략하기로 했다. 감사패는 고마움에 대한 최고의 예우지만 동참하지 못하는 다수의 마음을 더 헤아려서다.
의견이 가장 크게 나뉘었던 부분은 행사 진행이 철저하게 짜임새 있고 격식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군인출신으로서 우리도 본받아야 할 일이었건만 몇몇 임원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 핵심은 지나치게 ‘군인적’이라는 것이었다. 군 색깔을 빼는 게 낫지 않느냐는 견해였다. 처음엔 소수의견이었지만 논의가 거듭될수록 이 주장은 힘을 얻었고, 나중엔 대세가 되었다.
이렇게 몇 가지 큰 가닥에서 합의가 되고 나니 이제는 세부 실천 방안만이 문제였다. (우리가 이런 논의와 함께 나름의 합의점을 찾게 된 것은 모두 31기 선배님들의 행사를 참관한 덕분이었습니다. 성공적인 행사를 이끄셨던 선배님들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날 이후 코끼리 임원들은 매월 정례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듬해 4월로 예정된 행사를 위해 갑론을박 토의를 벌였다. 그 결과 하나의 대원칙에 합의했다. 그것은 40주년 기념행사는 우리 32기들의 축제이고, 따라서 우리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행사 진행과 행사 내용 모두에 대해서 전문가의 손을 빌린다는 방향이 정해졌다. 행사에서 ‘군 색깔’을 지우고 일반인들의 축제처럼 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문 MC와 직업가수를 섭외하여 행사를 진행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전문 진행자와 가수 초청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그건 어린아이도 안다.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충분한 비용을 모금하거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재능 기부’를 얻어내는 일. 우리의 선택지는 후자밖에 없었다. 가수를 정식 초청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부자가 아니잖은가? 다행히도 코끼리들 가운데 전문가수들과 연을 맺고 있는 동기들이 몇몇 있었다. 동기회장을 비롯한 그들에게 특별임무가 주어졌다.
모든 행사에는 비용이 필요한 법이다. 아무런 지출 없이 성공적인 행사를 바라는 건 탁상공론일 뿐이다. 기금이 필요했다. 동기회장과 사무총장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했다. 동기회 자문위원단이 구성됐고, 각 중대 지회장들과 자주 자리를 함께 하면서 아이디어도 공유하고 지혜도 얻었다. 기금문제도 상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40주년 행사의 성공을 위한 각 중대 지회장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이 눈부시게 빛났다. 행사를 2개월 앞두고서부터 기금이 모아졌고, 4월 중순에 이미 목표액을 넘어섰다. (이 기회를 빌려 자문위원단, 각 중대 지회장, 기금모금에 동참해준 모든 동기생들께 동기회장의 이름을 빌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3월 중순이 되면서 가장 바빠진 코끼리는 행사준비위원장이었다. 준비위원장은 모든 위원들의 도움을 얻어 차근차근 일을 추진했다. 초청장, 초청은사 파악, 주소록, 팜플렛에 소개될 32기 소개 글, 강재구 소령 헌화, 강당 협조, 식당, 선물, 전시작품 섭외 및 전시 등.
위원장의 리드에 따라 모든 코끼리들이 제몫을 다했다. 과거 현역시절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선물포장까지 우리가 직접 해야만 했다. (행사 이틀 전, 일손이 필요한 막바지 허드렛일로 고민하던 위원장은 카톡으로 코끼리들에게 긴급도움을 요청했고, 8명의 코끼리가 모였다. 그 모습에 그는 감동했고, 행사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술회했다).
드디어 행사일인 2016년 4월 22일, 금요일.
지난해처럼 화창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구름 낀 날씨로 인해 햇볕에 그을리지도 않으면서 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퍼레이드와 재구상 헌화, 생도대 견학 후 마침내 을지강당에서 우리들만의 행사가 시작되었다. 새얼의 역사를 영상으로 보여주던 말미에, 40주년 행사에 함께 하지 못했던 24명의 고인이 된 동기생들 이름이 하나씩 불리어질 때마다, 우리 모두는 가슴을 쓸어야 했다. 역시 전문 아나운서는 우리들의 아픔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었다.
남복희 아나운서, 그녀는 진정 이날 행사의 히로인이었다. 그녀의 사회로 국방부 군악대가 팡파르를 울렸다. 이어서 걸그룹 써스포의 현란한 춤과, 뮤지컬 가수 박완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가수 유리와 리아킴은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런 걸 심쿵이라 했던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특히 친숙한 가수 김종환이 무대에 섰다. 김종환은 노래도 최고였지만 서툰 듯 차분한 목소리로 좌중을 웃음으로 휘어잡았다. 진정 즐겁고 신명나게 펼쳐진 콘서트였다.
재기 넘친 아나운서의 돌발명령(?)에 따라 초로의 새얼 동기생 부부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그들만을 위한 잔치를 마음껏 누렸다. 그렇게 2부 행사를 마치고 강당을 나서는 부부의 얼굴들은 한결같이 즐거워보였고, 모처럼 회포를 푼 모습이었다.
하지만 축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새얼 동기생들은 만찬이 진행된 육사회관에서 또 한 번의 공연에 넋을 빼앗겨야 했다. 전문 MC 이동은의 사회로 3부 무대가 펼쳐졌다. 육사 군악대 소속 4인조 중창단의 가곡과 이태리 민요는 전문성악가 못지않게 힘차고 아름다웠다. 그뿐이었는가? 지난 세월 동안 갈고 닦았던 몇몇 동기생들의 색소폰 연주와 노래 실력은 또 어떠했던가?
행사가 다 끝난 뒤, 한 손에 기념선물을 받아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동안 수고들 했어. 최고의 행사였네!”
라고 말하면서 악수를 청한 뒤 모교를 떠나는 동기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모든 코끼리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이 날을 위해 쏟아 부었던 정성들이 보람으로 벅차올랐으리라.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을까.
“백세 인생이라는데 동기회 봉사, 아직도 두 번이나 더 남았네. 그래 코끼리들이여! 그때까지 살아서 동기회 감투 한두 번 더 쓰세.”
(행사에 기꺼이 출연해준 아나운서 남복희, 가수 써스포, 박완, 유리, 리아킴, 김종환, 써스포의 TK대표와 행사를 총괄해준 박기주 감독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4. 새얼 동기회 – 임관 40주년 모교기념행사 동기회 소개 글
육사 32기 동기생들의 역사는 1976년 3월 26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들 32기 역사의 근본은 1971년 육사 1차 시험에 응시했던 4,522명에서부터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1,247명이 합격하였지만, 최종합격자로 발표된 인원은 383명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20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화랑대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1972년 1월31일. 가입교생의 신분으로 화랑대에 입성한 생도는 377명이었고, ‘비스트 트레이닝’이라 불릴 만큼 악명 높은 기초군사훈련의 최종관문을 통과한 인원은 357명으로, 오직 이들만이 진정한 육사 32기 동기생이라는 영예의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은 생도생활 4년을 겪어 본 이들만이 안다.
고통과 회한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 회의(懷疑), 분노에 초라함까지. 거기다 ‘절차탁마’는 왜 따라오는지. 어쨌거나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그 생활을 이겨낸 314명만이 졸업하였고 육군소위로 임관했으니 진실로 육사 32기 동기생은 바로 그들이고, 그렇게 32기 동기회는 태동하였다.
우리 32기 동기회는 ‘새얼’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32기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뜻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많은 다른 선후배 기수들의 별칭에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32기는 좀 독특하다. 그래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새얼’은 ‘이 터에 새얼을’을 줄여서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이 생긴 연원은 1974년, 생도 3학년 시절의 하기군사훈련, 광주 동복유격장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행군간 담화를 했다는 이유로 교관이 담화한 교육생들을 밖으로 불러냈다. 혹독한 얼차려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명씩 두 명씩 일어서더니 결국은 모든 동료들이 열 밖으로 나와 새로운 대열을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절차탁마’를 넘어선 ‘동기애’의 발휘였다.
또 하나의 사건은 당시 장애물코스 조교의 도를 넘는 강압적 행동에 동료들 모두가 합심하여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훈련방법의 개선을 유도해냈던 사건이다. 사관생도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켜낸 일화로서 ‘새로운 터’를 일구어낸 사건들이었다.
그 훈련 기간 동기회에서는 이 사건들을 잊지 말고 향후의 군생활에서도 장교로서의 품위와 긍지를 지키며 새로운 틀의 시각에서 군발전을 도모하자는 의미로 그곳에 ‘이 터에 새얼을’이라는 글을 새기고 이를 동기회의 모토로 삼았다. 그러나 글이 너무 긴 탓에 정식 동기회 별칭은 1986년 ‘새얼’로 제정하였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간혹 그 사람의 이름이나 조직의 명칭처럼 운명이 함께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 32기도 그런 경우라 할 것이다.
선후배들이 32기의 특성에 대해 일반화하는 경우가 그렇다. ‘단합이 잘 된다’거나 ‘조용하고 튀지 않으면서도 할 일은 제대로 한다’ 등의 평가가 그렇다. ‘외유내강’이니 ‘김이 나지 않으면서도 뜨거운 감자’와 같다는 선후배의 평가는 생도시절에 만들어진 ‘이 터에 새얼을’이라는 모토가 함축하고 있듯이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건 최선을 다해 그 터에 새얼을 심자”는 32기의 공동정신에서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군에 새얼을 심은 대표적인 32기가 있다. 고 김동수 박사다. 국방과학연구소 재직 시 우리 자주포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그는 그 일에 매달려 수많은 실험을 거듭하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잃었다. 그렇게 그는 그 일을 완수했다. 그 터에 새얼을 심은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랑스런 육사인’으로 선정되어 32기 동기회를 빛내고 있다.
직접 전쟁을 겪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 32기도 어느새 퇴역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동안 22명의 동기생들이 순직 등으로 세상을 떠나 그 아픔이 크지만, 그 가운데서도 새얼 동기회의 면면은 크게 빛나고 있다고 본다.
314명의 임관 동기생 가운데 장군 진급자가 44명이다. 영예의 4성 장군에도 3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육군 최고직위인 정승조 전 합참의장, 김상기 전 육참총장, 그리고 박정이 전 1군사령관이 그들이다. 장군 진급 비율이 동기생 전체의 14%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1982년, 49명의 동기생이 행정부 각부처 사무관으로 임용된 이래, 성기택 관리관(1급)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2급)이 7명, 부이사관(3급)도 14명이나 배출하였으니 장성급 동기생의 비율은 20%를 상회한다.
세속적인 평가이긴 하나 자랑스런 통계라 하니 우리도 그렇게 자랑을 하련다.
공식적으로 위탁교육을 받은 석사 이상의 동기생이 141명에, 박사학위 소지자만도 교수 11명을 포함해 20명에 이르니 동기생 절반이 석사 이상의 고학력자다.
이런 통계의 선후배 기수가 또 있을지 모르되, 이 모든 것이 ‘이 터에 새얼을’이라는 동기회의 모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우리 32기 동기회는 갖고 있다.
‘이 터에 새얼을’에 대해 하나만 더 소개한다. 혹시라도 이 모토의 붓글씨를 본 적이 있는가? 크고 작은 한글로 쓴 이 붓글씨를 보면 누구나 그 필체의 다양성과 강한 기운에 휩싸여 김탄하게 된다. 이 붓글씨는 생전에 이화여대와 육사 서예강사였던 동주 이병호 선생의 작품이다. 동주선생의 필체는 그 특징이 우리 군인의 정서와 아주 잘 맞는다. 강하고 기품있고 또 아름답다. 그래서 생전 그분의 전시회에서 가장 많이 듣던 찬사가 추사 김정희의 재생이라는 말이었다. 생도시절 동주선생의 애제자였던 이현수 교수가 어렵게 받아온 친필이다. 우리 32기 동기회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보물이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우리 동기회를 소개할 것은 많이 있지만 졸업15주년, 20주년, 입교30주년, 졸업30주년, 입교40주년 등을 기념하여 제작된 자료집들이 있다는 말로 대신한다. 특히 졸업1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새얼동기회20년역사집’은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졸업 4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 32기 모두에게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다. ‘잘 지내봅시다’라고 인사 나누던 첫 대면의 순간부터, 동료가 육사를 포기하고 떠날 때의 착잡했던 심정, 한 주일을 긴장하게 만들던 뜀걸음, 사자들의 포효소리 같던 명예의식, 특기식,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추억들이 없다. 그때는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들이었건만 40여년의 세월에 다 녹아 지금은 오히려 그리운 시간들로 다가온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문턱에 서 있지만, 백세인생을 노래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해 있기에 우리 32기들의 미래는 아직도 화려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있다.
졸업 4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40년의 역사를 꿈꾼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이 터에 새얼을’이라는 모토와 더불어 새 목표, 새 비전으로 남은 삶을 이끈다면 50주년, 60주년에는 더 많은 자랑거리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이민수)
첫댓글 아~ 참으로 명 문장에 재밋고 생생하게 쓰셨네여.
50년전 일을 어젯일 처럼.
감동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명 문장을 재미있고 유머러스하게 쓰는 이가 바로 '벽벽벽' 님이라는 거 우리는 다 알아요.
그래도 부족한 글 다 일고 응원해주니 고마워요.
정말 글을 잘 쓰셨습니다. 철학교수님이라 그런가요?
신의 한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코끼리떼의 이유있는 반항이 새 장을 열었습니다. 그 때의 감정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사실감있게 쓰셨네요.
경창호 화백 이야기도 내일처럼 자세히 기록하였고요.
임관 40주년 행사도 바로 이민수 동기와 코끼리 동기들이 얼마나 힘들여 준비하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큼 멋있는 행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노도중대(12중대)도 입교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 새얼동기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만 여러가지 부족합니다. 그래도 오랫만에 모일려고 하니 우리 새얼동기생들 많이 모여서 지나간 이야기로 꽃을 피우기를 기대합니다.
제법 긴 글들인데 세세히 다 읽으셨네요.
아무렴 회장님의 생생한 기록에야 미치겠습니까. 감동은 또 어떻구요.
동기회 이끌어가느라 고생이 많으신데 일일이 응원까지 해주시네요.
임관 50주년 기념행사도 멋지게 해내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도 한껏 응원하겠습니다.
민수박사님 고맙다.
수고했네.최고다
해환이, 긴 글 읽느라 수고했고 고맙소.
선수 코끼리로서 이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했을 텐데 글 쓰다 보니 그 인내심이 경탄스럽네.
그보다 자네의 생생한 '백두대간 종주기'를 이곳에서 읽기를 기대했는데 아직이신지?
해환이 긴 글 읽느라 수고했고 고맙소.
글 쓰다 보니 선수로 생도생활을 한 해환의 고통은 이보다 훨씬 컸겠다는 생각이 드네.
그보다 내게 들려준 백두대간의 생생한 종주기를 글로써 여기서 읽고 싶네요.
민수박사,
생생한 그 시절의 증언들이 바로 엊그제 같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는 팩트와 조금 다르니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기록을 위해 저하고 한번 토의 합시다. 하하!
긴글 수고 많았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소 긴 글들 읽어주셨으니.
역사는 팩트에 기초해 기록해야 참 역사지, 아니면 소설이나 허구에 불과합니다. 내 머릿속의 팩트에 기반해 쓴 글이다 보니 혹여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네요. 꼭 바로 잡읍시다. 막걸리 한잔 놓고 돌아볼 날 고대할게요~^^
잘 읽었어요. 글이 그림이나 사진을 보는듯 선명하네요. 처음 부분에서는 7중대에서 3학년을 보내지 않은게 참 다행이라 여겨졌는데 글을 다 읽고나니 7중대가 부럽네요. 경창호 화백의 전시회에 갔었군요. 나도 가고싶었지만 팜플렛에 축하의 글만 남기고 가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감삼했는데 그것도 후회되는군요. 민수 동기도 그림 잘 그렸고 동주 선생한테 수묵화도배우지않았던가요? 김동수 박사 얘기도 감동적입니다. 김동수 박사가 나와 같은 5중대라서 더욱고맙습니다. 우리 동기회의 역사를 간결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고마워요. 이제 70이 넘어 노년이 되었으니 건강관리 잘해서 좋은 글 많이 남기길 바랍니다.
한편의 화랑대 파노라마를 보는 듯했네. 자료정리, 생생한 기억들이 새로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