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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쓰는 세월, 버리는 세월>의 줄거리 :
허락된 세월을 쓰는 사람이 있고 그 세월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송세월로 인생을 채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자 이스라엘이 될 때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모든 세월을 버리고 허송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는 이스라엘로서 사는 동안 평생을 허송세월한 끝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질 기회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이 기회를 살려서 하나님에게 집니다. 비로소 야곱이 참 선민다움을 얻는 순간입니다.
쓰는 세월, 버리는 세월
(창세기 42:26 ~ 43:14)
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42장 후반부에는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와 보고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애굽에는 둘째 아들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있고, 요셉은 정탐꾼의 의심을 벗기 위해서는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들은 야곱의 반응이 36~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절대로 베냐민을 데려갈 수 없다고 못 박습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데려간다면 분명히 불행한 일이 닥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다가온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43장으로 넘어가면 기근 때문에 다 굶어 죽게 생긴 상황에서 다시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때 유다는 베냐민을 데려가야만 함을 밝힙니다. 유다는 자기가 책임지고 데리고 오겠으니 베냐민을 동행하게 해달라고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그리고 11절부터는 다시 이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 이어집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무척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합니다. 야곱은 비로소 이 지점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어 나르는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야 자식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 던져버리고 마음에서 자식을 죽입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쓰는 세월, 버리는 세월’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쓰는 세월이란 몸이 살아있는 기간을 아주 알차게 잘 쓰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버리는 세월이란 몸이 살아있는 기간을 허송세월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씁니다. 노력하고 수고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허송세월하는 삶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만나면서 이상하리만치 자기의 정체를 숨깁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정탐꾼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베냐민을 데려오기를 요구합니다. 단순히 베냐민을 보고 싶어 했다고 이해하기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형들은 궁지에 몰렸고 시므온은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이제 베냐민까지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36절을 보면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야곱의 마음이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내 삶의 모든 상황은 나를 대적하기만 하느냐?’라고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기근 때문에 야곱이 평생 모은 소유는 다 거덜 나게 생겼습니다. 이것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시므온은 인질로 잡혔고 애굽의 총리는 베냐민까지 데려오라고 합니다.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김을 받아 잃은 기억이 있는 야곱으로서는 이제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면 이미 잡혀있는 시므온은 물론이고 베냐민을 포함한 아들들 전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어쩌면 그렇게 납덩어리와 같은 무게만 실어주는지 견딜 수가 없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는 말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상황이 될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선택을 한 것일까요? 베냐민이 보고 싶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형들을 돌려보내봤자 당장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들을 만난 시점에서 요셉에게는 아버지와 가족들을 다 부를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단순히 베냐민이 보고 싶어서 데려오라는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에 불타서 이러한 요구를 한 것 또한 아닙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이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정식으로 형들과 상봉합니다. 45장 5절을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했고, 7절에서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요셉의 마음에서는 이미 형들을 용서했고 정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형들을 속였던 것일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정탐꾼이라는 혐의를 씌워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는 바람에 아버지와 형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잘 보면 요셉이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42장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닌 야곱으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43장에 오면 이상할 정도로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생긴 이유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를 이긴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음에서 붙잡았던 세상 좋음을 놓고 대신 하나님 좋음을 붙잡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였지만 야곱은 이러한 요구를 이기고 세상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제발 네가 붙잡고 있는 세상 것을 놔라. 그 세상 것들은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놔라. 그 대신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처럼 나를 영광의 자리에 붙들어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요구를 뿌리치고 계속해서 세상 것을 붙잡은 상태를 유지했고 하나님께 축복을 강요했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사랑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방식을 이겼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필요한 축복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입니다. 42장까지 계속 야곱으로 불렸으나 43장에서 이스라엘로 바뀐 것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점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야곱과 마지막 씨름을 하시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신 것입니다. 이 씨름에서 하나님이 얻으시려는 것은 야곱이 마음에 붙들고 있는 세상 좋음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좋음을 붙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 좋음을 붙잡게 하시려는 마지막 씨름을 거시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43장은 바로 이러한 장면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번 씨름에 걸린 대상은 베냐민과 애굽에 잡혀있는 시므온과 나머지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들들은 정탐꾼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아들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야곱은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얍복강가에서 느꼈던 불길함과 같습니다. 야곱은 형의 복수에 의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얻었던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릴 위협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두려워 떨며 하나님과 씨름하며 이겨버립니다. 이번에는 시므온이 잡혀있고 베냐민을 보내야 하며 다른 아들들도 잃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을 잃은 것 같은 불길한 일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한번 얍복강가의 씨름을 걸어오십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굉장히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씨름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집니다. 43장 13~14절을 보면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자식들을 죽입니다.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말은 마음에서 자식들이 없는 상태를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 전 루스 들판에서 꿈에 사닥다리 환상을 보았을 때 나왔어야 하는 고백입니다. 야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가졌어야 되는 마음입니다.
야곱이 일찍이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야곱의 생애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애가 어땠는지 떠올려 봅니다. 야곱에게 요셉과 베냐민 같이 소중한 대상이 있듯이, 아브라함에게도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소중하게 여겨질 대상들이 있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었고, 아들 이삭이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었으며, 삶의 터전이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과 자신의 미래까지도 마음에서 다 죽이면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아브라함을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며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을 날마다 키워갔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늘에서 알차게 쓰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서의 인생의 기간을 하나님이 알차게 써 가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늘리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대로 아브라함의 세월을 알뜰하게 써가십니다. 그런데 그런 영광의 하나님이 당신을 제시하시면서 분명히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28장 15절을 보면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너의 미래를 내가 책임질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 먹을 것, 입을 것을 내가 다 공급할 것이다. 내가 계획한 바를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대응은 아브라함과는 달랐습니다. 야곱은 마치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못 들은 것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하나님에 의해서 먼저 이야기되었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너무나도 두려웠는데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아버지만을 내 마음에서 지켜내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야곱은 자기의 바람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그 내용이 20~22절에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 취직시키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야곱의 인생은 허락된 세월을 쓰지 못한 채 버리면서 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소중하고 좋아서 아까워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붙잡는 바람에 하나님을 붙잡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과 하나님을 가졌다는 소유감을 날마다 불려 나가는 일에 내 마음은 다 투입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실제의 나’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 것의 좋음을 놓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인생에 주어진 세월을 버리게 됩니다. 허송세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베냐민을 계기로 다시 벌어진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야곱은 드디어 패배를 선언합니다.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야곱의 고백에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주도하던 인생은 이제 끝이 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지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오기까지 야곱의 모든 과정은 허송세월이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는 과정을 생각해 봅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해 주신 자손이 모래알처럼 많아지리라는 첫 단계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의 첫째 아내 레아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의 네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들 중에 유다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야곱의 아내가 될 것을 미리 정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일입니다. 그리고 요셉과 베냐민을 낳은 라헬도 야곱의 아내가 될 것을 정해놓으셨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몸종이었던 실바와 빌하도 열두 지파에 속하는 아들들을 낳기로 하나님이 정하신 자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삽니다.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간 수고와 노력을 투입합니다.
야곱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였다면 외삼촌 라반이 품삯을 물어봤을 때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달라는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하란 땅에서 통용되던 노동자들의 품삯대로 주시면 되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13장 9절에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품삯에는 무관심한 상태로 하나님 아버지께만 관심을 집중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은 딸 둘을 시집 보내야 할 외삼촌 라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야곱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라반은 두 딸을 야곱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이 품삯으로 라헬을 요구한 29장 19절에서는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라고 했습니다. 라반은 이미 두 딸을 야곱에게 줄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마음에서 영광의 라헬을 붙잡으면서 14년을 헛바퀴를 돌게 됩니다. 허송세월을 한 것입니다.
야곱의 14년은 두 아내를 얻기 위해 수고와 노력을 하는 노동의 기간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처럼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확장하고 탄탄하게 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기간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했다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삶은 하나님이 쓰시는 기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결혼도 했을 것이고 양 떼도 얻었을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라반과 싸우고 갈등을 겪고 속이는 일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큰 전환점은 얍복강가의 사건입니다. 야곱은 형과의 상봉을 앞두고 두려워서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야곱은 마하나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야곱에게 군대를 보여주셨던 것일까요? 지금 야곱의 적은 복수심에 불타는 에서입니다. 군대를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에서와 싸우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미 에서는 하나님의 군대에 의해서 모든 원망과 복수심을 잃고 반가운 마음으로 야곱을 맞이할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이 씨름이 허송세월이고 쓸데없는 짓이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영광의 하나님을 붙잡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가졌다는 소유감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대로 야곱의 삶을 이끌어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야곱에게 주어진 시간은 다 허송세월로 버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야곱은 베냐민 하나를 붙잡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얍복강가에서 에서의 마음이 다 누그러졌다고 말씀해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바람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붙잡고 있던 세상 좋음을 자발적으로 죽이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상 좋음 대신 자발적으로 하나님 좋음을 붙잡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셨기에 이미 다 해결된 일임에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에서에게는 이미 야곱을 죽일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야곱이 보내는 선물도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에게서 지켜달라며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이처럼 허송세월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허락하신 세월을 땅에서 쓰시기만 하면 결혼이든 자식이든 다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야곱이 라헬을 영광의 자리에서 붙잡고 14년 허송세월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14년만큼 늘리고, 하나님의 소유감을 14년만큼 늘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14년이면 하나님 재벌이 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야곱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도 마지막으로 야곱과 씨름하십니다. 요셉의 신분을 가장하게 하셔서 형들에게 엄포를 놓게 하십니다.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이 상황을 내가 원하는 대로 축복하지 않으신다면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이겼던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어 나르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이 아들들을 지켜주신다면 지켜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들을 버리신다면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절대로 죽을 수도 없고 잃을 수 없도록 이미 조처해 두셨습니다. 베냐민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포로로 잡힌 시므온으로부터 다른 아들들도 머리카락 하나 손상되지 않도록 조처해 두셨습니다. 야곱이 혼자 괴로워했을 뿐입니다. 야곱은 ‘내 마음에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영광의 세상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오십 년 전에 루스 들판에서 이루어져야 했던 마음가짐입니다. ‘내 인생이 망가지려면 망가지리로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셔서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붙잡겠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서 인생에 허락된 세월을 다 쓸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야곱의 세월을 땅에서 쓰셨을 것입니다.
야곱은 허송세월하고서야 마지막 인생의 단계에서 베냐민과 아들들을 놓고 하나님이 걸어오신 씨름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잃으면 잃겠습니다. 내 마음에서 자식들을 다 죽이겠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주권의 하나님만 바라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이제 와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나중에 바로 앞에서 130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심한 고통을 받으며 선교 활동을 했지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합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세상 것을 원하는 만큼 갖기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그러한 인생이 험악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세월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버리느라 수고했고, 세월을 버리느라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기에 험악한 세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일생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넓은 범위에서 세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돈을 예로 들어봅니다. 돈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쓸 돈이 없다는 것일까요? 버릴 돈이 없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쓸 돈이 있고 버릴 돈이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을 가지고 키우고 확장하는 일에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 상태를 유지하는 중에 지출하게 되는 돈은 쓰는 돈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서 갖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위해서 지출하는 돈은 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있고 없음을 따지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육체를 입은 내가 죽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서 예수님의 몸을 입고 승천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아버지와 마주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마주 보고 계시는 상황에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기억하는 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 보고 계신 상황에 참여하는 중이기 때문에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만들어 놓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를 입고 있으면서 세상을 볼 때보다 현저히 돈을 지출해야 될 일은 없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쓴 돈은 다 버린 돈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으로 마음을 채우고 확장하면서 하나님 부자가 되기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돈을 지출해야 할 명목 자체가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돈이 없다고 아우성치고 돈이 없다고 원망하는 모든 일은 버릴 돈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으로 채우고 나서 지출을 생각하면 돈이 없다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돈을 쓰고 싶고, 무엇인가 사고 싶고, 무엇인가 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려면 돈이 들고 움직이려고 해도 돈이 들어갑니다. 그럴 때 얼른 마음으로는 육체를 입고 있는 나를 확인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나의 유일한 좋음으로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내 안에 많이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소유감을 늘리자. 하나님의 있음만이 유일한 있음으로 여겨서 하나님 존재감을 늘리자.’라고 생각하며 한 시간이라도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십중팔구는 지출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집니다. 돈은 쓰라고 있는 것이지 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세월은 쓰라고 있는 것이지 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나면 세월은 버릴 수밖에 없고 돈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들어온 돈을 버리면 안 됩니다. 내게 주어진 세월을 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일에도 적용됩니다. 부부관계도 써야지 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으로 채우고 확장하는 일에만 관심하는 중에 배우자를 볼 때 부부관계는 쓰는 것이 됩니다. 친구와 만난다면 친구와의 관계도 쓰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는 세상 좋음을 붙잡게 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놓지 않고 있는 상태처럼 관계하게 됩니다. 그럴 때 모든 관계는 버려지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으로만 채우고 있다면 그 관계는 하나님이 쓰십니다. 그런데 내가 관계함으로써 다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그 시간은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갖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시간 또한 버려지게 됩니다.
야곱은 인생 전체를 허송세월한 끝에 베냐민과 시므온과 아들들을 건 마지막 씨름에서 하나님께 집니다.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야곱의 패배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몇 살이나 되었든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월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월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버는 일에 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고자 내게 허락하신 세월을 쓰실 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생을 알차게 써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허락하신 것들 중에 써본 적 없이 버리기만 하는 허송세월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남은 생은 허락하신 것들 중에서 버리는 것 없이 쓰기만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일에 목숨을 걸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