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 부인 장황왕후 오씨의 지혜
후백제의 민심이 이반된 틈을 타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고 오다련군 등 서남의 귀족들은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갑판 선상에서 시내 위를 바라보던 왕건이 오색(五色)의 운기를 보고 달려갔다가 빨래하고 있는 오씨를 보았다.
본래 신분이 낮은 나주 호족의 딸이었으나, 태조를 만나 혜종을 낳고, 대광(大匡)인 박술희(朴述熙) 등의 비호를 받았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도 나주 지역에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다.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에 감동한 태조가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태조는 혜종 왕무가 임금될 자격이 있음을 알았으나 모후의 신분이 미천하여 주변의 반발이 있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징표로 옷상자에 자황포(黃袍)를 담아 전해주었다. 뒤에 왕건이 태자 무를 책봉할 때 왕건이 징표로 오씨에게 하사한 자황포 비단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자,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正胤 태자 무(太子 武)으로 삼기를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934년을 전후해서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설에는 943년 아들 혜종의 즉위를 보았으나 2년 뒤 아들의 서거도 목격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녀가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기록에 남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패하였던 장화왕후의 사후에 한 가지 전설이 덧붙여졌다. 고려사에도 수록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빨래터에서 만난 오씨를 불러 시침하였으나 오씨가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므로 임신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비하성 전설이 고려사에 전한다.
그 후 혜종이 태어났는데,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하여 왕을 상징하는 '용'자를 써서 이름을 '흥룡동'이라 하였다. 당시 처녀가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이 지금도 나주 시청 앞쪽의 도로 옆에 있고, 그 옆에는 왕비의 비(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