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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전3권 중 제2권
지은이: 조영래
제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에서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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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리의 천사'에서 평화시장의 노동자로
서울 동부지역 청계천 6가에서부터 서울운동장 쪽으로 약 6백 미터에 걸쳐 뻗어
있는 3층 연쇄건물이 평화시장이다. 그리고 이 평화시장 건물의 제1동 사이,
서울음악대학으로 들어가서 골목길 좌우에 동화시장의 5층 건물과 통일상가의 4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 악취 풍기는 청계천 연변에
무허가 판자촌들이 다닥다닥 늘어서서 서울 도심지의 일대에 빈민굴을 이루고
있었다. 이 판자촌 일대에는 2층까지 소규모 피복공장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청계천 복개공사가 완공되면서 이 판자촌이 철거된 자리에 1961년 연건평
7천4백여 평의 평화시장 건물이 들어섰고 여기에 철거되었던 옛 피복제조업자 및
의류상들이 들었으며, 건물은 수백 개의 점포와 작업장으로 나뉘어져 각 개인별로
분할등기되었다.
시장법에 따라 발족한 평화시장주식회사는 시장내의 경비와 청소 및
관계관청(국세청, 노동청 등)을 상대로 하는 외부와의 교섭을 도맡아 처리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차차로 노동운동을 제약하기 위한 업주들의 대변기관 노릇을
하게 되었다. 1968년 8월에는 연건평 5천 7백평의 동화시장이 들어섰다.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하였던 1970년도 현재의 이들 3개 시장의 형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들 3개 시장과 신평화시장 및 근접건물들을
합친 작업장의 총숫자는 약 8백 개이며,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노동청의 집계에 의하면 3개 시장을 합하여 428개 작업장에
노동자는 7천 6백여 명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특히 노동자의
숫자는 노동청이 직접 조사한 것이 아니라 각 업주들이 신고한 숫자를 그대로
합산한 것이었던 바, 업주들은 자신의 업체가 근로기준법 규정의 적용을 받는
종업원 16인 이상의 업체가 되지 않도록 실제 숫자보다 훨씬 줄여서
신고하였으므로 위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 3개 시장은 당시 전국 규모의 각종 기성복 공급시장으로서 확고한 상권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작업장(공장)들은 대부분 건물의 2층과 3층에 자리잡고
있어서 여기서 생산되는 제품이 아래층에 자리잡고 있는 점포(판매장)로 운반되어
도매 또는 소매된다. 생산되는 제품은 계절에 따라 다른데, 가을과 겨울에는 주로
잠바, 바바리 코트, 스웨터 등이, 그리고 여름에는 주로 홑잠바와 바지가 또는
때로는 남방셔츠나 수영복 등이 생산된다. 이 제품들은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대도시는 물론이요, 교통이 불편한 강원도의 영월, 철원과 심지어는 바다 건너
제주도에까지 흘러나가고 있어서 1970년 현재 전국 기성복 수요의 약 70%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소비자들이 주로'서울 물건'을 찾는 데다가 숙련기술공들이 대부분 이
3개 시장으로 몰리는 까닭에 지방에 분산되어 있는 피보제조업자들이 이 3개 시장의
상권에 도저히 맞설 수가 없어서 도산하거나 아니면 시장 주변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평화시장 일대는 나날이 팽창하고 있었다.
경기가 좋을 때는 평화시장 일대에서는 "만들기만 하면 팔린다"라는 말이
그대로 통할 정도였다. 추석 대목과 같은 시기에는 각처의 소매상들이 줄을 지어
빽빽히 늘어서서 갓 생산된 제품을 사가려고 현찰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들 3개 시장 일대의 사업주들은 태반이 4__6백만원, 고작해야
1천만원 정도의 자본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영세업자들이기는 하지만, 경기만
제대로 타면 미싱 서너 대를 놓고 시작한 업주가 불과 1__2년 사이에 스무 대,
서른 대의 미싱을 차려놓고 사업을 벌이며, 그 밖에도 집도 사고 땅도 살 만큼
치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러나 평화시장 일대의 이러한 번영이나 업주들의 치부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거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실로 참혹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피복공장 내의 직종은 대체로 재단사, 미싱사,
미싱보조, 재단보조, 시다 등으로 나눌 수 있다(이 밖에도 제품을 마무리하는
'마도메'와 다리미질하는 '시아게' 등의 기능이 분화되어 있는 곳도 많다).
1970년 현재 각 시장별 노동자 분포를 보면, 동화시장 1백 60개 작업장에 4천 8백
명, 통일상가와 그 근접 건물이 2백여개 작업장에 8천 명, 평화시장과 신평화시장을
합쳐 5백여개 공장에 1만4천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었다.
이 중 한 예로 평화시장의 경우를 보면, 총인원 약 1만명 가운데 미싱사(미싱보조
포함)가 4천 명, '시다'가 4천 명, 재단사가 3백명, 재단보조가 4백 명이었고 그밖에
'시아게', 공장장, 점원을 합쳐 3백 명, 업주는 1천 명 정도였다. 이 중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이 여공들이고 재단사와 재단보조는 주로 남자들로서, 평화시장 일대를
통틀어 여공이 약 80--90%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시다'란, 말이 견습공이지 실제로는 하나의 독립된 임무를 담당하는 노동자라서
보조 없이는 일해도 시다 없이는 일 못한다고 하는 정도이다. 시다의 직책은
작업장에 따라 또는 작업의 종류에 따라 반드시 일정하지는 아니하나, 요컨대
미싱사(혹은 재단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것이 시다의 일이며, 하루
종일 다리미질과 실밥 뜯는 일, 실과 단추를 나르는 일로부터 업주나 미싱사나
재단사의 사적인 잔심부름까지도 하게 되는 무척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다.
시다는 대부분 가정이 어려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2--15살의 소녀들이
기술을 배워 집안을 도와보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다. 일이 바쁜 철이면 평화시장
일대의 공장들 문 앞에는 '시다 구함'이라는 구인광고가 몇 공장 건너 하나씩
나붙어 있을 정도로 일자리는 많다.
멋모르고 시다가 되었던 어린 소녀들 중에는 몇 달만 일하고 나면 그 고된
생활에 질려서 직장을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고 재단사나
미싱사 밑에서 약 1년 반 내지 2년 동안 노동한 끝에 보조공으로 승격되어 월급도
시다보다 많이 받는 경우도 있다. 미싱보조의 경우, 보조생활을 시작한지 대체로
3__4년이 지나면 하나의 완전한 노동자로서 독립할 수 있다. 일류 미싱사가 되면
자신의 밑에 보조공을 둔다. 이른바 '오야'미싱사로서 작업량에 따라 보수를 받게
된다(오야 한 사람, 보조 한 사람, 시다 2명으로 되는 4인 1조의 작업조가
짜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일류 미상사가 되기 위해서는 견습공 생활로부터
시작하여 대체로 6--8 년이 소요된다.
각 작업장에는 평균하여 10대 정도의 일본제 고속재봉틀이 있는데, 재봉틀 1대에
미싱사 1명, 시다 1명이 배치된다. 그리하여 재봉틀 10대가 있는 작업장의 경우
10명의 미싱사(재봉보조공 포함), 10명의 시다, 그리고 재단사 1명과 재단보조
1명 정도의 노동자가 근무하게 된다. 재단사는 작업장에 쌓인 원단을, 생산할
제품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일정한 치수로 재단을 하여 각 작업조에 그날그날의
일거리를 나누어준다.
시다는 받침대 위에다 재단사로부터 받은 옷감을 올려놓고, 그것을 미싱사가
재봉을 할 수 있도록 접어서 다리미질을 하여 재봉대 위에 대어주며, 그렇게 하여
재봉이 다 되어 나온 것을 다시 받아서 주머니 구멍을 가위로 따거나 재봉한
자리에 남아 있는 실밥을 뜯어낸다.
오야미싱사는 시다가 갖다준 일감을 비교적 쉬운 것은 보조에게 주고 어려운
것은 자신이 직접 재봉을 하는데, 예컨대 잠바의 깃이나 자크, 소매를 다는 일 등은
오야가 전담하고 주머니 달기나 잠바 안쪽 같은 것은 보조에게 넘긴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제품은 마도메(완성공)에게 넘겨져 실밥을 따고 단추를 단 후, 다시
시아게로 넘겨져 다려진 후 시장 일층 점포로 가서 진열되거나 또는 전국 각지로
수송되는 것이다.
이상의 개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평화시장 일대의 피복제조업이란 고도의
노동집약 기업인 동시에 가내공업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영세한 규모이며, 그
노동의 성격은 숙련노동에 속한다. 이러한 영세업자들의 치부의 비결이란
극단적인 저임금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평화시장
일대에 수없이 밀집되어 있는 이 영세기업체들은 일찍부터 '평화시장주식회사'라는
그들의 동맹기구를 통하여 알게 모르게 일종의 저임금 기업연합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공동전선을 펴고 있는 반면에, 수많은 소규모
작업장에 분산되어 있으면서 거의 숨돌릴 틈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하여 단결하고 쟁의를 일으킨다는 것은(전태일의
기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이 미조직 상태의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은 상당 수준의 숙련된
기술을 지니고 중노동을 하면서도 한국에서도 최하급 수준인 노동조건 아래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이 노동자들의 직장 보장은 매우 불안하고 불완전한데, 추석 대목이나
크리스마스 또는 음력 설날 같은 때에는 일거리가 밀리면 보름씩 또는 한 달씩
계속하여 철야작업을 강행할 정도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반면에, 대부분의
공장들이 이른바 비철(비성수기)이 되면 일정한 기간은 일거리가 줄어들거나
아니면 아예 떨어져서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예컨대 음력설 후의 보름 내지
한달 정도와 여름철인 7__9월 사이).
이 무렵이면 평화시장에서는 의례히 실업자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고,
요행히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경우도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빈둥빈둥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식으로 반실업 상태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철이
바뀔 때마다, 노동자들이 '인간시장'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부르는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노동자들의 홍수가 밀리곤 하였고, 철새처럼
철마다 직장이 바뀌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또 일류 미싱사들의 경우에는
대목 때 철야작업을 해서라도 올린 수입으로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지긋지긋한 실업의 계절을 그럭저럭 넘기는 일이 가능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보조나 '시다' 등의 경우에는 이 기간을 견디지 못하여 아예 피복제조업을 떠나
다른 계통에서(예컨대 가정부, 술집 접대부, 버스 차장, 냉차 장사 등등)
돈벌이를 찾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로서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4년 봄경, 그의 나이
16살 때 시다로서였다.
그 뒤로도 그는 평화시장에서만 일하지 않고 구두닦이, 우산 장사 따위의 일을
간간이 하였는데, 그가 평화시장 노동자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것은 대체로
1965년 가을 무렵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시다로 취직하게 된 경과는 이러하다.
태일이 동생 태삼과 서울에서 다시 만나 두 형제가 나란히 구두통을 메고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그가 구두를 닦으러 돌아다니다가 평화시장 근처에까지 와서 어떤
학생복 맞춤집(삼일사) 옆에 '시다 구함'이라고 써붙인 광고를 보았다. 그 다음날
그는 찬물에 깨끗이 목욕을 하고 헌 누더기 옷을 떨어진 곳을 깁고 깨끗이 빨아서
다려 입은 후,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주인이 몇 마디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취직을
시켰다. 이렇게 하여 태일은 오랫동안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임금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구두닦이, 껌팔이, 신문팔이, 양아치, 창녀 따위의 일종의 떠돌이
실직 청소년들이 임금노동자로 취직을 할 때, 그것은 그들의 인생에 하나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변화를 다소
부자유스럽고 고되기는 하지만, 안정된 직장에서 기술을 배워 일생의 생계를
확보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그들은 "마음 잡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느 창녀가 동료였던 영자를 오랜만에 만나서,
"얘 영자야! 너 요새 뭐하니?" 하고 물었더니 영자가 대답하기를, "응, 나 요새
마음 잡고 빠에 나가" 하였다는 참혹한 농담도 있다.
섬사람들의 오랜 소원이 물에 나가 사는 것이라면, 시골 농부의 소원은 자식에게
지게를 지우지 않는 것이라면, 떠돌이 청소년들(거리의 천사)들의 오랜 꿈은 바로
안정도니 직장생활을 하며 기술을 배워 안락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숱한
버림받은 거리의 천사들이 끝내 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가는 곳이란, 형무소를
제 집 드나들 듯하는 범죄생활의 숨막히는 진구렁뿐이다.
그러나 어디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있는가? 많은 거리의
천사들은 그나마 그들에게 좁은 문을 벌리고 있는 숱한 공장과 작업장들이 실은
그들의 목숨을 좀 먹는 노동지옥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결국(선택의 기회가 있는 경우라도) 형무소냐 노동지옥이냐, 이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하기 위하여 고뇌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전태일은 그러나 우선 저 지긋지긋하고 불안하였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을 느꼈다. 첫출근을 하는 날. 그의 가슴은 새로운
희망과 꿈으로 부풀었다. 지금 당장 생활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구두닦이 때보다 더 궁핍한 생활, 더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겨나가며 기술을 배울 때에는 새로운 살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
그것이 그의 어린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한 달 월급은 1천 5백 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백 20원인데 일당 오십
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성루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
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내 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전태일이 처음 시다생활을 시작할 때에 대한 기록이다.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잔 값밖에 안되는 일당 50원, 기막힌 저임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전태일은 아직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하물며
그것을 시정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 당시 무엇보다도 그의 머리에 꽉 들어차 있었던 것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빨리 기술을 배워 셋방 한 칸이라도 얻을 수 있을 만한 돈을
장만하여 식모살이 하실 어머니와 길바닥에 버렸던 막내 순덕이를 데려오는
일이었다. 그리고도 그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생활의 여유를 가지고 나서
고학으로 대학까지 마치겠다는 옛부터의 절실한 집념이었다.
시다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후 마침내 음식점 '도원'으로 찾아가 어머니를 만났던
순간에도 그는 또다시 "빨리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되새겼다.
나의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눈에 표나게 야위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어서 빨리 돈을 벌어 다른 사람보다 어머니를 좀더 편안하게 모시리라
다짐하게 했다.
어머니와 힘을 합쳐 남산동 50번지에 셋방을 얻게 되어, 어머니가 중앙시장을
다니면서 야채장사를 하여 태일이 형제의 생활을 도와주게 되면서부터는 그의
수기에 의하면, 그는 "새벽에 여관에 가서 구두 닦는 일, 밤늦게 껌과 휴지를 파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열심히 기술만 배우면 되는 전보다 몇 배나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래 미싱일에 경험이 있었던 태일은 남달리 빨리 익힌 기술이 주인에게
인정되어, 곧 월급도 한 달에 3천원을 받게 되고 잔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미싱보조'가 되었다. 그의 가족이 모두 다시 모여 살게 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삼일사의 미싱보조로서 기술을 어느 정도 배운 그는, 1966년 가을에는 평화시장
뒤골목 통일사에서 어린아이들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때 전태일의 나이 열 일곱. 오랜 방황도 끝나 가족이 모여 살게 되고 원하던
기술도 익히면서 그는 청년노동자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을 배워
어머니, 아버지를 편히 모시겠다던, 그리고 끊어졌던 배움이 길을 뒤늦게나마 다시
걷겠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 평화시장의 지옥과 같은 처참한
노동현실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왔다. 떠돌이생활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금노동자로서의 괴로움이 그의 꿈을 짓밟고 그의 분노를 들끓게 하는 쇠사슬로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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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동지옥 1. 다락방 속의 하루
무슨 말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평화시장의 저 참혹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 열세 살의 한 여공이 있다고 하자. 그 아이의 이름이 시다, 평화시장의
시다이다.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한창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중학교 1학년쯤에 다니고 있을 나이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답십리 빈민촌의 한
판잣집 단칸방에 살며 평화시장을 다닌다.
하루 중에 가장 속상한 때는 이른 아침 언니 잠을 깨울 때이다. 제발 그놈의 잠
한 번 실컷 자봤으면 원이 없겠는데 정신없이 자는 그녀를 언니는 매정하게도 몇
차례고 뒤흔들어 기어이 깨워놓고야 만다. "5분만 더 누웠다 일어날께, 제발 좀
내버려둬줘" 하고 애원을 하건만, 그러나 언니는 이 측은한 동생이 언제나
아침 8시 전에 평화시장에 닿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서 바삐 집을 나선다.
만원 버스 속에서 시달리다가 청계천 6가쯤서 내릴 때면 벌써 아침밥 먹은 기운이
다 빠져버린다. 그러나 정작 고된 것은 이제부터다. 조금 후 그녀는 평화시장
3층의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숨이 턱턱 막히는 먼지구덩이의 작업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재단판과 열너댓 대 되는 재봉대(미싱다이)와 거기에
맞붙은 시다판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방안에 꽉 들어차고 그 틈서리틈서리에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이 종업원 32명이 끼어 앉아 일한다.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약 1.5미터 정도. 이것이 저 악명 높은 다락방이다. 원래는 높이 3미터 정도의
방이었던 것을 공주에다 수평으로 칸막이를 하여 그것을 두 방으로 만든 것이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왜 그녀에게는 이렇듯 좁은 공간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여공들은 허리를 펴고 걸어 다닐 수가 없다. 청계천 6가쪽 고가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면서 이 작업장들을 보면 마치 무슨 돼지우리나 닭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밀폐된 닭장 속에 갇혀서, 끊임없이 재봉틀의 소음 속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노동을 한다. 작업 도중에
일어나 변소 한 번 가려고 해도 '주인 아저씨'와 '미싱사 언니'들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녀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고된 것은 다리미질이다. 겨우 열서너 살짜리
소녀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을 훅훅 뿜어내는 그 무거운 다리미를 들고 옷감이
눌지 않도록 온 신경을 써가면서 다리미질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하 번이나 두 번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온종일 끝도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위험한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을 오르내리며 공장 안의 크고 작은 온갖 심부름을 해야 한다. 재봉이 된
것을 되돌려 받아 일일이 실밥을 뜯어내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주인 아저씨나 미싱사 언니에게서 일 잘못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야단을 맞는 일이다. 벼라별 욕설도 다 들어야 하고 때로는
매까지 맞아야 한다. 기름냄새, 땀냄새, 원단에서 나는 냄새, 옷감을 짜르고
재봉할 때마다 풍기는 먼지 속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노라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코를 풀면 시커먼 콧물이 나온다.
일거리가 밀려 야간작업을 할 때면 정말이지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난다. 연거푸
이틀 밤, 사흘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일할 때에는 정신이 아득하여 저도 모르게
눈이 저절로 감긴다. 졸지 마로 밤일 잘하라고 주인 아저씨가 사다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한 다음날에는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 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집에서 쉬는 날이라고 한 달에 이틀뿐,
부잣집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자가용차를 타고 주말 농장 같은 곳으로 놀러나갈
때에도 평화시장의 열세 살짜리 소녀는 햇빛이 통하지 않는 어두운 작업장에 갇혀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뼈빠지게 일을 해도 그녀의 한 달 임금은 평균 3천 원(1970년도 현재).
왕복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 집안 생계에 조금씩 보태고
나면 점심을 사먹을 여유가 없어서 1개에 1원짜리 풀빵 몇 개로 점심을 때우거나
아니면 아예 굶으면서 일하는 시다들이 태반이 넘는다. 삶은 파처럼 지친 몸을
무겁게 끌고 꾸벅꾸벅 졸면서 밤 11시가 넘어 집에 돌아오면 밥술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옷 입은 채로 그대로 쓰러져 눕는다. 좁은 방안에 여러 식구가 꽉 들어차
누우니 다리 한 번 마음대로 뻗어보지 못한다. 잠시 온몸이 걸리고 팔다리가
쑤시다가 곧 곯아떨어진다. 새벽이 되면 또 일어나자마자 출근이다. 밥 먹을
여유가 없는데 소화시키기 위하여 쉴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태어나면서부터
굶주림에 익숙해버려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그녀는 이미 재봉사 언니들이 모두
앓고 있는 신경성 위장병이라는 병을 새로이 얻었다.
언제나 끝나려나.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지긋지긋한 생활.
때때로 일거리가 떨어져 작업장에 앉아서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게 될 때면,
그녀는 멍하니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다른
시다들처럼 그만두고 딴 공장으로 옮겨볼까? 그러나 별달리 아는 데가 없다. 빨리
기술을 배워서 미싱사 언니들처럼 두툼한(!) 월급봉투를 집으로 가져가야지 하는
꿈에 잠시 가슴이 부풀기도 한다. 그러나 며칠 전에 어떤 미싱사 언니가 해준
말을 생각하면 또다시 맥이 풀린다.
" 평화시장의 여공생활 8년 만에 남는 것은 병과 노처녀 신세뿐이더라.
너만한 나이 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찌감치 평화시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야."
사실 평화시장에서 한 5년 이상 일한 미싱사 언니들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누렇게 뜬 핏기 없는 얼굴, 퀭한 눈동자, 그리고 거의 전부가 기관지염,
안질, 빈혈, 신경통, 위장병 따위의 환자들이다. 저래 가지고 시집인들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평화시장 여공은 데려가도(결혼) 한 3년밖에 못써 먹는다더니,
정말이지 3년이나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는지 몰라.
열세 살 소녀인 이 시다에게도 이제 곧 그러한 질병들이 차례차례로 찾아들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마음은 항상 어둡다.
웃고 뛰놀자
그리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에의 꿈을 키우자
남산 어린이회관 앞 비석이 새겨진 이 구호는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꿈 같은 얘기이다.
웃으며 뛰놀 수 없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주린 배를 안고 온종일 햇빛을 못 보며, 자꾸 만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막아내며 손발의 감각이 마비되도록 일해도 그날그날의
끼니조차 잇지 어려우며, 병든 부모에게 약 한 첩 변변히 사드리지 못한다.
웃고 뛰놀 수 없다.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찌푸린 마음을 활짝 펴고 뛰놀 정신적 여유도
없으며, 또 뛰놀고 싶어도 뛰놀 장소가 없다.
평화시장에도 점심시간은 있다. 약 30분. 경우에 따라서는 약 1시간. 점심을
굶어야 하는 어린 여공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평화시장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간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찬 청계천 바닥.
오락시설이 없는 그 옥상에서 그녀들은 거기에 깔린 돌멩이들을 주워가지고 이웃한
덕수상업고등학교 운동장에 던지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그들의 짤막한
여가시간이다.
그들에게는 '푸른 하늘을 쳐다볼'권리도 없고, '오늘을 생각할'시간도 없으며,
'내일에의 꿈을 키운다'는 건방진 여유는 더더구나 없었다. 책 한 페이지 볼 시간이
없는 그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랴만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그들, 한 창 피어나야 할 어린 마음이 나날이 겪는 기업주의 눈총과 쌓이는
생활의 번민에 못박혀 어둡게 굳어져야만 하는 그들, 세월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은 피로와 권태와 질병뿐인 그들, 평화시장의 여공들에게 내일은 없다. 하루하루
모진 목숨을 이어나가야 하는 숨막히는 노동의 질곡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스스로의 젊음과 소망과 건강과 생명을 그날그날 갉아먹으며
살아야만 하는 피팔이 인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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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동지옥 2. 평화시장의 인간조건
전태일이 있었던 당시의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노동시간은,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기간(가을, 겨울, 봄)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일거리가 밀릴 때에는
물론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 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
한 달을 통틀어 휴일은 2일. 제1주일과 제3주일의 일요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그것이나마 꼭 지켜지지는 않았다. 여성 노동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곳에서 생리휴가라는 것은 있어 본 일도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요컨대 평화시장 일대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한 '노동시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것이며 업주가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침 8시경에 출근하여 재봉틀 앞에 앉으면 낮 1시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자미
허리를 펴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도시락을 후딱 먹어치우고는 다시 허리를 꾸부리고
작업에 들어가 밤 10시나 11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생활, 중간에 변소 가는
일도 거의 없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생활이 평화시장 여공들의 일과였다.
게다가 이들이 해내고 있는 작업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격무 중에도 격무이다.
미싱사들의 경우 종일 허리를 꾸부리고 앉아서 행여 1밀리라도 착오가 생길세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의 초점을 재봉바늘 끝에 고정시킨 채로 손가락에 뻣뻣이
힘을 주어 옷감을 누르고 발로는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밟는다. 두꺼운 것을 박을
때에는 손가락에다 힘을 주는 것이 어깨를 통하여 온몸으로 힘이 가고 입매까지
굳어져 버린다. 숙련된 미싱사라도 이렇게 오전 몇 시간을 일하고 나면 예외없이
어깨와 등허리가 결려오는 것은 물론이다. 우선 손목이 시어서 견딜 수가 없고
심한 경우에는 점심 먹을 때 젓가락질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싱사의 손가락
끝은 살갗이 닳고 닳아서 지문이 없다. 자크를 달 때에는 둘째와 셋째 손가락 끝이
빨개져서 누르면 피가 솟아 나온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어지럼증이 나고, 장딴지가 띵띵 붓고 몸 구석구석이 쑥쑥 아리게 되며, 힘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가 힘들다. 퇴근할 때 구두를 신으려면 부어오른 발등이
구두에 들어가지 않아 억지로 구두끈을 졸라맨다. 미싱사들의 발등에는 거의
예외없이 구두끈 자국이 남아 있다.
이상은 물론 미상사들의 노동참상의 극히 작은 일부분에 대한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단추구멍을 뚫는 미싱사로 시다로부터 출발하여 5년만에 독자적인
미싱사가 되었다고 하는 한 노동자의 예를 보자.
배군은 요즘 들어서는 제품이 밀려 밤 11시까지 일하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다시 "큐큐"(단추구멍 뚫는 기계)앞에 앉게 된다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작년보다는
낫다고 자위하고 있다.
작년에는 보세가공 제품이 너무 밀려 꼬박 이틀 밤을 세웠는데, 주인이 좀
쉬라고 해서 일어섰더니 정신은 멀쩡한데 몸을 가눌 수가 없어 그대로 쓰러졌고
목에서는 응어리진 핏덩이가 나오더라고 말하였다.
그는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천 근 만 근 무겁고, 아찔한 현기증이 오며,
코라도 풀라치면 골이 쏟아지는 것처럼 아파 오고 새까만 것이 콧물에
섞여나온다고 한다.
'르뽀 평화, 동화, 통일시장', "신동아" 1971 년 1월호
이렇게 장시간의 중노동을 해내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우선 노임지불제도를 보면 미싱사, 미싱보조, 견습공의 경우 대부분이 정액
월급제가 아니라 작업량에 따라(예컨대 1매당 얼마라는 식으로) 지불되는
도급제이다. 따라서 견습공과 미싱보조의 임금은 업주가 직접 지불하지 않고
오야미싱사가 지불하게 되는데 이것은 근로기준법상의 임금지불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이에 의하여 견습공과 보조공의 저임금이 합리화되고 있다.
평화시장 일대의 이러한 도급제도는 업주에게는 유리하게,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작업량에 따라 수입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생활고에 쫓기는
임시공들은 노동시간 단축이나 임금인상 투쟁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하나라도 더
제품량을 늘려서 수입을 올리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몸이
가루가 되든 말든 일감이 많아져서 노동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오히려 환영하는
경향까지 있게 된다.
도 비철의 경우 일감이 적을 때라도 노동자들은 언제 무슨 일이 주어질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작업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다 못 해 주인의 잔심부름이나 청소
따위의 일까지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하여는 일체 보수가
지급되지 아니한다. 더욱이 일거리가 밀리는 대목 같은 때에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제품 1매당 얼마를 준다는 합의를 분명히 해두지 아니하고 그냥 일을
시키고나서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업주가 일방적으로 그저 재량껏 주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실제 작업량에 비하여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이렇게 하여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임금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것은 극히 낮은 저임금이다.
같은 직종의 노동자라도 경력 숙련도 제품 종류 등에 따라서 그 노임이
일정하지는 아니하나, 1970년도 당시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체로 시다가
월 1천8백 원에서 3천 원까지, 미싱사가 7천원에서 2만 5천원까지, 미싱보조가
3천원에서 1만 5천원까지, 그리고 재단사가 1만 5천원에서 3만원까지 받고
있었다. 시다의 경우, 열서너 살짜리 여공이 하루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하여
받는 일당이 70원 꼴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제 날짜에 받지 못하고 닷새나 열흘씩
체불되는 것이 보통이고, 주인이 장사가 뜻대로 안될 때에는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몇 달씩 밀리거나 아주 못 받게 되는 일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평화시장일대 노동자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극히
불량한 작업환경이었다.
겉모습은 번드르르한 평화시장 3층 건물의 내부에 빽빽히 들어차 있는
작업장들을 처음 들어가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질식할 듯한 탁한 공기와 그
지저분하고 어둠침침한 분위기에 놀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비좁은 작업장 안에 평당 4명 정도의 노동자가 밀집하여 일하고
있는 데다, 그나마도 각종 작업 설비와 비품과 도구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의자에
앉은 노동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몸 한 번 돌려볼 수도 없는 답답한 생활을 해야
한다. 작업장 한구석에 쌓인 원단 더미에서는 온종일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작업 도중 쉴 새 없이 옷감에서 실밥과 먼지가 풍겨나와서 먼지가 많이
나오는 옷감의 경우에는 두세 시간만 재봉일을 해도 머리가 하얗게 되며,
점심시간에 작업장에 앉아 도시락 한 입만 먹고 나도 벌써 밥 위에 먼지가 뽀얗게
앉는 것이 보인다. 노동자들은 아예 온몸에 뒤집어 쓴 먼지를 털어버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려 틈만 나면 잠잘 생각부터 앞서고,
몇 달 동안이나 목욕 한 번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그들이 각종 피부병을 앓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람이 밀집되어 있고 악취와 먼지가 많이 풍기는데도 불구하고
작업장에는 환기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 1970년도에 전태일이 조사한 바로는
평화시장의 경우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이면서도 환기시설이 하나도
없었다. 환기장치는커녕 건물구조 자체가 통풍과 채광이 잘 안되게끔 되어 있다.
대부분의 작업장들은 3면이 벽으로 막혀 있고 출입구가 있는 한 면만이 복도와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외부로 향하는 창문이 있어도 열고 닫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형편이었다(동화, 을지시장 등의 경우는 큰 창고 같은 건물을
돼지우리처럼 칸막이를 해서 만든 공장이라 통풍과 채광이 거의 안된다).
나쁜 작업환경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다락방이란 것이었다. 이것은 업주들이 좁은 작업장의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함으로써 생산비를 절감하고자 만든 것인데,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한국의 저임금경제가 딛고 선 냉혹한 인간경시, 인간비료화, 저 참혹한 노동지옥을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멀쩡한 육신을 제대로 바로 펴지
못하고 비좁은 작업장 사이를 허리를 꾸부리고 걸어다니는 노동자들을
상상해보라.
또 한 가지 문제는 작업장 내의 조명상태였다. 거의 햇빛이 들지 않는데도
조명시설은 극히 빈약하여 작업장 내부는 대낮에도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한데다가,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바로 눈앞에 백열전등이 켜져 있으므로 하루 종일 쐬는 이
눈부신 직접 조명으로 인해 거의 모든 노동자들의 눈이 항상 충혈된 상태이며,
밝은 햇살 아래로 나오면 눈을 뜰 수가 없는 등 각종 눈병을 앓게 마련이었다.
이 밖에도 노동자들이 겪는 불편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컨대 변소시설만
하더라도 남녀 공동 변소인데다가 시설량이 부족하여 불결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평화시장 2층의 변소 앞에서 거의 하루 종일 지어 기다리고 서 있을
정도였는데, 2천 명 이상의 인원이 변소 3개를 함께 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76년까지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상수도 시설도 극히 빈약하였고(4백여
개의 작업장이 있는 평화시장의 경우 상수도는 세 곳 뿐) 그나마 수도가 있는
곳에서는 제한급수를 하여 목욕이나 세면은 물론 물먹기조차 힘든 때가 많았다.
물론 3개 시장을 통틀어 노동자용의 목욕 시설이나 세면장을 제대로 갖춘 곳은
없었다. 일거리가 많은 한겨울에도 난방시설이 전혀 없어서 노동자들은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고, 서로서로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로 추위를 참아야 했으니,
한여름에야 얼마나 덥고 답답할 것인가?
이러한 작업환경 속에서 5년 이상을 일해온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건강상태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1. 우선 영양을 제대로 섭취할 리가 없으니 영양실조,
2. 식사를 제때에 못하고 소화시킬 여유도 없이 곧바로 신경을 쓰는 노동에 시달려야
하니 만성소화불량증과 신경성 위장병, 3. 그런데다가 휴식은 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자니 몸 전체가 쇠약하고 얼굴이 누렇고, 항상 피로해 보이며, 4. 온종일 먼지를
마시니 진폐, 지관지염, 폐결핵 등의 각종 호흡기질환, 5. 조명관계로 시력이 약해지는
등 각종 눈병, 6. 종일 허리를 못 펴고 앉아서 쉴 새도 없이 손발을 놀려야 하니
다리가 붓고 허리, 어깨, 다리에 각종 신경통, 7. 그 밖에도 여공들의 경우에는
월경불순 등 각종 부인병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는 전태일이 1970년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
미싱사 90%가 신경통 환자임.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된 사람은 전부 환자이며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머티즘이 대부분임.
이라 하였고, 또 설문조사에 응한 1백26명(시다, 미싱사, 재단사 포함) 가운데
진폐, 폐결핵 등 기관지 계통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1백2명이 신경성
위장병으로 식사를 잘 하지 못하며, 전원이 밝은 곳에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고
눈꼽이 끼는 안질에 걸려 있다고 하였는데,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 그들이 앓고
있는 질병은 전태일의 조사결과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 가고 삼년 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평화시장에서 5년 이상을 일하고 건강하다는 여공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으며,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은 치료를 받기는커녕
자신이 어떤 병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지내는 수가 많다.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아파도 아픈 것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특히 매일같이 면섬유를
만지고 있는 그들의 대부분이 갖고 있는 면폐증 같은 것은 운동할 때 호흡곤란이
오며, 경우에 따라서는 결핵이 합병되거나 폐기종을 초래하여 심한 기침과 함께
출혈성 가래가 나타나기도 하는 무서운 직업병이지만, 그 증세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나기 때문에 병자가 병을 모르고 지내는 수가 많다. 이 병은
질이 좋은 흉부 엑스선으로서도 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엑스선
간접촬영으로 이것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려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해봤자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속수무책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무슨 돈이 있어 치료를 받겠으며 그날그날 노동으로 먹고사는 터에 무슨 시간이
남아돌아 한가하게 치료를 받아 앉아 있겠는가? 대책이 있다면 오직 병이 깊어진
후에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인 것이다.
원래 직업병이란 업주가 책임지고 비용을 대고 고치는 거시 도의적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당연한 사리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평화시장의 업주가 제 돈을 내어 종업원의 병을 완치시켜준다고
하는 일은 없으며, 있다고 하여도 완전히 예외에 속하였다. 치료가 다 무엇인가?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사용자는 자신의 비용으로 매년 1회 이상 정기적으로 종업원들의
건강진단을 실시할 의무를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화시장의
업주들은 그것마저 제대로 실천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전태일의 말에 의하면 "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 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적인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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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억울한 생각
인간시장의 현장 평화시장. 1966년 전태일은 그 속에서 하루하루의 생명을 팔고
있었다. 매일매일 겪는 자신의 고통, 그리고 숱한 동료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면서도 그는 아직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현재의 모든 고통은 그저 주어진 운명이며, 그 운명에 순종하여 열심히 일만
하면 모든 문제가 차차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일까? 내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이니 누구를 탓할 것 없이 그저 힘껏 노력하여 돈만
벌고 나면 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였던 것일까?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한다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전태일의 경우에도
평화시장 생활이 길어지면서 어느샌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라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그의 수기에서 읽을 수 있다.
1996년 가을, 추석 대목을 한 달 가량 앞두고 전태일은 통일사 미싱사가 되었다.
추석이라 일이 밀려 업주들은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작업을 시키고 있었으며,
그래도 물건이 딸리면 야간 작업까지 시키고 있었다. 이때에 관하여 전태일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 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 안에서는 절대적인 책임자인 재단사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 하기 싫은 야간작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날은
평일보다 작업량이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공장 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아이들 바지를 만들어내는 매수에 따라 월불 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의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당
얼마는 준다는 확고한 결정을 하지 아니하고, 대목 일이 끝난 다음에야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주인이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 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 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야,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때가 1966년 늦가을, 그가 평화시장에 발을 디딘 지 2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때였다.
이 시기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이때 처음으로 그 억울함을 없애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데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태일이 그의 목숨을 걸게 되었던
고난에 찬 노동운동을 향한 첫걸음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그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미싱사의 생활을 그만두고 재단사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직공들의 대부분이 여공들이기 때문에 주인들의 이런 비위 사실을 직접적으로
따지는 예가 드물고, 대부분은 불만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미싱사들 중에서 유독 나 혼자만이 남자였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재단사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나도 어서 빨리 재단사가 되어서, 노임을
결정하는 협의를 할 때는 약한 직공들 편에 서서 정당한 타협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아주 큰 공장을 제외하고는 공장장이 따로 없는 공장은 재단사가
공장장까지 겸하여 직공들의 절대적인 문제인 입사와 해고의 문제까지 마음대로
관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재단사는 주인에게도 절대적인 존재이고, 우리 직공들의
건의사항도 재단사를 통해서 주인에게 건의되며, 재단사는 절대적으로 양심껏
중립을 지켜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에게 월급을 받는 약점 때문에
자연히 주인에게 편파적이었다.
미싱사들이 업주에게 따질 것을 따지며 대어드는 일이 드물었던 것은 물론
전태일의 지적처럼, 그들 대부분이 나이 어린 처녀들로서 가지는 위축감과
어리숙함 때문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역시
경제적 약자로서의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였다.
미싱사 중에서도 일류 기술자로 소문난 사람인 경우에는, 기술을 배경 삼아 업주와
싸울 때는 싸우고 그만둬버리면 언제든지 다른 공장으로 옮겨갈 수 있었지만은,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미싱사들은 일단 있던 공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닐 뿐더러 하루 일당도 아쉬운 판에 며칠씩 일을 못하면 손해가
막심하고, 또 옮겨보았자 새 주인에게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보장도 없는 것이며
전에 있던 직장에서 받지 못한 노임을 떼어먹히기나 할뿐이다.
해고를 면하는 경우라고 하여도, 업주의 미움을 일단 받으면 종전보다 일은 더욱
힘들고 노임은 더 싼 불리한 일감만 받게 도리 우려가 있으며 불량도 많이 날
것이고 그 밖에도 가지가지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재단사의 경우는 좀 달랐다. 그들은 우선 대부분이 20대로부터 30대 사이의
청장년 남자들이어서 어린 여공들의 경우보다 세상물정에도 밝고 업주측이
만만하게 다루기도 어려웠다. 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들은 한 작업장 안의 직공들
중의 실력자로서 업주의 돈벌이가 잘 되고 못 되는 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재단사 한 사람이 일을 잘못하거나 일손을 놓아버리면
그 공장은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 시간을 다투며 일거리가 밀리는 시기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업주의 장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전태일이 "재단사는 주인에게도 절대적인 존재"라고 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재단사가 주인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역시 강자는 돈을 가진 업주인 것이다. 재단사들은 미싱사의 경우와 달라
도급제가 아니라 정액의 월급을 받는데 대부분의 경우 업주에게 잘 보여서 한 직장에
올 붙어 있으면서 월급이 올라가기를 희망하게 된다. 업주측으로서는 재단사가
어지간만 하면 그를 회유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를 통하여 미싱사와 시다
등의 하급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리하여 업주와 재단사의 유착관계가 생기게 되며 재단사가 주인에게
'편파적인'현상이 일어나는 것인데, 바로 여기에 전태일이 분개하였던 것이다.
재단사로서 어느 정도 경력이 붙은 경우에는 미싱사들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많은 것이 보통이다. 그날그날 미싱사들의 작업량에 해당하는 분량 만큼의 원단을
재단해주면 되는 것인데, 이 일은 미싱사의 일보다 빨리 끝나기 마련이어서
재단사들은 대체로 하루 적어도 두세 시간은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또
한 작업장 안의 다른 직공들에 대한 재단사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어서, 재단사
10명이 모이면 적어도 2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뒷날 그가 평화시장
전체의 노동조건을 전반적으로 개혁할 것을 목표로 삼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느껴지듯이 재단사가 될 결심을 하던 당시부터
이미 전태일이 그러한 모든 사정을 명확히 내다보고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당시의 그의 결심은, 스스로 재단사가 되어서 자기가 일하는 공장 안의
어린 노동자들을 개인적으로 돌봐주고 그 공장 안에서 업주와 노동자들 사이에
생기는 공임타협 등 몇 가지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 노동자들 편에 서서 업주
들로부터'정당한 타협'을 이끌어내겠다는 데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그는 얼마 안 가서 이러한 좁은 생각에서부터 벗어나게 된다. 전태일이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에 대하여 또 한가지 이야기해 두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측면이 있다. 당시 그는 미싱사로서 월 7천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가족들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식구 여섯에 버는
사람은 거의 태일이 혼자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실직상태였으며
태삼이는 형을 따라 평화시장엘 다니고 있었지만 '시다'로서 제 차비밖에는 버는
것이 없었고, 어머니는 함지박을 들고 막벌이 노동자들을 상대로 20원짜리
수제비를 팔아 일정하지 않은 약간의 수입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판에
만약 태일이 재단보조공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재단사가 되려면 먼저
재단보조가 되어 상당 기간 기술을 익혀야 한다) 월 3천원 정도로 수입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집안 생계에 큰 위협이 될 형편이었다. 그는 그것을 무릅쓰고
재단보조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가 평화시장 시다로 취직하였던 때의 결심이 무엇보다도 먼저 어머님을 한번
편히 모셔보겠다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이때 와서 그는
월수입이 종전보다 4천원이나 떨어지는 재단보조가 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가족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렸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의 수기를 보면
그는 재단보조로 취직한 뒤에 "한 달에 고작해야 3천원 내외밖에 못 받는 월급
때문에 집의 어머니한테는 미안한 마음으로 우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인격적인 의무가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부모를
편히 모시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서 매일매일 참혹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이웃들,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에 대해서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2년이 넘도록 그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어린 여공들의 참상에 접하면서
안타까움과 울분 속에 살아왔다. 이 고통의 기간을 거쳐 눈앞에 보이는 불의한
기업주의 횡포를 명료하게 목격했을 때, 그는 가족들에게 돈 몇 푼을 다달이 더
보태려고 고분고분 죽어지내는 것보다는 이 억압과 불의에 저항하여 무언가 싸움에
나서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가 이러한 것을 머리 속에서
명확하게 의식하였건 안 하였건 간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뒷날
재단사가 되었을 때 그는 가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고 한다.
"어머니, 우리 순덕이는 평화시장 시다들보다는 참 행복한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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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린 여공들을 위하여
1966년 추석 대목 일이 끝나 며칠 쉬는 동안에 그는 재단보조 자리를 찾아
평화시장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는데, 그 결과 '한미사'라는 잠바집에 재단보조로
들어갔다. 공장은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었다. 재봉틀 8대, 안 쓰는 재봉틀 2대.
그가 맡은 일은 2층 재단판에서 나라시(재단사가 원단을 재단기계로 자르기
편하도록 재단판 위에 가지런히 쌓아놓는 것)를 잡고, 가게에서 원단기계로
내왕하며 심부름을 하고 잠바나 코트의 '싱'을 자르는 일 등이었다.
아침 8시 출근에 퇴근시간은 평균 밤 10시, 원래 고된 일이었지만 그는 남보다
더욱 고되게 몸을 놀렸다.
나는 처음 재단을 배우려고 생각할 때 결심한바 있어, 열심히 나에게 맡겨진 일을
했다. 내가 가기 전까지는 무질서하게 방치해 두었던 환경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시다들이 2층에 부속을 가지러 오면 기다리는 일이 없고 찾는 일이 없도록 잘 정돈해
두고 주머니, 후다, 싱 같은 것은 언제든지 풍부하게 잘라 두었다.
이 당시 그와 함께 한미사에서 시다로 일하였던 어느 여공의 말에 의하면, 그는
시다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하고 정성껏 작은 일이라도 도와주려고 하여
시다들이 모두 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재단사나 재단보조공은 시다들에게
가급적 여러 가지로 잔심부름을 시키고 귀찮은 일을 그들에게 미루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한 경우는 욕설과 손찌검까지 하는 일도 있는 형편이었는데 그러한
평화시장에서 재단보조공이 도리어 시다들의 일손을 하나라도 덜어 주려고
애쓴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인정에 굶주리고 있는 것이
평화시장의 시다들이었다. 전태일이 시다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시다들도 얼마
안 가서 그를 오빠처럼 따르고 그에게 이것저것 아쉬운 사정을 얘기하기도 하고
부탁도 하게 되었는데, 그는 시다들의 사정 이야기를 찬찬히 다들어주고 성가신
부탁에도 화 한번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니 자연히 그는 몸과 마음이 남달리 바쁘고 고달프게 되었다. 그 무렵 그의
가족은 그 동안 살던 남산동 50번지 일대가 큰 화재가 나고 철거된 뒤 미아리로
갔다가, 거기서도 살수가 없어서 도봉산 기슭의 판자촌으로 옮겨와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일이 끝나고 밤늦게 도봉산 집까지
가려면, 미아리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 한 시간 남짓 걸어야만 했다.
때때로 그는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버스값을 털어서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 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주린 창자를 안고 온종일 시달린 몸으로 다리를 허청거리며
미아리까지 걸어가면 밤 12시 통금시간이 되어 야경꾼에게 붙잡혀 파출소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다시 도봉산까지 걸어서 집에 당도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사이에 파출소 순경들도 사정을 알고 그냥 통과시켜 밤 한 시,
두 시가 지나 집에 돌아오는 일이 버릇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 4년 동안 계속되었다.
태일이 처음 미아리 파출소에서 밤을 세우던 날, 그의 어머니는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어머니가 회고하는 바로는 이러하다.
밤 1시가 지났는데도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평화시장에 취직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별별 생각을 다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문 밖만 내다보고
있는데,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태일이가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온몸이 이슬에 젖어
어깨는 축 늘어지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얀 게 불빛 아래서 보니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면서도 본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웃는 표정이길래 그냥 두고 보았더니, 그 뒤로도 한 사흘씩이나
계속 그런 일이 있었다. 도저히 더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는
막 집에 들어온 아들을 불러앉히고 물어보았다.
"웬 일이냐? 좀 까닭을 말해보려무나.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구나."
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오다 파출소에서 자고 왔어요. 어머니가 나 집
나올 때 차비 30원을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길래 보다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한테 나눠주었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
어머니가 가슴이 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라고도 못하고
하지 말라고도 못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태일이가 출근할 때 점심을 밀가루빵을
쪄서 신문지에 싸주었는데, 그는 그 점심도 시다들 안 보는 데서 숨어서 먹거나
그럴 형편이 못 되면 자기는 먹지 않고 남을 줘버렸다고 한다. 하루는 태삼이가
어머니에게 형과 같이 안 다닐란다고 말했다. 형이 자꾸 "너 그 버스값으로
풀빵을 사먹고 집에는 걸어가자"고 한다는 것이었다. 아침은 집에서 먹고
나가지만 밀가루 빵 하나도 제대로 다 먹지 못하고 온종일 그 고된 일을 하고
견딜라니까 태일이 자신은 배가 무척이나 고팠을 것이다.
몸이 고된 것 이상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시다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수록 그의 가슴은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그의 울분은 치밀어 올라 그의
생각은 깊어져 갔다. 한 번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순덕이보다 작은 애도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굶으면서 애쓰고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1969년 겨울 어느 날의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그의 눈에 비치는 시다들이야말로 바로 "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해버린 인간 그 자체였다. 아니 시다들이나
미싱사들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도 그러하였고 그의 눈에 비쳐오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불행한 세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을 그는 시간이 감에 따라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상적 발전은 뒷날의 일이고, 다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해 두어야 할
것은 그러한 그의 뒷날의 사상이 이때 시다들과의 매일매일의 접촉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때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미사 재단보조공이 된 지 서너 달 가량이 지나 1967년 2월초경, 음력설을
열흘 가량 앞두고 대목일이 끝났다.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시장에서 사귄 한
재단사와 함께 낙산 기슭의 판잣집에서 방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미싱사들과 시다들은 설이라고 기뻐해 하면서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는데 그는
집이 도봉산인데도 갈 수가 없었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번다는 것을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동생들 옷가지 하나 안 사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인 내외가 지방으로 수금을 가면서 그의 사정을 알고, 그에게 가게에 와서
살면서 가게를 보고 있으라고 하였다. 이때 그들은 주인의 처제 되는 처녀를
그에게 소개시키고 둘이 함께 가게를 보도록 하였다. 며칠 같이 지내는 동안 그는
그 처녀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 처녀도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으나, 이 일로 하여 그는 한동안은 무척 가슴 설레이는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고 그 뒤로는 상당히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어느날, 나는 깊은 죄의식을 깨달았다. 지금 이 시간
집에서는 이 불효한 자식을 위해서 정성을 드리고 계실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이런 사치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다.
이것으로 그의 짧은 사랑은 고백 한번 못한 채 끝나버렸다. 열 아홉 소년이라면
한창 이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밤낮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태일이에게 그것도
'사치'였던 것일까.
바로 이즈음인 1967년 2월 14일자 그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도 보람없이 하루를 보내는 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은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공장에서 완전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서,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 전에, 한창 피어나는 사랑을 꺾어버린 것이다. 내 마음에 내린 뿌리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줄기없는 뿌리가 얼마나 더 존재하겠는가. 부디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
냉혹한 현실이 지워준 짐은 무겁고, 힘과 시간은 모자라는 그에게는 남들이 다
해보는 연애라는 것도 잔인하게 꺾어버려야 할 환상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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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재단사 전태일의 고뇌
1967년 2년 24일 전태일은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한미사에서 함께 일하던
재단사가 딴 직장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태일이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명목상 재단사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일은
오히려 바빠졌다. 주인은 그가 착실하고 일 잘하는 것을 알고는 겉으로는 칭찬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럴수록 더욱 심하게 부려먹을 생각만 했다. 태일도 처음에는
주인 아저씨가 호인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 뒤로 어떤 계기를 거쳐서 그가
위선자라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뒷날 그가 쓴 글에 '한미사 주인의
이중인격'이라는 한 구절이 보인다. 어떻든 재단사가 되었을 무렵 그가 어떻게
혹사 받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우리는 그의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 명. 그 사람들이 할 걸 나 혼자서 다해주어야 하니.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사아게 잘 하는 사람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
(1967 년 3월 17일 일기에서)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점차로 그는 평화시장에 처음 들어왔던 때의 벅찬 희망과
꿈이, 그리고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때의 기대가 모두 이루어지기 어려운
환상으로 화해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되풀이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그의 꿈은 기술을
배워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학업을 계속하는 것, 그리고 그리하여 '밑지는 생명들'을
위하여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재단사가 될 결심을 하였을 때 그가
기대하였던 것은 약하고 어린 여공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 가지도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돈 문제로 겪는 고통은 여전하였다. 이 무렵의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굶주림과 쪼들리는 생활의 걱정이 얼마나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주머니에 돈 없이 오늘까지 사흘. 주인아주머니께 부탁했지만 7백 원 청구에 2백
원에 낙찰 5백 원이나 에누리하다니 내가 주인을 위해 애쓰는 걸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5백 원이나 에누리는 안할텐데. 사흘 동안에
주인집에서 두 끼, 주인 계하는 데서 한 끼, 내가 한 끼. 모두 네 끼를 먹고.
2백 원을 가지고 벌써 80원을 썼으니 아무리 절약을 해도 19일까지밖에 못
가겠구나. 20일날 인덕상회 98호 집에 작업복 일을 임시 하러 가기로 했지만 민생고
해결 때문에 고민이로구나. 일은 하러 가기로 했지만 먹을 게 있어야 가지.
(1967 년 2월 17일 일기에서)
내가 직장 생활 근 3년 고생해서 얻은 건, 인격과 경제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3년 동안의 고생과 14년 동안의 고역이 나를 경제문제 계산기로 만든 것이다.
언제나 식생활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소년 시절이 아니던가?
(1967 년 2월 22일 일기에서)
28일까지 방을 비우라니 정말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이다. 이제 겨우 정신 좀
차리려고 하니까 또 고난이 온다. 오늘도 예나 다름없이 이불 속은 차갑구나.
(1967 년 2월 27일 일기에서)
돈 때문에 생기는 걱정은 물론 그가 돈을 버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살아갔더라면, 언젠가 재단사로서 경력이 쌓여짐에 따라 다소간 덜어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나이에 공부도 하고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이루어보고 싶었던 그에겐 너무나도 멀고 먼 훗일의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죽는
바로 그날까지도 돈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고 무한히 마음이 무거워야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자학적으로 말하듯이 완전히 "경제문제 계산기"가
되어서, 공부도 노동운동도 다 팽개치고 그야말로 다만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해서 돈벌이에만 온 정력을 쏟아부었다 해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되기까지에는 적어도 15년 내지 20년의 세월과 행운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람 사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젊은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현실 속에서 그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가슴속에 쌓인 좌절감이 얼마나 크고 암담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69년 12월 어느 날의 일기에서 그는 "사나이의 이상은 용암처럼
부글거리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에서 나는 걷는 에너지가 모자라 애태우고
있다"고 썼던 것이다.
남다른 재기가 있고 꿈이 컸던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그 고된 노동 속에서도 별로
책을 손에서 떼어놓은 일이 없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꿈은 그가 평생을 통하여
끝내 이룰 수 없었던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항상 그의 개인적인
가장 큰 희망이었다. 그 집념이 생활의 괴로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꺾이지 않고 불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또한 이 무렵의 그의 일기 속에서 볼 수 있다.
마침내 생각대로 했다.
시청 뒤 보건사회부 옆 학원사 2층에 가서 연합 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백 50원에 샀다. 이로써 희미해져 가는 배움의 정신을 내 마음 한
곳에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다시 똑똑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붙들어맨 것이다.
남은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어디 있어? 해보자.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백76일 남았구나. 1년하고 10일. 재단을 하면서 하루에
저녁 2시간씩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볼 수 있겠지.
(1967 년 2월 20일 일기에서)
그의 이러한 집념이 결코 그대로는 실현 될 수 없는 무모한 꿈, 아니 안타까운
발버둥에 지나지 아니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중학교 1학년 정도의 학력, 하루
15시간의 중노동, 그리고 그날그날 닥치는 생계의 걱정, 그 속에서 어떻게
대학입학이 가능하겠는가? 그가 이때 산 1백 50원짜리 통신강의록만 해도 입고
있던 바지와 곤로를 3백 80원에 팔아서 산 것이다.
재단사가 되어서 어린 여공들, 시다들을 돕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될수록 그는 일개 재단사에 불가 자신의 혼자 힘만으로는
그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뿐더러 업주들은 그가 그 미약한 힘으로나마 시다들에게 해줄 수 있는
온정을 베푸는 것까지도 간섭하고 못하게 하였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따로 이야기하려 한다.
이렇게 그의 모든 꿈이 걷잡을 수 없이 꺾여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하루하루가 '괴로움의 연속'인 죽음과도 같은
노동의 괴로움, 의욕의 탈진, 기계처럼 아무 뜻없이, 의지도 없이 단조롭게
돌아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삶의 보람과 희망과 인간다운 삶의 기쁨을
빼앗겨버린, 질식할 듯한 소외의 나날이었다. 이때의 재단사 전태일은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계였다. 이것은 후일 그로 하여금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울부짖게 한 동력이었던 것이다.
어지럽게 들려오는 쇠금속 소리. 짜증 섞인 미싱사들의 언성. 무엇이 현재의
실재인지를 분간 못하면서, 그 속에서 나도 부지런히 그들과 같이 해나갔다.
무의미하게. 내가 아는 방법 그대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무아지경이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일 자체도 순서대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될
행동만이 질서정연하게 자동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이렇게 생각이 갈 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될 때이다.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으면 그걸로 하루가 끝나는 거다.
(1967 년 3월 일기에서)
이 감동적인 글은 재단사로서의 그 자신의 하루를 말하는 동시에 그와 함께
노동하던 모든 노동자들의 하루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꿈틀거리는 힘찬 근육과 펄펄 끓는 젊음의 피와 모든 사상과, 감정과, 의자와,
희망과, 꿈을 박탈당하고 박제된 인간,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노동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밥먹고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것도 '내'가 아니다. 참된 '나'는 어디론가 종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헛껍데기만
남은 나의 육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이리저리 온종일을
허덕이며 끌려다닌다. '나 자신'이란 것이 어렴풋이나마 되살아나는 것은
퇴근시간이 될 때 잠깐 뿐이라는 전태일의 표현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가!
그러나 그는 온종일 제 정신을 잃고서 그저 목숨은 이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령
아래서, 강자의 현실이 만들어놓은 틀 속을 일하는 도구가 되어 기계의
톱니바퀴인양 돌아가야 한다. "참 인간의 본능과 모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로
이러한 그의 체험을 통하여 그는 뒷날 이런 글을 남기게 된다.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환멸과 자기 자신의 나약한 소리를
증오하면서.
인간의 둘레를 얽매고 있는,
인간이 만든
인간본질의 희망을 말살시키고 있는,
모든 타의적인 구속을.
물론 그는 이러한 소외된 노동이 가져다 주는 좌절 속에서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자신을 포기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삶의
보람을 되찾아보려고 발버둥쳤다. 이 당시부터 그의 일기장 곳곳에는 "절망은
없다", "내일을 위해 산다"라는 절규가 수없이 적혀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시기까지는 도저히 이러한
조절과 절망의 늪 속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그가 그 자신의 "둘레를 얽어
메고 있는", "타의적인 구속"이 강요하는 좌절과 절망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발견하고, 탈진해가고 있던 의욕을 되살려내고, 나날의 삶의 보람을 되찾게
된 것은 지금껏 그를 괴롭혀왔던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인간에 대한 "타의적인 구속"그 자체에 도전하여 그것을 제거할 것을
확고하게 결심하게 되었을 때 이후였다.
그것이 그가 가야 할 길임을 확실히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길에 온몸으로
뛰어들게 되었을 때부터 그의 하루하루는 이미 아무리 고달픈 가시밭길일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무의미하게 돌아가는 쳇바퀴가 아니라, 참된 내일의
희망을 향하여 눈부시게 전진하는 참으로 인간다운 보람과 의욕을 되찾아주는,
저항과 창조의 나날이 되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이제껏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왔던 것이다.
'부유한 환경'으로부터 그는 모조리 거부당해왔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꿈은
차례차례로 현실의 잔인한 얼굴 앞에 부닥쳐 개어져왔고, 그리하여 그는 좌절되고
말았다.
현실은 너무나도 엄청난 큰 힘으로 그를 짓눌렀고 그 자신의 힘은 너무나도
나약했으므로, 그는 결국 언제나 그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산송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느 날 돌연 기적과도 같은 부활이 일어났다. 그는 죽음과 좌절을 뚫고
일어나 "아니다!"하고 울부짓기 시작했다. 20년간 밑바닥에서 쌓여온 모든
억울함과 모든 분노가 그의 답답하게 막혀만 있던 가슴을 뚫고 나와 폭발적인
힘으로, 지금껏 그를 거부해왔던 현실을 도리어 반대로 거부하면서 강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보아온 모든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합류하여 거대한
저항의 불길로 힘차게 타올랐다. 그는 무서운 힘으로 고통과 비인간 바로 그
자체인 현실의 냉혈한 철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인간이 없는 현실, 그 소리없는 통곡의 역사를 두드리는
'인간 선언'의 불꽃이 되어 승리하였다.
이 기적은 어떻게 하여 일어났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산송장처럼 좌절해
있었던 그가 어떻게 저 엄청난 노동운동에 온몸으로 뛰어들게 되었던 것인가?
거기에는 물론 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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