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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야, 같이 좀 가자. 나 다리 아프다 아이가"
"꽁아, 니는 천천히 온나. 빨리 안 와도 된다.
그냥 가만히 있지 왜 따라나서서 힘들다고 하노"
나랑 세상에 나온 지 1년 반밖에 차이 안 나는 옥이가
학교 간다고 집을 나서는데 따라간다고 난리였다.
나는 셋째고, 옥이는 하나뿐인 막냇동생이다. 옥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첫째인 언니가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왔다갔다했다고 한다. 동생이 벌써
둘이나 있었지만, 또 한 명의 동생이 태어난다고 하니
불안하긴 불안했었나 보다.
그보다 더 나는 동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젖을
많이 못 먹고 자란 탓에 키도 잘 자라지 못했다.
그런데 옥이는 태어나고 다 커서까지 한참 동안이나
엄마 젖을 빨곤 했다. 그러는 옥이가 미운 적도 있었다.
밖에서 잘 놀다가 와서도 항상 엄마 품에 안겨 엄마
젖을 찾는 옥이 때문에 엄마는 생각다 못해 빨간약을
발라놓았다. 엄마 아야 하니까 더 이상은 못 먹는다고...
어릴 때부터 옥이가 손에 뭔가를 만지기만 해도 남아
나는 게 없었다. 옷장의 손잡이도 옥이의 손이 닿기만
해도 망가지기 일쑤였고, 이사해서 집들이 때 들어온
네모난 성냥갑을 가지고 놀던 옥이가 그만 홀라당
자신의 머리카락을 태워 버리기도 했다.
잘 때면 꼭 깨워서 쉬도 시켜야 했었고 그렇게 해야
이부자리에 지도를 안 그릴 테니까...
안 그런 날은 꼭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렸던 옥이었다.
밤이 되어서 화장실 갈 때면 무섭다고 따라나가면
옥이를 놀려주려고
"빠알~간 종이 줄까? 노~오란 종이 줄까?" 이러면
무섭다고 내 죽는다고 난리였다. 그러니 또 안 놀려
먹을 수가 없었다.
더운 날 처음 선풍기를 아버지가 사오신 날
옥이는 선풍기 앞에 앉아
"내 날아간다, 내 날아간다"하고 소리를 쳤다.
자기 또래의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그런지
늘 밥 먹고 나면 산으로 들로 함께 놀러다니던 습관이
들어서인지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어서 가자고 하시면서 자전거를 끌고
나오셨다.
"어디 가실 건데예?"
"니 학교 간다."
"학교는 무슨 학교를 가예? 지 아직 학교갈라믄 1년
더 있어야 하잖아예"
"내가 가만히 있을라 했던데, 은정이 아빠가 지 딸은
학교 갈 수 있고, 너거 딸은 학교 못 간다 안 하나.
그래서 내가 가나 못 가나 볼라고 지금 학교 갈라고
한다. 가만있자, 니 말고도 해운대 있는 홍맹이오빠랑,
저짝 동네에 사는 지영이랑 또 누구 있더라.
암튼 걔들하고 다 학교 내가 넣어 불 끼다.
지 딸만 되는지 안 되는지 내가 두고 볼 끼다"
아버지는 은정이 아빠랑 대화를 하시다가 나보다
은정이가 생일이 더 느린데, 은정이는 학교 들어갈 수
있다고 하고 나는 학교에 절대 못 들어갈 거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화가 난 아버지는 아직 취학통지서가
나오려면 1년이나 더 있어야 하는 나랑 몇몇을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하셨다.
동네 친구들과 아무 일 없이 놀고 있다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자전거에 태워진 나는 학교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학교의 운동장은 참으로 넓기만 했다.
그리고 들어선 곳은 교장실이었다. 나는 가만히
교장실 의자에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셨다.
생일도 지나지 않아서 만 5살 밖에 되지 않은 내가
갑자기 뜬금없이 학교에 가야 한다니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이미 언니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고, 오빠도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늘 언니랑 오빠가 학교 가는
것만 지켜보다가 나도 새삼 학교에 가야 한다니 아직
한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가 학교에 가서 적응이나
잘할 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 시절만 해도 유치원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기에
학교에 들어가서야 공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빨간 운동화에,
만화그림이 그려진 빨간 가방을 사오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지켜보던 옥이가 한마디 한다.
"왜 언니 꺼만 사주는데. 내 꺼는 엄나?"
"니는 학교 안 간다 아이가. 담에 니도 학교 가믄
아버지가 사주실 끼다. 쓸데없는 걸로 지짜고 그라믄
니 아버지한테 맞는데이"
"나도 언니따라 학교 가끼다."
"니는 아직 안된다고 했다 아이가"
막내라서 늘 오냐오냐하고 귀엽다고 해주니까 내가
하는 게 있으면 모든 걸 다 따라하려고 했던 옥이가
한편으로는 가엾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귀엽고 예쁜 내 동생이라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니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나 작아서 키가 안 클 것 같아서
걱정이셨던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제발 고모만큼은 커야 할 텐데'...
그러던 내가 만 5살 때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아침부터 아버지는 언니랑 오빠를 자전거에 태워서
학교에 한차례 내려주고 오시는 길이었다.
다음이 내 차례였다. 혹시나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엄마가 한 번 더 나를 보시면서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아주셨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에 태워져
학교로 갔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만국기가 펄럭이며
나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운동장에는 나처럼 하얀
손수건을 가슴에 단 아이들이 이미 많이 모여 있었다.
어떤 아이는 콧물을 질질 흘리며 손수건으로 닦으면
될 것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있는 걸 보니 옆에
가기가 싫었다.
시간이 흐른 후 언니, 오빠야들이 운동장에 다 모여서
드디어 입학식이 치러졌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듣던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언니, 오빠야들이 함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불렀다.
그리고 갓 입학식을 치른 우리에게 언니, 오빠야들이
악수를 청한다.
입학식이 다 끝나고 예쁜 선생님의 안내로 우리는
교실 복도로 들어섰다. 남녀 따로 키 순서대로 줄을
세우시고 남녀 이렇게 짝을 지어주시며 교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게 하셨다. 늘 여자아이들끼리 놀아서 그런지
처음 대하는 남자아이가 낯설고 말 한마디 걸기가
어려웠다.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친다.
"선생님예 제 짝지가예 오줌 샀으예"
그 말에 뒤로 돌아보니 한 아이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앉아있고 아래를 보니 의자 밑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괜찮다. 가만있어도 돼. 자, 선경아 너 혼자
집에 갈 수 있겠지?"
선경이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다.
곧이어 선경이는 어깨에 가방을 메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아이가 밀때걸레를
가지고 와서 닦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날 어떤 수업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
이후에도 다른 아이가 수업시간에 실례를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가서 화장실에 가는 게
두려워서 물도 많이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처럼 옷에 실례하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재래식 화장실이 아주 깊기도 하고 냄새도 많이 나서
차마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던 우리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꾹 참곤 했다.
그러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다른 화장실을 쓸 수 있게
되면서 화장실을 기피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언젠가부터 수업하는 중에 간간이 창밖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었다. 그냥 있으라 했는데도 끝까지 학교에
따라오겠다고 떼를 쓰는 옥이를 어쩔 수 없이 학교까지
데리고 왔는데 학교 앞 가게에서 핫도그를 하나 사주고
내가 먼저 한입 베어 물고 나머지를 옥이 손에
쥐여주면서 조심해서 잘 놀고 있으라고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 두면서 거듭 이야기를 했다.
"언니 공부하고 나올 끼니까 니 어디 함부로 가면
안된데이"
"알았다, 언~니야. 나 여기 가만히 놀고 있을 거니까
빨리 온나"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고 하굣길에 옥이 손을 잡으며
집으로 왔었다.
그해 여름, 교회에서 여름 성경학교가 있었다.
아침부터 교회에 가려고 나오는데 그날도 옥이가
"언니 어디 가노. 나도 가면 안 되나"
"와, 니도 가고 싶나? 그라믄 같이 가자"
그렇게 옥이 손을 잡고 교회에 갔다.
한참 동안 찬송가를 부르는데 옥이가
"언니야 나 졸린다. 자면 안 되나?" 한다.
그래서 교회 선생님께 미안했지만
옥이를 재워야겠다고 했다.
"니 여기서 자고 있어라. 끝나면 언니가 깨울 끼다"
여름 선경학교가 끝나고 자는 옥이를 깨워서 집에
가려는데 제대로 옥이가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옥이를 등에 업었다.
"언니야, 나 무겁제?"
"아이다 괜찮다. 나는 언니라서 안 무겁다. 니는 많이
먹지도 않는데 뭐가 무겁노"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옥이랑 이야기하면서
집으로 왔다.
엄마가 옥이한테 한소리 하신다.
"니는 왜 따라 가 가지고 언니를 힘들게 하노.
이제는 언니 따라 나설라 카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라.
알았나?"
"안 할끼다. 나는 언니 따라 갈 끼다."
"맨날 둘이 싸우면서 뭐가 좋타꼬 따라댕기노.
그럼, 니 나중에 언니가 시집가면 따라가서까지
싸울 끼가?"
"그래, 나 언니 시집가도 따라가서 싸울 끼다."
"그래 엄마가 두고 볼끼 니까 함 그래봐라. 어디 잘
따라가나 못 가나 함보께"
엄마랑 옥이가 하는 소리에 나는 한마디 하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내어준 방학숙제를 한다고 바빴다.
논에 심어놓은 나락(벼)이 익어가면서 얄미운 참새가
나락을 쪼아 먹는다고 아침부터 엄마랑 아버지는 논에
가셨다. 그래서 나도 아침을 먹고 엄마가 있는 논에
간다고 집을 나서는데 또 옥이가 따라나온다.
"언니야 같이 가재이"
"알았다. 빨리 온나. 논에 새 보러 간다. 빨리 안 가믄
새가 우리 나락 다 먹어 삔다."
옥이랑 나는 논에 가면서 강아지풀을 꺾어서 서로
간지럼을 태운다고 바빴다.
그리고 풀잎을 따서 풀피리를 불었다. 드디어 논에
도착하니 엄마가 옥이랑 나한테 말했다.
"니들 왔으니까 엄마는 다른데 갈 끼다.
둘이 싸우지말고 새 잘 보고 있거래이"
"알았다. 엄마 나 안 싸울 끼다.
언제 싸웠다고 그라노."
그리고 말없이 멀어지는 엄마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시도때도없이 찾아오는 참새들이 정말
얄미웠다. 여기서 '워이'하면 날아갔다가도 또 다른 데
가서 앉고 또 '워이~'하면 날아가는가 싶다가도 또
앉아버리니 해가 질 때까지는 끝없이 반복해야 해서
빨리 해가 저물기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옥이가
"아야, 언니야 이게 뭐꼬. 뜨거버죽겠다"
돌아서 옥이를 보니 옥이가 팔을 나에게 내민 채
울상을 짓고 있다. 하늘을 보니 제비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아마 제비가 그만 옥이 팔에 똥을 싼 것 같았다.
"에고 더러라. 니가 나쁜 짓 해서 제비가 니한테
벌주는 기다."
"내가 뭐 했다고 그라노. 언니가 뭐 안다꼬 그런 말
하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옥이의 팔에 실례를 한 걸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풀잎을 뜯어서 닦아주었다.
"에이 더러라. 이제 니 어쩔 끼가. 더럽다 퉤퉤..."
그 말에 그만 옥이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맺히는 게
아닌가.
"아이다. 괜찮다. 언니가 닦았으니까 집에 가서
또 물에 씻으면 된다. 바보가 울게.
울지마라. 그거가지고 울면 정말 바보 아이가."
그렇게 옥이를 달래며 새를 보다가 해가 저물자
집으로 왔다.
우리 집 처마 밑에도 제비가 집을 지어서 갔다 왔다
하는데 하필이면 논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 후로는 아무런 일도 없이 잘 지내왔다.
그러다 옥이는 내가 4학년이 되었을 때에야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옥이랑 나는 빗을
샀다. 나는 빨간 빗, 옥이는 까만 빗을...
하지만 오래지 않아 옥이는 빗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산 빨간 빗은 30년이 넘게 지나 보물 2호가 되어
있다.
옥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옥이는 나보다 덩치가 더 커져서 오히려 나를 업고
다녀야 했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 옥이랑 별거
아닌 일로 참으로 많이 싸웠었다.
하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한 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옥이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신부화장을 한다며 앉아있는데도
신기하기까지 했고, 식장 안에 들어서며 화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내가 눈물을 다 흘렸다.
그리고 옥이가 쌍둥이를 가졌을 때는 내가 태몽도
대신 꾸어주었다.
잉어 두 마리가 놀고 있는데, 엄마가 하는 말씀이 "한
마리는 언니꺼니까 잡지 마래이" 하시는 거였다.
하지만 욕심많은 옥이가 그냥 둘리 있겠는가.
잉어 두 마리를 다 잡아서 결국엔 쌍둥이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죄가 많아서 여자로 태어난 거라며 늘
하소연하던 엄마 때문인지 나는 옥이가 꼭 아들을
낳길 기원했었다.
아버지는 딸들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여자가 무슨 대학을 가냐며,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하셨다. 말 안 듣는 아들이라도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언니는 아들만 있는 집에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
그래서 아들이 굳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팔자가 무슨 팔자인지 남편복도 자식복도 없어
아무것도 꿈조차 꿀 수 없으니, 옥이 만큼은 꼭 아들을
낳아서 우리 딸들의 서러움을 씻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들 쌍둥이라니 정말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갓난 쌍둥이들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했었다. 어리게만 보였던 옥이가 아기를 낳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작게 나와서 걱정이었는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한 뼘이나 더 커서 놀랍기까지 했다.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서 옥이의 보디가드가 되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쪽에 잘생긴 아들 둘을 옆에 두고 거리를
걸으면 얼마나 뿌듯할까. 생각만 해도 옥이가
부러웠다.
지금 조카 쌍둥이는 중학생인데 키가 벌써 175가
넘어간다.
내 동생 옥이 보고 싶다...
©️비꽃(이은숙)
첫댓글 글 읽다가 내 어릴적 모습을 보았네요. 감사요. 즐 한 주 되세요.
저도 가끔 어릴적 생각이 나면서
그땐 그랬지 하고 피식 웃곤 합니다.
가끔은 동생이 "언니 언제 내려올 거냐고~
묻곤 하는데 20년 넘게 떠나있어서 그런지
생각이 나는 것과 다르게
저는 내려가서 살고싶은 생각은 들지않네요.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곳의 삶이 익숙해져서인지도 모르겠네요.
지나면 다 추억이 되잖아요.
그저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네요.
즐거운 한주를 위해 파이팅!!